Series 1. Articulation [표현]
[SURL] 리츠, 플뢰르, 클로에, 에밀
에밀은 이런 상황에서도 제 악보집에 무언가를 빼곡히 적고 있었다. 아마 작곡 중이겠지. 리츠는 대단한 집중력이라고 생각하면서 에밀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에밀은 리츠에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제 손에 들린 악보집에 집중된 것 같았다. 리츠도 에밀에게 더 이상의 관심을 주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리츠는 한창 대화 중인 플뢰르와 클로에 쪽으로 걸어갔다.
네 사람은 어떤 대기실에 있었다. 촬영을 위해서였다. 메인 키워드는 Articulation, 표현이었다. 촬영 전 네 사람은 사전에 필요한 서류와 질문지의 작성을 끝냈고 첫 번째 촬영에 선택되어 대기실로 오게 되었다. 이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우선 첫 번째 촬영자는 리츠와 플뢰르, 클로에, 에밀. 이 네 사람이었다. 리츠는 그 많은 것 중에 ‘표현’ 에 자신이 걸린 이유를 알지 못했고 왜 키워드가 ‘표현’ 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담당자인 미코가 키워드에 너무 신경쓸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하긴 했으나, 무언가 묘한 기분은 떠나보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우연히 전해들은 두 번째와 세 번째 키워드가 뭔가 섬뜩했다. 두 번째 촬영자들의 키워드는 ‘Decay’ , 부패였으며 세 번째 촬영자들의 키워드는 ‘Irresponsibility’ . 무책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운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표현은 세 개의 키워드 중에서는 제일 평범해보였다.
리츠는 플뢰르와 클로에의 대화를 듣고 있었지만 끼어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번 촬영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에밀은 세 사람에게 시선을 잠시 두었다가 다시 제 악보집을 내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촬영은 언제 시작하려나요. 클로에의 중얼거림과 함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대기실로 담당자인 미코가 들어왔다.
“리츠 님. 플뢰르 님. 클로에 님. 에밀 님 순으로 촬영 진행할 예정이에요. 준비 되셨나요?”
네 사람은 촬영장으로 향했다. 길고 긴 복도를 걷고 걸어 도착한 세트장은 밝은 조명으로 채워져 있었다. 미코가 서류를 넘기며 물었다. 먼저 그는 리츠를 바라보았다. 색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해보고 싶다고 하셨죠? 리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스태프가 의상이 걸린 옷 거치대를 끌고 왔다. 다양한 의상들이 걸려 있었지만 리츠가 평소에 입던 의상은 없었다. 아무래도 ‘색다른 방식’ 이라고 했으니 일부러 리츠가 입어보지 않은 옷들을 가져온 게 아닐까? 도리어 그렇다보니 고르기가 어려웠다. 어떤 옷을 입던 안 어울릴 것 같았다. 리츠가 힐긋 미코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미코는 옷 거치대를 바라보다가 몇 개의 옷을 집어보았다.
“이건 파티 드레스인데요…. 가슴 쪽이 좀 파여 있어서 별로이실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이건 제복이에요. 쿨한 이미지를 살리고 싶다면 이거만한 게 없죠.”
미코의 말을 들으면서도 리츠는 거치대의 옷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옆에서 한창 보고 있던 클로에가 리츠에게 다가와 옷 하나를 집었다. 차이나드레스와 비슷한 느낌의 의상이었다. 이거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러면서 클로에는 리츠에게 그 옷을 가까이 대어보았다. 응, 이거 예쁘다. 클로에는 태연히 웃어보였다. 스태프가 전신 거울을 끌고 왔다. 리츠는 클로에가 추천해준 옷을 한참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할게요.
그러자 이번엔 다른 스태프가 왔다. 다른 디자인의 헤어스타일을 해보는 건 어떻냐고 하면서. 리츠는 머리가 기니까 어떤 헤어스타일이든 예쁘게 나올 거라고 스태프는 이야기했다. 미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코의 동의를 받은 스태프들은 리츠를 데리고 한 쪽으로 향했다. 그 사이에 플뢰르의 촬영에 대한 얘기를 하기로 했다.
“플뢰르 님은 평소의 이미지를 좀 더 살리고 싶다고 하셨죠.”
그것도 나름의 표현이니까. 플뢰르는 빙긋 웃었다. 역시나 옷 거치대 하나가 준비되었다. 플뢰르가 컨셉으로 잡고 있는 청순한 느낌의 의상들이 많았다. 플뢰르는 분홍빛 옷을 집었다. 역시 이게 좋으려나? 클로에와 에밀을 돌아보며 플뢰르가 물었다.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째선가 에밀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는 이쪽 어때요? 분홍색은 자주 입어보셨잖아요. 에밀이 골라본 옷은 푸른색의 멜빵 치마였다. 베레모도 함께 있는. 넥타이 대신 리본 같은 걸 달아도 예쁘실 것 같고. 플뢰르는 전신거울에 에밀이 골라준 옷을 가져다대어 보았다. 플뢰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빙긋 웃었다.
리츠 님은 아직인가. 미코는 리츠가 간 쪽을 바라보았다가 탈의실을 가리키며 플뢰르에게 옷을 갈아입고 오라 이야기했다.
미코는 클로에의 의상부터 먼저 고르기로 했다. 클로에는 표현에 대한 질문에 이리 답했다. ‘뱅글뱅글을 표현하고 싶다’ 고. 이는 미코에게 있어서 꽤 난해한 주문이었다. 덕분에 미코는 클로에의 옷을 디자인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래서 그런가 클로에의 옷 거치대에는 미코가 디자인하지 않은 옷도 몇 벌 걸려 있었다. 클로에는 잠시 옷 거치대를 보다가 민소매 와이셔츠를 집었다. 이 위에 가디건을 입으면 예쁠 것 같아. 클로에는 자신에게 맞춰보지도 않고 아무 옷들이나 덥썩 집어서 탈의실로 가버렸다. 그러는 사이 리츠가 돌아왔다. 리츠는 그새 옷도 갈아입은 채였다. 미코는 에밀에게 잠깐 기다려달라 이야기했고 에밀은 미소로 대답했다.
세트장이 붉은 빛으로 꾸며지기 시작했다. 리츠는 새하얀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이였다. 붉은색과는 확연히 다른 색이었다. 리츠는 준비된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무슨 포즈를 지어야 하지. 리츠는 제 손가락을 매만졌다. 정자세로 찍는 게 편할까 싶어 리츠는 손을 다소곳이 모았다. 가만히 렌즈 너머를 보던 미코는 불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미코의 지시에 따라 스태프들이 커튼을 치고, 배경을 꾸몄다. 그럼에도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미코는 마침 옷을 갈아입고 온 플뢰르와 클로에, 무언가의 작곡에 열중한 에밀을 돌아보았다.
“아이디어 같은 거 추천해주실 수 있어요?”
“부채나 우산은 어때요? 무척이나 빠르게 뱅글뱅글할 것 같은데.”
클로에의 제안에 미코가 스태프를 돌아보았다. 스태프는 곧 검은색의 접부채를 가져왔다. 리츠는 접부채를 받아서 보다가 어색하게 자세를 잡아보았다. 어색하지만 미코의 입장에서는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붉은 조명들이 적절히 배치되었다. 셔터음이 울리고 곧 리츠의 촬영이 끝이 났다.
다음 순서는 플뢰르였다. 한 스태프가 미코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미코는 플뢰르를 보며 물었다. 혹시 가발을 사용해볼 생각이 있냐고. 위로 묶은 포니테일이 청순함을 살려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스태프의 의견이었다.
“스태프분들, 의견도 낼 수 있었나요?”
에밀이 옆에 있던 스태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미코는 엄연히 자아를 가진 이들이라고 이야기하며 에밀에게 괴롭히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에밀은 당연히 괴롭힐 생각은 없다 이야기했다. 그러든 말든 에밀의 시선은 스태프 한 명에게 향해 있었다. 그 스태프는 은근슬쩍 스태프들 사이로 숨어들어갔다.
플뢰르는 자신에게 딱 맞는 붙임머리를 붙이고 왔다. 스태프들이 배경을 교체하기 시작했다. 그걸 지켜보던 미코는 스태프들이 ‘느리다’ 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 풍경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곧 미코가 한 마디를 했다.
“구축.”
그러자 아름다운 하늘의 배경이 세워지듯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플뢰르의 주변에 정교한 홀로그램을 만든 듯한 느낌이었다. 에밀은 그 광경을 굉장히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보았다. 미코는 클로에의 촬영이 끝나기 전까지 옷을 갈아입어달라고 에밀에게 부탁했고 에밀은 옷 거치대를 가져오는 스태프를 보다 알겠다고 이야기했다. 리츠는 에밀의 의상이 궁금했는지 에밀 쪽으로 다가갔다. 한편 모델인 플뢰르는 주위 홀로그램을 둘러보다가 제 가슴에 손을 얹고 웃었다. 아이돌이네. 클로에가 방긋 웃으면 금방 촬영이 시작되었다.
다음 타자는 클로에였다. 다만 미코는 여전히 클로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클로에가 무엇을 ‘표현’ 하고 싶은지 알지 못했으니까. 미코는 클로에에게 다가가 직접 세트장을 꾸며볼 수 있겠냐고 물으며 노트와 펜을 건넸다. 클로에는 이내 간단하게 구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슥, 슥슥. 곧 완성된 이미지는 쿠션을 이용한 구도였다. 스태프들이 미코의 말대로 쿠션을 가져왔다.
클로에는 쿠션 위에 폭 앉았다. 그러고는 적당히 포즈를 취했다. 플뢰르는 속으로 클로에에게도 아이돌의 자질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리츠는 어느샌가 플뢰르 옆에 돌아와서 작게 이야기했다. 귀여우시네요. 리츠도 귀여워. 플뢰르의 칭찬에 리츠의 얼굴이 붉어졌다. 클로에의 촬영도 굉장히 빠르게 끝났다. 속전속결로 끝난 플뢰르와 클로에를 보며 리츠는 괜히 미코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어느샌가 나타난 에밀이 세트장으로 향했다.
플뢰르는 에밀의 옷을 보고 조금 놀란 것 같았다. 허리가 세게 조여져있는 것 같았으니까. 에밀은 그 반응을 눈치챘는지 코르셋이니까 당연합니다. 하고 빙긋 웃었다. 미코는 에밀의 ‘표현’ 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에밀은 귀공자와 반대되는 느낌을 표현하고 싶다 이야기했다. 미코는 이에 약간 뒷골목 느낌의 스타일을 고려하면서 에밀—그리고 그의 파트너인 선배—의 기존 이미지 또한 살리기 위해 코르셋을 사용했다. 에밀이 입고 있던 옷은 미코가 디자인한 것 중 제일 만족했던 옷이었다.
문제는 배경이었다. 미코는 고민했다. 어떤 배경이 어울릴까. 스태프들이 여러 시안들을 보여주었지만 미코는 만족하지 못했다. SURL의 작품은 완벽해야 했다. 미코의 고집이었다. 세 사람도 미코를 따라 덩달아 고민했다. 리츠는 음산한 분위기, 플뢰르는 밤, 클로에는 반짝반짝을 제안했다. 스태프들이 조명을 고치고 배경을 바꾸며 효과를 주기 시작했다. 미코는 고민했다. ‘귀공자’ 와 반대되는 이미지라고 부탁을 받았는데, ‘밤의 귀공자’ 같았다. 하지만 에밀은 즐거워보였다. 섬뜩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에밀을 보고 미코는 물었다. 괜찮으신거죠? 네, 물론이죠. 한 손을 들어보이는 에밀을 보며 셔터음이 울렸다.
네 장의 사진 촬영. 첫 팀의 촬영이 끝이 났다.
“사실 표현이라는 건 신기하죠.”
대기실에 있던 네 사람에게 미코가 이야기했다.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고 미코는 생각하는 듯했다. 네 사람의 사진은 그런 의미에서 표현하고 싶은 ‘나’ 를 표현한 과정이었다. 미코는 사진 한 장 씩을 네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각각 자신이 찍힌 사진이었다. SURL을 상징하는 한쪽의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미코는 정중히 인사했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또 다시 촬영장에 오게 될 것이다. 그게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스태프분들 또 볼 수 있나요? 에밀의 물음에 미코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에 플뢰르와 클로에가 웃음을 터뜨렸다. 리츠는 제 사진을 보고 있었다. 평소의 나와 굉장히 다른 것 같은 나를 보았다. 가만히 보면 리츠와 닮아 있었다. 평소하고도. 이 사진으로 나를 표현했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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