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위해

토룡신

눈을 떴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아, 아아악, 절로 비명이 터져나왔다. 무슨 일이 있었지? 아악, 악,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두꺼운 이불같은 것이 로젠을 둘러싸고 있었다. 손을 휘적거리자 서늘하고 촉촉한 살점이 만져졌다. 희고 반투명했다. 주름이 지글지글 움직이고 있었다. 간신히 고개를 빼낼 수 있었다. 두두두두,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새벽제비!

로젠이 소리질렀다. 요란한 소리가 급하게 끊겼다. 새벽제비, 그는 집에 없었다. 집에는 로젠 혼자였다.

새벽제비?

로젠은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새벽제비에게 토룡신이 아니냐고 물어본 다음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약간 달라졌다. 새벽제비는 로젠에게 주술을 행했다. 흰 옷을 입히고, 녹색 비단 천을 태운 연기를 들이마시게 하고, 약을 먹이고,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을 해주었다. 기이한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연기를 들이마시는 것이 가장 기이한 것이었다. 로젠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믿지 않았다.

내 방에는 들어오지 마.

잊을 만 하면 새벽제비가 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남의 방에 들어가고 싶니? 그것도 안방인데?

새벽제비는 로젠의 방을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의 사생활을 지켜주는 대신에 로젠의 사생활도 지켜주겠다는, 당연한 교환이었다. 새벽제비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로젠은 새벽제비의 말을 믿지 않았다. 왜냐면 로젠은 새벽제비를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벽제비도 로젠을 불신하기 때문에 로젠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꼬마 신랑님?

머리 속으로 들리는 쨍한 여자의 목소리. 로젠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자신은 희고 반투명한 “지렁이” 에게 “들려” 있었다. 자신을 반쯤 묶듯 해서 로젠을 몸통으로 들고 있었다.

꼬마 신랑님, 요 몇 백년 간 말씀이 없으셔서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산책까지 나오시니 얼마나 기쁘게요?

난…….

로젠이 선언했다.

난 꼬마 신랑이 아니야.

당신의 냄새는 속일 수 없어요.

나에게서 꼬마 신랑의 냄새가 난다고?

토룡신은 거대한 몸으로 똬리를 틀었다. 그리고 그 위에 로젠을 놓아주었다. 로젠은 적당히 폭신한 매트리스 위에 올라온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토룡신의 몸을 짚었다. 새벽제비는 왜 급작스럽게 집을 비웠을까? 로젠은 새벽제비가 없다는 것을 알자마자 그의 방문 앞으로 갔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문과 바닥 사이의 틈새로 방 안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냥 문을 열었으면 됐을까? 마치……. 약방에서 그랬던 것 처럼?

좋아. 토룡신이시여, 오랫만에 산보를 나오니 기분이 좋습니다. 헌데, 저 말고 다른 신부를 얻을 생각은 없으십니까?

토룡신이 “쳐다보았다”. 희고 반투명한 곳에 앙증맞은 구멍(혹은 구멍인 척 하는 무늬)이 세 개 나 있었다. 이모티콘 같았다. 토룡신의 얼굴에 있는 가운데 구멍이 오물거렸다. 그 때 마다 째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로젠은 그 웃음소리를 알아챘다.

어머님께서 시키시던가요?

풍문-,

잘못 대답하면 엄청난 재앙이 닥칠 것을 직감했다. 로젠이 더듬거리며 말을 돌렸다.

어,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풍문, 입니다.

로젠은 머리를 땅바닥에 붙이고 눈을 떴다. 부릅뜬 눈이 보였다. 로젠과 똑같은 자세로 로젠을 쳐다보고 있는 새벽제비. 로젠은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래서 가만히 새벽제비의 눈을 바라보았다. 새벽제비가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아마 소리를 냈다 해도 로젠이 들어본 적 없는 이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그제야 로젠은 자신이 겁에 질렸다는 것을 알았다.

새벽제비!

로젠이 째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리고 현관으로 뛰어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집에서 나가야한다. 로젠이 현관 문을 열었다. 그 곳에는 로젠의 어머니가 피를 흘리며 기어다니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저건 내 어머니가 아니다. 내 어머니는 나에게 사랑을 남겼어, 저런 허물이 아니라……. 로젠의 눈 앞에 가려졌다.

보지 마.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를 믿지 않는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어, 언젠간 금기를 깰 거란 것도.

그럼 우리 사이를 이간질한 죗값을 치러야겠지요.

토룡신이 말했다. 토룡신의 목……. 이랄까, 몸통 윗 부분에 솟아난 손바닥만한 돌기가 파닥였다. 희미한 빛이 모였다. 저걸로 새벽제비에게 벌을 내리는 것일까? 등골이 오싹해졌다. 빛은 로젠에게 날아왔다. 내가 꼬마 신랑이 아니란 걸 알아차린 것인가? 벌이 나에게 오는 것일까? 로젠은 눈을 감았다. 죽기까지 일 초, 이 초……. 십오 초 까지 셌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로젠은 눈을 가늘게 떴다. 기분 좋은 밝기의 빛-공이 떠있었다. 로젠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빛 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 안에는 구체가 있었다. 로젠은 그게 뭔지 알았다. 녹색 비단공이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비단공을 잡고 손을 툭 떨구었다.

어째서 이것을?

로젠이 간신히 물었다.

꼬마 신랑님, 꼬마 신랑님,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공이여요. 어머님께서 당신을 괴롭히신다면 이 미물이 잘 타이르겠습니다.

토룡신은 이용을 당했다. 토룡신은 새벽제비에게 이용 당했다

아니. 널 떠날거야.

로젠은 이용을 당했다. 로젠은 새벽제비에게 이용 당했다. 로젠은 토룡신의 몸에서 팔짝 뛰어내렸다. 토룡신의 목소리가 머릿 속을 뒤흔들었다. 네가 나를 떠난다고? 나에게서 도망을 가겠단 말이냐? 땅이 쓰나미처럼 솟구치고 하늘이 크게 출렁였다. 로젠은 눈을 질끈 감고 달렸다. 등 뒤에서 두두두두, 수많은 발이 땅바닥을 딛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제비가 모든 것을 계획했다. 가만히 땅 밑에 잠들어있던 토룡신을 로젠이 깨우게 한 것 부터 새벽제비의 술수였던 것이다. 로젠은 일단, 토룡신에게서 달려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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