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외전, if 등)

외전: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

그래도 저는 순애가 좋아요

*시도폰, 카리타스가 학생으로 다른 세계에 되살아났다는 설정. 시도폰만 기억이 있고, 카리타스에겐 기억이 없었던 상황이었는데. 모종의 사건으로 카리타스의 기억이 되돌아온다.

 

“시도폰, 이런 질문을 해서 미안한데 꼭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그렇게 된 다음에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

학교 점심시간, 시도폰은 옥상에서 그 질문을 듣고 얼어붙었다. 기억이 돌아온 카리타스라면, 분명 제게 이걸 물어보리라고 예상했지만, 막상 이걸 직접 들으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했지만, 카리타스의 질문에 대답하려면 필연적으로 그를 제 손으로 죽이던 그 순간부터 떠올려야 했다.

어두운 하늘 아래에 망가진 신전과 바닥에 널브러진 관, 부서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동상과 그 아래의, 심장이 관통당해 늘어진 시신.

‘내가 네게 같이 북부로 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넌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몰라.’

‘좋아해. 아마 죽어서도 그럴 거야.’

‘죽지 말아 줘.’

그 모든 말들은 아직도 시도폰의 머릿속에 똑똑히 남아있었다.

“….”

고개를 들지 못하는 시도폰을 보던 카리타스는 제 질문이 시도폰을 슬프게 한다는 걸 알았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시도폰이 어떻게 살았을지, 무책임하게 죽은 자신 때문에 또 괜한 일에 휘말리지는 않았을지. 신은 그를 놓아주었을지.

간신히 시도폰이 내놓은 대답엔 슬픔이 섞여 있었다.

“대답…, 안 하면 안 될까?”

“…네가 힘든 거 알아. 그래도 궁금해, 나는 네가 그 이후로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보거나 들은 게 없어.”

“그래? 다행이야. 네가 알아서 좋을 게 없으니까.”

이제는 조소가 섞인 듯한 시도폰의 대답에 카리타스가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자 시도폰은 두 발짝 물러나며 대답하지 않겠다고 재차 말했다. 거의 선언에 가까운 단호한 그의 태도는 카리타스의 의구심을 불릴 뿐이었다. 카리타스도 물러서지 않았다.

“네가 무슨 선택을 했든, 말해줘.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뭐라고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야. 그냥… 묻지 말아 줘.”

“하지만….”

끈질긴 카리타스 때문에 시도폰은 결국 날을 세웠다.

“네가 옛날에 내게 대답하지 않은 게 많았던 것처럼, 나도 그냥 그걸 말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야, 아닌데….”

시도폰이 그만 변명하라고 말하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옛날처럼 치마를 힘주어 잡은 카리타스를 봐버렸다. 치마가 주름이 질 정도로 그것을 억세게 쥔 카리타스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죄를 고백하는 것처럼, 카리타스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나는, 네가 날 계속 보러 와줬으면 했어.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얼마 없어서… 얼마 안 되는 이야기를 다 해버리면 네가 날 더 궁금해하지 않을 것 같았어.”

금방 마음이 약해져 버린 시도폰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난 널 좋아했는데.”

“….”

그 말에 카리타스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가 금방 입술을 깨물어 입꼬리를 내린 채 말했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언제까지 갈 거라고 확신할 수 없잖아…. 난 신전에 혼자 있고, 네 주변엔 언제나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금방 네가 나한테 싫증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

과거에 해결하지 못했던 난제를 풀어냈지만, 시도폰은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최후를 이야기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는 마음을 다잡으려 말했다.

“네 마음은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그때의 나는 네게 모든 걸 말했잖아, 이제야 네가 그걸 말해주는 건 그냥 과거 청산일 뿐이야.”

그러자 카리타스는 치마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도폰에게 다시 묻는 대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시도폰을 지나쳐 옥상 문을 열었다. 카리타스의 슬픈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시도폰은 그를 뒤따라 갈 수 없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감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오던 시도폰은 급하게 이쪽으로 올라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그의 앞에 등장한 이는 예상대로 카리타스였지만, 그의 얼굴은 이제 슬픔이 덧대진 분노로 점철되어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카리타스가 물었다.

“죽었다며, 내가 죽고 나서.”

저 멀리, 두 사람을 이쪽 세계로 불러온 장본인이 미안하다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도폰이 그를 향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카리타스가 다시 물었다.

“왜 그랬어?”

회피하지 못할 질문은 아니었다. 시도폰은 대답했다.

“악마가 너무 많았어. 나 혼자 상대할 수가 아니라고 판단했으니까 그냥 그…의 힘을 빌리려고 했던 거야.”

카리타스는 바로 소리 높여 반박했다.

“거짓말하지 마. 너라면 그 불쌍한 영혼들을 설득할 수 있었어. 진실을 깨달았잖아, 영혼들이 네 말을 들었을 텐데. 왜 거기서 그런….”

영혼들을 설득해서 공격을 멈추게 하고, 그것을 근거로 신의 악행을 폭로하는 게… 카리타스가 생각한 가장 이상적인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길 바라서, 카리타스는 시도폰에게 살아달라고 말했을 것이고.

하지만 시도폰은 이제 저 이성적인 말들이 힘들었다.

“그래, 네 말대로 그런 게 가능했다고 치면…. 모든 게 해결됐다고 치면, 뭐가 달라져?”

심상치 않은 시도폰의 어조에 카리타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시도폰이 재차 물었다.

“네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해?”

“…아니, 그렇지는 않지만. 너는 집행자잖아. 나 말고도 지켜야 할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뱉어놓고도 제법 무책임한 말이라고, 카리타스는 생각했다. 시도폰은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카리타스의 멱살을 잡을 것 같았으니까.

“내가 집행자가 돼서 지키고 싶었던 사람은 너였어. 너도 알잖아? 내가 힘을 얻기도 전에, 무모하게 전투에 나갔던 이유가 뭐였는지.”

“날 지키고 싶다고….”

“그런데 난 널 지키지도 못했고, 오히려 그 힘으로 널 죽였잖아. 그것도 내 손으로! …이런 나보고 계속 살아있으라고.”

“….”

“나한텐 네가 없는 삶이 지옥보다 싫었어. 두 달에 한 번이라도 연락할 수 있는 그때랑은 다르게, 아예 볼 수 없다는 걸 상상도 하기 싫었다고.”

아까와는 반대로, 이번엔 카리타스가 뒤로 물러났고 시도폰이 그에게 다가갔다. 여태까지 털어놓지 못했던 진심을, 시도폰이 맥락 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 곁이래도 네가 행복하면 된 거라고 믿었고, 내 마음 같은 건 널 부담스럽게 할 것 같아서 전하지 않았어. 나 혼자 널 좋아한 거였는데, 너도 같은 마음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게 부끄러워서 한동안 자책도 했었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폰.”

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거친 목소리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분노에 차 말을 이었다.

“네가 네 마음을 숨기고 외면하는 바람에 내가 그렇게 생각했잖아, 그런데 정작 넌 죽기 직전에야 나한테 좋아한다고 살아달라고, 말했지. 그게 얼마나 잔인하게 느껴졌는지 이제 감이 좀 와?”

시도폰은 그렇게 말하고 숨을 골랐다.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고, 짧은 침묵 후, 카리타스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 이렇게 되니까 왜 내 기억만 날아갔는지 알 것 같아.”

뜬금없는 말에 시도폰은 설명하라는 듯 카리타스를 바라보았다. 아주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카리타스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내가 널 좋아하면 네가 힘들어지잖아.”

“뭐?”

“내가 ‘그’에게 부탁해서 다시 기억을 지워달라고 할게.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면서 같이 물어봤거든. 내 기억을 다시 지울 수 있냐고. 힘들긴 한데, 가능하대.”

정말로 지우려는 사람처럼, 카리타스는 뒤돌아 걸어갔다. 이번엔 시도폰이 곧바로 뒤를 따라가 그를 붙잡았다. 카리타스의 손목을 붙든 시도폰의 손은 어째서인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 마, 이번에도 도망치려고 하는 거잖아. 내가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솔직하게 말해주면 안 돼? 이제야 전부 알게 됐는데 왜 그러는 건데?”

시도폰은 도무지 카리타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태까지의 이야기를 뭐로 들었던 건지, 카리타스는 엉뚱한 이야기나 하고 있었고, 그의 마음은 다시 답답해졌다. 가능하다면 제 머리카락을 뜯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지금 시도폰은 카리타스를 붙들고 있었으니 그런 기행은 불가능했다.

카리타스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가 언제까지 같이 있을 수 있을까? 여기서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난 너랑 떨어지게 되면, 그때와 다르게 행동할 자신이 없어.”

“안 떨어지겠다고 노력하겠다는 선택지는 왜 생각을 안 해?”

“너도 알잖아, 내 노력은 의미가 없었어.”

이전 세계에서 얻은 무력감이 카리타스를 아직도 붙들고 있었다. 기억을 날린다면 그런 무력감도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신의 압제로 왜곡되었던 카리타스의 자존감과 성격도 조금 더 나아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시도폰은 그게 카리타스에게 더 낫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놓아줄 수 없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건,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버텨온 카리타스였으니까.

그는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나한텐 왜 미안하다고 했는지 기억해?”

“…응. 네가 네 손으로 날 죽이게 했잖아. 널 북부로 데려가서 신에게 갖다 바친 것도 나였고. 그리고… 더 많았지만.”

“그건 어떻게 갚을 거야? 이렇게 기억을 지우고 또 도망치면 너만 편해지잖아, 난 어떡할 거야?”

할 말이 없었던 카리타스는, 곧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시도폰을 마주 보았다. 따지는 말투와 다르게 시도폰은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괴로운 듯했다.

붙들리지 않은 손을 들어, 카리타스는 시도폰의 뺨을 만졌다. 그 손길에, 시도폰은 카리타스가 죽은 그 날이 떠올라 결국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카리타스의 죄책감을 끌어내서 제 곁에 두겠다고 결심했던 그는, 어느새 그 다짐이 무색하게 카리타스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노력해 줘. 내 옆에 계속 있을 수 있게, 무슨 일이 생겨도 계속 날 따라와 줘. 그러면 되는 거잖아…. 날 또 내버려 두고 가지 마. 응?”

시도폰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카리타스는 소매로 닦아내며 물었다.

“계속 너한테 날 좋아하냐고 물어볼 텐데?”

“물어볼 때마다 대답해줄게.”

“지겨울 정도로 자주 물어볼 수도 있어. 내가 네 사랑을 믿지 않고 있다는 의심이 들 정도로.”

여전히 울먹이는 목소리로, 시도폰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의심은 해도 괜찮아. 그냥… 계속 옆에 있어. 내가 네 의심을 언제든 부정하려면 가까이 있어야 하잖아.”

정오를 살짝 지나간 시각, 햇살이 시도폰의 뒤에서 그를 비추었다.

흰색 교복 상의가 빛났고, 시도폰은 마침 여름이라고 머리카락을 단발로 자른 상태였다. 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어깨 근처에서 살랑였고 그 광경에, 카리타스는 자신이 시도폰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땐 내가 울고 있었는데, 이젠 네가 울고 있네.”

“….”

“네 곁에 있을게. 계속 있으려고 노력할게. 그러니까….”

카리타스는 살짝 발꿈치를 올려, 시도폰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웃어주면 안 될까?”

“…응.”

대답과 다르게 시도폰은 바로 웃지 못했다. 대신, 그는 카리타스를 세게 껴안았고, 조금씩 진정되는 시도폰을 마주 안으며 카리타스는 그의 등을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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