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3부 9화

북부기사단 야외훈련일지(1)-전투편

“오순절 동안 늘어난 악마들을 처리하는 동시에, 전투 대형을 익히는 훈련이니 잘 따라주길 바란다. 오늘은 첫날이니 들판에서 대형을 연습할 테지만, 내일부턴 숲으로 들어갈 예정이네.”

시도폰이 간단히 훈련의 목적을 설명했다. 프라이에와 두코는 각자 부대를 이끌고 처음 들판에 도착할 때처럼 대형을 이뤘고, 베론은 기사 몇 명과 함께 짐을 지키면서 훈련을 지켜보기로 했다.


‘약한 소리 하는 거… 좋지 않다곤 생각하지만, 처음인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훈련을 떠나기 전날, 시도폰이 남들 몰래 베론을 찾아와서 했던 말이다. 그동안 잘 해왔으면서 왜 갑자기 의기소침해지셨냐고 베론이 묻자, 시도폰은 여태까지와는 규모가 달라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동안 악마들을 많이 소탕해보긴 했지만, 대부분 소규모 인원으로 제압 가능한 상황이었잖나. 이번엔 세 부대가 다 같이 움직여야 하니까, 잘 통솔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내 말에 반항하는 기사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이가 내 명령을 정확하게 따르진 않을 것 같으니까.”

“원래 처음이라는 것이 다 불안한 것이고, 당연히 말이란 것은 뱉는 이와 듣는 이가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말이 동반하는 오차를, 전술을 기억하는 몸이 지울 수 있도록 훈련을 하는 것이고요. 기사들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도 주눅 드실 필요 없습니다. 따를 때까지 굴리시면 됩니다.”

“…그런가.”

의문스러움을 담은 말과 다르게 시도폰은 웃고 있었다. 그는 문을 닫고 베론의 집무실을 나가면서 믿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한층 가벼워진 목소리에 베론도 안심하며 야영할 짐을 꾸렸었다.


“잘 하고 계시는군.”

멀리서 부대의 움직임을 보던 베론이 중얼거렸다.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시도폰은 부대를 제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움직임을 모두가 의식할 수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강력했다. 밝은 태양 아래에서도 기죽지 않고 타오르는 푸른 불꽃이 악마들을 자비 없이 불태웠다.

시도폰이 창을 하늘로 치켜들어 신호를 보내자, 아까의 전투로 일자로 퍼져있던 부대가 다시 돌격대형으로 모였다.

“이디스, 보호막을!”

정신없이 다친 기사들을 치유하던 이디스가 프라이에의 외침에 고개를 들었다. 보호막이 다소 늦게 만들어졌지만, 다행히 촌각을 다투는 상황은 아니었다. 프라이에가 이디스와 함께 악마들의 약한 부분을 뚫자, 시도폰과 두코가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잘 했어. 앞으로도 보호막 치는 거 잊지 말고. 우리 부대원들 목숨이 너한테 달려있으니까.”

말을 타고 앞으로 달려가며, 두꺼운 랜스로 악마들 둘 셋을 한 번에 꿰뚫은 프라이에가 말했다. 피처럼 붉은, 하지만 지나치게 새카만 액체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 뒤엔 바짝 긴장한 이디스가 계속해서 움직이는 프라이에를 따라 보호막을 갱신하고 있었다. 말발굽은 검은 발자국을 찍어내며 경계로 향했다.

“네, 넵!”

“음…, 너무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어. 네가 보호해주지 않아도 나는 이 창만큼 튼튼해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으니까.”

프라이에가 나름의 배려를 해준 것이었지만, 이디스에겐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는지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한편, 후방을 맡은 두코는 크로마에게 이동하는 동안은 활을 들지 말고 보호막에만 집중하라고 명령했다.

“프라이에가 길을 뚫어줬으니까 우린 그 뒤를 놓치면 안 돼. 허리가 잘리면 끝. 집행자나 솔라는 알아서 각자도생할 수 있지만, 다른 기사들은 안 되니까 공격보단 방어에 집중할 것. 싸우는 걸 좋아하는 건 알겠지만 말이야.”

그 말에 크로마는 말고삐를 고쳐잡고 두코를 따랐다. 그의 시선은 쭉 전 부대의 중앙, 시도폰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 정도야 여러 번 해봤으니 기억하고 있습니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했으면 좋겠네요. 움직이는 거 계속 따라가면서 보호막 위치 옮기는 거 생각보다 힘들거든요!”

두코는 알겠다며 속도를 올렸다. 부대는 목적지에 도착해 대열을 일자형으로 바꿨고, 두코는 몸이 근질근질했다며 양손에 단도를 하나씩 들었다.

그가 일으킨 바람에 악마들이 휘청였고, 두코가 몸을 숙여 그들의 다리를 공격하면 크로마는 쓰러진 그들을 불화살로 마무리했다. 시도폰의 불과는 다르게, 크로마의 것은 밤이 되어야 붉게 보이는 불이었지만, 위력은 강했다.

크로마는 화살을 쏘면서도 솔라의 움직임을 관찰했는데, 그는 검으로 가까운 거리의 적을 처리하면서 십자가를 이용해 시도폰을 돕고 있었다. 눈이 네 개라도 되는 것 같은, 묘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크로마! 정신 안 차려?”

두코의 호통이 벼락처럼 크로마를 치고 지나갔다. 그제야 크로마는 제 옆에서 막 쓰러진 악마를 발견했고, 성큼 다가온 두코는 악마의 머리통에 박힌 단검을 빼냈다. 꾸중할 시간도 없었던 두코가 급하게 돌아갔고, 정신을 차린 크로마가 합류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잔당도 완벽하게 처리된 것 같군요.”

베론이 시도폰과 기사단을 맞았다. 악마들이 흘린 피로 몸이 축축해진 이들은 빨리 씻고 싶다고 아우성이었고, 치유 사제들은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시도폰은 제 옆에서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솔라에게 괜찮냐고 물었지만, 솔라는 거기에 대답하지 못할 정도로 힘이 없었다.

“베론, 오늘 불침번은 자네랑 내가 서야겠네.”

“아니,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고집부리지 말게. 내일 훈련에 빠지고 싶은 게 아니면.”

아무리 솔라라고 해도 시도폰이 단호하게 말하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에게 저녁 준비를 시키던 베론이 시도폰의 말을 듣고 솔라를 쳐다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라가 속으로 ‘그렇게 심각해 보인다고?’라고 생각할 동안, 시도폰은 크로마를 꾸중하고 있는 두코에게 다가갔다.

“두코, 잠시 이야기 좀. 많이 바쁜가?”

“아뇨. 다 끝났습니다. 정신이 빠져있는 것 같아서 뭐라고 좀 했습니다.”

“전장에서 넋을 놓으면 안 되지. 바로 죽을 수도 있으니까.”

“죄송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크로마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가볍게 숨을 내뱉은 두코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내일 숲에서 있을 훈련에서 자네가 나랑 같이 움직이고 솔라가 크로마와 함께 숲 외부에서 작전을 진행했으면 해서.”

“나무 같은 빽빽한 장애물이 있을 때의 부대 기동력을 높이겠다고 한 거 아니셨습니까? 물론 두 사람은 원거리 공격에 특화되어 있어서 그런 곳에서 움직이는 게 되려 힘들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만.”

“그것도 있고, 오늘 훈련해보니까 두 사람의 능력을 어떻게 조합해야 할지 알 것 같아서. 무리인가?”

“아뇨, 가능합니다. 고작 두 사람 빠진다고 진행이 안 되는 훈련은 아니니까요. 프라이에에게도 전달해두겠습니다.”

고맙다고 대답한 시도폰은 솔라를 끌고 씻으러 갔고, 두코는 크로마에게 그렇게 됐다고 통보하고 프라이에를 찾으러 떠났다. 덩그러니 남겨진 크로마는 미묘하게 들뜬 기분을 느끼며 뒷목을 쓸었다.

“…그렇게 됐다는 말씀. 너랑 이디스랑은 별로 관련 없는 얘기지만, 아니다, 이디스는 좀 더 바빠지겠구나. 말 좀 잘 해줘.”

“응. 용건은 그걸로 끝이야?”

고개를 끄덕인 두코는 피 냄새를 맡았다. 악마가 흘린 피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 흘린 피의 냄새였다. 주변을 둘러봐도 부상자는 보이지 않았고, 보이는 거라곤 뒷짐을 진 프라이에뿐이었다.

“너 손 앞으로 내봐.”

“손? 무슨 손? 허리가 좀 아파서 받치고 있는 거야. 오랜만에 말 탔더니 그렇더라고.”

능청스레 웃는 프라이에에게 두코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갔고, 그가 다가간 만큼 프라이에가 뒷걸음질 쳤다. 장난하냐며 두코가 거센 바람을 일으켰고, 뒷걸음질 치던 프라이에는 그대로 넘어지다가 두코에게 멱살을 붙잡혔다.

넘어지는 몸을 받치려고 뻗은 프라이에의 팔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코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피가 이렇게 철철 흐르는데 잘도 이걸 숨기고 있었네. 빨리 치료받아. 여태까지 뭐한 거야?”

“아니 그렇게 심하게 다친 건 아니잖아. 뼈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뼈가 보였으면 네가 지금 이렇게 태연하게 서 있지도 못했겠지.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가.”

“아직 치유 사제들은 바빠 보이는걸. 네 말마따나 이렇게 태연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사람보다는 중상자를 치료하는 게 먼저잖아.”

한숨을 쉰 두코가 손을 쥐락펴락했다. 간단한 치유술을 배워두긴 했지만, 두코도 이미 신성력을 다 써버린 상태라 프라이에를 치료해줄 수 없었다.

“그 사람들도 중요하지, 그런데 넌 부대장이잖아. 네가 다치면 너만 아프고 끝나는 일이야? 싸우느라 신성력도 다 떨어져서 자가치유도 안 되는데,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하려고 그러는데?”

“하…. 알겠어, 알겠다고.”

결국, 양손을 들고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보인 프라이에가 지나가던 치유 사제를 붙잡고 치료를 받았다. 금방 끝나버린 처치에 두코는 눈을 가늘게 떴고, 프라이에는 자신을 치유해준 사제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자, 깔끔하게 치료받은 거 확인했지? 난 이제 씻으러 간다.”

“… 그래.”

소매를 걷어 흔적조차 없는 말끔한 팔을 보여준 프라이에가 돌아섰다. 두코는 사제가 프라이에의 손을 다소 오래 잡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봄의 미지근한 바람이 들판을 쓸어와 재의 냄새를 흩뿌렸다. 전투가 끝나고, 악마의 시체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시도폰은 전부 태워버리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했고,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

이걸 언제 다 묻냐고 속으로 한탄하던 기사들은 시도폰의 하늘색 불꽃에 집어 삼켜져 재가 되어버리는 악마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불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타오르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고, 들판엔 회색의 공터가 생겼다.

“악마도 타고 나면 재뿐이구나. 뭐 다른 거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매캐한 냄새가 몸에 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두코는 수건을 챙겼다.


“두코가 악마들을 여기까지 잘 데리고 올 수 있겠지?”

시도폰은 숲의 가장자리에서 불안한 듯 뒤를 흘끔 쳐다보았다. 악마의 기운이 가까워지는 걸 보면 그들이 근방에 온 것은 확실했지만, 두코가 무사한지는 알 수 없었다. 모두가 긴장한 순간, 두코의 머리가 빼꼼 솟아났다.

그의 뒤로 몇 명의 기사와, 수많은 악마가 따르고 있었고 시도폰은 부대에게 숲으로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솔라의 옆엔 크로마가 있었다. 솔라는 오늘 아침, 시도폰이 말했던 작전을 말없이 복기하며 악마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크로마는 비행형 개체들이 오늘따라 많다며 솔라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군요. 예상한 상황은 아닙니다만, 저희도 이제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십자가는 꺼내지 않으시고요?”

솔라는 이번엔 십자가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대신 그는 얇은 나뭇가지를 하나 손에 들었고, 그 모습은 활에 시위를 걸고 자세를 잡은 크로마와 다르게 전투에 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지시봉을 든 교사와 오히려 비슷했다.

솔라와 훈련 시간이 겹치지 않았던 크로마는 그가 무엇을 할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솔라를 지키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기사들이 숲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일었고,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으며, 마침내 푸른 불꽃이 솟았다. 평소보다 좁고 높게 솟아오른 불꽃에 크로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때, 그곳에 얇은 수직선이 하나 그였다.

선은 곧지 않고 군데군데에서 꺾이는 듯한 모양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꽂혔다. 크로마가 그것을 본 순간, 그것은 찢어지는 모양으로 팽창했고, 또 조금 시간이 지나선 굉음이 울렸다.

‘낙뢰? 아니, 그렇다기엔 너무 정밀하게 내리꽂혔어, 우연이 아니야.’

그리고 크로마의 옆엔 나뭇가지로 정확하게 시도폰의 불꽃을 가리키는 솔라가 있었다. 또다시 하얀 선이 생겼고, 굉음이 귓전을 때렸다. 솔라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고, 차분한 손놀림과 다르게 이마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제가… 도울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크로마는 활을 들고 있던 팔을 내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애초에 그걸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경이가 자아낸 혼잣말이었다.

두 사람의 뒤에서 대기하던 기사들도 크로마처럼 낙뢰를 바라볼 뿐이었다. 세 번째 낙뢰가 내리쳤을 때, 비행형 개체들이 본대 기사들의 추적을 멈췄다. 그들은 허공에서 원을 그리다가 솔라가 있는 곳을 발견했는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도 보이는 여러 쌍의 눈동자에, 크로마가 다시 활을 들었고 솔라는 잠깐 숨을 몰아쉬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지킬 겁니다. 당신께선 해야 할 일을 하세요.”

세 개의 불화살이 시위에 걸렸고, 크로마는 악마들이 달려들기만 기다렸다. 마침내 화살이 닿을 수 있는 거리로 악마들이 날아왔고, 크로마의 화살들은 처음으로 달려든 개체의 머리와 몸통 중심, 날개 한쪽에 각각 하나씩 박혔다.

화살을 촛대 삼아 타오르던 불이 악마에게 옮겨붙었고, 그것은 미친 듯이 몸을 비틀다가 지상으로 추락했다. 크로마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활을 쐈지만, 바로 격추되는 개체는 드물었다.

‘처리한 개체보단 남아있는 것들이 많네. 더 빨리, 더 많이….’

푸른 불꽃이 또 솟아올랐고, 솔라는 그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코앞에서 악마가 불타 죽는데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제 일에만 집중하는 모습에, 크로마는 이를 악물고 활시위를 당겼다.

그렇게 몇 번의 낙뢰가 내리친 끝에 전투가 끝났다. 오늘도 사망자는 0명, 부상도 심각하지 않았다.

“수고했네. 그런데… 상태가 많이 안 좋군. 임무 보고는 좀 이따 하고 먼저 쉬다가 오게.”

“죄송합니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사과할 필요 없네. 어제나 오늘이나 힘든 일을 시킨 건 나니까. 두코, 본대로 복귀하려고 하는데 이상 있나?”

“없습니다. 부상자는 전부 회복했고, 말을 타지 못하는 이들은 마차에 실어두었습니다. 솔라도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시도폰이 돌아왔을 때 크로마에게 기대서 앉아있던 솔라는 그대로 두코에게 끌려가 마차에 실렸다. 하지만 지친 표정과 다르게 그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고, 옆에서 그를 지켜봤던 크로마는 아직도 크게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고자 심호흡을 해댔다.

‘솔라는 대단한 사람이니까, 시선이 끌리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모습을 보고도 여전히 이렇게 진정이 안 되는 건….’

프라이에를 향한 두코의 감정을 눈치챘을 때보다 난감했다. 솔라는 제게 관심도 없을 텐데. 그의 관심사라곤 신과 집행자뿐일 텐데.

“어이, 부관. 상관이 일하는데 거기서 노나? 진지까지 돌아가기 전까진 임무 끝난 거 아니다.”

“넵! 가겠습니다.”

두코의 부름에 크로마가 정신을 차렸다. 프라이에는 한 구석에서 울고 있는 이디스를 달래다가 두코의 신호에 고개를 돌렸다. 빨리 해결하고 합류하겠다는 뜻으로 프라이에가 손짓하자 두코는 본대를 대기시켰다.

“실수였잖아. 금방 회복도 시켜줬고. 정말 괜찮다니까.”

“하지만 회복했다고 해도 다치는 건 아프잖아요. 제가 굼떠서 이런 일이 생긴 거니까.”

“내가 괜찮다고 말하면 괜찮은 거야. 그리고 이디스, 앞으로 네가 전투에 나갈 일이 수십 번은 있을 텐데 매번 이렇게 힘들어하면 이거 오래 못 해.”

이디스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켰다. 포기하고 싶다, 그만하고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은 이어지는 프라이에의 말에 흩어졌다.

“난 네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있었으니까 내가, 그리고 기사단이 살아있는 거야. 어제오늘 사망자가 아무도 없었고, 부상자 몇 명으로 끝난 것도 전부 네 덕이야. 아픈 거야 잠깐 아프고 말면 되지. 그것도 살아있으니까 느낄 수 있는 감각인걸.”

눈물을 닦은 이디스가 일어서자 프라이에가 그를 말에 태우고 뒤에 올라탔다.

“너무 많이 울어서 말도 제대로 못 타는 꼴이라니 부끄럽네요.”

“목이 다 잠겼어. 돌아가면 따뜻한 물이라도 마시자.”

중얼거리는 이디스의 뒤에서 프라이에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어느새 진지에 도착한 이들은 어제처럼 하루를 마무리했다. 불침번을 맡은 프라이에와 크로마 외에는 모두 잠든 밤, 프라이에는 크로마에게 솔라와 무슨 진전이라도 있었느냐고 물었고 크로마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눈치채신 겁니까? 저도 오늘 알았는데,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아니, 아마 나만 알았을걸. 두코도 아무 말 없었거든. 난 처음에 네가 집행자께 관심이 있는 줄 알고 굉장히 심장 졸이면서 지켜봤는데, 다행히 아니었더라고.”

“감히 그분을 사적으로 맘에 두는 사람이 있을까요?”

말도 안 된다며 크로마가 웃어넘겼고 프라이에도 뭐라 덧붙이지 않고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크로마는 두코가 그에게 품은 감정을 말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다음 불침번 타자로 두코와 이디스가 교대하러 오자 안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코는 크로마에게 그 이야기를 하기 전이나 후나 다를 것 없이 평온하게 프라이에를 대했고, 두 사람은 짧은 인사를 나누고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크로마는 자기 전, 누워서 하늘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나도 저렇게 하는 게 맞는 거겠지. 기사단 안에서 그런 사적인 관계는 불안 요소니까.’

연인 사이가 된다고 해도 항상 사이가 좋을 수 없었고, 기사단은 서로의 관계에 상관없이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조직이다.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는 순간 조직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씁쓸한 마음에 옆으로 돌아본 크로마에겐 걱정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얼굴로 태연하게 잠든 프라이에가 보였다.


다음 날, 같은 훈련이 반복되었고 솔라는 어제보단 적응이 되었는지 전투가 끝나고도 제 다리로 잘 서 있었다. 그날 밤 불침번은 시도폰과 솔라였고, 두 사람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시도폰이 잠을 깨기 위해 물을 마셨고, 솔라는 멍하니 불이 타는 걸 감상하고 있었다.

“전투 내내 너무 잘 해줘서 놀랐네. 솔직히 낙뢰를 내 신호에만 맞춰서, 시야가 거의 가려진 상태로 사용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거든. 맞춘다고 해도 땅이나 주변 사람한테 맞을까 봐 나는 다른 사람들이랑 조금 떨어져서 이동했었는데, 아무도 다치지 않았네.”

“낙뢰가 땅에 닿기 직전까지 신성력과 마력을 구분해서 탐지했습니다. 물론 신성한 힘은 온전히 제 것이 아니니 제가 실수했다고 한들, 당신께 직접적인 위험이 발생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전투 후에 주저앉다시피 했으면서 솔라는 제 공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시도폰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머리카락 한 가닥도 다치지 않게 그 힘을 조절한 건 순전히 자네 능력이자 의지야. 고맙다고 말하는 거니까 앞으로도 잘 하겠다고 대답하면 그걸로 충분하네.”

솔라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도폰을 바라봤다. 곧이어 그는 ‘그런 거군요.’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도폰은 컵을 내려놓으며 크로마는 어땠냐고 물었고, 솔라는 전투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낙뢰에만 집중하다 보니 크로마 씨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비행형 개체들이 이쪽으로 오는 걸 열심히 처리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한 마리라도 놓쳤으면 제가 중상을 입었겠죠.”

“크로마는 근접 전투는 약하지만, 원거리로는 자네 다음으로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니까 두 사람을 따로 둔 거라는 건 기억하겠지? 앞으로는 두 사람이 전투에서 비행형 악마를 전담해줬으면 하네.”

그 말에 솔라는 눈만 도르륵 굴려 시도폰을 보았다. 시도폰은 이제 솔라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되었기에 잠자코 있었다.

“저는 당신의 부관입니다.”

“그런 건 단순히 직책일 뿐이지 고정된 역할이 아니네. 근접 전투에서 자네의 도움을 많이 받긴 하지만, 땅에서 싸울 수 있는 기사들은 많아. 하지만 공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원은 많지 않네. 피데이스도 투창은 가성비가 나쁘다고 해서 나도 그쪽은 훈련을 거의 하지 않았어.”

“하지만….”

“비행형 개체들이 가장 먼저 노릴 상대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물론 어제오늘은 공격을 담당한 자네였지만, 들판에서 전투가 일어나면 그들의 제거 1순위는 나일세. 결국, 내 부관으로서 하는 업무의 연장인 셈이니까. 그렇게 눈을 홉뜨지 말아 주게.”

시도폰이 장난식으로 무섭다며 눈을 가리자 솔라는 얼굴에 준 힘을 풀었다. 작게나마 한숨을 쉰 솔라가 명령이시니 받아들이겠다고 답했다.

“내일부터는 마을 순찰이니까 마음 편하게 먹어도 괜찮을 것 같네. 이동하는 건 좀 지칠 것 같지만 몇 시간씩 싸우는 것보단 훨씬 평화롭겠지.”

“넵. 근래엔 마을에 악마가 나타났다거나 악마 숭배자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다음 교대 전까지 재밌는 이야기라도 하면 좋을 거 같은데, 뭐 아는 거 있나?”

“그런 게 있었다면 여기까지 오면서 이미 다 말씀드렸을 겁니다.”

타당한 지적에 시도폰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별이나 보자며 시도폰이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조용한 이른 새벽의 봄바람이 불어왔고, 악마들의 시체가 불타버린 숲은 고요했다. 멀리서 산들거리는 나무를 바라보다가 어느새 아침이 밝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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