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고양이한테 최종수 이름붙인 주찬양 (1)

주찬양은 운명이니 인연이니 하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염세적인 인간이라면 비약이라 받아칠 수 있겠으나, 그래서 애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더라 하는 말은 부정하기가 어려웠다. 그건 막 걸음마를 떼었을 무렵부터 지금껏 그를 따라다니는 평가 중 하나였다.

콕 집어 애늙은이 같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또래에 비해 차분하다, 남자애치고 얌전하다, 조숙하다, 조용하다, 욕심이 없다. 보통은 그런 식이었다. 마냥 칭찬인 줄로만 알았던 표현이 다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열 살 즈음. 어떤 평가는 소리를 죽여도 들려오기 마련이다. 그건 존재 여부조차 알지 못한 판도라의 상자 같았다. 있는 줄을 몰라 호기심도 가진 적 없던 것이 빠끔 입을 벌린 채 숨죽인 악의를 토해냈다. 한 꺼풀 아래에 감춰둔 진심이 적나라했다. 걘 남자애가 차분하고 조용한 게 영 또래 같지 않지, 애늙은이 같아서 좀 징그럽던데, 말 잘 듣고 자기주장이 약해서 키우기는 쉽겠더라, 남자애는 사고 좀 치더라도 소신이 있어야지….

모든 이들이 그네들 같진 않으리란 건 알고 있었다. 알고 있어도 신경이 쓰였다. 그때의 주찬양은 고작 열 살이었다. 어른스럽다는 소리 좀 듣는다고 덜컥 어른이 될 수 있을 리 없는 나이였다.

이상한 아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또래의 아이들을 흉내 냈다.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려보거나, 가지고 싶지도 않은 것을 사달라 떼를 쓰거나. 양친은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도 한 번 당황하질 않았다.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히고, 눈을 맞춘 채 가만히 물었을 뿐이다. 정말 그리고 싶으냐고. 고개만 끄덕이면 될 일이었다.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그랬을 테고.

열 살의 찬양은 시간을 들여 고민했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가지고 싶은 건 아니었고, 정말로 싫은 것도 아니었다. 제 손을 떠나 아쉽지 않은 것. 바란 적 없어 간절하지도 않은 것들. 주찬양은 어렵지 않게 그것들을 포기했다. 그게 편했다. 이후엔 귓등을 긁어대던 평가 역시 흘려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열네 살. 처음 만진 농구공이 림을 통과하던 순간 비로소 바라는 것이 생겼다. 일렬로 늘어선 훈련용 고깔을 지그재그로 통과해 정해진 위치에 선 찬양이 팔을 들었다. 근육 하나 없이 마른 팔에 묵직한 부하가 걸렸다. 드리블을 할 적엔 마냥 미끄럽게만 느껴지던 공의 표면에 다듬지 않은 손톱이 길게 걸렸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농구공이 정확하게 그물망을 통과했다. 12색 크레파스로 칠한 것처럼 유치한 갈색 공이 정오의 볕을 소리도 없이 가로질렀다. 그는 그날 다섯 번 공을 던졌고, 다섯 번 공을 넣었다. 수행평가에서 만 점을 기록한 학생은 많았지만 명문이라는 장도중학교 농구부에 입부 제의를 받은 건 그가 유일했다.

수업이 끝난 후엔 농구부를 견학했다. 거기에 최종수가 있었다. 그는 열네 살에서 열여섯 살 사이 난다긴다하는 놈들이 죄 모여있다는 장도중 농구부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다. 3점 라인에서 달리기 시작해 골 밑에 다다른 뒤 양발로 정확히 바닥을 밀고 올라가 점프. 급한 동작으로 뛰어오르는 센터백을 비웃듯 공중에 체류하다 센터가 떨어지는 순간에 맞춰 슛. 깔끔한 점프폼 덕에 최종수의 체공시간은 유난히 길었다. 꼭 중력의 영향을 벗어난 사람 같았다. 가벼운 착지와 함께 숱 많고 곱슬곱슬한 머리가 느리게 내려앉았다. 고개를 흔들어 엉겨 붙은 머리칼과 땀을 털어낸 열다섯의 최종수가 곧장 몸을 돌려 달렸다. 볼 돌려! 막아! 누군가가 소리친다. 그가 다시 뛰어올랐다. 수비를 열어젖히는 움직임엔 여유가 묻어났다. 격한 운동에 붉어진 뺨과 달리 유치한 갈색 공을 쫓는 까만 눈동자는 무섭도록 차분했다. 그 모든 찰나가 망막 위로 느리게 펼쳐졌다. 그리고 찬양은, 제가 이 순간을 영영 잊지 못하리란 걸 알았다.

농구부에 들어가고 싶어요.

열 살의 주찬양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어투였던 것도 같다. 고민을 해 보자는 부모님의 대답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금 더 간절하게 말해볼걸, 하는 생각을 했던 걸 보면. 후회라 할 만큼 거창한 감상은 아니었다. 당연히 실망하지도 않았다. 십여 년 전의 양친은 까맣게 몰랐겠지만 그건 실상 통보에 가까웠다. 주찬양은 농구가 하고 싶었고, 거기에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하진 않다고 생각했다.

우여곡절 끝에 농구부에 들어갔고, 최종수와 같은 팀이 되었으나, 그와 같은 경기를 뛰는 일은 없었다. 1학년 1학기가 마무리될 무렵 농구부에 들어간 찬양은 생짜 초보였고 최종수는 일찌감치 장도고 진학이 확정된 유망주였으니까. 코트 바깥에서 기본기를 연습하는 내내 시선은 그를 향한 채였다. 잘한다. 순수한 감상의 꼬리로 어렴풋한 바람이 떠올랐다. 그와 같은 코트에서, 그와 함께 경기를 뛰고 싶었다. 그렇게 일 년 하고도 반년이 지났다. 최종수는 중등부를 졸업했다. 3학년이 된 찬양은 그가 장도고에 입학하자마자 즉전감으로 논의되더라는 소문을 들었다. 3학년과 2학년. 아마도 한 번 있을 기회. 더 어린 나이에 농구를 시작한 또래에 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3학년이 된 찬양은 곧 장도중의 주전이 되었고, 2학기가 될 즘에는 이름 좀 있다는 고등학교에서 적지 않은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장도고등학교보다 조건이 좋은 곳도 있었다. 2학년이 될 즘에는 주전으로 활약할 여지가 있는 강호고도 있었다. 찬양은 고민도 없이 장도고를 선택했다. 장도고는 의심할 여지 없는 고교 1위 농구부지만 그만큼 유망한 선수가 많았다. 선수층이 두꺼운 만큼 3년 내 벤치만 데울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슈터가 필요한 학교로 가는 편이 좋잖겠느냐는 감독의 권유에 찬양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때 알았다. 저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장도 중학교에서 이 년, 다시 장도 고등학교에서 일 년. 그렇게 열여덟이 되던 해, 그는 기어코 원하는 자리를 손에 넣었다. 당시 주전이던 3학년의 기량이 크게 떨어진 탓이었다. 예비 엔트리에 들어있던 찬양은 경쟁에서 승리했고 장도고에서는 드물게도 2학년인 채 주전이 되었다. 잘 부탁한다는 인사에 농구공을 옆구리에 낀 최종수가 말끄러미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 대꾸한 뒤에는 당연하단 듯 코트로 들어갔다. 그의 등을 잠시 바라보던 찬양이 그를 따라 코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래 바랐던 것이 눈앞에 있었다.

어떠한 판단을 내릴 틈도 없이 혓바닥 위로 단어 하나가 튀었다. 종수 선배? 유동 인구가 많은 대학로의 카페 앞. 빨간 우산을 어깨에 걸친 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흐린 하늘을 비춘 눈동자가 파르스름한 빛을 띠었다. 쌍꺼풀 짙은 눈이 깜빡일 때마다 거기에 담긴 주찬양이 나타나고 사라지길 반복한다. 술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머리가 지끈대는 통에 비어있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졸업식이 있던 날의 꿈을 꾸었던 탓일까. 질끈 눈을 감은 찬양이 머리를 털며 정면을 응시했다. 빨간 우산을 든 종수는 여태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몇 번이고 같은 짓을 반복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변은 그가 여덟 번째로 눈을 감았을 때 일어났다. 따악. 눈앞이 번쩍이는 고통에 놀란 찬양이 이마를 감싸며 고개를 들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종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꿈이 아니구나.

“혹 생기면 어떡해요?”

“먼저 불러놓고 등신같이 서서 모르는 척했잖아, 니가.”

어제 헤어지고 오늘 만난 사람 같은 첫마디였다. 실없는 웃음이 샜다. 삼 년 만에 우연히 만난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건넬만한 인사말이 아니라는데 의식이 미친 탓이다. 찬양은 맞은 이마를 문지르며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꿈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남자가, 꿈에 나온 날처럼 그의 정강이를 툭 찼다. 웃냐? 짜증이 반, 황당함이 반. 볼을 씹어 가까스로 웃음을 삼킨 주찬양이 열여덟 그 시절처럼 대답했다. 아뇨. 뻔뻔한 대꾸에 한쪽 눈썹을 추켜 올린 종수가 허, 숨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목구멍이 간지러웠다. 어쩌면 내내 변하지도 않았을까.

대화를 나누는 건 삼 년 만이지만 종수가 삼 년간 한국 땅을 밟지 않은 건 아니었다. 찬양은 그간 몇 번이고 종수의 소식을 전해 들었고, 개중엔 그의 입국에 관한 것도 있었다. 출처의 대부분은 팀메이트이자 선배인 이규였다. 종수 휴가 나왔다는데 같이 보러 갈래? 자주 그런 제안을 받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인 적은 없었지만.

찬양은 오래도록 그날을 곱씹었다. 귀국하거든 연락해 달라던 부탁을 거절하던 최종수의 목소리와,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날에도 파르스름하고 건조하던 그의 눈동자를 기억했다. 그가 듣고자 했던 것에 대해 생각했다. 때를 놓친 다음에야 알게 된 답이 신발에 들어간 돌멩이처럼 그를 불편하게 했다. 털어내면 홀가분해질 것을 알면서 차마 그러질 못했다. 까맣게 흩어지던 머리칼, 공을 움켜쥔 길고 단단한 손가락, 높고 느긋한 포물선을 따라 토해지던 날숨. 새어드는 정오의 볕에 먼지처럼 부유하던 감각들. 최종수는 주찬양이 처음으로 가진 소망의 형태였다.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목이 탔다. 우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몰리는 시선을 알아차린 건 그즈음이었다.

농구부 2학년 걔, 체교과 2학년 걔. 키 크고 몸 좋은데 마스크까지 반반한 주찬양은 주익대의 유명 인사였다. 대단한 사건이 있었느냐면 그런 건 아니고. 키 크고 몸 좋고 얼굴 반반한 스무살 남자에게 주어지는 영광 같은 거였다.

학기가 시작되기 무섭게 숱한 고백을 받았다. 그를 남자친구 후보로 점찍은 여성의 스펙트럼이 광활한 덕이었다. 나이로는 동갑내기 신입생부터 띠동갑 복학생까지. 스타일로는 얌전한 이미지의 여자애부터 어느 과 여신 소릴 듣는 화려한 선배까지. (길게 가진 못했지만)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개중 하나와 연애도 했다. 찬양의 연애 소식은 가을 산불처럼 빠르게 캠퍼스에 번졌고, 이별 소식은 (출처는 그녀의 SNS였다) 벼락처럼 신속하게 캠퍼스에 꽂혔다. 여자친구와 헤어진 다음 날 오전. 1교시 강의를 들으러 이동 중이던 찬양이 걸음을 멈췄다. 그를 불러세운 초면의 여학생이 급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걔랑 헤어졌다길래…! 오래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라고 덧붙이는 목소리엔 과연 깊은 망설임이 묻어났다. 처음으로 보는 사람과 무슨 연애를 하겠느냐 되묻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은 아니었다. 흘긋 시간을 확인한 찬양은 큰 고민 없이 그녀의 고백을 거절했다. 미안, 연애는 아직 생각이 없어서. 바지런하게 움직이던 다리가 멈춘 건 강의실 문을 통과한 직후였다. 돌연한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오래 고민했다고? 찬양은 문 앞에 선 채 기억을 더듬었다. 이별을 고하던 여자친구의 뒤로 펼쳐졌던 밤하늘, 습관적으로 확인한 핸드폰 액정에 떠올라 있던 시간. 전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 아홉 시간이 지나가는 차였다.

아니나 다를까, 시선의 끝으로 산발적 속삭임이 날아들었다. 어, 저거 체교과 그, 하는. 개중 농구에 관심 좀 있는 치들은 종수를 알아보기도 했다. 그나 종수나 좀 움츠리는 정도로 인파에 몸을 숨길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수의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계속 서있었다간 헌팅이라도 당할 판이다. 판단을 내린 찬양이 종수의 뒤에 있는 카페를 가리켰다. 일단 커피 좀 드실래요?

“넌 해장을 커피로 해?”

연유를 잔뜩 넣은 라떼를 홀짝이던 찬양이 고개를 들었다. 분홍과 노랑이 층을 이루는 깜찍한 음료에 잠시 시선이 미쳤다. 음료의 제일 위에는 레몬 한 조각과 별사탕, 하얀 마시멜로 토끼 따위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일 년의 반 이상을 미국에서 보내는 종수는 대학로의 카페 메뉴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시즌마다 계절 음료가 쏟아져나오는 한국 프랜차이즈 카페에 무지한 그는 불행하게도 아르바이트생에게 메뉴를 추천받을 말주변마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레모네이드를 선택했다. 빈속에 카페인을 붓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신장이 이 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남성에게 압도당한 듯 멈칫한 점원은 별다른 설명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SNS 인증샷을 노리고 올 시즌 무슨 캐릭터와 콜라보를 했다는 깜찍한 외관의 음료를 맞닥트린 종수는 끔찍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레모네이드가 맞냐 묻자니 음료를 장식한 레몬의 자기주장이 너무 강렬했다. 망설이며 빨대에 입을 가져간 종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맛은 평범한 모양이었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은 종수는 곧장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연하게 카페에 따라 들어와 음료를 시키기에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둘 다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으므로 특별한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적어도 찬양은 그랬다. 종수가 어떨진 알 수 없었지만.

종수는 핸드폰을 확인하며 그가 우산을 들고 섰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느다랗게 흐르는 백색소음 위로 어슴푸레한 적막이 내깔렸다. 무심코 빨아들인 음료에서는 걸쭉한 단맛이 났다. 혓바닥에 엉기는 단맛에 빨대로 음료를 두어 차례 저었다. 얼음이 달그락대며 두 층으로 나뉘어있던 음료를 흩어놓았다.

“저 술 냄새 나요?”

불쑥 튀어나온 물음에 핸드폰을 만지작대던 종수의 시선이 들렸다. 잠시 찬양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그는 그것이 음료를 받기 전 던진 물음의 연장임을 인지했다. 어. 찬양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퍽 퉁명스러운 대꾸였건만 서운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태평한 얼굴이었고 실제 감상에도 별반 차이는 없었다. 그렇구나, 민폐겠다, 그게 다였다.

“근데 한국은 어쩐 일이세요.”

끌고 나온 슬리퍼 사이 빠끔히 튀어나온 발가락을 꿈지럭대던 찬양이 물었다. 귀여운 핑크빛 음료를 쭉 빨아들이던 종수가 눈을 찌푸렸다. 너 원래 이렇게…, 그는 말을 맺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찬양은 빤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심장 구석이 간지러웠다. 씰룩이는 안면근육을 필사적으로 통제해가며 얌전한 체 눈을 깜빡였다. 그를 휘감은 고민의 가닥들이 손에 잡힐 듯했다.

“휴가. 미국은 9월에 학기 시작하니까.”

처음 안 사실이라는 듯 얕게 탄성을 흘리자 종수의 한쪽 눈썹이 들렸다. 보기 좋은 입술이 달싹이다 소리도 없이 닫힌다.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의 짐작대로, 찬양은 미국의 학기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야, 종수는 귀국할 때마다 규를 만났고, 규는 심심찮게 같은 대학에 입학한 후배에게 함께 그를 만나러 가지 않겠냐 의사를 묻곤 했으니까. 규가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었던 건 당연히 종수가 그래도 좋다고 말했기 때문일 테고. 찬양이도 부를까? 질문을 듣는 종수의 표정을 상상했다. 무료한 낯으로 핸드폰을 만지작대던 종수가 흘끗 규를 바라보았다. 그러던지.

찬양이 자리에 한 번도 동석하지 않은 일이야 어떻든, 미국의 학기제를 모른다는 건 뻔한 거짓말이었다. 종수는 구태여 그 점을 지적하는 대신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을 집었다. 큼직한 액정의 최신 스마트폰을 한 손에 쥔 종수가 바쁘게 엄지를 움직였다. 몸을 비스듬하게 숙인 채 메시지를 보내는 모양이 어울리지 않게 아기자기했다. 당사자가 알았더라면 질색할 만한 감상을 태연히 해낸 찬양이 쪼르륵 커피를 빨았다. 액정을 보며 몇 번인가 더 손가락을 움직이던 종수가 입을 열었다. 시선은 그에게 턱없이 작아 보이는 핸드폰 액정에 못 박힌 채였다.

“규한테 연락받았어?”

뜬금없는 물음에 아니오, 하는 대답을 하기도 전 찬양의 핸드폰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발신자 정보가 떠올랐다. 핸드폰을 테이블에 올려둔 차였으므로 그건 자연히 앞자리에 앉은 종수의 눈에도 들어갔다. 이규였다. 찬양은 진동하는 핸드폰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핸드폰을 뒤집고 싶었다. 못 본 척. 모른 척. 종수가 테이블에 올려둔 그의 핸드폰 액정을 보지 못했더라면 생각한 바를 행동에 옮겼을 것이다. 그는 연락을 받는 대신 종수의 얼굴을 응시했다. 까만 홍채가 카페의 조명을 비춰 노르스름했다. 어떤 금속의 표면을 닮아 어둑한 빛을 내는 눈동자가 고요히 가라앉은 채였다. 수 분 전까지만 해도 손에 잡힐 듯 뚜렷했던 것들이 흐물흐물 녹아 형태를 잃었다. 화려한 얼굴은 잘 그린 그림 같았다.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설렘으로 간지럽던 심장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길게 반짝이는 액정에 꽂히는 시선이 집요했다. 못 본 척 시침을 떼는 건 불가능했다. 목구멍을 긁는 것들을 가까스로 삼켰다. 통화 아이콘을 당기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속이 불편했다.

어제 많이 마셨는데 잘 들어갔어? 다정한 첫마디. 네, 하고 대답할 틈도 없이 용건이 이어졌다. 그는 퍽 곤혹스러운 기색이었다. 혹시 오늘 약속이 있느냐는 물음에 찬양은 맞은편에 앉은 종수를 흘깃 바라보았다. 자연히 시선이 맞닿는다. 종수는 곧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간밤의 기억은 손상된 필름처럼 뚝뚝 끊겨 있었다. 그만치 술을 부었는데 약속은 무슨. 있던 약속도 취소해야 할 판인데요. 찬양은 자질구레한 농담을 건네는 대신 침묵을 지켰다. 규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그 틈을 채워 넣었다.

그는 금일 종수와의 약속을 망각했다. 종수와의 약속을 잊고 회식에 참여했느냐면 그런 건 아니었다. 전날 규의 과음은 제가 술을 얼마나 마시든 다음날 있을 약속을 지키지 못할 리 없다는 자기 과신에 기반한 행위였다. 실제로 그는 숙취가 심한 편이 아니었고,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 역시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새벽 세 시 반. 그를 숙취의 늪에서 건져낸 건 오랜 친구와의 약속이 아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어머니. 비몽사몽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댄 규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하나뿐인 누나가 병원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산통이라고 했다. 규보다 여섯 살이 더 많은 그녀는 이 년 전 결혼했고 임신 중인 채였다. 예정일이 이맘때였다. 이른 새벽 산통을 느낀 그녀는 즉각 산부인과로 이동했고 와중에 그녀의 남편이 친정에 연락을 넣었다. 규의 친가는 타지에 있었으므로 그의 어머니는 때마침 산부인과 가까이에 자취 중인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규야, 누나 분만실 들어갔단다. 엄마 도착할 때까지 매형이랑 같이 기다리고 있어. 종수와의 연락은 그렇게 잊혔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약속 시간, 약속 장소에 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의아함을 느낀 종수가 먼저 연락을 넣었고 그는 그제야 오늘의 약속을 떠올렸다. 그때가 오전 열 시였다. 무사히 출산했어도 약속을 취소해야 할 마당에, 그녀는 아직 진통 중이라고 했다. 규가 상황을 설명했고 종수는 수긍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갈 데가 있느냐는 규의 물음에 종수는 대수롭잖게 집에, 하고 대답했다. 부모님 여행가셨다며…. 끝을 흐리는 목소리에 죄스러운 기색이 묻어났다. 가족과 친구를 만나자고 귀국을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혼자 남겨진 셈이었다. 오랜만에 귀국한 친구를 사람 하나 없는 자취방에 덜렁 던져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고민하던 규는 곧 찬양의 존재를 떠올렸다. 종수와 만나기로 한 건 학교 근처였고, 찬양은 때마침 가까운 곳에 자취 중이었으니까. 찬양은 사정을 듣는 내내 종수의 옆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규는 그와 종수가 우연히 만나 카페에 마주 앉아 있다는 건 까맣게 모르는 기색이었다. 종수 지금 기다리고 있을 거야. 정문 앞 카페에 있다고 했는데…….

쭉 메시지를 나누던 상대가 이규였던 것 같은데, 정작 찬양과의 만남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시선을 알아차린 종수가 그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찬양은 똑바르게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종수 선배가 괜찮다고 하시면 그렇게 할게요. 간단한 안부 몇 마디를 더 나누고 통화를 종료했다.

“저희 집 오실래요?”

내뱉은 물음이 저돌적이었다. 곧바로 실수를 인지했지만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그를 바라보던 종수가 눈을 내리깔았다. 길게 늘어지는 시선으로 그림자가 졌다.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종수는 테이블에 비스듬하게 세워둔 우산을 집었다. 응. 큰 고민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찬양은 고개를 젖혀 종수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보이는 것과 달리 무던한 편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의외라는 생각은 들었다. 종수가 멀뚱멀뚱 저를 바라보는 찬양을 응시했다.

“일어나. 가자며?”

“잠깐만요.”

주섬주섬 우산이며 핸드폰을 챙겼다. 좋게 말하면 여유 있고, 나쁘게 말하면 답답한 움직임이었다. 허리를 숙인 찬양의 뒤통수로 짜증 밴 숨이 떨어졌다. 야, 하는 목소리는 언젠가 들었던 것과 비슷했다.

“나 기다리는 거 싫어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던 찬양이 고개를 들었다. 파르스름한 눈동자에 얼빠진 낯이 비쳤다. 핸드폰을 꽉 움켜쥔 손가락 마디가 얼얼했다. 종수의 얼굴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담담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종수가 다시 말했다.

“그만 기다리게 하라고.”

뭘요? 혓바닥까지 올라온 물음을 가까스로 욱여넣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던 명령조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시선이 오래도록 맞닿았다. 누구 하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찬양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종수가 등지고 선 노란 조명이 점점이 번져 눈을 아리게 했다. 입을 열었다. 오래 말하지 못한 사람처럼 꽉 잠긴 목소리였다.

깜빡. 질릴 정도로 담담한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일자로 굳게 다물렸던 입술이 웃는 듯 짧은 숨을 토해냈을 뿐이다. 하. 얇은 눈동자에 성에처럼 끼었던 무언가가 녹아 자취를 감췄다. 그날로부터 한 치도 변하지 않은 투명한 눈동자가 주찬양을 향하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최종수가 빨간 우산을 든 채 그를 재촉했다. 할 말 있잖아. 한쪽이 흠뻑 젖은 운동화를 신은 열여덟의 주찬양이 대답했다.

“네.”

네,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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