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뺨이 한 쌍인 이유
에이스 트라폴라&듀스 스페이드 드림
‘아이렌은 마치 이 세상 모든 것을 탐구하고 즐기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에이스나 듀스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영화와 공연 관람, 글쓰기, 사진 찍기, 게임, 요리와 미식, 전시회 방문, 그리고 아이돌 응원까지. 직접 몸을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웬만한 것엔 다 흥미를 보이는 아이렌의 삶은 참으로 바빴다. 저 많은 취미를 돌아가면서 즐기고, 그 와중 예습과 복습까지 착실히 하니 하루가 48시간이라도 모자라지 않겠나.
그렇기에 두 사람은 아이렌이 직접 몸을 써야 하는 취미가 아닌 이상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는다고 해도 그리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이번 취미는 조금 의외였다.
“에이스, 듀스.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 있어? 나랑 야구 보러 갈래? 야구 좋아하는 선배가 표 나눠줘서, 같이 갈 사람 찾고 있는데.”
‘갑자기 야구?’ 그 제안에 두 사람이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기쁨이 아닌 의문이었다.
자신들이 아는 바로는 아이렌은 운동과는 크게 연이 없었다. 몸치인 탓에 웬만한 스포츠는 멀리하는 편이었고, 딱히 경기를 챙겨보지도 않았지. 그런데 갑자기 야구를 보러 가자니. 아무리 표를 선물 받았다 해도 의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렌, 너 야구 룰은 알아?”
“실례되는 말을 하네, 에이스. 믿기지 않겠지만 어릴 때는 늘 야구장에 끌려갔던 몸이야.”
“정말?”
“응. 집안 어른들이 좋아했거든.”
그건 가족들이 좋아한다는 거지, 본인이랑은 관계 없는 이야기 아닌가.
에이스는 여전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듀스는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고 냅다 제안을 승낙했다.
“재미있겠네. 나는 갈래.”
“좋아. 이쪽 세계 야구장은 처음 가봐서 두근거리네. 맛있는 거 많이 팔려나?”
“아마 그렇겠지? 그럼, 우리 둘이 가는 거야?”
“음, 일단은? 그림은 관심 없다더라.”
아니, 어쩌다가 자신은 자동으로 빠지는 것처럼 된 건가.
에이스는 은근슬쩍 둘만의 시간을 노리는 듀스를 흘겨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갈래. 몇 시 경기야?”
✻ ✻ ✻
‘아이렌, 정말 우연히 표를 얻은 걸까?’
에이스는 목소리가 되어 튀어나오려는 물음을 삼킨 채 손님으로 북적이는 매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 깜빡할 새 다가온 일요일 오후. 경기 시작 1시간 전에 경기장에 도착한 세 사람은 곧장 관중석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렌, 우리 것까지 사 온 거야?”
“응, 별로 안 비싸기도 하고, 손 건강을 생각하면 이게 맞아. 직접 손뼉 치면 다음 날 너희 손바닥이 부어서 아무것도 못 할걸?”
“어, 음. 그런가?”
그러니까, 왜 그렇게 잘 아는 거야.
듀스에게 사 온 클래퍼를 나눠주며 진지하게 이유를 늘어놓는 아이렌을 본 에이스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솔직히 오늘 아침까지 ‘선물 받은 표니까 아까워서라도 보러 가자’ 정도의 마음으로 자신들에게 야구장 나들이를 권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이렌은 진심으로 야구장에 오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 선배라는 사람도, 아이렌이 이토록 관심을 보이니 표를 준 걸지도 모르고.
제 몫의 클래퍼를 받은 에이스는 살짝 손목을 흔들어 보았다. 짝짝. 플라스틱끼리 부딪치며 나는 경쾌한 소리는 확실히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힘이 있었다.
“너, 엄청 즐거워 보인다.”
“그래?”
에이스의 말에 어깨를 으쓱인 아이렌은 음료수와 과자가 들어있는 가방을 고쳐 매었다. 경기장 앞에서 이것저것 많이 사서 그럴까. 커다란 가방은 작은 움직임에도 요란한 소음을 냈다.
“뭐, 즐겁긴 해. 어린 시절 생각나서 좋네.”
“헤에, 어릴 때도 열심히 응원했나 봐?”
“글쎄. 잘 기억 안 나. 기억 나는 거라곤 야구장에 가면 늘 맛있는 걸 사줬다는 거랑, 다들 노래 부르고 뛰어놀아서 좋았다는 거지.”
과연, 경기 자체가 아니라 분위기만 즐긴 건가. 어린 시절 긍정적으로 남은 기억이 지금까지 설렘으로 이어지는 건 그리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지.
드디어 아이렌의 즐거움에 대해 조금은 이해한 에이스는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여유 좀 있는데, 어쩔까?”
“미리 들어가자. 선수들 연습하는 거 보면서 좀 기다리다 보면 금방 경기 시작하니까.”
“연습하는 것도 보게?”
“이왕 왔으니 보는 게 이득 아닌가?”
맞는 말이다. 무엇보다, 괜히 다른 곳에 한눈 팔렸다가 늦게 들어가면 자신들만 손해니까.
아이렌의 의견에 동의하는 건 듀스도 마찬가지인지, 클래퍼를 몇 번 울려보던 그는 자연스럽게 아이렌의 가방을 가져갔다.
“그럼 가자, 가방은 나 줘. 내가 들게.”
“아, 고마워. 별로 안 무거운데.”
아니. 분명 무거울 거다. 간식비가 얼마나 나왔는지 뻔히 알기도 하고, 한 번을 사양하지 않고 순순히 고맙다고 하는 걸 보면 꽤 무겁다는 거 아니겠나.
어느새 아이렌에 대해 제법 이해도가 높아진 에이스는 잘 보일 기회를 선수 친 듀스의 곁에 다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들어 줄 거면 진작 들어주지, 보여주기식이냐?”
“아예 권하지도 않은 너보다는 낫다고 보는데.”
“아니, 물어볼 틈도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무슨 소리야?”
시끄러운 인파 속. 주변에는 들리지 않게 최대한 목소리를 죽이고 시작된 설전은 오래가지 못했다. 평소 옆에서 마법약이 폭발해도 비명 한 번을 안 지르는 아이렌이, 오늘은 들뜬 목소리로 자신들을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 가자! 이왕 온 거, 홈팀이 이기면 좋겠네!”
“아, 으응.”
“크흠.”
말싸움은 언제든 할 수 있지만, 모처럼 멀리 외출한 날 아닌가. 게다가 신난 아이렌을 볼 기회는 흔치 않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언쟁을 멈춘 두 사람은 서로를 잠깐 노려본 후, 아이렌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 ✻ ✻
경기는 좋게 말하자면 무난하게, 나쁘게 말하자면 지루하게 흘러갔다.
홈팀도 원정팀도 점수를 내지 못하고 흘러가는 시간. 안타는 나와도 점수는 나오지 않는 답답한 경기.
그러나 에이스와 듀스는 전혀 지루해하지 않았다.
‘같이 안 왔으면 어쩔 뻔했나 모르겠네.’
두 사람은 자신들 사이에 앉아서 열심히 응원가를 따라부르는 아이렌을 힐끔거렸다. 미리 응원법이라도 찾아보고 온 건지, 아니면 과거 경기를 보고 다닌 게 도움이 된 건지, 금방 응원법을 익힌 아이렌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팔을 흔들었다.
아, 이 좋은 구경을 자신들만 하다니. 이래서 같은 반이라는 게 좋은 거 아니겠나. 분명 다른 이들은 아이렌의 이런 모습을 상상도 하지 못하리라. 심지어 아이렌과 아주 가까운 몇몇 선배들에게 말해도, ‘무슨 헛소리냐’라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까.
게다가 응원하다 보니 슬슬 흥이 올라 즐기고 있게 됐으니, 역시 이 제안을 받아들인 건 역시 정답 같다.
분위기에 휩쓸려 잔뜩 들뜬 두 사람은 어느새 로비에서 했던 설전도 잊고 현장을 즐겼지만, 아무래도 신은 세 사람을 평화롭게 둘 시간이 없는 모양이었다.
“응?”
이번에도 무득점으로 한 이닝이 끝나고 공수 교대를 위해 선수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중. 경기장의 커다란 전광판에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안내문이 뜬다.
지친 목을 음료로 축이던 아이렌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아, 키스타임이네.”
어느 스포츠 경기든 꼭 한번은 찾아오는 키스타임. 화면에 잡힌 사람끼리 입을 맞추면 경품을 주는 화기애애한 이벤트. 사이 좋은 연인들이면 한 번은 참여하고픈 그 시간이, 방심하던 사이 불쑥 찾아온 것이었다.
‘설마.’
마치 자신과는 하등 상관없는 이벤트라는 듯 덤덤한 아이렌과 달리, 두 소년은 귀 끝이 붉어져서 전광판을 응시한다.
자신들은 나란히 교복 차림으로 온 탓에 셋이서 한 세트인 게 티가 나니까 카메라가 비춰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하지만, 키스캠이 엉뚱한 사람들을 잡아서 웃음을 주는 변수도 흔히 있지 않던가.
아니겠지. 하지만, 혹시.
상반되는 마음으로 눈치만 보는 사이, 카메라들은 여러 사람을 비춘다.
누가 봐도 커플로 보이는 젊은 남녀, 나이가 좀 있는 부부, 어머니의 품에 안겨 경기를 보던 소녀까지.
‘역시 아무 일도 없는 건가.’ 그렇게 안심한 사이. 마지막 목표물을 찾던 카메라가 세 사람을 향했다.
“어?”
대체 무슨 기준으로 판단한 건진 알 수 없지만, 촬영자는 아이렌과 듀스를 한 쌍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이렌은 자신과 듀스가 한 화면에 들어오게 잡힌 스크린을 보고 돌처럼 굳어버렸다.
“아, 아니. 이건.”
얼어붙은 와중에도 열심히 손을 내젓는 아이렌의 몸짓에는 부끄러움과 난감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듀스의 반응은 달랐으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음에도 제게 주어진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는 그는 대담하게 아이렌의 어깨를 잡았다.
그때.
“너 미쳤냐!”
듀스의 입술이 아이렌에 닿기 전. 냅다 팔을 뻗어 경쟁자를 밀어낸 에이스는 몸을 가까이 해 화면 안에 들어왔다.
예상 밖의 난입이 흥미롭게 느껴진 걸까. 카메라는 화면을 돌리는 대신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에이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뭐야? 이게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냐고? 그건 내가 할 말이다만?! 왜 진짜 키스하려고 하는 건데, 넌?”
“내가 하든 말든!”
“아이렌은 싫다잖아!”
두 사람의 말다툼은 카메라의 마이크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세 사람의 표정을 보고 이미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어머, 어머.”
“젊구먼, 젊어~ 하하!”
아직 청춘인 학생들의 귀여운 사랑싸움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진다. 심지어 어딘가에선, 누구든 얼른 입 맞추라는 소리까지 하고 있었지.
‘아, 이런 망신이 있나.’ 기절할 정도로 부끄러워진 아이렌은 마른세수를 하더니, 말싸움 중인 둘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냥 해.”
“어?”
“아, 아이렌?”
“누구든 상관없으니, 얼른 하고 끝내. 둘 다 하던가.”
이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두 사람은 지금 가장 곤란한 이가 누구인지 깨닫고 서로를 밀어내던 손을 거두었다.
“어, 어쩔 수 없지. 그럼 볼에다 하는 거다.”
“미안, 아이렌.”
아, 사람의 볼이 양쪽이라 얼마나 다행인가.
더 상황을 질질 끌 이유가 없는 두 사람은 달아오른 아이렌의 뺨에 각각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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