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행

연습장 by 슈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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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머리가 멍한 와중에 비소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대답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다급하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낯익은 공간이다. 차가운 벽과 텅 빈 실험대, 열탕기 같은 도구들과 독들이 널려 있는 책상과 책장까지. 궁의 자신의 실험체다. 하지만 비소가 쉬던 의자나, 화로가 없는 걸 확인한 민화인은 손가락을 한 번 뒤로 꺽어본다. 아프다. 왼팔을 움직여 본다. 너무나도 멀쩡하게 잘 움직인다. 그는 책장에서 자신의 실험 일지들을 꺼내서 날짜들을 확인한다. 자신이 궁에서 머물던 그 시기다. 비소를 만나기 전 그 시점.

꿈인가?

방에서 나와 시비들을 불러서 말을 걸어 보고 복도를 지나고, 정원까지 살펴보고 그는 이것이 뭔가의 환상이나, 진법 혹은 꿈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였다. 그러면 정말로 시간이라도 거슬러 왔단 말인가? 어째서? 마지막으로, 비소랑 뭘 했지? 기억을 더듬어 가보지만 기억이 흐릿하기 그지 없다. 민화인은 비소를 떠올려 보았다. 새하얀 백발과 쉴세 없이 떠들던 목소리, 춤 출 때마다 즐거워하던 모습까지. 지금도 그 모습처럼 중원 어딘가에 있겠지.

그렇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복도 한가운데에서 뭘 그리 정신을 놓고 있는거야?”

“리여원?”

건강해 보이는군. 당연한가? 비소가 궁에 끌려오게 된 이유는 그에게 있지 않을까. 비소 정도의 체질이라면 그의 인형들 시야에 걸렸고 그래서 오게 된거라면?

“혹시 만불독침이나 그와 비슷한 경지, 체질에 대한 소문 같은 건 못 들어봤습니까?”

“만불독침이 어디 개 이름이냐?”

“모르면 됐습니다.”

그러보니 비소를 만났을 때 계절이 겨울쯤이었던가?

“혹시 지금 계절이 어떻게 됩니까?”

“연구실에만 처박혀 있더니 드디어 맛이 갔나보지?”

“제 머리 멀쩡하니 걱정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여름이라 더위 먹었나보네?”

“여름이었군요.”

그렇다면 기다려야겠지. 올 겨울인지, 내년 겨울인지 알 수 없지만 기다리다보면 그는 오겠지. 아니면 팔이 멀쩡할 때 궁에서 탈출해서 그를 만나러 갈까 싶기도 했지만 궁주가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테니 그만 두기로 했다. 짐을 달고 비소를 만날 순 없지 않는가. 그리하여 민화인은 다시 궁에서 살기 시작했다. 실험, 실험, 실험, 날짜를 세어가며 그는 추워지기를 기다렸다. 혹시 꼬일까봐 리여원한테도 뭔가 더 말하는 것도 하지 않고 충실하게 실험을 이어간다. 마치 아무도 없는 무대에서 일인극 따위를 하고 있는 것만 같다. 비쩍 말라 비틀어진 정신으로 기다렸다. 실험대 위에 올려지는 단역과도 같은 실험체들을 넘기는 하루, 하루가 쌓여간다.

“아.”

그렇게 하늘에서 첫눈이 내린 날 그는 시비들에게 말하여 화로를 준비한지 몇 일이 지나서 실험대 위 눕혀지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민화인은 바짝 말라 버린 목구멍으로 겨우 소리를 냈다. 아직 약기운 탓에 일어나지 못한 비소를 보면서 생각한다. 자신을 기억 못하면 어쩌지? 그렇다면 자신은, 그를 포기할 수 있나? 찰나 같은 망설임. 하지만 민화인은 그 입을 벌리고 독을 밀어넣는다.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자신은 그가 보고 싶고, 그가 다시 한 번 그때처럼 손을 뻗어 줬으면 한다. 기억 못한다고 해도 이 성에서 그는 도망치지 못할테니까 적어도 자신의 눈 앞에 계속 있겠지. 아직 반응이 없는 그를 보면서 그 옛날에 했던 대사를 그대로 다시 말해본다.

“별 반응이 없군. 숨이 끊어지면 바로 치워야지.”

살짝 비소를 향해 허리를 숙인다. 움찔거리는 손가락이 보인다. 이윽고 그가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멱살을 잡는다. 몇 십 번이고 회상하던 그 붉은 눈동자에 깃든 그리움을 확인하고 두 팔을 뻗어 그 몸을 안아 들었다.

“비소.”

“민화인.”

지금까지는 일인극이었으니 이젠 이인극인가 하는 쓸데없는 농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해야겠지만 지금은 잠시 그런 생각은 그만하고 제 품에 안겨 있는 이의 체온을 즐기기로 했다.

“비소, 춤춰주세요.”

“나 아직 팔다리 저린데?”

“그럼, 노래라도 불러주세요.”

품에 안겨서 작게 웃는 몸의 떨림마저도 사랑스러워서 웃음만이 나온다. 앞으로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은 그리운 이를 끌어안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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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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