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따라 나견이 유난히 마음에 걸린다. 하도 단독행동을 많이 해서 그러느냐 하면, 부정하진 않겠다. 시작은 며칠 전의 임무에서 복귀한 후부터였다. 며칠 전의 임무란, 동서쪽의 마을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일이었다. 사건을 일으킨 조직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첩보가 있어 기사를 파견한 것이었다. 이런 일에 보통 기사급을 보내는 경우는 없지만
*움짤 트레틀 사용
저 칙칙한 모자에 풀빛 머리카락. 아주 익숙한 윤곽이다. "어, 벌써 와 있었네." "별로 안 기다렸습니다." 커피를 두 손에 들고 기다리던 시간은 길었는지 짧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것보다도 아메리카노 한 잔을 건네자 자연스럽게 받는 투박한 손이 더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을 그리 열심히 하는지 곳곳에 굳은 살이 보인다. "그럼 갈까." "네." 이
요즘따라 악몽을 자주 꾼다. 아무리 자주 꿔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집에 나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가 하면, 언제는 얼굴을 반쯤 그을려진 나진이 나에게 정말 복수할 생각이 있긴 한거냐며 질책하고 저주했다. 나는 그래 마땅했다. 아직 이 손으로 내 숨통을 끊지 않은 이유는 너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한 복수. 그것 하나뿐이다. 이번 꿈에도 나
"이번 달 분은 여기 있다." 책 세 권이 눈앞에 내밀어졌다. 소설책 두 권과 여행 수기 한 권이다. 살짝 헤진 책의 모서리가 다른 사람들이 여럿 빌렸음을 짐작하게 했다. 나견은 익숙하다는 듯 양손으로 책들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이 책 보따리를 친히 가져다준 건 기사, 담청색 기린 지우스다. 큰 사건들이 마무리되었다고 해도 아직 한창 바쁠 텐데. 그
"나진, 여기 앉아서 뭐해?" 익숙한 목소리다.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니 마르샤가 바로 옆에 우뚝 서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지만 기대고 있던 나무의 녹음 덕에 눈부시지 않았다. "무슨 할 얘기라도 있어?" "아, 뭐, 음..." 모처럼의 휴식 시간이라서 혼자 있고 싶었다. 다른 애들에게서 좀 떨어진 곳에서 숨 좀 돌리나 했는데. 말동무라도 필요했던
불덩이처럼 뜨겁고도 새빨간 모래가 뱃속에서 역류한다. 흐트러졌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아지고 모래는 화약이 되어 머릿속을 달구고 헤집어놓는다. 지금, 내가 해야할 일. 그것만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저 남자의 모든 것을 부순다. 그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그런 나를 보고 그가 넌지시 제안해온다. 우리는 서로를 적대시하지 않아도 된다. 네 소원대로 죽어주겠다
삶의 아주 오랜, 어떤 것이 먼저인지도 모를 기억들. 그 뿌리부터 우린 언제나 함께였다. 둘이서 손을 맞잡고 어디든 갔고, 무엇이든 함께 했다. 배고프면 산에 올라 식물의 뿌리를 캐 먹다가 물가를 찾아 목을 축였다. 날이 추워지면 땔감을 찾아 불을 피웠고, 심심하면 나무 사이를 쏘다니며 서로를 쫓아서 놀았다. 넓은 산중을 뛰놀면서도 가는 발걸음이 같아 마
*아래는 쓰면서 들은 음악 링크 https://youtu.be/AsKETdR9UZ4?si=3g5waLqj52fwRk1X 나견은 지금 동대륙의 한 작은 마을에 있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벚꽃나무가 만개하여 절경이었다. 밤이 어둑해졌지만 마을은 조명 축제가 한창이었다. 동대륙 풍의 등 안에 촛불을 키면 그 빛이 주변을 밝히며 아른거렸다
나견이 죽었다. 나진이 견습 기사가 되어 떠난 날, 나견은 마을 사람의 손에 죽었다. 모험가를 꿈꾸던 그가 짐을 모두 챙기고 설레는 마음으로 현관을 열었을 때, 평소 쌍둥이에게 불만이 많던 덩치 큰 사내가 그를 덮쳤고, 나견은 저항할 틈도 없이 당하고 말았다. 타인에게 쌀쌀맞게 구는 주제에 특출나게 강한 동생과 화재 사건의 범인인 형. 특히 나진에게 심한
231211 *이어지지 않는 단편 두 편 *견지우cp 견용cp 약 와견 진견 1. 정찰이 한창인 시기, 인원의 절반이 흩어진 숙소는 평소보다 비어있다. 그믐의 밤이다. 숲 속의 거처는 풀무치가 우는 소리나 밤바람 특유의 숲소리 하나 없이 칠흑 속에 거하여 조용히 그늘에 숨어 망을 보는 견습기사들을 제외한다면 보이지 않는 비탄이 모든 소음을 삼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