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전력 2천 자

[준쫑] 단문

벨소리, 구름, 키스

최종수가 개별 벨소리를 설정해 둔 사람이 다섯 명 있다. 그 중 둘은 부모님, 둘은 농구 관계자, 나머지 하나는 저다.

벨소리가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나 액정부터 확인한 최종수는 전화 좀 받고 올게, 같은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굳이 액정을 보여주고 갔다. 엄마 전화는 받아야지. 성준수는 혼자 남은 자리에서 어울리지 않는 재즈 음악을 들으며 초코라떼만 쪽쪽 빨았다.

비자 관련으로 확인할 게 있어 입국할 거라는 말을 들은 게 열흘 전이다. 오는 김에 건강 검진을 받아야 해서 최세종의 도움으로 일정을 빠듯하게 잡았다고 했다. 그 두 개만 해결하면 자유 시간인데 검사 일정이 자꾸 바뀌어서 출국 전날까지도 병원에 가야 한다는 게 불만이었는지 입이 댓발 나온 최종수를 어르고 달래느라 애를 먹진 않았다. 그냥 불평 좀 들어주고 맛있는 걸 입에 넣어주고 나란히 앉아서 손을 잡아주면 해결될 일이었다. 지금은 그 중 두 번째를 실행하던 참이다. 에타에서 추천 받은 타르트 가게였는데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최종수는 세 번째 타르트를 먹고 나서 카운터로 나가더니 선물용 한 박스를 추가로 결제했다. 엄마랑 같이 먹고 싶어.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다. 그의 발언에 의하면 이런 디저트 취향은 모두 그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으므로.

사실대로 말하자면 성준수는 지금 여기서 느긋하게 앉아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일이 마감인 과제를 절반밖에 하지 못했고, 또 하필 내일 있을 토론 수업의 참고 자료도 모아야 했다. 일단 모으기만 해도 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라던 동기의 말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도 미룬 이유는 당연하게도 최종수의 출국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화로 입국 소식을 들었을 땐 각자 할 일 하다가 시간 되면 만나고 안 되면 말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들어온 놈의 얼굴을 보니 자고 일어나도 보고 싶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일을 미루는 게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주는지 알 사람은 알 텐데 그 스트레스마저도 저 얼굴을 목도하면 잊혀지긴 했다. 헤어지만 귀신같이 살아나 두통을 유발하곤 했지만 그걸 알면서도 부득불 이 얼굴을 보러 나온 제 선택에 책임이 있다. 고작 이 타르트 몇 개를 먹으러 여기까지 온 건데도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허락한다면 리스트업 해두었던 다른 가게도 같이 가 보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다.

사랑이 대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느냐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그건 아마 저보다는 제 성질을 알고 있는 다른 놈들이 더 많이 할 것이다.

“야. 밖에 눈 와.”

맞은편에 앉는 최종수의 머리 위에도 눈이 쌓여있었다. 털어내기 전에 녹아 없어지는 바람에 손을 대진 않았지만 시선이 자연스레 창가로 옮겨간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법 어둑하길래 비라도 오는 건가 했는데 아니었다. 어중간한 골목 안에 있는 카페라 근처에 편의점도 없고, 카페에선 여분의 우산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 않다. 창밖을 보던 최종수와 눈이 마주쳤다. 아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터다.

엄마가 자꾸 누구 만나냐고 물어봐. 언제 말해? 너 한국 들어오고 나 프로 되면. 어차피 그때도 사귀고 있을 건데 왜 기다려? 나 아직 대학생이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아무래도 이 자식은 꼬치꼬치 캐묻는 버릇을 고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성준수는 바닥난 초코라떼를 옆으로 치우고 턱을 괴었다.

자기 입에 풀칠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뭔 인사를 드려. 그럼 언제 인사할 건데? …… 나 프로 되면. 왜? 그때쯤 되면 너 하나 정도는 건사할 수 있잖아. 네가 나를 왜 건사해? 내가 너보다 연봉 높아. 아직 받지도 않으면서 왜 깝치지? 아니, 생각을 해 봐. 내가 너보다 먼저 될 건데 당연히 더 높겠지. 안 그래?

안 그래는 무슨 얼어죽을. 성준수는 입을 다물고 맞은편을 쳐다보았다. 이겼다고 생각하는 건지 최종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아, 키스하고 싶다. 밖에서 만나는 게 싫은 건 아닌데 뭔가를 하고 싶을 때 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어 불편하다. 그렇다고 집에 데려가자니 할 짓이 하나밖에 없어서 별로 내키지 않았다. 애당초 건강 검진 받는다고 온 놈을 육체적으로 괴롭히는 건 못 할 짓 같았다.

“눈 그치면 나갈래.”

“어디 가게.”

“비밀이야. 너는 그냥 입 다물고 따라오기만 하면 돼.”

통보하듯 말을 던진 최종수는 곧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추측키로는 다음 행선지를 고르는 듯했다. 굳이 방해할 마음이 들지 않아서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창밖을 구경한다. 눈발이 점점 거세어지는 와중에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이 저마다 후드를 뒤집어 쓰거나 우산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움직였다. 지금 나가면 저희도 저 꼴이 될 것이다. 종종걸음으로 움직이는 최종수를 상상하자 웃음이 터졌다.

뭐야? 왜 웃어? 누가 걷다가 미끄러질 뻔해서. 안 미끄러졌어? 어. 코어 좋네. 그러게.

또 조용해진 틈새로 재즈 음악이 밀려왔다. 공기는 따뜻하고, 자리도 편하고, 음식도 괜찮고, 눈앞에는 애인도 있다. 성준수는 잠시 눈을 감으며 누가 됐든 벨소리만 울리지 않게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전화가 아니라면 최종수는 무조건 받지 않을 테고, 그러면 이 순간을 방해할 수 있는 요소는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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