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번호 12
1회차, 헤인 님
뚝뚝 흐르며 천국 앞에 서 본 적 있나요. 나는 오차적 사랑으로 태어나 거세당한 사슴을 알아요. 그는 잘린 뿔로 연인의 부른 옆구리를 치받고 빨간 약속을 받아먹는 습관을 가졌어요. 생의 고열은 어쩜 이렇게 뜨거워요? 내가 기다리던 것이 진정 맞나요? 연인의 텅 빈 눈동자는 어쩜 이렇게 나를 바라봐요? 우리 똑같은 것을 기다리고 있었잖아. 이번 생에서는 케케묵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말자고 두 혀를 질질 끌었다. 천장의 필라멘트가 깜빡거리는 건 누군가 뒤집힌 우산을 들고 인간의 마음을 흉내 내기 때문일까요. 뱀의 비늘이 치밀하게 누워 아름다워질 때 두 번 없음을 객혈한다. 지상의 도로는 마음의 토사물로 뒤덮여 가요. 이제는 미끄러지지 않을 용기가 없죠. 미끄러져 태어난 이력을 부정하고 싶었다. 연인들이 나프탈렌 가루를 뒤집어쓴다. 서로가 산 사람의 증거인데 장례를 치르는 용기. 어쩜 나를 바라보지 않죠? 야맹증이라고 했던가. 아니, 실어증이다. 더 이상 말이 없는 눈 짓물러 사체 냄새를 풍긴다. 쌓아 올린 거즈는 유령의 산등성이. 여전히 발 디딜 곳 없음. 평화의 단비가 살아 꿈트럭거리는 고향. 그런 게 존재했다면 넌 뿔을 자르지 않았다. 하나뿐인 심장과 광기로 재발하는 무덤들. 투명한 실린더 속 부패한 사랑이 태초의 재앙을 빨아당긴다. 연인의 악취는 매혹적입니다. 눈을 맞추고 등을 말아요. 없는 것들을 모아 힘껏 기어요. 벌레의 졸렬함을 용서해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살고 싶었다. 주사침을 뜯어 삼키고 연인의 역사를 부정한다. 불가해의 잔혹사만을 건설하는 세상에서 허물없는 영혼으로 너와 두 번 살아남고 싶지 않다. 차가운 침대에 나란히 누워 가역적인 사랑을 꿈꾸는 일이 최대치의 불행이 되어 눈꺼풀을 부풀린다. 터질 것 같아. 머지않았어. 너 또 피 흘리고 있어? 누가 너의 생애를 칼질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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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궁금해하는 해마
나와 연인. 청자는 누구이고 화자는 누구인지 분명하면서도 흐릿한 시라고 생각해요. '시'라는 형태를 생각했을 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시라서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 번 읽었어요. 사람, 사랑, 삶. 이 셋이 뒤섞여 어그러지는 세계와 그 세계 속의 관계를 쓴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봐요. 특히 [지상의 도로는 마음의 토사물로 뒤덮여 가요 (…) 연인들이 나프탈렌 가루를 뒤집어 쓴다] 이 부분이 살아가면서 겪는 관계, 그 속에서 겪는 감정들이 정형화되고 흔해짐으로써 언듯 방부제를 쓴 것처럼, 길거리에 쏟아진 토사물처럼,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여겨지게 되는 것을 표현한 것 같아 무척이나 인상 깊었어요.
수집하는 나비
하나의 독백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문장의 유려함에 경탄하게 되는데, 시라는 프레임을 씌워두고 보면 어렵게 느껴지는 시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제 작품이 구체적인 선례와 과정이 있는 장르로 명해지는 건 조금 꺼려지기도 해요. ㅋㅋㅋ 다들 시는 느끼는 거라고 하던데 이렇게 긴 시를 보면 너무 자연스럽게 해석하려고 드는 습관이 있어요. 처음엔 사슴과 동일시 되는 존재가 '나'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잘린 뿔을 가진 이는 연인이더라고요. 나의 연인은 잘린 뿔을 가졌고, 눈동자가 텅 비었고, 나를 바라보지 않고, 사체의 악취가 납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와 함께 해요. 이번 생을 그와 함께 끝내고 싶어해요. 무덤적으로 정말 선명하고 강렬한 사랑의 메시지가 느껴졌습니다. 처음엔 빨강의 색채 이미지가 강했는데 전개가 될수록 불 꺼진 천장 아래 검고 짙푸른 방에서 겨우 흰 빛을 받는 두 사람이 떠올랐어요. 뚝뚝 흐르며, 사랑, 빨간 약속, 고열 같은 단어가 쌓은 시의 색감은 천장의 필라멘트가 등장하며 완전히 뒤집히는 것 같아요. 구체적이고 복잡한 시라 읽는 맛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시를 쓸 때 과도한 한자어 남용을 지양해야 한다고 배워서 중간에 턱턱 걸리는 걸 느끼기도 했어요. ㅋㅋㅋ 그 한자어를 풀어쓸 수 있다면 다음엔 활용해보셔도 좋을 듯 해요. 아, 그리고 왜 하필 12인지 궁금했습니다!
용기있는 유니콘
사랑이 세상이 되어 통증으로 덮인다면 이 둘의 올해에는 눈 말고 나프탈렌 가루가 내릴 거예요. 타이레놀 같은 걸 원했던 것 같은데……. 서로를 살리려는 행위가 전부 서로를 죽이는 행위가 될 것이고 부정하고 싶은 어떤 병증은 감정을 뱀으로 묶고 서너 마리의 사슴의 눈에서는 단 한 번의 눈물이 흐른 적 없는데 화자는 흘러가면서도 천국 앞에 서고 녹아가고 기어가고 결국 허물있는 영혼으로 한 번 죽어 그 입구에서 그간 쌓아온 흰 거즈 갈지 못한 전구 둥근 무덤 위에 덮인 천 혹은 그 둘 위에 덮였을지도 모르는 천을 떠올리게 합니다. 처음에 한 번을 잘라 읽고 다시 이어 읽고 사용된 소재들의 묶음을 다시 보고 다시 무슨 말이었는지 생각하고 곱씹다 보니 칼질된 청자와 제가 같이 들려 슬퍼졌습니다. 해삐디 님께서는 다양한 목소리를 들으신 것 같아서 너무 신기했는데, 저는 헤인 님의 이 시 속의 모든 목소리가 여성의 것으로 들렸어요! 순간적으로 꺾이며 -ㄴ다, 로 끝나는 문장들에서 냉혹하리만큼 단호하고 설명적인 병원의 냄새가 났습니다. 그래서 섬뜩하고 좋았어요. 혼자 극장에서 혼자 배우의 혼자 음악극을 보는 기분이었어요. 추신 실은 청자가 부럽습니다. 누군가 생애를 걱정해 주는 것은 무슨 기분인가요?
HBD 창작자
첫 번째 문장이 뚝뚝 흘리며, 가 아니라 뚝뚝 흐르며, 라는 것부터 강렬합니다. 분명 청자에게 묻고 있는데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취급하고 있네요. 이후로 전개되는 글은 파괴적이면서도 어쩐지 서글픕니다. 저는 이 문장이 가장 좋았어요. '지상의 도로는 마음의 토사물로 뒤덮여 가요. 이제는 미끄러지지 않을 용기가 없죠.' 개인적으로 어미가 통일되지 않는 시는 여기저기 마구 산발적으로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여러 목소리가 다성적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통상적으로 그런 시들은 속도감 있게 읽게 됩니다만, 특이하게도 헤인 님의 시는 경어 따로 경어가 아닌 문장 따로 연결해서 읽어 보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한 시에서 두 작품이나 읽힌다는 게 신기했답니다. '누가 너의 생애를 칼질했어?' 라고 물어보면서 끝내는 것도 좋았어요. 어디서 작품을 끊어내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도 작가의 미덕이지요. 마감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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