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hay
총 13개의 포스트
그 말을 듣고 에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같이 웃어야 하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울어야 할 일도 아닌 것 같았다. 화를 내야 하나? 에나는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눈썹과 입꼬리가 제멋대로 흔들려 읽어내기 힘든 표정이 되었다. 처음엔 깔깔대며 웃던 남학생들도 에나의 반응을 보고는 점점 당황한 표정
침대 위에 요이사키 카나데가 아무렇게나 누워 있다. 한쪽 발은 의자에 걸치고, 다른 한 쪽은 침대 밖으로 삐져나온 채로. 컴퓨터 화면 불빛에 반사되어 푸르게 빛나는 머리카락 밑에는 악보와 메모지가 몇 겹이고 쌓여 있다. 카나데의 침대가 카나데의 체구에 비해 큰 편이기는 해도, 쉴 새 없이 쌓이는 종이뭉치들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작다. 책상 위에 놓지 못한
요이사키 카나데의 집에는 드나드는 이가 많지 않다. 생필품과 컵라면 박스를 배달하는 택배 기사를 제외하면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외에는 현관문이 열리는 일조차 없었다. 카나데는 적막한 집이 익숙했다. 아니,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져야 했다. 아버지가 쓰러지던 그 시점부터 카나데는 갑작스레 대화할 기회를 빼앗겼다. 머뭇거리며 뱉은 "좋은 아침이야"나
아사히나 마후유가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학교는 끝났고 예비교 활동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애매한 시간대에, 조금 들뜬 발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걷는다. 예쁘게 묶인 보라색 머리카락 뒤에서 소곤대는 목소리가 들린다. "와, 아사히나 선배다. 어디 가시는 거지?" "당연히 공부하러 가는 거겠지. 그 성적을 유지하려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걸." "하긴 그렇겠지?
"마후유, 마후유! 이번 글쓰기 숙제 내용 뭘로 할지 정했어?" "글쎄...아직 못 정했어. 주제가 가족이라서 그런가 고민이 되네." "그치? 마후유도 그렇지? 나도 도대체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 "넌 매번 그러잖아. 어쩌다 한 번 고민하는 아사히나랑은 다르지." "너무하네, 고민할 수도 있지!" 마후유는 피식 웃었다. 숙제의 내용을 그렇게까지 고민할
퇴근하는 마후유의 발 아래로 마른 낙엽이 밟혔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낙엽은 공중으로 흩어졌다. 바람이 데려온 한기가 코트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마후유는 바르르 몸을 떨었다. 아직 가을이라지만 날씨가 추웠다. 괜스레 따스함이 고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덥혀줄 난로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 따스하고 다정하고, 항상 내 곁에 있어주는 그런
살다 보면 가끔은 세상을 원망하며 한없이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내 감정과는 상관없이 아침이 되면 불그스름한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 끔찍이도 보기 싫어서, 시간이 흐르지 않기를 바라는 때도 있다. 물론 세상은 그리 너그럽지 않다. 시간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다른 형태로 바뀌어 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그런 흐름을 조금이나마 거스르
저녁거리를 고르느라 바쁜 주부들 사이로 짙은 보랏빛이 자연스레 섞여든다. 마후유는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무심한 얼굴로 장바구니를 집어들었다. 옆을 스치는 사람들이 흘끔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명문 여학교 미야마스자카 여학원 학생이 이 시간에 여기서 장을 본다고? 진짜? 그런 노골적인 시선이 쏟아진다. 순간 마후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옷을 갈아입을걸
아사히나 마후유는 무감각한 인간이다. 그녀가 짓는 미소는 아름답지만 텅 비어 있다. 그 어떤 것을 보더라도,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마후유는 웃음을 꾸며낸다. 그녀의 주변인이 그녀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기에 마후유는 제 눈길을 끄는 한 소녀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제대로 안 먹어 아담한 체구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스치듯 기억해둔 말을 카나데는 몇 번이나 곱씹고 있었다. 카나데가 태어난 때보다 몇 세기는 일찍 만들어진 말이지만, 그 말은 놀랍도록 잘 맞아떨어졌다. 시간의 흐름은 감정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기나긴 시간 속에서 감정이란 찰나의 일에 불과했다. 요이사키 카나데는 지금 아주 의외의 방법
해가 쨍쨍한 7월이었다. 이글거리는 태양빛만큼 식물들은 줄기차게 꽃을 피웠다. 짙은 주황빛을 띠는 능소화, 수많은 씨앗을 품고 노란 꽃잎을 활짝 펼친 해바라기, 하얗고 청초한 백합. 꽃집에도 별의별 꽃이 다 들어와 있었다. 햇빛의 은혜를 듬뿍 받는 7월은 꽃들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계절임을 꽃집 주인은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꽃집에 소녀가 들어왔을 때 자
"나, 내일 접속 못 해." "뭐? 너 시험기간 때문에 한참 동안 접속 못 했잖아!" "워워, 진정해, 에나. 마후유는 할 일이 많잖아." 갑작스런 마후유의 접속 불가 선언은 25시 멤버들에게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대개는 시험 기간, 가끔은 동아리 활동. 혹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다. "학교에서 여름 학습 캠프를 한대. 나도 참
흔히들 봄은 시작과 생동의 계절이라고들 한다. 겨우내 죽은 듯이 조용했던 나무에 새순이 움트고, 평소 눈길 한 번 줄 일 없던 화단에서는 푸릇하고 여린 싹이 봄비로 촉촉해진 흙을 뚫고 나온다. 예전보다 자연과 함께하는 일이 적어졌다곤 해도 사람들은 생각보다 사소한 것에서 봄을 느끼곤 한다. 단골 카페에서 한정으로 나오는 딸기 파르페라든가, 찬 기운만 가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