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G(카디그)

솔트 인 원더랜드

S님 커미션 작업물 | 소금목마 리부트 시점(카디그)

115호 by 리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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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퍼드 “솔트” 포스터는 처음으로 손안에 쥔 이 망할 약을 먹을지 말지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건 흰색이었고 모양은 양옆으로 긴 장방형의 조그만 알약이었다. 알약들은 처방 약들이 늘 그렇듯이 속이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오렌지색의 원통에 우르르 들어있었으며 흰 안전 뚜껑으로 닫혀 있었다. 원통의 옆면에 붙은 스티커에는 약의 이름인 ‘스틸녹트(Stilnoct)’와 투약 시 주의 사항 같은 것이 적혀 있었으나, 그딴 것들은 솔트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언젠가의 기억이다. 이것들이 ‘잠을 자게’ 해준다고 의사가 지껄였던,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과거의 일들.

이 약을 처방받았을 때, 솔트는 이것들을 그대로 어딘가에 처박은 채 내버려두었고 잊어버렸다. 지금까지 내내 수면장애에 시달리면서도 약을 먹지 않은 것에 대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현대의학에 대한 반항심이라든가, 자신은 약 따위에 의존하지 않겠다거나 하는, 그런 흔하고 거창한 이유도 없었다. 그냥 솔트는 잊어버렸고 그게 다였다.

그렇게 스틸녹트는 솔트의 온갖 잡동사니와 함께 영원히 썩다가 버려질 운명이었지만, 어느 날 솔트가 이 약을 기억해 냈다. 솔트는 약을 찾기 위해 집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노력이 얼마나 필사적이었던지 집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다. 그러나 그 어디서도 약을 찾아내지 못한 솔트는 마침내 ‘약 저장 선반’ 안에서, 그러니까 대충 약물이라면 으레 있어야 할 지극히 합당하고 별 수고롭지도 않은 곳에서 수면제를 찾아냈다. 탈력감이 동반된 자괴감으로 조금 괴로워해 주다가, 수면제를 들고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것도 삼십 분. 드디어 결심하고는 한 번 열어보려는데 뚜껑이 덜걱거리면서 안 열렸다.

“씨발 진짜…….”

안전 뚜껑은 함부로 약을 먹어서는 안 될 어린이를 위해 개발되었다. 그 결과 솔트가 유달리 안 열리는 안전 뚜껑 때문에 약을 못 꺼내는 사태가 발생했다. 무언가를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솔트는 대개 총을 들이댔고 그러면 문제가 사라지거나 해결되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어린이용 안전 뚜껑은 총을 들이댄다고 벌벌 떨거나 무서워하지 않는 법이었다. 솔트는 이 하얀 뚜껑에 무력감을 느꼈고 당연히 그 치욕적인 사실을 자동으로 부인한 뒤 자신이 무력감을 느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솔트가 이렇게 필사적인 이유는 별거 없었다. 지금이 잘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새벽 한 시. 잠들기 좋은 시간이라는 데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솔트는 ‘그 참사’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악몽을 꾸느라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이제는 밤이 두려웠고 잠은 예정된 악몽으로 항상 직행했다. 그러니 솔트는 자신이 약을 먹기에 적합하고 합당한 어른이라는 걸 증명해야 했다. 그것도 지금 당장.

악몽의 내용은 항상 같았다. 솔트는 어떤 건물 안에 있었고 혼자가 아니었다. 동료들과 함께 임무를 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약한 수면장애가 있었던 솔트는 대개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으나, 임무가 거의 끝나고 철수하는 과정에서 약간 방심했다. 솔트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고 그것도 아주 우스꽝스럽게 바닥에 철퍽 엎어졌다. 이건 오 년 내내 놀려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였고, 술자리 때마다 취한 동료가 흉내 낼 게 틀림없었으므로 아주 절망적이었다. 쪽팔려서 잠시 고개를 들지 못했던 솔트는 동료들의 낄낄거림을 예상하며 겨우 일어서려 했다.

그리고 솔트는 ‘그들’을 보았다.

‘그들’은 눈이 스무 개쯤 달리고 여덟 개의 다리로 움직이는 괴물이었다. 넘어진 솔트 대신 먼저 철수하기 시작한 대원들은 ‘그들’과 눈이 마주쳤고, 즉각적으로 잡아먹히기 시작했다. 솔트는 어둠 속에 있었고 야간투시경으로 그 광경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동료들은 비명을 질렀고 버둥거렸으나 이빨들은 그들의 군장과 뼈와 살을 무자비하게 으스러뜨리며 인간들을 고기 다지듯이 집어삼켰다. 솔트는 모두가 잡아먹히고 ‘그들’이 현장에서 사라지기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참상을 바라봐야만 했다.

그래도 솔트는 운이 좋았다. 넘어졌고 그래서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리고 넘어졌기 때문에 어둠 속에 남겨졌고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그게 운이 좋은 것이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나고 솔트는 본부의 수색 끝에 구조되었는데, 그 당시 솔트는 야간투시경을 쓴 채 총을 끌어안고 아이처럼 웅크린 채로 발견되었다.

군은 ‘눈과 다리가 몹시 많은 괴물이 동료들을 잡아먹었다’고 주장하는 불쌍한 미치광이를 즉각 제대시켰다. 눈과 다리가 많은 괴물들이 동료들에게 한 것만큼이나 솔트에겐 무자비한 조치였다. 그래도 그렇게 하는 편이 모두에게 좋았을 것이다. 이제 실업자가 된 솔트는 낡은 집에 터덜터덜 들어가는 것까지가 악몽의 줄거리다.

여기서 끝이라면 참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악몽이 아니라 실제로 옛날에 벌어진 일이었다. 차라리 이게 전부 픽션이고 솔트는 그저 매일 밤 말도 안 되는 가상의 악몽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거라면 차라리 기분이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 일련의 사건들은 솔트가 겪은 현실 그 자체였다. 솔트는 아마도 미치지 않았고 아마도 동료들은 눈과 다리가 많은 괴물들에게 잔인하고 참혹하게 잡아먹혔고 아마도 솔트는 겁쟁이 같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동료들을 방관한 게 전부 실제로 벌어졌던 일일 것이다. 솔트가 진짜로 미친 게 아니라면 그건 현실일 것이다. 악몽은 현실을 촬영한 뇌가 자꾸 틀어주는 리플레이에 불과했다.

솔트는 매일매일 악몽을 꿨고 매일매일 못 잤다. 그러던 어느 날 솔트는 한계에 도달했다. 악몽을 그만 꿀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아넘길 것이다. 악마도 쓸데없는 선물 교환식 같은 것을 하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다행히도 솔트에겐 먼 옛날 받아둔 현대의학의 산물이 있었고 그게 바로 지금. 이 스틸녹트였다. 오늘은 그냥 잘 것이다. 그냥 잔다는 것은, 그냥 잔다는 뜻이다. 아무 악몽도 없이, 꿈도 없이, 그냥 깊이 푹 자는 것. 그날 이후 솔트에게 한 번도 허락되지 않은 사치를 부릴 것이었다.

불굴의 의지로 씨름한 끝에 솔트에게는 두 가지 일이 벌어졌다. 좋은 일로는 드디어 뚜껑이 열렸다. 나쁜 일로는, 그러다 플라스틱병을 놓쳤고 그게 변기에 빠졌다. 와르르 쏟아진 수면제는, 솔트가 대충 관리해서 별로 위생적이지는 않은 변기에 천천히 가라앉았다.

악마에게도 영혼을 팔 각오였던 솔트는 그에 준하는 일을 하는 대신, 변기 물을 그냥 내려버렸다.

솔트는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스틸녹트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고함을 지르거나 뭔갈 부수거나 분노로 날뛰는 일은 없었다. 솔트는 그저 침묵했다. 솔트는 갑자기 담배가 그리워졌다. 아까 피우다 들어왔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어제 사놓은 담배는 한 보루다.

솔트는 담배 두 갑을 꺼냈고 옷을 대충 주워 입었다. 이미 하루 종일 두 갑쯤 피워놨지만 거기서 두 갑을 더 피울 것이다. 앉은자리에서. 지금은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고 폐암으로 인한 자살은 제법 괜찮게 들렸다. 그게 바로 솔트가 새벽 한 시 사십 분에 정원에 나와 담배만 뻑뻑 피우고 있는 이유였다.

정원은 황량함 그 자체였다. 키 작은 관목들은 벌레 먹은 잎들이 말라 죽어가고 있었고 잔디와 민들레는 너무 무성해서 이웃들의 신고가 자꾸 들어왔다.

할 수만 있다면 미관이고 나발이고 이 애물단지를 다 뽑아버렸을 테지만 솔트는 그럴 힘이 없었다. 솔트는 정원 관리뿐만 아니라 삶의 많은 것에서 이미 의욕을 상실해 버린 상태였다. 지금의 솔트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술 먹기, 똥 싸기, 담배 처 피기, 기억나진 않지만 어떻게든 본인에게 다양한 형태의 영양분을 급여하기밖에 없었다. 그중 담배 처 피기는 솔트의 제일가는 특기였다.

정원을 서성이며 담배를 피우려고 했지만, 밖은 비가 왔고 그래서 솔트는 현관문 앞 계단에 걸터앉았다. 숨을 들이마시자, 담뱃불이 더 밝게 타오르면서 동시에 솔트의 뺨이 약간 홀쭉해졌다. 안 그래도 흉터가 진한 핼쑥한 얼굴이 약간 더 험악해질 것 같은 찰나에, 온몸으로 퍼지는 니코틴의 힘으로 얼굴 자체는 묘하게 더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깊은숨으로 내쉬는 담배연기는 지독했지만, 솔트에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악몽 그까짓게 뭐라고. 이미 겪어본 고통이다. 한 번 겪고 살아남은 고통이니 무섭지 않다. 절대 무섭지 않다.

‘그냥 자자. 악몽은 좆 까라고 하고.’

솔트가 담배라는 ‘제일가는 특기’를 발휘하고 그나마 제정신이 되었을 무렵, 솔트는 터져 나갈 듯한 우편함을 발견했다. 평소에는 그런 것이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그냥 거슬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것들은 솔트의 인식 범위 밖에 있었다. 하지만 솔트는 담배 처 피기라는 행위를 통해서 요 몇 주를 통틀어도 가장 명료한 제정신이 된 상태였고 한순간 상식인이 되었다. 그래서 그 우편함이 거슬렸다.

온갖 청구서와 광고와 이상한 편지들을 움켜쥐고 집으로 들어온 솔트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분류했다. 나중에 볼 거, 안 볼 거. 후자는 바로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모든 우편물들을 그렇게 분류하고 나자, 솔트에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편지 하나만이 남았다.

‘생화학 테러 편지인가?’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가 본인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솔트는 이제 더 이상 요원도 뭣도 아니고, 정말 말 그대로 그 무엇조차도 되지 못하는 구제 불능의 폐기물이었다. 그 나이에 집을 산 건 칭찬할 일이지만 그 나이에 벌써 연금 생활자가 되고 말았다. 테러는 좀 더 대단한 사람에게 하지 않는가. 이를테면……. 멀쩡하게 임무를 잘 수행하는 요원 ‘솔트’라든지. 폐인 셰퍼드 포스터가 아니라.

그래서 솔트는 편지를 거침없이 뜯었고 내용을 읽자마자 편지를 와작 구겼다. 홧김에 한 행동에 자신도 놀라고는, 구긴 편지가 찢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다시 펼쳤다. 편지 내용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였다.

꼼꼼하게 들여다본 편지의 내용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아래 번호로 전화주세요.

+44 789 398 4567]

적힌 내용은 그게 끝이었다. 더 읽을 것도 없었다. 하지만 솔트가 반사적으로 종이를 구겨 버린 것은, 그 옆에 조잡한 삽화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린이 일러스트 같은 엉성함이었지만 핵심은 확실하게 전달했다. 무지하게 많은 눈, 8개의 다리, 그리고 군장도 으스러뜨릴 만한 이빨.

심박수가 미친 듯이 올라갔다. 이 울렁거려서 토할 것 같은 감정은 그냥 생리적인 반응일 것이다. 직전에 담배도 무리하게 많이 폈으니까. 그냥 신체 반응일 뿐이라는 확신은 명료한 사실이었다. 솔트는 절대로 겁쟁이처럼 그림만 보고 화들짝 놀라거나 긴장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진짜였다. 씨발, 솔트가 폐인인 것만큼이나 진짜였다. 그리고 세상의 다른 누군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때 망설이는 건 겁쟁이나 하는 짓일 테다. 솔트는 편지에 적힌 수상쩍고 스팸 같은 전화번호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성우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립토 오퍼레이션 고객센터입니다. 배송 관련 문의는 1번, 제품 A/S 문의는 2번, 정기구독 요청은 3번, 상담원 연결은 0번을 눌러주세요.]

솔트는 0번을 눌렀다.

[모든 상담원이 통화 중입니다. ARS를 종료합니다.]

뚝. 그렇게 전화는 끊어졌다.

그렇게 덩그러니 남겨진 솔트의 이성은 스틸녹트들이 변기에 빠졌을 때만큼이나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고함을 지르거나 물건을 부수거나 욕설을 뱉지는 않았다. 하지만 좀 더 강력한 충동이 밀려 들어왔다. 담배를 마구 피워서 폐암으로 자살하는 것 이상으로 확실하게 인생을 끝내줄 방법이 어디 없나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담배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더 피웠다간 토할지도 몰랐다.

솔트에게는 불행 중 다행으로, 서랍에 있는 권총에 생각이 닿기에는 솔트가 너무 졸렸다. 솔트는 편지를 던지고 웃옷도 훌렁 벗어 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조금만 덜 졸렸다면 바지와 속옷까지 벗었겠지만, 솔트는 너무 졸렸고 옷을 다 벗어서 갈아입기도 전에 악몽으로 가는 직행열차의 특등석을 타고 말았다.

이번 악몽은 평소와는 달랐다. 이번 악몽에서 솔트의 위치는 그 임무가 있었던 건물이 아니라 자기 집, 그것도 딱 자신이 누운 침대 위였다. 집에서 자꾸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창 너머로 눈이 무지하게 많고 다리가 8개 달린 괴물들이 돌아다녔다.

쾅! 소리가 났다. 우지직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들”이 다리 중 하나로 침실 문을 꿰뚫었을 때가 되어서야 솔트는 이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때마침 천장도 무너지기 시작해 잔해가 솔트의 배를 때리기도 했고, 사운드가 너무 리얼했기 때문이었다. 몸의 수많은 흉터에 방금 잔해가 남긴 흉터를 추가한 솔트는 창문을 넘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디가 올바른 길인지도 몰랐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지만, 솔트는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그들”의 눈을 피해 정원을 가로질러 우체통을 지나갈 무렵, 솔트는 너무 극도로 긴장하고 아드레날린이 솟구친 나머지 과거의 자신이 침입자 방지용으로 설치해 둔 부비트랩 장치를 건드리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새벽 두 시, 도시의 모든 사람이 잠에서 깼다.

천만다행으로 고막이 터지진 않았지만, 솔트는 3초간 기절해 있었다. 그래도 깨어난 솔트를 맞이한 건 화가 난 괴물의 이빨이 아니라 매캐하고도 차가운 새벽 공기와 축축하게 얼굴을 때리는 비였다. 3초나 무방비했는데도 솔트가 동료들과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지 않았다는 것은, 곧 괴물들이 몰살되었다는 의미다. 그 폭발물이 솔트의 집까지 날려 버리지만 않았어도 폭발물 지식을 알려준 플라비오 박사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해야 할 타이밍이었을 것이다. 목숨을 건졌으니 정말로 한 번 감사해야 할 타이밍인가? 하지만 씨발, 너무 훌륭히 큰 제자는 그 지식으로 집을 해먹고 말았다.

‘내가 왜 이딴 걸 만들었지?’

앞서 말했듯이, 솔트 요원이면 몰라도 셰퍼드 포스터를 해치러 올 무시무시한 암살자 같은 건 없다. 열심히 만든 기억이 나는데 대체 왜 이런 미친 장치를 해뒀지? 옆에 있는 물을 계속 마시면서…….

‘그게 물병이 아니라 보드카 병이었나?’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은사님의 제자는 물 아니면 보드카에 꼴아서도 올바르게 폭발물을 설치했고 올바른 타이밍에 썼다. 군용 폭발물을 구할 길도 없었는데도. 술에 취해 정성 들여 만든 수제 폭탄이 터지고도 살아남았다. 훌륭한 제자였다. 비록 비 오는 날 웃옷도 없이 바지만 간신히 입은 채, 흉터투성이의 맨살을 드러내며 방치된 채였지만.

솔트는 좀 더 감정적인 행동, 이를테면 엉엉 운다던가 자기연민을 한다든가 아니면 허공에 욕설을 발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이렌 소리가 들렸고 솔트는 그 모든 것을 해보는 대신 현장에서 튀었다. 아주 전문적이고 민첩하게, 마치 유능한 요원 솔트처럼.

***

유능한 요원이었던 솔트는 경찰에게 잡히지 않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솔트의 그동안 배운 지식마저 헛되지 않았다. 솔트는 상의를 탈의한 상태로 추운 영국의 새벽을 계속 쏘다니는 건 미친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체온을 위한 조치가 필요했다. 어둠 속을 쏘다니던 솔트는 헌 옷 가게의 잠바 하나를 훔치는 ‘조치’로 이 문제를 무력화했다. 그 와중에 솔트에게 제법 어울리는 어두운색으로 쌔비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뭐라 글자가 적혀 있었지만, 솔트는 문구를 신경 쓸 만큼 패션에 깐깐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게 솔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성취였다. 이외에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솔트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솔트가 방금 날렸다. 그 망할 ARS라도 다시 전화 걸까 싶었지만 솔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번호도 잊어버렸다.

‘스팸 같은 번호였는데…….’

알다시피 이런 정보만으로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곤란한 법이다. 솔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비가 그칠 때까지 다리 밑에서 배회하는 것밖에 없었다. 아니,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배회하다 누가 보면 너무 수상할 테니, 차라리 옷을 여기저기서 ‘조달’해 온 뒤 홈리스인 척 누워 있는 게 더…….

‘홈리스인 척? 척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지? 진짜 홈리스가 됐는데 무슨 망할 헛소리를?’

버려진 옷이나 찾을까? 아니면 어디 높은 데로 가서 어떤 결심을 하고 영원히 아늑하고 포근하게 자버릴까? 유능한 요원 솔트의 자아가 쪼그라들고 위축된 셰퍼드 포스터가 덩그러니 남을 무렵, 그리고 진짜로 높은 곳이 매력적인 선택지처럼 느껴질 무렵, 전화 소리가 울렸다.

전화 소리는 파란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고 있었다. 요즘 누가 공중전화를 쓰나?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공중전화는 거기 있었고 전화는 계속 울리고 있었다. 반경 몇십 미터 이내에 있는 사람이라곤 솔트밖에 없었고, 기묘한 일을 계속 당한 솔트는 이 전화가 자신을 겨냥했다고, 그렇게 직감했다.

솔트는 망설일 때도 있지만 망설이지 않을 때는 정말 빠르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직감이 찾아온 순간 솔트는 바로 공중전화 부스에 쳐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너머의 상대는 그 어떤 인사치레도 생략하고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집 잃었다며?”

타겟의 목소리는 걸걸한 타입이며 어리다. 젊은 남성으로 추정. 수화기 너머로 느껴지는 감정은 짜증이다. 본능적으로 옆에 두면 피곤하고 상성이 안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의 반사회적인 태도가 이 짧은 말 두어 마디에서 물씬 풍겨 나왔다. 타겟은 솔트가 집을 잃은 것을 알고 있다. 솔트가 여기 온 건 딱히 계획적인 결과가 아니었다. 평소에 오는 곳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솔트 근처의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솔트의 동선을 확보했다는 소리니, 최소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놈들이다. 일반 기관도 아니고 괴물에 대해 알고 있는 기관일 것이다.

이 모든 생각들은 수화기를 귀에 대고 목소리를 들은 순간 솔트의 머리를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생각이다. 솔트는 한때 한 사람 몫을 하는 요원이었고 생각하는 속도와 순발력이 빨랐다. 따라서 지금의 솔트는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도 상대방의 말에 자연스러운 타이밍에 대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솔트는 침묵했다. 왜냐면 솔트는 어처구니없이 집을 잃었고, 잠도 못 잤고, 수화기 너머 애새끼의 말을 듣자마자 짜증이 확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솔트가 대답하지 않자, 상대방은 답을 기다리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주소 하나를 불러주었다. 안전 가옥의 주소라고 했다. 솔트는 바로 암기하고 다시 암송해서 재차 확인했다. 상대방이 말했다.

“서둘러.”

단순한 재촉으로 들릴 수도 있었지만, 누가 봐도 고압적인 명령조였다. 이 짧은 대화로 솔트를 두 번이나 욱하게 만드는 것도 재주였다. 하지만 폐인으로 산 지 제법 된 솔트는 이 생경한 감정들이 반갑기까지 했다. 그래서 솔트는 제법 짜증을 덜고 친절하게 대꾸해 주었다.

“기다려.”

그러고 솔트는 전화를 끊었다. 저쪽이 빨리 와주기를 바라는데, 이쪽도 빨리 가줘야지 않겠는가. 솔트는 집도 돈도 신분증도 카드도 무기도 없었지만,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 때보다 더 귀중한 것이 생겼다.

바로 목표였다.

무일푼으로 시 중심부까지 빨리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현지 통화 없이 작전지역에 떨어져서 목적지까지 집합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후자라면 솔트는 ‘현지 언어’와 문화에 능통하고 지형에 익숙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이런 쉬운 임무라면 거저먹기였다. 솔트는 이 쉬운 임무에 전력을 다해 집중했다. 그 결과 정확히 21분 후, 솔트는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불러 준 주소 앞에 섰다.

‘좆같은 곳이군.’

좆같은 것들이 있기 딱 좋은 곳이었다. 솔트 자신까지 포함해서. 불러준 주소를 들었을 때부터 이미 그곳은 도심의 슬럼 지역일 것 같았고, 도착해보니 솔트의 예상이 맞았다. 다 쓰러져 가는 폐가 하나가 눈앞에 있었다. 주소도 거의 지워져 있어서 일반인에게 주소를 주고 찾으라 했으면 한참을 헤맸을 것이다. 하지만 솔트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솔트는 들은 암호를 입력했고 문을 열었다. 해당 장소에 대한 정보도 야간투시경도 없어서 솔트는 한쪽 눈을 감고 들어갔고, 옳은 선택이었다. 들어간 장소는 직접조명 없이 어두웠다. 감았던 쪽 눈은 순식간에 어둠에 적응했고 이 장소가 어떻게 생겼는지 대강 파악했다.

먼지 냄새가 약간 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거기 쌓여 있는 총기들과 방탄복, 탄약들은 제대로였다. 대체로 조용한 그 공간에 삑삑 하는 금속음만이 주기적으로 나고 있었다. 그 살풍경한 광경에서 솔트는 묘한 편안함을 느꼈다. 총기, 탄약, 방탄복, 위험, 작전. 이 모든 것은 솔트에게 익숙했고 그게 솔트의 삶이었다.

‘지나간’ 삶이라고 해야 옳긴 하다. 솔트도 그것들이 지나갔다고 받아들였고, 체념했고, 그렇기 때문에 폐인으로 살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광경들이 솔트에게 지나간 것들을 전부 다시 불러일으켰다. 단 1초도 안 되는 시간이 휘몰아친 감정들이, 일상이 전부 박살 난 순간에 유예했다가 한꺼번에 다시 몰아닥친 감정들이 너무 강력해서 솔트는 잠시 주춤했다.

그 순간, 펑! 소리가 나며 모든 조명이 켜졌다. 고통스러운 빛이 눈을 파고들었다. 조명 때문에 시야를 완전히 빼앗겼다. 솔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본능적으로 냅다 옆으로 굴렀다. 현장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고전적인 수법에 또 당했나. 이 모든 건 몸이 이후에 어떻게든 이어질 총격을 피하고 뭐라도 대비하려는 자동적인 움직임이었다.

“쓸만하네? 도착 시간도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러나 어떤 건방진 애새끼 목소리, 솔트가 수화기 너머로 한 번 들어본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솔트는 다음 액션으로 진행하려다 멈췄다.

시야는 서서히 돌아왔다. 바닥을 한 번 구르고 언제든 일어서서 튀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자신을 어떤 사람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첫인상을 딱 잘라 정리하면 이랬다.

‘너드 새끼.’

역광을 잔뜩 받은 어떤 남자는 그 말 이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분류해 보자면 너드 새끼 중에서도 성격 더럽고 자기만 아는 성격파탄자 계열처럼 보였다. 단 몇 마디만을 주고받았지만 이미 목소리만으로도 그 점만은 확신하고 있었기에, 성격대로 생겼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너드 놈은 권총으로 솔트를 겨누고 있었고 그립은 제대로 훈련받은 사람처럼 탄탄했다. 솔트는 그것으로 이 조직의 수준을 한 번 가늠했다. 시야가 돌아온 솔트와 눈이 제대로 마주치자, 상대는 기분 나쁘게 미소 지었다.

“유능하네. 오는 길에 취직까지 해오고.”

그러면서 권총을 솔트에게 던졌다. 보급품 대충 던져주는 상사처럼. 황급히 받고 반사적으로 제대로 잡은 채  일어섰지만 어리둥절했다. 무슨 개소리지? 그러다 솔트는 너드 놈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눈을 돌렸다.

솔트가 체온 유지를 위해 훔쳤던 외투에는 NYPD라고 적혀 있었고, 제이슨 스미스라는 명찰이 달려 있었다. 저 멀리 뉴욕에 있던 옷이 왜 영국의 헌 옷 가게에 있는지, 제이슨 스미스 씨는 왜 이렇게 옷 간수를 허술하게 했는지 따져 묻고 싶은 게 한둘이 아녔다. 색상이 어두우니 그나마 낫다고 집어 온 건 자신이었기에 솔트는 그 기분 나쁜 미소를 보며 인상을 쓰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왜냐고? 정황상 ‘저게’ 솔트와 자주 엮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고, 솔트는 이제 괴물에게 습격당해 집도 날려 먹은 홈리스니까.

솔트의 사회성이 그렇게 좋은 편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솔트는 다 자란 어른으로서 가지는 최소한의 상식이 있었다. 그 최소한의 상식이 말하기를 장래 상사가 좆같은 인간처럼 보일지라도 너무 티 내면 안 된다. 그건 좆같은 업무 라이프와 개좆같은 업무 라이프를 가르기 때문이었다.

“알려준 대로 왔다. 이제 앞으로 뭘 하면 되지?”

하지만 아직 상사는 아니고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으니 깍듯하게 부하의 태도까지 갖춰주고 싶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고 솔트는 최대한 당당하게 행동할 것이다. 이 조직이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뭐라도 알고 있다는 것, 그 이상을 모르니 오히려 솔트 자신이 최대한 상식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군장 챙겨. 여긴 발각됐어. 버린다.”

셰퍼드 포스터라면 황당해서 무슨 개소리냐고 따졌겠지만, 지금의 솔트는 셰퍼드 포스터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임무 중에는 온갖 일들이 일어나며 쉘터는 영원히 안전한 곳이 아니다.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작전 중에는 정보를 많이 아는 자의 권유나 명령에는 군말 없이 따르고 이유는 나중에나 물어보는 게 그나마 낫다는 것을 오랜 시간에 걸쳐 배웠었다. 그래서 솔트는 반문하거나 놀라는 대신, 침착하게 되물었다.

“얼마나 빨리?”

그 질문을 하는 순간, 솔트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솔트는 한때 플라비오 박사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다. 그중 하나는 폭발물에 대한 지식이었다. 사회 통념상 바람직한 지식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열심히 배웠고 “솔트”로서 살아갈 때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지식들은 거의 뇌에 조각도와 끌로 새겨진 수준이었다. 솔트는 그에 그치지 않고 지식들을 꾸준히 업데이트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솔트는 조용한 곳의 배경음으로 들려오는 금속음 소리, 삑삑 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고성능 시한폭탄이 세 번째 페이즈에 접어드는 소리로, 이 소리가 들릴 때쯤이면 얼추 3분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 씹새끼는 내가 늦게 왔으면 어쩔 셈이었던 거지? 미친…….’

미친 새끼라고 욕할 시간도 없었다. 솔트는 방을 순식간에 스캔하고 군장을 챙겼다. 옆에서 보기에는 훈련된 요원의 엄청나게 신속한 속도였지만 솔트에게는 그게 답답하기만 했다. 더 빠를 수 있는데, 더 빠를 수 있는데. 솔트가 현역일 때는 이렇게 느리지 않았다. 몸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몸뚱이가 안 따라줬다. 느렸다. 너무 느렸다. 그러나 느린 몸은 착실하기는 했고 안전 시간 1분쯤 남았을 때 완전군장이 되었다. 사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완전군장까지 필요했나? 싶지만 솔트는 알았다. 이건 테스트였다. 빌어먹게 성격 파탄 난 테스트.

그러는 동안 너드 놈은 유유자적 솔트를 구경하면서 백팩을 하나 멨다. 본인 짐은 그게 끝인 것 같았다. 솔트가 군장을 거의 다 챙겨 메는 동안 너드 놈은 손에서 뭔가 만지작거렸다. 손에 가려져서 거의 안 보였지만 솔트는 전문가의 눈으로 그것이 폭발 컨트롤 스위치란 걸 알아보았다.

솔트가 군장을 다 갖추자, 너드 놈이 손뼉을 짝짝 쳤다. 분노로 심장이 터져서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느릿느릿한 박수를.

“합격. 너 되게 빨리 왔고 빨리 해냈으니까, 천천히 여기 버리고 나가자고.”

천천히. 시한폭탄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상한 말이다. 그러나 솔트는 어느샌가 삑삑 소리가 고요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가 폭탄 조절 스위치를 흔들면서 말했다.

“폭파 타이머는 이제 멈춰 놨는데……. 물론 이것까지 알아차렸겠지?”

뭔가 인정이라도 한다는 듯이, 혹은 봐줬다는 듯이. 그러나 스위치를 본 순간부터 솔트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내놔.”

솔트가 불쑥 말하자 처음으로 너드 놈이 당황했다. 솔트에게 일그러진 비웃음을 흘리며 상대가 물었다.

“뭘?”

솔트는 아까 상식인이 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찬 완전군장은 무거웠고 수면 부족 상태로 최대 각성 상태를 유지 중인 솔트는 기분이 점점 나빠졌다. 어차피 완전군장을 한 채로는 상식이란 게 딱히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솔트는 최대한 침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그리고 가능하면 정중하게 들리기를 바라며 상대에게 말을 건넸다.

“타이머 내놔, 이 새끼야.”

그리고 솔트는 상대가 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솔트는 타이머를 빼앗았다. 비상식적인 행동이고 충동적인 행동이고 반사회적인 행동이고 저놈이 만약 진짜 상사가 된다면 지금 단단히 찍혔을 것이다. 하지만 솔트는 화가 나 있었다. 내내 화가 나 있었다. 동료들이 전부 찢겨나간 그 순간부터 솔트는 화가 나 있었고, 집이 날아갔을 때는 묘사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싸가지없는 말투의 애새끼는 기폭제였을 뿐이고, 솔트는 화풀이가 필요했다. 그리고 화풀이에는 뭔가 날려버리는 게 좋았고, 그게 자기 집이 아니라면 특히나 더 좋았다.

두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 통로로 이동해서 차에 올라탔다. 차는 완전히 선팅되어 있어 안이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는 수상쩍은 검은색 밴이었다. 운전대는 너드 놈이 잡았다. 솔트는 군장 일부와 총기를 뒷자석에 던져 놓고 조수석에 탔다. 그리고 너드 놈이 시동을 거는 순간 솔트는 백미러를 봐버렸다. 차 뒤에서 무엇이 쫓아오는지 봐 버렸다. 솔트를 습격한 놈들과는 다르게 생겼지만, 분명히 “그들”이었다.

솔트는 너드 놈이 드디어 악셀을 밟자마자 기폭 스위치를 눌렀다. 화려한 폭발이었다. 규모 내에서라면 모든 것을 날려 버릴 그런 폭발이었다. “그들”도, 그리고 그 망할 안전 가옥도 전부 다. 그리고 솔트는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폭발물은 솔트가 제대로 알고 있고, 어떻게 될지 알고, 어떻게 통제하면 될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였으니까. 충격파에 따라잡히며 그들이 탄 차는 굉음을 내며 튀어 나갔다. 솔트는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손에 잡은 스위치, 이제는 소임을 다하고 쓰레기가 된 스위치를 으스러질 듯이 움켜쥐었다. 솔트가 결정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이를테면 폭발 같은 일이 언제 벌어질지 솔트가 결정했다. 그리고 시원하게 날아갔다. 펑!

마지막으로 웃은 지가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솔트는 웃었다. 음침한 낄낄거림 대신, 사고를 친 소년 같은 청량한 웃음이었다. 그 순간 다른 누군가가 옆에 있었다면, 험악한 인상이었던 한 남성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 미소만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을 것이다. 마치 시선이 그쪽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그 가상의 사람이 정신을 차렸다면, 어쩌면 카메라를 들어서 그의 웃음을, 이 순간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솔트의 삶에 다시 없을 웃음은 어두운 밤 인적 드문 국도에서 빛이 바래갔다.

웃음이 간신히 멈추려는 찰나에, 옆에서 ‘저 미친 새끼를 어쩌지?’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자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로, 첫 단추부터 거나하게 잘못 끼웠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게 원래 인생이었다. 셰퍼드 포스터에게도, 솔트에게도 그건 둘 다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모두가 조용해지고도 한참이 흐른 뒤, 너드 자식이 입을 열었다.

“환영한다. 이제 내가 널 뭐라고 불러야 할지 정해.”

코드네임 정하라는 말이라고 단박에 알아들었지만, 자기 코드네임은 알려주지 않는 싸가지에 감명받은 솔트는 킥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너도 정해야 할 걸. 아니면 내 맘대로 불러줄까?”

너드 새끼라는 좋은 호칭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 순간 맞은편 화물차가 중앙선을 넘었고 헤드라이트가 그들을 덮치기 직전, 너드 자식은 핸들을 팍 꺾었다. 스키드 마크 소리가 났고 그들은 쫙 미끄러져서 한 번에 3개 차선을 넘었지만 어쨌든 무사했다. 평범한 상상에서라면 욕설이 마구 터져 나왔어야 했을 순간이지만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없었다. 이 모든 일을 다 겪고 위대한 드라마가 펼쳐지기 직전, 겨우 졸음운전을 한 화물차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걸 방금 깨달은 인간은 침묵을 택하기 마련이었다.

도로는 계속 조용했다. 화물차가 어떻게 됐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외로운 헤드라이트 한 쌍 아래서 포장한 지 얼마 안 된 아스팔트가 물기 있게 반짝였고 차선은 갓 칠해서 새하얗게 빛났다. 앞에도 뒤에도 사람은 없었고 맞은편 헤드라이트는 간헐적으로 나타나다가 마침내는 그마저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때쯤 운전하는 자가 말했다.

“트로이. 트로이라 불러.”

트로이. 어쩌다 그런 코드네임이 되었을까? 솔트의 머릿속에는 머나멀고 의미 없는 신화의 국가 대신, 저번에 솔트의 하나뿐인 컴퓨터를 망쳐놓은 트로이의 목마 바이러스가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제법 어울렸다.

이제는 자신의 차례였다. 자신이 여기서 사용할 이름을 말할 차례였다. 아마 트로이는 기다려줄 것이다. 작명 센스가 없는 자신이 뭔가 정해올 때까지, 적어도 이 알 수 없는 지옥으로 가는 도로가 끝나기 전까지는.

그러고 그는 생각했다. 죽은 동료들을 생각했다. 임무를 열심히 수행하던 때를 추억했다.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정말로 많은 일이…….

그를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해준 많은 일들이.

그래서 그의 고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솔트.”

그것만이 그를 살아있게 만드는 이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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