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트

이렇게까지 좆망할 수 있는거임? 프로포즈도?

궁창 (미완결)

발단

 

어느 날의 평화로운 주말, 시로는 그날 먹을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세이버와 사쿠라는 외출, 후지 누나도 따로 일이 있다고 했으니…… 밥을 챙겨야 할 것은 자신과 잠깐 놀러 온 린이었다. 오늘은 뭘 먹지? 점심이니까 가벼운 건 안 될 거고…….

“아, 에미야 군, 내일 시간 있어?”

“시간? 있는데…… 왜?”

좋아, 오늘의 점심은 볶음 우동으로 할까. 새우가 조금 남았으니 튀겨서 고명으로 올리고…….

“아처 프러포즈 준비를 도와줄 수 있을까 해서.”

“그런 거면 가능……”

뭔가 이상한 단어가 있었던 거 같은데. 시로가 방금 들은 말을 반추했다. 프로……포즈라니. ……누가? ……누구에게??

“잠시만 토오사카, 방금 뭐라고 했어?”

“응? 아처 프러포즈를 조금 도와줘. 아무래도 혼자서는 좀 버거울 거 같아서. 아처는 어제부터 계속 실수만 반복해서 도움이 안 될 거 같으니까…….”

“아니아니아니. 지금 프러포즈 한다고 하지 않았어?”

“말했지?”

“누가?”

“아처가.”

“……누구에게?”

“누구라니, 랜서 말고 더 있어?”

“어째서???”

그리고 이날 시로는 정말 알고 싶지 않았던 누군가의 연애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별개의 인물이긴 하나 동일 인물이기도 한 아처가 자기 자신을 살해하려 든 남자를 좋아하다니. 편견은 없지만 어떻게 되어 먹은 취향이야……. 아니 애초에 둘이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었냐고. 그날 시로는 3시간을 뒤척인 끝에야 잠에 들 수 있었다.

전개

 

“그래서 애송이가 준비를 돕게 됐다고.”

“그렇게 됐어.”

와, 사람 뚫리겠네. 시로는 자신을 노려보는 아처의 시선을 피했다.

“……린. 나는 이 애송이의 도움을 받을 바엔,”

“소금 대신 설탕을 넣은 아처는 조용히 하도록 하세요.”

“…….”

“와…….”

시로는 잠시 아처를 경악스레 바라봤다. 웬만해선 실수를 하지 않는 아처의 실수라니, 귀하기도 했거니와 신기했기 때문이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아처에 시로가 린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진짜 설탕을 넣었어?”

“어이!”

“까르보나라가 혀가 아릴 정도로 달았으니까…….”

“린——! 그리고 설탕이 아니라 꿀이다!”

“그게 중요해 지금?”

애초에 꿀이 설탕보다 더 심각한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시로였지만 아처를 위해 생각만으로 끝내기로 했다.

위기

 

대망의 당일. 린과 두 명의 에미야는 오후 1시부터 프러포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랜서는 아르바이트를 갔다가 5시에 퇴근을 한다고 했으니, 이동 시간을 고려해도 그 전에 준비를 끝마쳐야 하는 셈이었다. 풍선도 불고, 현수막도 걸고, 리본도 달고…….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지만, 딱 하나 순조롭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하면…….

“아처 쟤…… 토하는 거 아냐?”

프러포즈의 진행자 아처일까.

“으응…… 그러진 않을 거라고 믿고 싶은데…….”

린은 아처를 힐긋 바라봤다. 한 시간 전부터 계속 창백한 얼굴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모습은 이제 동정심까지 유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시로가 다가가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니, 시로는 그게 조금 웃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과 아처의 상태는 별개. 현재 5시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남짓. 남은 준비라곤 바닥에 굴러다니는 풍선을 벽에 붙이고, 촛불에 불을 붙이는 일이었으니 아처가 필요한 일은 별로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좋아. 아처!”

“왜 부르나, 린.”

“잠깐 옥상에 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와.”

“……호의를 받지.”

평소 같았으면 한 번은 튕겼을 텐데, 순순히 따르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다. 비틀거리며 문밖으로 나간 아처를 배웅하고 남은 것은, 풍선 붙이기와 불붙이기였다. 시로는 가스 점화기를 들고 하트 모양으로 놓인 촛불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불을 다루는 일이다 보니 토오사카에게 맡기기엔 조금 불안이 있었다. 바닥에 놓인 촛불 중 절반 정도에 불을 붙였을 무렵,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면 오후 4시 38분. 랜서가 오기까지 시간이 남아있었으니 지금 들어온 것은, 분명히 아처여야 했을 텐데. 그랬어야만 하는데.

“야, 아처, 나 왔다……아?”

어째서 눈앞에 보이는 건 랜서인가…….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랜서였다. 푸른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랜서. 헛것을 보는 건가 싶어 볼을 꼬집으면 둔탁한 아픔이 느껴진다. 현실이다. 현실.

“왜 벌써 온 건데?!”

시로는 저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5시 퇴근이라며! 그럼 적어도 5시 이후에나 올 거 아냐! 왜 벌써 오는 건데?!”

“아니 그, 사장님이 일찍 집에 가도 된대서…….”

머릿속에서 인자하게 웃으며 엄지를 세워 보이는 생선 가게 사장님이 오퍼시티 50으로 스쳐 지나갔다. 조금만 덜 인품 좋게 살지 그랬어요! 랜서와 사장님이 듣는다면 억울해할 만한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시로였다. 하지만 그건 둘째치고, 지금 중요한 것은 현 상황의 수습이었다. 랜서를 봐라. 눈을 굴려 집 안 꼬라지를 보자 무언가를 짐작한 듯 다시 나가려고 하지 않은가. 시로는 다급하게 일어나 랜서의 팔을 잡았다.

“잠시만, 랜서, 가지 마! 일단 설명을 들어!”

“무슨 설명? 일단 좀 놔 봐, 꼬맹아, 뭘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난 방해꾼 같으니까,”

“——에미야 군.”

린의 조용한 목소리에 시로가 우뚝 멈춰 섰다. 어느새 린은 하트 모양 촛불이 중앙에 서 있었다.

“토오사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제가 마무리를 짓겠어요.”

그 모습은 마치 세이버가 연상될 정도로 늠름했다. (역시 린凛이라서 그런 걸까.)토오사카 린, 그녀가 누구인가. 한다면 하는 여자. 무엇이든 해내는 만능. 그런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던가. 물론, 가끔 중요한 순간에 실수하는, 즉 덜렁이 속성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중요하지 않은 문제. 그래서 시로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작은 벨벳 케이스를 린의 손에 올려주고 구석 쪽으로 물러났다. 자신은 방해만 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랜서.”

“……오우.”

랜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매만지며 시선을 방황하고 있었다.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시선이 그의 좌불안석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울 거 알아. 내가 아닌 아처가 직접 말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렇게 됐으니까 어쩔 수 없지.”

린은 랜서의 앞에서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쥔 벨벳 케이스를 내밀었다. 시로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꽉 쥐며 그 장면을 바라봤다. 랜서의 시선이 린에게 꽂혔다.

“나의……,” 잠시만. 아처와 랜서가 결혼하게 되면 랜서는 나의 뭐지? 린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나……의……,” 형부? 형수? 이건 아닌 거 같은데. 그럼, 뭐지? 부하의 남편을 뭐라고 부르더라? 어? 어어? “나, 의.” 어떡해! 하나도 모르겠어! 근데 지금에 와서 그만둘 수도 없는데-랜서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미묘해지고 있었다-, 아, 정말!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손은 착실히 뇌의 명령을 따라 벨벳 케이스를 천천히 열고 있었다……. 결국 린은 제대로 된 생각을 거치지 못 한 채로 일단 내뱉게 된다.

“나의 아처와 결혼해 주지 않겠어?”

“뭐?”

토오사카——! 시로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프러포즈에 쓸 법한 대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는 눈치도 없이 빛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마술이 있을까? 있다면 지금 당장 여기에서 사용해 줬으면 좋을 거 같다.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랜서도 린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아, 시로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입을 연 순간.

“린! 지금 랜서가, 여기——”

최악의 타이밍에 등장한 아처 되시겠다. 영체화는 개나 줘버리고 달려온 건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아처가 보게 된 광경.

구석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시로, 하트 모양 촛불 안에서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벨벳 케이스를 열어 내밀고 있는 린, 그리고 그 정면에 서 있는 랜서. 3초 만에 모든 상황을 대략 파악한 아처는 생각했다. 나 자신의 의지로 죽자.

후, 가볍게 웃은 아처가 부부검의 한 쪽, 막야를 소환해 쥐었다.

“린. 함께해서 즐거웠고——”

“스탑스탑스탑잠깐만멈춰미친놈아!!”

“토오사카! 간드!! 간드!!!”

“그렇게말하지않아도알고있어——!!!”

그 난리 통 속에서 시로는 생각했다. 토오사카의 덜렁이 속성을 중요하게 여겼어야 했다고——.

절정

 

아처의 자발적 퇴거 시도 소동 후, 남은 것은 죽고 싶어 하는 아처와 지금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린과 시로, 아무것도 모른 채 일단 자발적 퇴거쇼를 직관하고 말리게 된 랜서였다. 분위기 어때? 분위기는 모르겠고 그냥 위기야. 1분이 100년처럼 느껴지는 침묵을 깨게 된 것은 랜서였다.

“……혹시 현대에는 프러포즈 대리도 있는 거냐?”

라는 충격적인 한마디로. 그 말에 현대인 세 명이 경악하며 고대인에게 잘못된 지식이 심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한 건데?!”

“아니, 아가씨가 한 말도 있고…… 현대에는 온갖 대리가 있길래……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

“아냐, 진짜 절대 아냐! 애초에 프러포즈 같은 중요한 일을 대리로 맡기는 사람이 있다면 구제 불능의 쓰레기니까!”

”……호오.“

시로의 말에 랜서의 시선이 아처에게 잠깐 향했다. 시로는 그쪽을 보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왜…… 왜 하필이면 그쪽을 보는 것인가. 아니왜보는지아예모르는건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왜 하필이면.

좋아, 이쯤 되어서 잠깐 린과 시로가 세운 완벽한 아처의 프러포즈 작전을 살펴보겠다.

랜서가 오기 전까지 ←실패!

준비를 다 끝내고 ←실패!

자신들은 집에 가고 ←실패!

아처 혼자 긴장 속에 떨다가 ←성공!

프러포즈를 진행한다. ←성……공?

망한 계획 대회에 나가면 두말할 것도 없이 우승할 수 있는 스펙이었다. 어떻게 계획이 이렇게까지 망할 수 있는 걸까. 역시 행운 스텟이 문제인 걸까. 아처와 랜서의 행운 스텟이 E인 것을 생각하면 아예 불가능한 가설도 아니었다. 시로가 그런 생각을 하며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을 무렵, 린이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표정은 자신이 마무리 짓겠다고 선언하던 그때와도 같아서, 시로는 일말의 불안을 느꼈다.

“후후, 좋아. 해결책을 찾았어.”

“……토오사카?”

“랜서가 간드를 맞고 기억을——”

“진정해 토오사카!!”

그 불안은 틀리지 않았다……. 정말 간드를 쏠 작정이었는지, 소매까지 걷는 린을 말리기 위해 시로와 아처는 꽤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전체적으로, 날아오는 간드를 피하고 막기 위해서.

결말

 

그리하여 다시 현재에 이른다. 아처와 시로의 린 말리기 대소동이 끝난 후 남은 것은, 여전히 절반만 켜진 채의 하트 모양 촛불을 중앙에 두고 둘러앉아 당장 악마라도 소환할 법한 분위기를 풍기는 넷이었다. 이 사건의 당사자이자 피해자라고도 할 수 있는 랜서는 모든 상황을 전부 설명받은 후,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니까…… 궁병이 나에게 프러포즈하려고 했고.”

“응.”

“그걸 아가씨랑 꼬맹이가 돕게 됐고.”

“응.”

“어쩌다 보니 일찍 온 나 때문에 전부 망했다?”

“전부! 망……했지…….”

무언가 반박하려던 린이 말끝을 흐림에 따라 망한 걸 두 번이나 긍정한 꼴이 됐다. 시로는 어색하게 웃었고 아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역시 프러포즈를 하겠다고 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나? 아처는 사리물었다. 과분한 것을 바랐다는 건 알고 있다. 원래라면 닿을 수조차 없는 것에 욕심을 낸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낸 것은. 평생을 남을 위해 살아왔으니 단 한번의 스스로를 위한 욕심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한 번이라면, 딱 한 번 뿐이라면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와 함께하기를 바랐다. 그 뒷모습을 좇는 것이 아닌 옆에서 나란히 걸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리하여, 종내엔.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것을 보면, 역시나 자신으로서는 바라서도 안 됐던 모양이다. 그렇기에 다짐한다. 시작이 자신이었으니 끊는 것도 자신이라고.

아처가 그런 생각으로 땅을 파고 있을 동안 랜서는 그냥…… 아주 단순히, 당황스러웠다. 그게 끝이다. 자신들은 서번트다. 이미 죽은 자들이며, 현재 현계하고 있는 것은 기적에 가깝고, 언제 퇴거할지도 모르고, 이 모든 일들이 ‘기록’으로서 좌에 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까고 말하자면 이 모든 것들은 높은 확률로 버려지는 기록이 될 테다. 결국 남은 것은 말로도 남지 못한 기약이겠지. 자신조차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저 궁병이 이 사실들을 모를까? ‘그’ 궁병이? 차라리 세이버가 내일 단식한다는 것이 더 현실적이었다.

그러니 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저 궁병이, 결혼 같은 것을 입에 담지도 않을 궁병이, 이렇게까지 비합리적인 일을 자발적으로 한다는 게. ……뭐, 사실, 아예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자연스레 한숨이 나왔다. 여기에서 말하자면, 이 한숨은 그냥 심호흡 같은 것이었지 누군가를 비난…… 경멸…… 뭐 그런 의도를 담은 한숨이 아니었다. 그래서 랜서는 자신의 한숨 한 번에 세 명이 동시에 움찔거릴지 몰랐고, 그 모습을 보고 조금 웃긴다고 생각한 것도 그리 큰 잘못을 아닐 테다. 다만 그것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아 랜서는 일단 상황을 수습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처음-당연하지-이라…….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할지 모르겠기에 말을 고르고 있던 찰나, 랜서보다 아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랜서. 억지로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다.”

음, 저딴 말을 할 줄 알았다면 그냥 입을 틀어 막아버리는 건데. 아처의 말 한마디에 양쪽에서 덜컹거린다. 랜서는 아처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솔직히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조금 궁금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든 자기 복장을 터트리겠다만은.

“어차피 너도 이런 걸 원하는 건 아닐거다.” 참 나, 이것 봐라. 남의 속도 모르고 저딴 말이나 내뱉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여기서 전부 정리하도록 하지.” 언제나 그랬다. 상대방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림짐작으로 단정 짓고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내 어리광에 어울려줘서,” 어리광은 뭔 놈의 어리광. 그게 어리광이라면 세상 사람 모두가 응석쟁이가 될 텐데.

아처의 말이 뚝 끊긴다. 그 무엇도 아닌 갑작스레 목소리가 안 나오게 됐기 때문이다. 그런 아처에 린과 시로가 당황했다. 아처 본인 또한 당황해하는 것을 보면 의도치 않았던 모양이다. 린도, 시로도, 아처도 하지 않았다면, 남은 것은…….

자연스레 랜서에게 시선이 쏠린다. 랜서는 시큰둥한 얼굴로 들어 올렸던 손가락을 내렸다. 그 궤적을 따라 빛무리가 반짝였다.

“침묵의 룬이다. 사람 복장 터지게 하지 말고, 그 입 좀, 다물어.”

아플 리 없는 머리가 아프다. 속도 조금 쓰린 거 같기도 하고.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전부 다 제쳐놓고 한 대만 때려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난 이 시대를 살아가게 된 지성인이니까. 주먹으로 모든 걸 해결하던 시대는 저물었고, 그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까……. 나중에 때리자. 그리고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자연스레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여전히 세 쌍의 눈동자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에 떠올랐던 말 전부를 골라낸다.

“내가 왜 이런 걸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지도 궁금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만. 그 전에 하나만 묻자, 아처.” 빛이 문자를 이루다가 사라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짓을 한 거냐?”

공기가 얼어 붙었다. 아처의 시선이 허공을 방황하다 아래를 향한다. 자연스레 고개도 툭 떨어졌다. 꾹 다물린 입술이 퍽이나 열릴 듯싶었다. 아, 이거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신호군.

이 정도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이런 사소한 버릇 같은 것이 그랬다. 랜서는 크게 심호흡했다. 좋아,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게 된 지성인. 화내지 말 것. 아처 저 새끼만 있는 거면 몰라, 여긴 꼬맹이랑 아가씨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화내지 말고…….

아니근데저새끼가먼저.

왜 이렇게 화를 내냐고 묻는다면, 그래. 저 새끼가 한두 번 이런 거면 몰라, 매번 이랬으니 그렇다고 하면 대답이 될까. 솔직하게 털어놓으라고 해도 조개 마냥 입을 꾹 다물고 전부 삼켜낼 뿐이다. 지금까지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털어놓는 게 마냥 쉬운 일도 아니거니와, 애인이라고 해서 꼭 모든 걸 터놓고 지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까지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청혼하겠다고 했으면서, 그래서 꼬맹이랑 아가씨까지 끌어들였으면서. 전부 다 망했으니까 깔끔하게 없던 일로 하고 퉁치자고? 내가 그걸 납득할 거 같냐? 그렇구나, 그럼 없던 일로 할까, 하고 전부 다 넘길 거 같냐고.

“웃기지 말라 그래.”

그러니 이 정도는 봐주길 바란다. 멱살이라도 잡아야 이 감정을 적당히 통제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팔에 힘을 줘 끌어당기자 아처의 몸이 부자연스레 떠올랐다. 지지대를 잃어 방황하던 다리가 겨우 제자리를 찾아 선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지만, 괜찮다. 싸우지 않아. 그냥, 정말 그냥.

“궁병. 내 인내심이 별로 없다는 건 네가 제일 잘 알거라 믿는다.” 대화로 해결할 거다. 정말로. 이 새끼가——

“솔직하게 말해. 어쭙잖은 거짓말 하지 말고.”

전부 털어놓는다면.

그리고 다시 위기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아처는 자신의 멱살을 잡은 랜서의 손목을 붙들었다. 일단 이걸 놓고 얘기하자는 무언의 신호였지만, 랜서는 그것을 알아들었으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시선을 굴려 눈을 마주한다.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선득하게 빛났다. 눈을 내리깔아 시선을 피하면 그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처는 한숨을 삼켰다. 무얼 하든 이 상황을 타파하는 것이 먼저였다.

“내가 할 말은 없다, 랜서. 적당히 하고 이 손부터 놓지 않겠나. 린과 애송이가 보고 있다. 너는 괜찮겠지만, 난 이 이상의 추태를 보일 생각은,”

“아니.” 그 말을 끊어낸 건 린이었다. “그럴 필요 없어. 우린 이만 돌아갈 테니까.”

어느새 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 결심의 때와 닮아 있었다.

“——토오사카!”

시로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린을 올려다봤다. 그 속에는 많은 말들이 함축되어 있었다. 린이 시선을 돌려 시로를 바라보자,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힌다. 원망스레 바라보는 그 눈빛의 함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온전한 원망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게 그답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미련하다는 생각도 들고……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입안이 썼다. 시로가 무언가를 말하려 입술을 달싹였지만, 린이 그보다 더 빨리 입을 열었다.

“괜찮아.”

그리 말하며 옅게 웃는 얼굴에 안심하게 되는 것은 어째서일까. 시로는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아처의 마스터인 토오사카와 다르게, 자신은 랜서의 마스터도 아닌 완전한 제 3자였다. 결국 이 일에 대해 말을 얹을 권리는 없는 것이다.

설령——미래의 자신이라 하더라도.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뜬 시로가 머뭇거리다 린을 따라 느리게 일어섰다.

“그럼——”

“아가씨.” 랜서가 조용히 린을 불렀다. “금방 끝나. 밖에서 기다려 줄 수 있을까.”

시선이 얽힌다. 랜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단단한 푸른빛을 마주하며, 언젠가의 그때처럼 웃어 보였다. 린은 그런 랜서를 가만히 바라봤다. 랜서를 잘 알지 못 하지만, 그래도 그가 한 번 한 말을 지킬 거란 건 알고 있다.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매너 없는 남자들 같으니라고.

“숙녀를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예가 아니니, 빨리 끝내도록 하세요.”

그러며 휙 돌아 걸어 나가자, 시로 또한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 점차 작아지는 발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랜서는 린과 시로가 나간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 눈동자가 아처를 꿰뚫는다. 그 모습이 언젠가 자기 심장을 뚫었던 창을 연상케 해 아처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을 깨트린 것은 랜서였다.

“이제 너와 나뿐이구나, 궁병. 설마 지금도 추태 타령을 하는 건 아니겠지. 우린 이미 서로의 모든 걸 본 사이잖냐, 엉?”

침묵이 이어진다. 아처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는다. 랜서는 머리를 헤집으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고집을 부릴 건지 모르겠다. 강제로 입을 열게 할 수도 없으니 더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 정도로 기다려 줬으면 충분하지 않나?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앉아라. 서서 할 이야기는 아닌 거 같으니.”

그 말에 아처가 머뭇거리다가 자리에 조심스레 주저앉았다. 방은 깜찍하고 큐트하게 꾸며져 있는데, 정작 그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사납다 못해 살벌했다.

랜서는 비딱한 자세로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저쪽이 입을 열지 않는다면 일단 이쪽이라도 입을 열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만, 랜서는 머리를 굴리기보단 몸을 움직이는 타입-몸이 좋으면 머리가 고생 안 한다는 말의 훌륭한 표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이었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보지 못한 탓도 있었다. 그가 아는 이들은, 한 번의 발산 후 훌훌 털어버리고 일어섰으니.

절대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돌린 아처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본다. 손길이 닿자 움찔거리는 꼴이 퍽이나 우스웠다. 팔이 툭 떨어졌다. 눈을 슬 굴려 바라본 창밖은 밤이 되어가는 데도 여전히 밝았다. 그러고 보니 현대에서는 빛 공해 때문에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던가.

과거, 별은 길 잃은 것들을 인도해 주는 길라잡이였다. 그런 별이 잘 보이지 않는 현대에서, 제 앞에 있는 놈처럼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이 많은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일까. 시선을 돌려 아처를 바라봤다. 자신을 보고 있었던 건지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눈을 내리까는 모습이 제법 황당했다. 아, 정말이지, 허술한 놈 같으니라고.

“……궁병. 넌 항상 그렇지. 언제나 겁쟁이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가. 마주하기보단 회피하고 외면하기를 선택하지. 후회에 잠겨 앞도 제대로 못 보고, 꼬맹이를 죽이면 전부 해결될 거라 믿고. 미련하기 짝이 없어.”

모순적이게도, 아처는 미래를 바라 보고 나아가고자 했기에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미련에 잠겨 살아 길을 잃고 방황하면서도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로 인한 종착점이 무저갱 속이어도 괘념치 않는다. 목적을 이루는 것, 그것만이 그가 살아가는 이유였으니.

나아가면 갈수록 어긋나고, 망그러져서, 그 산란한 파편들 끌어모아 얼기설기 붙여두어, 빠진 게 있다면 메꾸고, 그렇게 완성된 존재가 아처였다. 그렇게 완성된 존재는 시작점 때의 그 존재와 온전히 같다고 할 수 있는가?

“목적을 위해선 더러운 일도 서슴지 않고, 긍지가 결여되어 있어. 비열하고, 비겁하고, 치졸해. 난 그런 네놈을 싫어했다.”

아, 그래, 그랬었다. 비꼬거나 사람 화 돋구는 솜씨는 일류 중의 일류, 아무렇지도 않게 개라고 비하하기나 하고, 근성도 긍지도 없고 목적을 위해선 방식을 가리지도 않고, 재수 없는 얼굴로 너구리같이 굴기나 하고. 자신이 싫어하는 부분만 가득 담아 만들어낸 것 같은 녀석이었다. 아, 싫다. 정말 싫다. 그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몸서리치게 될 정도로 싫었다. 그러다가도 이게 그 녀석이 살아온 방식이겠지, 하고 수용하고서는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어느 날의 실수, 그리하여 이어진 패스를 통해 보게 된 꿈. 서번트는 꿈을 꾸지 않는다. 그러니 이것은 기록을 지켜보는 것과 같다. 그래, 마치 영화처럼 보게 되는 것이다. 퇴장은 성립되지 않는 영화를.

많은 것들을 보았다. 익숙한 것도 있었고, 익숙하지 않은 것도 있었으며,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끔찍한 장면들도 많이 지나갔다.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가고 나서야 끝내 보게 된 광경은.

붉은 하늘, 움직이지 않는 톱니바퀴, 허허벌판 속 무수히 꽂힌 검과…….

그곳에 있는 단 한 명의 생명.

아, 정말이지. ■■한 말로가 아닌가.

종내엔 이해하게 된 것이다. 왜 이렇게 마모되었는지. 왜 이리 삐뚤어지고 꼬인 놈이 되었는지. 왜 가끔 길 잃은 아이처럼 보였는지. 전부 알게 되어서, ■■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어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되어서, 그만.

그날 새벽, 한 번 눈을 뜨고 나면 다시 잠들 수가 없어 곤히 잠든 아처를 바라봤다. 쉽게 볼 수 없는 온화한 표정이었다. 자신을 보기만 하면 미간을 팍 찌푸리고 노려보기나 하니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둥근 이마가 그 존재를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졌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뭐야, 그냥 꼬맹이잖아…….’

무심코 호흡처럼 내뱉고 만 생각. 정신적인 성장을 겪지 못한 어른은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정신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당한 이는 어떤 방식으로 대해야 하는가. 몸이 성장을 마쳤다고 해서 정신 또한 성장을 마쳤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런 이들을 이끌어주는 것은 누구지. 아니, 애초에. 이끌어줄 이는 있긴 한가?

이 모든 것은 그 녀석이 한 때의 긍지를 품고 걸어온 길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것에 대한 어떠한 감정도 품어내지 않겠다. 정제되지 않은 어설픔은 모욕으로 이어지기에, 전부 잘라냈다. 그것들을 모아 마음 한구석 깊은 곳에 처박아뒀다. 다시는 꺼내보지 못 하도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라내지 못한 단 하나가 있었으니, 그 때문에 그를 예전처럼 대하기가 어려웠다. 괜한 감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버리지 못한 것은, 아마도——.

아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아처의 얼굴에 조심스레 내려앉는다. 손으로 햇빛을 가려줄까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아처는 눈을 떴다. 깜박, 깜박. 눈꺼풀의 움직임에 따라 흰 속눈썹이 흔들렸다. 온전히 뜨여진 눈동자를 마주하고 나면 절로 온화한 미소가 지어졌다.

‘……랜서?’

‘좋은 아침이다, 에미야.’

그날의 햇볕은 같잖게도 따뜻했다.

이후 아처를 대하는 태도가 둥글어졌다는 건 자각하고 있다. 주변에서 이상하다는 듯이 보는 것도, 그 변화에 그 누구도 아닌 아처 본인이 가장 당황했던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아라. 이리도 어리고 미숙한 이를 어찌하여 예전처럼 대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은 그 얼굴을 쓰다듬으며 했던 다짐이 있었으니.

근데 이놈이 그 다짐을 무색하게 만드니 뭐 어쩌란 말인지……. 랜서는 잠깐 제 앞의 아처를 꼴아봤다. 싫어했다고 하자마자 눈에 띄게 축 처진 모습이 웃기고…… 귀엽고…… 황당하고…… 짜증 나고…… 그냥진짜한대패고시작하면안되나……. 한숨이 끊임없이 나온다. 어째 평생 내쉴 한숨을 다 내쉬는 기분이었다.

“너는 왜 네 욕망에 솔직하질 못하냐…….”

얼굴을 쓸어내린다. 억누르고만 사는 건 좋은 것은 아니다. 우연찮게도 랜서 또한 해본 일이니 알고 있었다. 그렇게 살다가 망가지는 것은 결국 자신이다. 랜서는 그것을 깨닫고 발산하며 살기를 택했다. 하지만 아처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억누르기를 택했다. 그 선택이 아처와 랜서의 간극을 만들었고, 그 간극은 메워지지 않는다. 영원히.

“쿠 훌린, 나는,” 머뭇거리던 아처가 겨우 입을 열었다. 랜서는 고개를 들어 아처를 바라봤다. “나는……,”

어렵게 열린 입이 다시 닫힌다. 랜서는 인내심을 가져보기로 했다. 저놈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드는 것은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 만약. 아처가 모든 것을 털어놓을 용의가 있다면 랜서는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었다. 랜서는 일말의 기대를 담아 아처를 바라봤고, 아처는.

“……단순한 변덕이다.” 아.

“그것뿐이야.”

기대한 내가 바보인가.

“그러니 너도 신경 쓸 필요 없다.”

아니, 기대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쟤랑 내가 어떤 사이인데.

“이건, 그냥, 아주 잠깐의 헤프닝이라 생각하고……,”

아니다, 그냥…….

정신을 차리면 아처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멱살까지 잡힌 걸 봐서는 성질을 못 이겨 아처를 들이덮쳤나 보다. 아, 그래도 때리진 않았네. 한 대 때렸으면 좋았을 것을. 한순간의 감정에 못 이겨 충동적으로 행동했으면서, 머리 한구석에선 냉정히 생각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너는,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 거냐?”

“뭐?”

“날 신뢰하지 못하는 거냐고 물었다. 네가 안고 있는 그 어떤 것도 내보이지 않을 정도로, 난 신뢰받고 있지 않은 거냐고.”

울고 싶은 건가? 아니, 그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일로 울기보단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더 났다. 근데 할 수 있는 일을 못 찾겠으면 어떡하지. 아무리 고민해 봐도 해답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전부 말해주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네가, 일부라도 내비치길 원했다. 그게 아주 작은 파편일지라도, 나는, 괜찮았다고…….”

이렇게 아픈 것은 어째서인가. 빛바랜 기억 속의 어떠한 고통도 이보다 아프지는 않을 테다. 전부 다 토해냈음에도 갑갑한 것은 어째서인가. 보일 수 있는 것 전부를 보였고 말할 수 있는 전부를 말했다. 그럼에도 해소되지 않는 이 갑갑함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아, 아닌가. 말하지 않은 것이, 딱 하나, 있구나.

“에미야, 너 말이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결코 담고 싶지 않았던 것. 이 한마디가 아슬아슬하게 쌓아 올린 모든 걸 무너트릴 걸 알았기에, 결코 입에 담지 않으려고 했던 말이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전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끝난다면, 확인 정도는 받아도 되지 않겠는가.

“날 사랑하긴 한 거냐.”

시야가 흐릿해져 간다. 아처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울고 있단 걸 깨달았다. 최악의 전개다. 전부 엉망이 되었는데,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왜 아처의 앞에서는 감정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건지.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좋은 표정을 아닐 거다.

널 이끌어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다짐했었다. 켈트의 마술사는 드루이드다. 그렇기에 감히, 내가 그 역할을 자처하겠다고 생각했다. 어설프게나마 현자의 흉내를 내며 너를 이끌어, 네가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걸 돕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 결과가 어떻지? 이끌어야 할 놈은 이끌지도 못 하고, 스스로조차 길을 잃고 헤매는 꼴이라니. 한심하다 못해 비참했다.

널 사랑했다. 그리고 너도 날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너는 그저, 거절하기 어려웠던 것이었나. 내 고집에 장단을 맞춰주고 있었을 뿐이었나.

그도 그럴 것이, 에미야.

넌 그 시간 동안 단 한 번을 사랑한다 해주지 않았잖아.

영웅은 태어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태어나 영웅으로써 자라는 것이다. 이 말인즉슨, 영웅의 본질 또한 인간인 것이다. 그러니 나 또한 영웅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호흡이 불안정하다. 힘이 빠진 손에서 옷깃이 흘러내렸다. 천천히 숨을 토해내며 몸을 옹송그렸다. 가슴께에 이마를 툭 기대면, 느린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보이는 것은 암흑이다.

“마지막 기회다, 아처. 무슨 말을 해도 괜찮아.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를 말해. 그게 무엇이든 전부 받아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각오는 되어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또한 있다. 이 녀석의 생각을 알 수 있다면, 무엇이든 감내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딱 한 가지 두려운 것이 있다고 하면.

“사실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으니까…….”

허망할 정도로 가냘픈 목소리였다.

그리고 다시……

 

아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눈에 익은 천장이 이질적이다. 머리가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랜서가 흘려낸 것 전부가.

널 사랑하냐고 물었던가. 그만한 우문도 없다. 어떻게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 이만치 빛나는 이를, 다정한 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냐고. 애매한 우상은 질투의 대상이 되지만 범접할 수 없는 우상은 동경이 된다. 네가 그랬다. 이루어낸 업적도, 걸어온 자취도, 너무나도 눈이 부셔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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