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타입

230311 L님 리뷰 커미션

<얌전한 천룡인이 먼저 단두대에 오른다>에는 주인공 ‘셰헤라자드 성’을 둘러싼 여러 인간군상이 등장한다. 모종의 이유로 인해 소년으로 환생한 셰헤라자드. 다양한 사정을 가지고 그 또는 그의 능력을 노리는 주변 인물들. 죄책감과 슬픔, 그리움과 착각. 이번에는 인간군상, 작품 내에서 강조되는 세세한 포인트, 작법 등을 중심으로 읽어보고자 한다.

 

사보는 작품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셰헤라자드의 주변 인물이다. 정체를 알면서도 친애했지만 결국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기에 그가 보이는 첫 번째 감정은 절망이다. 두 번째로 등장하며 사보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인물은 드래곤과 이완 코브이다. 셰헤라자드의 희생을 알면서도 방관을 택한 드래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절망하는 이완 코브. 두 사람의 반응은 정반대지만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 이 세 인물의 대비는 작가가 해석한 인물상을 도드라지게 강조한다. 같은 상황에 처해있지만, 성격과 경험, 입장이 다르므로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셰헤라자드가 소년으로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발 벗고 나서 기뻐하는 이완 코브, 슬픔에 젖은 드래곤, 이제는 놓치지 않는다며 막무가내로 나서는 사보.

 

혁명군 진영은 대체로 이런 모습이지만, 흰 수염 해적단이나 붉은 머리 해적단은 어둡고 깊은 감정이 강조된다. 단순히 소년을 재미있게 여기는 에이스 같은 인물이 있는 한편 소년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애증의 편린을 보이는 하루타, 사황의 충돌이라는 일촉즉발 상황을 초래한 샹크스. 특히 하루타와 소년에 대해서는 작가가 많은 분량을 안배했는데, 연재분을 살핀 결과 하루타의 심리에 대해 따로 적어놓은 것까지 발견했다. 이 글에 따르면 하루타는 감정적으로 고착화된 인물이다. 유능하지만 내면의 성장을 제때 이뤄내지 못한, ‘사회화된 결핍’의 형태를 보인다. 이것은 셰헤라자드의 자극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보이며, 결국 완벽히 해결하지 못하고 그가 흰 수염 해적단을 떠남으로써 명확한 결말을 내지 못하였다. (정확히는, 하루타의 트라우마는 가족애를 겉에 씌웠을 뿐 올바른 방향으로 해소되지 못하였다)

샹크스 그리고 그가 ‘포시어’에게 품은 감정은, 셰헤라자드(소년)와의 대화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둘은 소년이 ‘환생’하기 전부터 친한 친구였고, 혁명군의 암호를 통해 만날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샹크스는 이전부터 셰헤라자드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고 독백하기도 한다. 셰헤라자드가 그의 마음을 알고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키워드에도 적혀있듯, 착각을 소재로 한 작품이기 때문에) 알고 있다면 그것을 이용할 것인지, 당황할 것인지 기대되는 바다.

 

이렇게 셰헤라자드를 가족처럼 여기면서,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두 세력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그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이 사보라고 생각한다. 사보는 드래곤과 이완 코브만큼 셰헤라자드에 대해 잘 알고 있지는 않지만, 그를 애칭으로 부를 만큼 친애한다는 사실을 21화에서 알 수 있다. 그런 한편 샹크스나 하루타만큼은 아니지만 어떤 집착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음을 역시 21화에서 알 수 있다. 이 사실에 미루어 생각해 봤을 때, 작품의 키맨은 사보가 아닐까. 셰헤라자드가 본래 속한 진영인 혁명군의 인물이면서, 드래곤과 이완 코브가 숨기고 있는 사실을 독자의 눈높이에서 파낼 수 있고, 23화와 24화에 언급된 사실에 따르면 거의 3년 동안 자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5화, 26화에서 토트랜드로 향하는 셰헤라자드를 수행하는 것을 보면 먼 시일이 지나지 않아 사보와 셰헤라자드 사이의 갈등이 터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26화부터 등장하는 새로운 인물은 샬롯 푸딩이다. 셰헤라자드를 대하는 푸딩의 태도는 이질적이다. 혁명군 진영처럼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지도 않고 샹크스처럼 집착을 보이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소년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대하지만 순진한 척 대응하는 소년에게 서서히 마음을 여는, 이전에는 없던 인물상이다. 이후 연재되는 분량을 보아야 알겠지만 푸딩의 비교적 색다른 태도를 작가가 머지않아 조명할 것으로 보인다. 감정선은 동떨어져 있지만, 흰 수염 해적단의 하루타와도 유사한 전개다.

 

이후에는 어떤 인물이 샬롯처럼 등장하여 셰헤라자드와 엮일 것인지 기대되는 바이다.

 

셰헤라자드를 둘러싼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마무리한 것 같으니, 이제 세세한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작품에 대해 작가가 제시한 키워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착각계’, ‘병맛물’, ‘집착물’, ‘브로맨스’, ‘로맨스’. 브로맨스와 로맨스는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는 태그다. 그렇다면 착각계는 어떨까. 등장인물의 착각과 오해를 작품의 추진제로 삼는 경우를 착각계라고 흔히 칭한다. 만화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 고전 애니메이션 중에서는 <무책임함장 테일러>, 라이트 노벨 시장에서 크게 히트한 <오버로드>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착각계’라고 칭할 수 있는 부분은 뭐가 있을까? 하루타와 샹크스, 두 예시가 있다. 하루타는 ‘착각’까지는 아니지만 셰헤라자드를 지나치게 과대 해석하고 있고, 샹크스는 통상적인 ‘착각계 작품’의 클리셰를 따라간다. 기성 작품에 빗대자면 <오버로드>의 데미우르고스 같은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데미우르고스는 지극히 평범한 인물인 주인공을 과대평가하여, <오버로드>의 착각계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장치로서의 인물이다. 샹크스 역시 데미우르고스처럼 지혜로운 인물이면서, 집착에 눈이 가려진 것인지 셰헤라자드의 능력과 심상을 지레짐작하고 앞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장치를 배분하는 것이 착각계의 묘미이자 가장 어려운 점이다. 주인공은 평범하거나, 평범하지 않아도 비교적 소시민적인 면모를 보이나, 주변 인물들은 그 언행을 해석한 결과 각자 과격한 반응을 보인다. 주인공을 찬양하거나, 의심하거나, 질투하거나. 작가는 샹크스라는 인물을 통해 셰헤라자드의 능력을 강조함과 동시에, 셰헤라자드의 진정한 심상을 ‘굳이’ 조명하지 않음으로서 ‘정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독자에게 여러 상상의 여지를 준다.

 

착각계 다음의 키워드는 병맛물이다. 병맛물이란 무엇인가? 이 작품에서는 가끔 맞춤법을 파괴하거나, 기본적인 문법을 지키지 않은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정말로 맞춤법을 모르거나 문법을 몰라서 그런 문장을 사용했을까? 당연히 아니다. 여기서 병맛물의 성격이 드러난다. 인터넷에서 여러 의미가 혼재해 있지만, 병맛이란 ‘맥락이 없고 형편없으며 또한 어이없음’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검색 등으로 금방 알 수 있다. 고의적 맞춤법 및 문법 파괴로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캐릭터가 전혀 하지 않을 행동을 하거나. 이런 속성이 극명히 드러나는 장면은 샹크스와 셰헤라자드가 술을 마시며 대화하는 장면이다. ‘ㅋ’ 글자로 격한 감정을 표현하거나, 애교를 부리는 등.

 

“대충 여섯 명은 쓰러뜨렸는데 막타 남았을 때 제가 먼저 기절해서…”

“ㅋㅋㅋㅋ 응.”

“깨보니까 모비 딕.”

“엌ㅋㅋㅋㅋㅋㅋㅋㅋ”

“눈 앞에 불사조 마르코.”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루타는 고문할 기회만 노리고…”

“으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들이 끌고 왔으면서… 진짜 미친 거 아닙니까?”

“잠깐만ㅋㅋㅋㅋㅋㅋ 나 술 좀ㅋㅋㅋㅋㅋㅋ 마시겤ㅋㅋㅋㅋㅋ”

본문 발췌

 

앞의 키워드는 비교적 분석하기 쉬웠다면, ‘집착물’은 좀 다르다. 명백한 장르명을 지정한 것과 달리 특정한 감정에 장르를 뜻하는 물(物)을 붙인, 비교적의 신조어이기 때문이다.

 

집착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림’. 고착이나 애착 등이 유의어로 사용되며, 마음이 쏠리는 당사자의 이기적인 마음이 반영되는 감정이다. 감정이란 매우 주관적이기에 어떤 사람은 이것이 집착물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걸 부정하며 저것이 집착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작품의 경우, 어느 한 감정을 ‘집착’이라고 정의하기보다 여러 감정을 집착이라고 정의하는 경향을 보인다. 드래곤과 사보의 미련도, 이완 코브의 다정함도, 샹크스의 진짜 ‘집착’도, 이 작품에서는 이기심으로 비롯된 집착인 것이다, 그렇다면 셰헤라자드는 집착에 둘러싸인 불행한 인물일까? 셰헤라자드 주변에는 이기적인 인물상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이기심은 단순히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기에, 너무 지나치거나 부족하지만 않으면 상대에게 폐를 끼칠 일도 없다. 이완 코브가 셰헤라자드를 친애하는 것처럼 셰헤라자드에게 도움이 되고 의지가 되는 인간관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키워드에 대한 이야기는 이만 접고, 첫 번째 리뷰에서 다루지 않은, 작품 속 ‘도구’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선과 채색, 인체, 그리고 그림체 따위를 따지듯 글을 쓰는 사람은 문법과 소재, 그리고 문체 따위를 따진다. <얌전한 천룡인이 먼저 단두대에 오른다>를 쓰면서 작가가 사용한 도구는 무엇일까?

 

자연히 넘겨서 볼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춘 종이책과 달리, 요즘 떠오르는 웹 소설은 핸드폰 같은 작은 화면에서 편하게 볼 수 있는 구조를 채택한다. 작은 화면에서는 종이책같이 긴 문단을 읽기 힘들다. 문장은 짧고 파편화되어 쪼개진 편이 유리하다. 이렇게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문단, 다른 매체의 경우 짧은 시간의 드라마나 크고 여러 컷으로 이루어진 웹툰. 과자를 먹듯 간편하게 소비할 수 있는 문화를 스낵 컬처라고 부르며, 조아라는 이런 형태가 극대화된 연재처이다.

 

셰헤라자드 성의 희고 단정하던 모습도 곧 수없이 던져지는 오물들을 맞으며 더러운 쓰레기통처럼 변해갔다.

그래. 우리는 이걸 원한 거야.

그저 폭력에 굴해 단죄당하는 것이 아닌, 민중의 손에 끌어내려지는 천룡인의 모습을. - 본문 발췌

 

문단이 비교적 긴 1화조차 두 줄을 넘지 않는다. 문장 사이마다 대사와 의성어와 의태어로 포인트를 주기도 한다.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이 어떤 플랫폼을 통해 연재하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고, 그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서술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매우 옳고 지극히 영리한 판단이다.

 

지금까지 셰헤라자드를 둘러싼 인간군상, 작품의 세세한 포인트, 작가가 제시한 키워드, 내재화된 서술 방식에 대해 분석하였다. 좀 더 많은 분량을 받았다면 더 많은 포인트를 집어낼 수 있었겠지만 26화와 외전이라는 분량은 아쉬울 정도였다. 그렇다고 작가분을 무리시킬 권리는 없기에 그저 일상과 건강을 챙기며 건필하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공지를 보면 연재를 대학 생활과 병행하고 있는 것 같고.

 

마침 오늘 분을 읽었지만, 아쉽게도 짧은 외전이었기에 본편의 분석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물론 재미있었다)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작가가 앞으로 얼마만큼의 전개를 구상했는지, 셰헤라자드는 왜 남자가 되었는지, 앞으로 얼마의 갈등이 셰헤라자드 앞에 펼쳐질 것인지…26화에 달하는 분량을 보며 셰헤라자드 성에게 정을 붙였기 때문에, 모쪼록 잘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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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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