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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탐
“출발하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하지, 알하이탐 서기관. 정말 동행할건가?”
“벌써 세 번째 물어보고 있다만, 그래. 갈 거야. 타이나리에게 부탁받은 일도 있고.”
사이노는 마뜩찮은 낯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이 이상 설득이 무용하다는 것은 그 스스로도 느끼고 있을 터였다. 챙겨온 가방에 수통을 집어넣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어색한 침묵 사이를 깨트리듯 울렸다. 사이노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체념한 듯 창을 고쳐잡았다. 알하이탐의 소소한 승리를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폰타인에서 일어났던 범람의 재앙이 완전히 해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건 이틀 전의 일이었다. 대풍기관의 소집령도 당일 이루어졌다. 나히다는 멜모니아 궁의 밀랍 인장이 찍힌 소포를 손에 들고 사이노를 반겼다.
사이노는 정선궁 안쪽의 부드러운 백금빛 길을 조심히 걸었다. 쿠사나리 화신 구출 작전 이후, 수메르가 모든 혼란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궤도에 들어서고 나서, 수메르의 내정에 대한 회의에 참석하고자 이곳을 몇 번 더 방문한 적이 있던 건 사실이지만 화신과 독대한 경험이 많은 건 아니었다. 그는 수메르에 퍼진 초목만큼이나 부드러운 바닥에 부복한 채 눈앞의 존재에게 경외를 표했다.
“위대한 쿠살라 다르마, 쿠사나리 화신을 뵙습니다.”
“어머, 그 인사는 정말로 매번 해 주는구나. 우선, 와줘서 고마워, 사이노. 급하게 부른 건데 바로 방문해 주어서 기쁘네.”
“급한 용무라 들었습니다. 지금은 그다지 바쁘지 않은 시기이기도 하니까요.”
나히다가 소리 없이 웃었다. 사이노는 내려두었던 창을 손짓 한 번으로 흩뜨려 숨기고는 몸을 일으켰다. 어린아이의 외형을 한 그의 신은 그가 과할 정도로 예의를 차리는 것에 개의치 않는 듯했다. 기실 신을 몸에 받아들인 이로서 신의 초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노의 입장에서는 그래주는 것이 더욱 편했다. 아이답지 않은 –어쩌면 가장 현명한 자와 닮은-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걸리나 싶더니, 다정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멜모니아 궁에서 연락을 받았어. 폰타인 수뇌부가 예언 이후로 정상화된 것 같더라고.”
“관련된 소식에 대해선 전해들었습니다. 베이다 항구의 풍기관사로부터 최근 폰타인 당국으로 수출되는 상품의 품목량이 증가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모를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정말 소식이 빠르네. 오늘 부른 건 그것 때문이 아니긴 하지만….”
신이 다시금 소리없이 웃었다. 사이노는 얌전히 이어질 뒷말을 기다렸다. 말을 흐린 뒤 청자에게 잠시간의 틈을 주어 청자가 홀로 유추하고 혼란스러워할 기회를 주는 건 그녀의 작은 장난들 중 하나였다. 어린 신은 호기심이 많았고 그만큼 어린아이다운 장난도 제 측근에게는 서스럼없이 치곤 했다. 화신은 그걸 스스로 답을 구할 시간이라고 했지만 그가 생각하기엔 온 수메르에서 감히 풀신의 말을 가로챌 간 큰 이는 없을 것 같았다.
화신에 대한 불경죄로 경고를 받았던 이의 적절한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는 귀여운 얼굴로 그렇지 못한 말을 천천히 내뱉었다.
“바다이슬 항구 쪽 밀수출입을 업으로 하는 도금여단 세력들에 대해 이번 일을 계기로 힘을 빼놓을까 해. 이번 범람으로 그들 역시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 있기도 하고, 항구 쪽에서도 꽤 오랫동안 골을 앓던 모양이야. 이 일에 대해, 풍기관으로부터 정식으로 협력을 요청하고 싶어.”
“확실히, 그쪽도 더 방치해둘 순 없겠죠. 그쪽을 제대로 막아둔다면 사막에서 간헐적으로 벌어지는 불법 밀수품 거래도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맞아. 그래서, 그 일에 대한 책임자로 대풍기관이 가주었으면 해. 국경 부근의 문제인만큼 폰타인 당국과 마찰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인력 보충이 필요하다면 정식으로 서면을 제출해 줘.”
“아, 제안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풍기관사 내의 이들로 충분하기도 하고, 우림의 학자들은 사막의 기온차를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소수의 풍기관들만 대동할 생각입니다.”
“네 판단을 의심할 생각은 아니지만, 정말 괜찮겠어? 밀수품의 규모가 얼마나 될지, 그 잔당세력이 얼마나 있을지는 아직 이쪽에서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어. 아루 마을에서 지원을 요청한다고 해도 시간이 제법 걸릴 거야.”
사이노는 희미하게 웃었다. 눈앞의 어린 신은 그가 하룻밤만에 단신으로 도금 여단 백여 개를 ‘처리’한 일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알고 계시더라도 그 특유의 상냥한 성정이 걱정으로 나온 것이겠지만. 사이노는 재차 제안을 거절하고 정선궁을 나왔다. 바다이슬 항구까지 가는 최단 경로는 사막을 횡단하는 길이었으므로 필요한 물건과 인력을 뽑으려면 한시가 급했다.
“…… 네가 가겠다고?”
“그래. 난 사막의 일교차에도 쉽게 적응할 줄 알고, 저 풍기관들보다는 역사적 지식이 풍부해. 밀수품의 경중을 따져 중형의 기준도 매길 수 있고.”
“그건 우리 애들도 할 수 있어.”
대서기관이 동행을 요청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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