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행자 1
인포익제 / 미즈키 록라 if 언젠가의 에젤과 페데리코
이제 책을 읽을 순 없겠구나. 에젤은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채 그런 같잖은 생각을 했다. 멍하니 올려다본 회색 하늘에서 희멀건 것이 에젤의 피부 위로 나풀나풀 내려왔다가, 곧 녹아 사라졌다. 그는 이대로 있다간 저 희멀건 것이 제 피부에 닿아도 녹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그러면 완전한 종말인 것이다. 가열된 탄피가 총신에서 분리되며 땅에 떨어져 생기는 금속음도, 화약이 폭발하면서 난 파열음도, 라테라노인에게 있어 떼어놓으려야 놓을 수 없는 것들 모두가 하얗게 변해 사라지는…….
"에젤."
달갑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에젤은 짜증을 내거나 미간을 찌푸린 대신, 흐리게 웃으며 오른손을 위로 뻗어 상대의 뺨을 매만졌다. 차갑게 얼어붙은 제 손이 온기에 닿는 감각이 좋아서 킥킥대며 웃자 상대는 왜 웃는지 모른단 낯으로 미간만 조금 좁혔다.
"좋은 아침이에요, 페데리코 선배님."
멀리서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가벼운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비록 수습 집행자 동기들 사이에서는 가벼운 축에 속하긴 했지만- 페데리코는 눈에 흠뻑 젖은 에젤을 손쉽게 둘러메고는, 그의 무릎까지 쌓인 눈밭을 척척 헤쳐 나갔다. 에젤은 그제야 제 몸이 추위에 떨고 있었을 깨닫고는, 괜히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못 본 사이에 페데리코는 새로운 제복을 받았는지 손끝에 닿는 것은 투박한 공증소 집행자의 정식 제복이 아니라 교황청 사람들이 자주 입던 비단이었다. 사위가 온통 고요했다. 어둠이 깔린 동토를 불길 하나 없이 걷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고, 한참 체첼리아와 떠돌아다닐 적 들었던 조언을 생각하며 에젤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목덜미를 감싸 안고 있던 팔이 떨어지니 페데리코가 경고하듯 그의 이름을 짧게 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옷에 달린 주머니를 죄다 뒤집어엎은 에젤이 기쁜 탄성과 함께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불빛 하나 없이 가는 건 좀 그렇잖아요."
"이 정도 어둠에는 익숙합니다."
"춥고 어두우면 외로워요, 선배님."
"……."
눈밭 위로 잡동사니가 뒹굴었다. 에젤의 주머니에서 쏟아진 것이었다. 커피맛 사탕 포장지, 커피믹스 막대, 단추, 머리끈, 다 시들어 찢긴 꽃잎, 구겨진 시경, 다 쓴 오리지늄 손전등, 열쇠, 비어있는 탄창……. 페데리코의 기억 속에 있는 에젤은 고독을 외로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집행인들 또한 그러했다. 리켈레도 페데리코도, 하다못해 모스티마의 감시역인 피아메타마저 단독행동을 어려워하진 않았다.
하지만 에젤은? 페데리코는 에젤과 같이 행동한 적이 드물었다. 그들은 정반대되는 삶의 길을 걸었고, 외근 업무 역시 따로 행동하는 일이 더 잦았다. 페데리코는 에젤을 알지 못한다. 그가 어두운 걸 싫어하는지, 밝은 햇살 아래서 지내는 걸 좋아하는지, 추위에 외로워하는지…. 페데리코는 소지품이 쏟아진 것도 모른 채 헤실헤실 웃는 에젤을 단단히 들쳐업었다. 어린 집행자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굴었다.
"곧 나올 겁니다."
"뭐가요?"
"임시 거주지요. 눈보라가 세게 몰아친다고 했으니, 일주일 가량은 거기에 머물러있어야겠지요."
그의 눈가 곁에서 에젤의 광륜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 신호를 대답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페데리코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에젤의 손에 들린 손전등이 그의 가슴팍 쪽에서 흐린 빛을 내며 흔들렸다.
오두막은 간소했다. 벽난로와 대충 짜서 만든 러그, 탁자, 침대 겸용으로 쓰는 소파, 조리도구 몇 개가 걸려있는 낡은 조리대, 군데군데 바스러진 마룻바닥이나 틀이 제대로 맞지 않는 서랍장 따위가 주인이 오래 돌아오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페데리코는 소파에 에젤을 눕혀두고, 그 위로 제 겉옷을 벗어 덮어주었다. 손전등을 꺼내며 조잘거리던 이는 이제 식은땀을 흘리면서 잠든 채 끙끙 앓고 있었다. 문을 잠그고, 새어나갈 빛을 막기 위해 커튼을 치고 돌아보았을 땐 어린애처럼 몸을 웅크린 채 숨을 급하게 몰아쉬고 있었다. 페데리코는 라테라노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시본과 시테러의 생물체 잠식에 대한 거부반응 양상을 떠올렸다. 조혈 장애, 주의력 상실, 신경 쇠퇴, 생체 변이…. 우르수스와 가까운 동토에서 시테러의 세포가 순환계로 유입될 리는 없으니 생체 변이를 선택지에서 제외한 페데리코는 급한 대로 마른 수건을 가져와 식은땀을 닦아냈다.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리던 에젤이 가물가물하게 눈을 떴다.
"에젤."
"선배님, ……."
"더 자도 괜찮습니다. 우르수스의 눈보라는 낮과 밤을 구별하기 어렵다더군요."
그래도 아까보단 표정이 풀려 다행이다. 대답 없이 스르륵 잠든 어린 집행자의 빈 어깨를 토닥이며, 페데리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1일차. 페데리코가 오두막 벽에 작대기를 하나 긋고 있을 즈음에 깨어난 에젤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페데리코는 에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고맙다는 말은 괜찮습니다, 에젤.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라며 그의 말을 자르고, 뒤이어 "장작 개수를 좀 세어주겠습니까?" 하며 그에게 일거리를 맡겼다. 느리게 눈을 깜박인 에젤이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곤 헐렁한 옷을 끌어올리며 벽난로 옆에 있는 장작더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에젤은 장작더미를 두어 번 다시 세 보더니 평소처럼 말간 낯으로 소파에 앉아 페데리코에게 장작 개수를 말해주었다.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여주자 말갛게 웃는 것이 제법 강아지를 닮은 것이라, 페데리코는 그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이리저리 뻗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이럴 줄은 몰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던 에젤이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그의 손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페데리코는 한참 그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옷소매를 살살 잡아끌어 그를 소파에 앉혀주었다. 식량에 관해 논해야겠다고 하자 에젤은 잠시간 말이 없다가,
"선배님 결정대로 할게요. 저도 집행자 훈련은 받았으니까요."
하고 다시 흐리게 웃었다. 극기 상황에서 식량 보급이 며칠씩 제대로 되지 않더라도 견딜 수 있게 하는, 그런 훈련을 말하는 거겠지만 당장 시테러에 잠식되어 한쪽 팔을 잘라낸 집행자가 극기 상황을 견딜 순 없을 것 같았다. 페데리코는 고개를 내저었다.
"의견을 내야 합니다, 에젤."
"네?"
"공증소의 규칙이 그럴 텐데요.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마주하거든 선후배나 사수에게 도움을 청할 것. 식량 분배는 온전한 제 권한이 아닙니다. 이 눈보라가 지나가더라도 동토를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더 걸어야 할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에젤."
"… 그렇지만, 선배님."
"네."
"저는 금방 죽을 거예요. 이런 몸으로 라테라노에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요."
"……."
두꺼운 커튼 너머로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들린다. 창틀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페데리코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평소라면 그렇게 두지 않았을 거란 말을 했겠지만 어째선지 그런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에젤의 연한 제비꽃빛 시선이 페데리코를 따라 움직였다.
"창틀을 보수해야겠군요."
"아, 도와드릴게요."
"쉬어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저 역시 집행자인걸요."
"지금은 환자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쉬세요, 에젤."
페데리코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헛숨을 들이킨 에젤이 시선을 내리깔고는, 그를 따라가려 엉거주춤하게 일으켰던 몸을 다시 낡은 소파에 앉히고는 숨을 죽였다. 그는 어린 집행자를 바라보다가, 소파 뒤쪽의 벽에 걸려있던 담요를 들어 에젤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에젤이 고맙다고 웅얼댔다. 더 자라고 하니 순순히 그러겠다 말하는 게 꼭 삐진 것 같아 보였으나 표정이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페데리코는 그를 조금 더 살펴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임의로 배분한 식량으로 만든 간단한 수프를 저녁으로 삼고, 침대 대용으로 쓸 소파를 벽난로 쪽으로 조금 더 끌어왔다. 러그를 치우니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은 것은 덤이었다. 발로 가볍게 문을 두드려 본 에젤이 "그냥 지하실인 것 같아요."라고 말했고, 페데리코도 동의했다. 불침번을 서려던 그는 에젤의 손길에 다소 힘없이 끌려와 -버티고 서 있어서 바닥이 좀 패였다- 좁은 소파에 나란히 누웠다. 페데리코의 귓가에서 에젤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에젤."
"춥잖아요, 선배님."
"… 불을 좀 더 뗄까요."
"일주일 치 분량만큼 나눠뒀어요. 혹시 모르니까 여분용 제외하면 오늘치 장작은 다 넣었는데요."
"그렇습니까."
"이러고만 있어도 돼요. 더 안 넣어도 따뜻할 거예요."
"에젤."
"안녕히 주무세요, 선배님. 내일 뵈어요."
어린 집행자가 다정하게 웃었다. 페데리코는 눈을 감은 에젤을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손을 올려 등을 토닥였다. 벽난로에서 장작이 불타는 소리와 눈보라가 몰아치는 소리가 뒤섞여 좁은 오두막 안을 크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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