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글

"하지만 글은 그림과 다르잖아요."

글을 읽는 것은 끔찍하고 지겨운 고행이 아니다.

※동인계/커뮤계와 같은 취미활동 영역 속 글 연성과 그림 연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글은 그림과 달리 읽고 이해해야 하잖아요. 당연히 덧글을 달기가 더 어렵죠."

2010년대 초반의 일이다. 나는 카페 커뮤를 운영하는 운영진 중 한 명이었고 글 연성과 그림 연성 사이의 덧글 차이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혹은 그 시절에도) 글과 그림 사이의 극명한 관심차가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운영진들은 얼마간 논의를 거듭한 끝에 자신이 올린 게시글을 기준으로 위아래 각각 3개의 게시글에 덧글을 달자는 규칙을 세웠다. 익명의 회원이 반박을 제시한건 그 공지가 올라오고 얼마 지나지 않은 뒤의 일이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글과 달리 그림은 한눈에 볼 수 있고 이해도 빠르다. 하지만 글은 한 줄 한 줄 찬찬히 읽어야 하니 덧글을 달기가 힘들다. 그러니 글 연성과 그림 연성에 똑같이 덧글을 하나씩 달아야 한다는 공지는 다소 불합리하지 않은가. 운영진들은 그 반박에 대해 화를 냈다. 결국 글을 읽기 귀찮으니 그림에만 덧글을 달게 해달라는 이야기 아니냐며.

그 이후의 기억은 흐릿하다. 햇수로만 세어보면 벌써 10년은 지난 이야기다. 공교롭게도 시간은 오래 흘렀으나 동인계나 커뮤계에서의 글 취급은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하다. 그에 얽힌 기억들을 풀어 얘기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번에 긴 글을 쓰고자 마음먹은 것은 이러한 편파와 차별의 기억을 기록하고자 함이 아니다. 나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적어보고자 한다.

글은 정말로 그림보다 이해하기 어려운가?

사람들은 으레 이렇게 말하곤 한다. "글은 그림과 다르다."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보다 그림을 보고 이해하는 것이 더 빠르다." 물론 합당한 말이다. 하지만 글을 읽고 이해하는 일이 그림을 보고 이해하는 일보다 어렵다는 말은 사실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글을 이해하는 것이 그림을 이해하는 것보다 시간이 걸릴 수는 있어도, 그것이 글이 그림보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글로 풀어 쓰니 다소 긴 문장이 되어버리므로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들어보겠다.

그네 -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죽기 전에 꼭 봐야할 명화 1001점」)

예시로 가져온 명화는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그네」라는 작품이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이 그림을 본 사람은 화면 중앙에 빛을 받으며 묘사된 한 여성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 다음으로 나무 그림자에 숨겨지듯이 위치한 두 명의 남자와 조각상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단순히 정원에서 그네를 타는 여성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 아니다. 이 그림을 주문한 남작(화면 좌측의 남자)은 화면 중앙의 여인을 정부로 두고 있는 관계였다. 남작은 그네를 타는 정부와 그의 등을 밀어주는 성직자, 그리고 여인의 사랑스러운 다리를 볼 기회를 얻은 자신의 모습이 모두 보이기를 주문했다고 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서양미술 산책」)

그걸 염두하고 그림을 다시 보면 빛을 받아 강조된 여인이나 어둠 속에 숨겨진 남자 두 명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설령 그림이 아까와 같은 똑같은 모습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그네를 타는 여인'과 '그네를 타는 정부,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두 남자'는 다른 의미를 가지게 마련이다. 나는 이렇게 그림에 대한 별개의 정보를 통해 그 안에 그려진 맥락을 읽어내는 과정이 "그림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림을 이해하지 않더라도 그림 그 자체를 인식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인식이지 이해는 되지 못한다. 여인의 정체를 단순한 인식으로는 알아챌 수 없듯이, 맥락을 통해 숨겨진 의미를 읽어내려면 정보를 가지고 그림을 "이해"해야 한다. 

굳이 명화가 아닌 연성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가상의 A라는 캐릭터가 붉은 드레스에 하얀 구두를 신은 일러스트가 있다고 하자. 그건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색 배합을 특이하게 잘 잡은 일러스트일 수 있으나, A가 어렸을 때 붉은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어머니에게서 하얀 구두를 선물받았으나 불의의 사고로 어머니와 구두 모두를 잃어버렸다는 설정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남다른 감정을 선사해주는 일러스트가 될 것이다. 전자는 일러스트를 "인식"했고, 후자는 일러스트를 "이해"했다. 

이러한 이해가 힘들까? 마음을 다잡고 임해야 하는 일일까? 물론 사전정보를 찾는 과정에서 시간이 걸릴 수는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충분한 사전정보가 있다면 작품의 맥락을 읽어내고 이해하는 과정은 그리 힘들지 않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이해"가 글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 성직자가 여인의 등을 강하게 밀었다. 너무 세지도 않고, 너무 약하지도 않은 적절한 세기였다.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맑은 햇빛을 받은 여인의 그림자가 조각상 위를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옅은 분홍색 옷자락과 하얀 속치마가 휘날린다. 머리에 쓰고있는 모자가 살짝 비뚤어지지만 정작 여인의 관심은 거기에 쏠려있지 않았다. 그 시선 끝은 멋지게 쭉 뻗은 자신의 다리 끝에, 그 끝에서 살짝 벗겨져 날아가는 구두에 머무른다. 공교롭게도 (혹은 아주 당연하게도) 또 다른 남자 또한 정면에 가까운 위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발이 공중에서 부유한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위의 글은 내가 「그네」를 보고 짧게나마 글로 묘사해본 것이다. 이 글 속에는 등장인물을 포함한 그림 속에 그려진 정보가 대다수 포함되어있으나, 그들의 관계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있지 않다. 하지만 위에서 그림의 배경정보를 들은 이들은 여기서 등장하는 이들이 성직자이자 정부, 그리고 정부와 애인관계인 남작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이해"된다. 이 과정은 그림을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괴롭지도 힘들지도 않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글의 "인식"과 글의 "이해"를 착각한다. 이를테면 약 4~5장의 그림 연성은 금방 읽으면서, 같은 내용을 다룬 3천자의 글을 보면 일단 뒤로 슬슬 물러나는 식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 글은 너무 길어! 이해하는데 시간도 걸리고 어렵다고!" 하지만 그들은 정말로 글을 이해하기 어려운게 아니다. 그저 글의 길이만을 인식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 지레짐작했을 뿐이다.

물론 문체에 따라, 읽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이해가 어려운 글이 존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취향이나 호불호의 문제로 넘기기에는 "글은 그림보다 이해하기 어렵고 고생스러운 것"이라는 인식이 지나치게 만연해있다는 생각이 든다. 글은 그림보다 어렵고 골치 아픈 매체가 아니다. 충분한 사전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맥락을 읽고 상황을 추측하여 작품을 "이해"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나는 적어도 이러한 이해의 측면에서 글이 그림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글은 읽는데 시간이 걸리잖아요."

그러나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글이 그림과 달리 한 눈에 바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크롤을 내리며 하나하나 읽어야 한다는 이유로, 문체가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장을 읽으면서 하나하나 상상해야하는게 번거롭다는 이유로 글을 멀리하며 때로는 폄하하고 깎아내리기를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숱하게 겪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마주했다. 다행히도 운좋은 어떤 일들의 연속으로 아직까지 글러로 지내고 있으나, 어떤 불행의 연속으로 글러를 그만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전에도 트윗으로 한 번 적었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리고 뒤이어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글 연성을 좀 더 읽고 좋아해주었으면,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글 연성에 담긴 정성을 깎아내리지는 말아주었으면, 글 연성을 "이해"하는 재미를 알아주었으면….

도대체 즐기려고 하는 취미활동인데 왜 그런 것까지 신경써줘야 하냐고 의문을 표할 사람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같은 이유에서, 어떤 사람이든 단순히 취미활동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거나 폄하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글러든 그림러든 영상러든 다른 누군가이든, 그 실력이 뛰어나든 뛰어나지 않든, 각자가 만든 작품은 각자의 이유로 존중받아야 한다. 단지 이해하기 번거로울 것 같다는 이유로 다가가기도 전에 훌쩍 물러나서 그 행동을 정당화하려 상대를 깎아내리는 행동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에도 글을 읽고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건 자명하지 않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글을 읽는데 걸리는 시간은 글을 이해하기 위한 즐거운 과정이라고. 여행길을 걸을 때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기만을 생각하고 가다보면 금방 질려버리지만 중도의 풍경이나 식물, 볼 거리 등을 구경하며 나아가다보면 어느샌가 목표에 도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부디 글을 읽는 과정을 끔찍한 고행이라 생각하지 말고 선뜻 발을 내딛여주기를 바란다. 글을 쓰는 사람도 분명히 그러기를 바랄 테니까.

글은 그림과 다른가? 그렇다. 글은 그림과 다르다. 하지만 다르다는 것이 못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글에게는 글의 재미가 있고, 그림에는 그림의 재미가 있다. 그것을 제대로 정리하고 싶어서 쓴 글이 꽤 길어지고 말았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글 연성의 매력을 알고 받아들여주었으면 좋겠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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