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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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건물 밖으로 훌쩍한 키의 소년이 걸어 나왔다. 줄곧 자리에 앉아있느라 굳어진 몸을 쭉 뻗고 잠시 볕을 즐기던 소년은 문득 주변을 돌아보았다. 쫓아오는 어른은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다. 망설임을 덜어낸 발걸음이 넓게 펼쳐진 숲을 향해 가볍게 내달리고, 햇살 속에 윤기를 내는 머리칼이 바람을 따라 흩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이곳은 대대로 뛰어난 마법사를
어느 날의 한가한 늦은 저녁,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작은 소녀는 마찬가지로 작은 주먹을 꾹 말아쥔 채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원인은 시도 때도 없이 제 볼을 찌르며 작은 키를 놀려대는 2살 터울의 오빠였다. 말로는 귀여워서 그렇다고 하지만 아무리 봐도 엄마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둘러대는 말임이 분명했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냉장고에 남겨둔 제 초콜릿을
전화가 울렸다. 바뀐 것은 하나도 없지만 몇 년 만에 다시 듣는 벨소리가 어쩐지 신선했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주영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몸을 돌리고 일어나려 했지만 준영은 그런 그를 만류했다. 뭐, 오빠 된 도리로 기특한 동생 녀석이 몇 년 만에 어머니와 재회하는 시간을 방해할 순 없으니까. 까만 머리칼을 장난스레 흩뜨린 준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
"거 안 본 지 두 달은 됐다니까 그러시네!" "그럼 이참에 가서 좀 봐! 너는 아픈 애가 혼자 있는데 신경도 안 쓰이니? 주영이가 붙여준 밴드값은 해야 할 것 아냐." 흠칫. 현관 앞에서 기를 쓰고 버티던 커다란 몸이 굳었다. 지난 2년간 얼굴에 생채기가 날 때마다 염치없이 주영을 찾아가 치료받고 온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거길 다녀왔다고 말한 적
코트자락 위에 가볍게 올려진 두 손이 놀라 움찔거렸지만 주영은 피하지 않았다. 언젠가 대만과 이렇게 될 거란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얌전히 그를 따라 눈을 감은 주영이 까치발을 들었다. 발 끝으로 지탱한 몸이 잠시 균형을 잃고 휘청이자 허리를 끌어안은 팔이 더욱 단단하게 감겨왔다. 고개가 돌아가고 입술이 조금씩 어긋날 때마다 울리는 물기 어린
식어가는 서늘한 바람이 하얀 커튼 사이로 나부꼈다. 손목 위에서 째깍이는 시곗바늘은 어느새 6시를 한참이나 넘긴 상태였다. 어쩐지 슬슬 배가 고프더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지. 풀이의 포인트가 될 만한 부분에 형광펜을 칠하던 찰나 교실 문을 넘어오는 익숙한 발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들자 옆자리의 의자를 끌어내 제 옆에 털썩 주저앉는 대만이 보였다. 어
푸하— 투명한 페트병에 담긴 음료를 꿀꺽꿀꺽 들이켠 대만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같아. 옆에 앉아있던 주영이 놀렸으나 대만은 별말 없이 키득거렸다. 슬슬 뜨거워지는 햇빛이 코트 바닥을 데우고 있었지만, 늦봄의 우거진 나무들이 만들어 내는 이쪽 그늘은 제법 시원했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땀에 젖은 두 사람의 머리칼을 느릿느릿 쓸어주었다. 열
기말고사의 마지막 날이라는 기대감으로 들뜬 분위기 속에서도 2층 복도의 한 구석은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그곳에 모인 다섯 명의 학생들은 따끈따끈한 최신 이슈로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정말? 확실해?" "진짜라니까! 키가 그렇게 큰데 어떻게 서태웅을 못 알아보겠어?" "그렇긴 하지만. 여자애가 하주영인 건 어떻게 아는데?" "주영이도 꽤 유명해. 입학할
일, 월, 화, 수, 목, 금, 그리고 오늘 토요일. 오늘은 내가 생전 처음 보는 짙은 남색의 소파에 둥지를 튼 지 딱 7일째가 되던 날이었다. 왜 '되던' 날이냐면, 30분 전에 그 자리에서 쫓겨나 거실 바닥으로 팽개쳐졌기 때문이지. 화가 날 법도 하지만 집주인 커플의 애정 행각을 한낱 객식구인 내가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너그러이 넘어가기로 했다
옛~날 옛적,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대략 1800년 전쯤? 아니, 아무튼 옛날에요. 산속에는 회색 털에 하늘색 동그란 눈동자를 가진 작고 귀여운 토끼가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회색 토끼에겐 부양해야 할 자기 자신이 있었기에 매일매일 부지런히 움직였어요. 혼자 살면 잔소리 할 동물이 없으니 여유를 가져도 되는 거 아니냐고요? 전혀요! 세대주이자 유일한 세
세상에서 숨길 수 없는 것은 두 가지 - 재채기와 사랑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조인 字 자효에 한해서는 전자 한 가지만이 해당할 뿐이라고 조조군에 속한 전부가 단언할 수 있었다. 가끔은 한술 더 떠서 "조인은 사실 커다란 바위에 일만 번 기도를 올려 태어난 인조인간이라 재채기도 하지 않는다"며 어리숙한 병사들을 놀려먹는 이도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우스갯소
오전 7시. 평소라면 자몽한 만물 위로 뽀얗게 아침 햇빛이 내렸을 시간. 하지만 오늘은 솜이불마냥 두텁게 깔린 구름이 여유로운 주말 아침에 한층 나른함을 더했다. 회색빛 공기 속에서도 일찍이 눈을 뜬 전위는 자는 동안 품에서 빠져나간 연인을 찾아 옆자리를 더듬었다. "으응…." 눈을 감고서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는 중에도 저를 찾는 손길을 느꼈는지.
"……." 동그랗고 빨간 불빛 아래 멈춰 서있는 차 안.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검은 시트 위에는 민트색 종이봉투와 빨간 장미 한 송이가 어색하게 놓여있었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그것을 쳐다보기를 한 번. 두 번. 셋넷다섯여섯……. 손바닥만 한 봉투 안에 폭탄이라도 든 것처럼 몇 초에 한 번씩 옆자리를 힐끔거리던 조인은 뒤늦게 바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