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시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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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어, 키티. 오랜만에 보여준 과감함, 멋있더라." "다 네가 있어서 가능했던 거지." 두 사람의 손바닥이 맞부딪치며 경쾌한 소리가 났다. 파리를 구하고 난 후에 하는 둘만의 의례였다. 마침 아이스크림 트럭이 근처를 지나가던 참이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뒤풀이를 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까 넌 어쩌다 스카라벨라가 된 거야?" "나
며칠째 날이 우중충했다. 하늘에 푸른색의 면적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고 구름은 두꺼워졌다. 거짓말처럼, 아직 집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순찰을 하다말고 건물의 천막 아래로 몸을 숨겨야 했다. 비는 불운의 중요한 변수가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마리네뜨는 비 오는 날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다. 마리네뜨가 아드리앙을 좋아하
선명한 햇빛이 내리는 날. 완벽한 기상캐스터의 자질을 갖춘 오로라 보레알이 데뷔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같은 이유에서 햇빛을 만끽하는 대신 양산으로 피부를 보호했다. 쏟아지는 빛은 스튜디오의 조명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기대해서였을까. 패배에 대한 절망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쓰라렸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질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
무당벌레와 고양이를 제외한 모든 미라큘러스를 손에 넣은 호크모스는 모나크가 됐다. 그가 강해진 만큼 싸움은 더 힘겨워졌고, 파리 시민들의 불안도 높아져 갔다. 순찰 하는 횟수나 시간을 늘리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저희 안전한 거 맞죠?”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반은 줄었다. 길에 나온 사람들도 불안한 표정으로 그렇게 질문하고는 했다. 단순히
가브리엘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냉혈한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큰 키 때문에 항상 사람을 내려다봤다. 위에서 아래로 시선을 내리꽂는 회청색 눈동자의 색이 싸늘했고, 입매는 항상 아래로 기울어진 채였으며 농담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성격이 그 단서였다. 사실 가브리엘은 냉혈한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스로 그렇게 보이길 원했다. 이성적이고 이지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것
보낸 이의 이름이 적히지 않은 편지가 도착했다. 이름을 일부러 쓰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잊어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태양 같은 금발, 행운을 부르는 녹색 눈. 항상 궁금해, 네 생각, 네 꿈. 하지만 절묘하게도 자신이 보내지 못했던 연서에 대한 답신이었다. 레이디버그의 색이라고 하면 모두가 붉은 색을 연상했다. 무당벌레의 날개를 닮은 색. 삼색기의
해도 달도 별도 매일 뜨고 지지만 어떤 날은 갑작스러운 영감을 선사해주고는 한다. 마리네뜨는 평소처럼 방에 불을 켜놓고 작업하는 대신 달빛 아래서 영감을 받아보기로 했다. "뭔가 좋은 결과물이 나올 것 같아!" "그러게, 오늘 감이 좋아 보이는데?" 거침 없는 손놀림과 반짝 거리는 눈. 공책 가장자리에 앉아 응원하는 티키. 그러나 순조로울 줄 알았던 작업에
간혹 그런 생각을 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 많은 파리 시민들 가운데 아드리앙도 끼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아드리앙은 엄청 빛나는 존재니까 누군가를 동경하거나 사랑해본 적도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자신을 구해준 적도 있는 레이디버그에게는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나가다 아드리앙과 만나게 된 건 우연이었다. 사실은 운명이라고 부르고 싶
에밀리에게서는 빨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빛을 모조리 반사해버릴 듯 찬란한 금발과 빨강과는 상극인 짙은 녹색 눈동자, 핏줄이 비칠 만큼 하얀 피부는 얼핏 창백해 보일 수 있었지만 머리카락이 반사하는 빛과 눈에서 타오르는 생기가 그런 느낌을 없애 줬다. 타고난 차갑고 고고한 인상과 달리 긍정적인 성격과 태양 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어 아무도 에밀리를 차갑다고
주제 [너의 빈 자리] "언제까지고 파리를 지키는 영웅이고 싶어." 그렇게 말했던 게 징조였을까? 막연한 생각이라고 넘기며 농담을 던졌던 것이 후회됐다. 물론 잡는다고 잡혀줬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도라도 해볼걸. 파리에서 레이디버그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하게 컸다.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셋이고, 그 중 영웅이 둘이다. 그 가운데 하나라면 당연히 존
그날 파리의 시간은 멈췄다. 침잠한 달은 더 이상 밤을 데려오지 않았다. 파리의 하늘이 달을 독점하게 됐음에도 밤을 맞이하지 못한 이유였다. 부서진 달은 그날부터 쭉, 파리의 하늘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때문에 그날부터 몇 주야가 지났는지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었다. 확실한 것은 홀로 남은 이에게 가혹할 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었다. 별 대신 하
가브리엘 아그레스트는 아주 불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그의 꿈에 에밀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가 꿈에 나온 게 불쾌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로 가브리엘은 꿈 따위의 환상에 관심이 없었다. 떠나가는 에밀리를 붙잡으려고 애썼던 것이 꿈이라는 것은, 자신의 노력도 미소 짓던 에밀리도 환상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날이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기
"아, 시간 다 됐다. 그럼 난 먼저 가볼게." 에펠탑에서 집으로 가는 건 이제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레이디버그에게는 던지는 곳에 정확히 감기는 요요와 원하는 만큼 멀리 뛸 수 있는 다리가 있었으니까. 레이디버그는 지붕 몇 개를 밟고 뛰어넘어, 파리에서 가장 맛있는 빵집의 3층에 발을 딛음과 동시에 사라졌다. 던지는 곳에 정확히 감기는 요요도, 원
주제 [연인]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 최고의 파트너라는 데는 파리의 모든 시민이 동의할 것이다. 그 둘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데는 아이스크림 장수 앙드레가 보증을 섰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서로를 이어주는 아이스크림을 몇 번이고 함께 먹으면서도 그 사실을 부정했다. "저희는 서로가 누군지도 모르는 걸요." "누구인지 왜 몰라? 너희는 레이디버그와 블랙
하늘이 너무 파래서 꼭 네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투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맑은 날인데, 왜 갑자기 그날이 생각났던 걸까? 그날은 비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서로의 소리를 모두 잡아먹을 만큼 컸잖아. 혹시 기억나? 학교에 오게 된 날부터 행운으로 향하는 길이 트인 기분이었어. 자유를 얻고, 학교에 가게 되고, 새 친구를 사귀는 게 너무 좋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