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IKYUU!!

[우시오이카게] 유곽물

썰백업

황태자 우시지마 X 기생 오이카와 X 상인 카게야마. 우시지마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의 권력 아래에서 부를 쌓고있는 오이카와, 그런 오이카와를 알기에 죄책감 없이 그를 착취하는 우시지마, 우시지마의 손아귀에서 오이카와를 빼내고 싶어하는 카게야마.

지독한 남존여비가 만연한 세상이었다. 남자라는 이유로 여자를 하대하는 것이 당연해 그 누구도 이의 조차 제기 하지 않는 시대. 그런 시간 속에서 남자 '기생'인 오이카와는 그들의 수치 취급을 받으며 한 없이 멸시받고 무시당했다.

나라에서 가장 큰 기방을 책임지는 행수기생은 튼튼하다는 이유로

온갖 폭력적인 취향의 손님들의 손에 오이카와를 밀어넣었다. 덕분에 신입 치고는 많은 급료를 받았지만 몸뚱아리는 그보다 더 하게 너덜너덜 해졌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제 처지를 안쓰럽게 여기지 않았다. 사내치고 예쁘장하다는 이유로 양부모 손에 팔렸으니 제 자신을 아껴 줄 사람은 저 뿐이다.

약해질래야 약해 질 수 없었다.

낮에는 저를 더러운 오물 보듯 모멸을 일삼는 것들이 밤이 되면 한 낮동안 입고있던 그 옷을 벗기지 못해 안달인 모습은 그저 우습다. 속으로는 한 없이 그들을 비웃으며 겉으로는 억지로 새된 소리를 질렀다. 악착같이 돈을 벌 것이다. 자신을 보호 할 가장 좋은

수단은 곧 돈이리라.

그러던 어느날 행수기생이 아침부터 호들갑을 떨며 기방의 모든 기생을 들들볶아 댔다. 모두들 가장 좋고 화려한 옷가지를 꺼내입게 하고 화장도 더욱 진하게 시켰다. 평소 뚜렷한 이목구비와 흰 피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차분한 옷과 과한 장신구를 피하던 오이카와도 온 몸에

보석을 주렁주렁 달아두었다.

"누님, 누가 오는데 이리도 부산스럽습니까?"

오이카와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기생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실제 나이는 모르겠으나 제가 처음왔을 때부터 쭉 있던 사람이라 그저 그렇게 불러주었다.

"태자전하가 오시는 날이거든. 조심해 잘못하면 목이 날아간다."

공식적으로 일년에 한 번 정도,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겠다며 방문하고 비공식적으로는 두어 달에 한 번정도 온다고 했다. 처음엔 다들 어떻게든 태자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어보려 애썼으나 단 한 번도 창기를 부르는 일 없이 조용히 시중만 받고 돌아가니 다들 시들해져 신분상승은 포기하고 그저

행하(*팁)만 기대한다고 했다. 비공식적인 방문엔 이리 소란을 떨지 않고 행수기생과 극소수의 고참 들만 시중을 들러 가니 오이카와가 모를 만도 하다며 누님은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바쁘게 자리를 떴다.

해가 지자 행수기생은 문 앞에 기생들을 두 줄로 주르르 세워놓았다. 들어온지 얼마 안된

오이카와는 잡일을 하는 솔거노비들과 같이 맨 뒷줄에 서 대기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서있던 다리가 저릿할 즘 왕실의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은 남자가 다가와 행수기생에게 무어라 말을 전했다. 곧이어 수십명의 사람이 발맞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눈이 마주칠새라 허겁지겁

고개를 조아렸다. 가마꾼만 14명, 호위 기사가 10명 개인적인 시종 두엇까지 오니 그 규모가 방대했다. 우시지마는 부드럽게 가마에서 내렸다. 행수기생이 차분한 발걸음으로 우시지마의 뒤에 서 그를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기생들도 그제서야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하게 꾸며진 연회장 상석에 앉아 있는 황태자는 냉소하기 짝이없는 무표정으로 앉아 공손히 공수자세로 서 있는 기생들을 둘러볼 뿐이었다.

"인사 올리겠습니다 태자 전하."

한 명씩 차례대로 인사를 올렸다. 순서가 지나고 마지막 즘 오이카와가 앞으로 나섰다.

"오이카와 토오루 라고 하옵니다 전하."

오이카와가 허리를 숙였다 올리자 장신구들이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일자로 다문 입술과 날카로운 눈매. 오이카와는 차가운 얼굴의 우시지마를 보며 더욱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가 그 남자 기생인가."

"예 그러하옵니다, 전하."

우시지마가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모두들 당황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대답했다.

"어쩌다 사내가 기생짓을 하게 되었지?"

"고아로 자라 자식이 없던 집안에 입양되었으나 부인께서 회임하셨고, 양반가문이 아니라 사노비를 쓸 수 없으니 저를 이곳에 팔아버리셨습니다."

우시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내 시중은 너만 들거라, 귀녀도 물러가시게."

"하오나 전하, 이 아이는 아직 들어온지 얼마안되어....."

행주기생이 조심스레 말을 올렸다. 괜히 오이카와가 실수라도 하여 흠을 잡힐세라 걱정하는 눈치였다.

"괜찮다. 나가보라."

그러나 황태자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행수기생은

다시 한 번 인사를 올리고 뒷걸음질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녀까지 자리를 뜨자 커다란 연회장에는 우시지마와 오이카와 단 둘만 남게 되었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으나 속은 우시지마의 의중을 읽느라 바빴다.

"이리 가까이 오라."

낮고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보통 남자 기생이 몸까지 판다고 하면 개보다도 못하게 보는데 어째서 황태자라는 사람이 저의 시중을 받겠다고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 그의 옆자리로가 앉았다.

"모실 수 있어 영광입니다 전하."

오이카와가 정중한 손짓으로 우시지마의 잔을 채웠다. 우시지마는

말 없이 그 모습을 찬찬히 살피더니 대뜸 손을 들어 머리 카락 여기저기에 꽂아놓은 장신구를 떼어냈다. 그러자 고정해 놓은 머리카락이 풀려 긴 머리가 어깨를 덮엇다.

"없는게 더 낫구나."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참을 우시지마는 말 없이 술만 마셨다. 오이카와는 악기도 연주하고 시조도 읊고

노래도 불렀으나 우시지마는 잘했다며 칭찬 할 뿐 다른 말은 하지않았다. 술은 얼마나 잘 마시는지 오이카와가 어지러운 시야를 바로 잡기 위해 부러 눈을 깜빡일 때도 우시지마는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곧은 자세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전하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해보라."

우시지마는 손을 뻗어 흘러내린 오이카와의 옆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오이카와는 인상과 다르게 다정한 손길이라 생각하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저는 사내의 수치 아닙니까. 어찌 이런 저에게 전하를 모실 기회를 주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생각보다 더욱 직설적인 말에 오이카와는 스스로도

흠칫했다. 하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 얌전히 대답을 듣는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우시지마는 손길을 거두지 않고 부드럽게 오이카와의 얼굴을 쓸었다. 부드러운 손끝이 피부에 감겨오는 느낌이 싫지않았다.

"나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너는 내가 본 사내중에 가장 아름답지."

얼굴을 쓸던 손길은 목을 타고 내려가 옷깃까지 내려왔다. 우시지마의 손은 천천히 옷깃안으로 들어와 오이카와의 쇄골을 지분거렸다. 순간 오이카와의 눈이 반짝거렸다. 오이카와는 몸을 움직여 우시지마에게 더욱 가깝게 붙었다. 오이카와가 몸을 틀자 우시지마의 손이 들어가있던 옷깃이 벌어져

없었으나 그 어떤 관가나 재상도 오이카와의 술시중을 받을 수 없었다. 평소에는 손님들에게 악기만 연주하고 황태자가 방문할 때만 그의 술시중을 들고 그와 잠자리를 가졌다.

황태자의 잠행 빈도는 눈에 띄게 높아졌다. 그러니 행수기생마저 오이카와에게 함부러 대하지 못했고 오이카와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관기가 되었다. 누구보다 좋은 비단옷을 입고 화려하지 않지만 값비싼 보석으로 몸을 치장했다. 그러니 오이카와의 미모는 더욱 빛을 발했고, 그 명성은 날로 드높아 졌다.

그러니 외국에서 지내던 카게야마가 본국에 돌아오자마자 그 항설을 듣게 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남자 기생이요?"

돈많은 상인의 집안의 둘째로 태어난 카게야마 토비오는 제 누이와 함께 오랜 유학을 마치고 본국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부모님은 누나인 미와에게 동생이 공부 할 동안 잘 보살펴주라며 같이 보냈으나 카게야마는 제 누이가 퍽 영민하고 손재주가 남다르다는 것도 알았다. 덕분에

미와는 부모님 눈치 볼 필요없이 토비오와 함께 실컷 공부할 수 있었고 귀국과 동시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혼인을 미루고 카게야마가 물려받은 상단을 꾸려갈 채비를 했다.

"그래, 요즘 길가는 사람들 중 그 자를 모르는 이가 없더구나. 토비오 너도 궁금하면 한 번 만나고오지 그러니."

미와가

짓궂은 얼굴을 하며 웃었다. 어릴때부터 저와 둘이서만 지낸 탓인지 영 여자를 대하는게 어색한 제 동생이 기방에 드나드는 꼴은 상상조차 되지않았다. 아마 들어가자마자 뻣뻣하게 굳어버리겠지. 깔깔거리며 웃던 미와는 장부와 물품을 대조하며 토비오에게 이것저것 심부름을 시켰고 토비오는

군말없이 짐을 챙겨 나왔다.

타박타박 흙길을 걷다보니 뭔가 이상했다. 인파가 많은 혼잡한 길목을 지나는 중이건만 사람들이 모두 멈추어 서 제 뒤를 보며 소근거렸다. 뭘 보는 거지? 카게야마는 호기심이 들어 미와가 전하라고 한 서류를 품에 꼭 안은채 뒤를 돌았다.

전모 아래 푸른끈이 갸름한

턱 끝에 매어 예쁘게 늘어뜨려져있었다. 손에 쥔 연꽃 모양 미선부채를 살랑살랑 부치며 척봐도 고급 비단을 덧댄 신발로 사뿐사뿐 걷는 모습은 꼭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같았다. 가히 모두가 숨죽일 만한 자태였다. 그런 군중 사이에서 겁도 없이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남자 앞에 멈춘 오이카와는

생긋 가볍게 한 번 웃어주고는 토비오의 옆을 지나쳤다.

토비오는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자가 그 소문의 남자 기생이구나.

그 날 심부름도 채 끝내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돌아온 토비오는 미와에게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토비오 너 무슨일 일었니?"

언제 멍했냐는 듯 잔뜩 고양되었다. 미와는 일이 단단히 꼬이겠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 저녁 미와의 만류에도 카게야마는 값나가는 도포를 차려입고 기방 문앞에 섰다. 나라에서도 알아주는 기방인 만큼 입구부터 사치스럽기 짝이 없었다.

'문 손잡이만 뽑아 팔아도 돈 꽤나 되겠네'

상인의

아들다운 생각을 하며 문을 두드리자 남자 하인이 나와 노골적으로 그의 옷 차림을 훑었다.

"못뵈던 나으리신데 어디서 오셨습니까?"

"카게야마 상단의 새 상주 카게야마 토비오 일세."

"아 그 수입제 고급품만을 취급하는 곳 말이죠. 제가 귀한 분을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나으리. 안으로 드시죠"

내부또한 으리으리했다. 지붕의 기와는 궁을 연상시키듯 궁궐과 같은 모양으로 지어졌고 곳곳에 향초를 피워두는 듯 마당에서도 좋은 냄새가 났다. 입구와 가까운 작은 방으로 토비오를 안내한 하인은 따로 찾는 아이가 있는지 물었다.

"그, 여기에 남자 기생이 있단 얘기를 듣고 왔네만...."

"아이고, 새 상주님이 외국에 오래 있다가 오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죄송하지만 나으리 오이카와님은 일정 규모 이상의 연회나 궁의 높으신 분들이 아니면 따로 만나뵙기가 어렵사옵니다."

"따로 약속을 잡을 수는 없는가? 돈이라면 얼마든지 낼 수 있네만."

"저 그게....사실 오이카와님은

태자전하가 총애하는 관기다 보니 좀 어렵습니다. 저희 기방엔 다른 기생들도 많으니 제가 몇몇 추려서 보내겠습니다."

"아니. 그럼 됐네. 그냥 술과 음식이나 좀 갖다주시게. 그리고 오이카와는 그럼 지금 어디에있는가?"

"중심 연회장에 관청의 높으신 분이 오셔서 아마 거기 계실 겁니다."

"아 고맙네. 음식은 자네가 알아서 가져다 주게."

토비오는 소매를 뒤져 엽전 꾸러미를 내밀었다. 하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껏 밝아진 얼굴로 돈을 받아들고는 신명나는 걸음으로 뛰어나갔다.

토비오는 자리에 앉아 다리를 달달 떨었다. 황태자가 총애한다고? 누나가 말린 이유가 있었구나.

그러나 이미 후회해도 늦은 뒤였다. 그의 얼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토비오는 꽤 성대하게 차려진 술상으로 대충 요기만 한 뒤 방을 나서 마당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걷는 내내 들려오는 악기소리와 웃음소리에 오이카와의 것이 섞여있을까. 토비오는 부푼 마음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들어가자 지금까지 지나쳐왔던 방들과는 비교도 안될 크기의 연회장이 보였다. 연회장은 과시라도 하듯 모든 창을 열고 보석으로 발을 달아 바람이 불면 보석끼리 부딪쳐 촤르륵 소리가 났다. 그 안으로 보이는 수십명의 기녀와 악사들이 중 가장 앞에서 거문고를 뜯는 오이카와가 있었다.

꿰어 신고는 밖으로 나가는 모습에 토비오는 걸음을 재촉해 그를 따라잡았다.

"저, 저기요!"

카게야마의 부름에 오이카와의 옷매무새를 봐주던 어린 하녀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나으리! 오이카와님은 행수님의 허락이 있으셔야 합니다!"

"아니, 그게 저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요...."

"됐다. 내가

아는 분이란다. 괜찮으니 가보렴."

오이카와의 말에 꾸벅 허리를 숙인 소녀가 총총거리며 사라졌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나으리. 저 아이가 저를 유독 잘 따라 호들갑을 잘 떱니다."

"아닙니다. 평소에 나쁜 일을 많이 겪으시나 봅니다."

"가끔 제가 어느 분의 사람인지 모르시고 무례를 저지르는

분들이 계신데 아주 드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이카와는 아주 여유로워 보였다. 지금 네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아보라는 말. 허나 토비오는 누군가 조각해 놓은것 마냥 보기좋게 자리잡은 입술이 제게 말을 건네는 것 만으로도 황홀했다.

"그런데 저를 어찌 아십니까?"

"낮에

길에서 뵙지 않았습니까? 저는 한 번 본것은 잊지않는답니다. 더욱이 나으리 처럼 외모가 출중하신 분들은 더욱요."

카게야마는 입 발린 칭찬에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귀, 귀하도 참으로 예쁘십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그런데 어떤일로 저를 부르셨는지요?"

"그 귀하를 만나려고 왔는데

만날 수가 없다고 하여....여기에 있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찾아왔습니다. 미안합니다. 저는 관직이 없는 상단의 상주입니다. 이런 저는 어찌, 어찌하면 그대를 만날 수 있습니까?"

오이카와는 티나지 않게 찬찬히 토비오를 살폈다. 저보다 어려보이는 외모에 잔뜩 얼어붙어있는것이

딱 봐도 기방에 드나든적 없는 갓 도련님 소리를 벗어난 애송이였다. 그리고 오이카와는 이 바닥의 섭리를 잘 알았다. 권력이 있으면 재물도 따라온다. 이 꼬맹이가 아무리 부자여도 당장 제 등 뒤에 연회를 주최한 재상만큼은 아닐 것이다. 저는 지금 나라에서 제일 비싼 기생이었고 돈이 없으명 볼

수 없었다.

"저는 그 분 말고는 시중을 들지 않습니다. 그저 작은 재능을 발휘하여 악기만 연주하지요. 그 모습이라도 보고싶으시면 연회를 여세요. 아주 크게요."

"저는 외국에서 공부를 오래하여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토비오가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오이카와는 금방 풀죽어

세상이 무너진 얼굴을 하는 잘생긴 도련님이 꽤나 귀엽다고 생각했다.

"나으리. 나으리는 상주시니 더욱 잘 아시겠지요. 모든건 돈입니다. 아니면 기방에 제 앞으로 아주 큰 돈을 내세요. 같이 담소정도는 나누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이만. 오이카와는 정중히 인사를 한 뒤 망설이 없이 뒤돌아

걸어갔다. 이정도 얘기했으면 알아들었겠지. 적당히 하고 오지말라는 뜻을. 그러나 다음날 오이카와의 예상은 처참히 빗나갔다. 정말로 아침부터 토비오가 엽전꾸러미 수십개를 들고 나타났다는 것이다.

행수기생은 멋대로 그런 약속을 한 오이카와에게 화가났으나 질책할 수도 없어 그 옆전꾸러미를

보며 오이카와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로 돈을 한아름 안고 오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카게야마 님."

"제, 제 이름은 어떻게...."

"그야 아침에 저희 기방에 이름을 적으셨지않습니까."

"아, 아 그랬지...."

토비오는 멋쩍은듯 뒷목을 긁적였다.

"빨리 보고싶어서요....그대를."

제 눈을 피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는 카게야마를 보며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린 오이카와는 토비오 앞에 똑바로 섰다.

"정식으로 인사올리겠습니다 나으리. 오이카와 토오루 입니다."

카게야마와 보내는 시간은 꽤 즐거웠다. 이 말주변 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상주는 어떨 때는 한 없이

맹하다가도 다른 얘기를 할 때면 또 눈을 빛내며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였다.

"아 그러면 상단은 거의 누님이 운영하시는 거군요."

"네, 부모님은 제가 아들이기 때문이 저에게 물려주셨지만 저보다 누님이 훨씬 더 아는 것도 많고 재주가 많으십니다. 오이카와 씨는 어떤걸 좋아하고 잘하십니까?"

오이카와는 갑작스런 질문애 조금 뜸을 들여야 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좋아하는 건 돈인데 잘하는 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 악기도 잘 다루시고 글도 읽고쓸줄 아시고 노래도 부르신다 들었는데요."

"악기와 노래야 다들 저만큼 합니다. 글은 운이 좋겠도 양부모님을 만나 배울 수 있었지만

겨우 나릿님들 흉내나 내는 수준이지요. 특출난것이 못됩니다."

"그럼 지금이라도 찾아보면 어떨까요? 기방을 나와..."

"안됩니다."

토비오의 말에 오이카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기방을 나갈 수 없습니다 나으리."

"어째서요? 빚이있습니까? 제가 값겠습니다. 생활도 제가 책임질 수

있습니다."

토비오는 다급하게 말했다. 아, 사랑에 빠진 남자란 이리도 어리석다. 오이카와는 살풋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저는 그 분의 사람입니다. 잊지마시옵소서 나으리."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도 잘하는 일도 모르고 사는건

너무, 너무 외롭지않습니까."

"괜찮습니다. 익숙하니까요."

오이카와은 조용히 고개를 돌리고 술 한 잔을 입에 머금었다. 작게 움직이는 목 울대를 지나 불쑥 튀어나온 쓸모없는 감정들이 다시금 깊이 파묻히길 바랐다.

그 후로 토비오는 종종 선물과 함께 편지를 보냈다. 아무리 누나가 경영의

중심을 맡고 있다고는 하나 카게야마 상단은 수입품, 개중에서도 고급품만을 취급했다. 바쁘기도 많이 바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잊지않고 매일같이 편지를 부치거나 편지가 오지 않으면 직접 그를 만나러 기방에 왔다. 둘 사이도 조금씩 가까워져 오이카와는 서툰 솜씨로 적힌 그의 편지를 차곡차곡

카게야마를 안내했던 하인과도 친해져 그는 기방의 여러 일들을 얘기해주곤 했는데 오늘은 더욱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시려나 모르겠지만 오이카와님은 원래 3패, 그러니까 창기였습니다. 그러다 태자전하의 눈에 띄어 1패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하인은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카게야마가 눈치채지 못할리는 없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을 꽉 말아쥐고는 뒤돌아 문을 나섰다. 화가났다. 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오이카와가 선택한 일이라면 존중하기도 해야했다. 하지만 울컥 치미는 분노는 쉬이 사그라 들지 않았다.

다음날 해가 채 지기도 전에 카게야마가

기방의 문지방을 넘었다.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온 카게야마은 준비된 술만 연신 들이켰다.

"나으리, 오이카와 이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의 오이카와였다. 카게야마가 선물해준 귀걸이를 차고 온 것이 신경을 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어제는 제가.."

카게야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오이카와 앞으로 다가갔다.

"보고...싶었습니다."

털썩 오이카와 앞에 마주앉은 카게야마의 눈동자는 상처로 얼룩져있었다. 오이카와는 씁쓸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렇습니까. 저를 이리도 귀하게 여겨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카게야마는 제 어깨를 쓰다듬으며 흘러내린 오이카와의 소매 사이로 언뜻 붉은빛을 보았다.

"손목은 어찌이럽니까??"

놀란 마음에 손을 잡아 소매를 들추자 눈에 띄게 빨간 자국이 양쪽 손목에 나있었다.

"뭡니까 이게?"

"아....이게...."

놀람과 분노가 뒤섞인 파란 눈동자가 오이카와에게 재촉했다.

"이거...황태자가 이런 겁니까?"

"그저 취향이실 뿐입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내고는 소매를 잡아내렸다.

강압적인 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는건 알고있지만 오이카와가 그런 일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오이카와 씨도 그렇게 하는게 좋습니까?"

"그냥......뭐....."

입꼬리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오이카와의 표정은 전혀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대 몸에 상처가 나는게 싫습니다. 저는 보기만 해도 이렇게 아까운데...."

"저는 원래 그러 손님들을 받던 창기였습니다. 익숙하니 걱정마세요."

"익숙하면 안 아픕니까? 이렇게 상처가 남았는데"

오이카와가 좋아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라니 카게야마는 제 얼굴을 감싸쥐었다.

"아무힘도 없는 저한테 화가 납니다."

"그렇게 생각마세요. 나으리와 보내는 시간은 저에게 매우 기쁘고 즐서운 일입니다."

"그대는 언변에 능하죠. 저는 눈치도 없고 사람 마음도 잘 못 읽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카게야마를 만난 이후 오이카와의 생활은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이불 한 채, 앉은뱅이 책상 하나, 서랍 하나. 빛나는 비단옷들이 줄줄이 걸려있음에도 휑하던 방안에 생기가 돌기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때면 죽은듯이 누워만 있던 오이카와는 짬이 날 때면 카게야마를 위한 시를 짓고,

카게야마가 보내온 편지의 답장을 썼다. 오이카와는 일패기생이지만 기방에 우르르 모여살아야 했는데, 그나마 독방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조금 나은편이었다. 모두가 잠들 시간까지 버텨 몰래 쪽문으로 빠져나와 달빛도 채 비치지 않는 어두운 골목으로 소리없이 달려가 카게야마를 만날때에는

사방등에 그림자라도 비칠까 노심초사 해야했다. 그러나 그 불안한 걸음을 내딛는데에 망설임은 없었다.

하지만 몰래 싹을 틔워낸 마음은 금방 짓밟혔다.

"그간 평안하셨나이까 전하."

긴 머리를 수수한 옥비녀로 고정하고 양반집 부인들이 쓰는 연분홍 분으로 옅게 화장을 한 오이카와는 평소보다

더욱 매서운 눈빛의 우시지마를 보며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공포를 꾹 눌러야했다.

"소인 오매불망 전하가 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눈웃음을 지으며 감히 황태자의 옥체에 몸을 기대니 우시지마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요즘 자주 너를 찾는 양인이 있다고 들었다."

"전하가 소인을 찾으시니 제 소문을 듣는다면 궁금해 하는게 당연하지 않겠사옵니까. 늘 있는 일이니 너무 염려치 마시옵소서."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품에 안겨있었기에 서로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오이카와가 마른 침을 삼키며 두근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을 때 휙 우시지마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고개가 들렸다.

"네가 누구의 것인지 똑바로 기억하거라."

"소인은 태자전하의 것이옵니다. 황송하옵니다."

오이카와는 제 턱을 쥔 손이 칼날이라도 되는듯 목덜미가 서늘했다. 그래도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며 저를 집어던지다시피 침방으로 밀어넣는 손길에도 인상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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