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가브리엘
*
나는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고 눈을 뜬 후에 담겼던 풍경은, 온통 하얬다.
수백, 어쩌면 수억,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눈송이들이 다가와 나를 맞이해주고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나 또 죽었구나.
얼굴에는 살짝씩 스치는 차가움과 따스함이 섞인 서린 바람이 불어왔고, 내 몸을 포근하게 받혀주는 눈 밭은 누워있는 나한테 더욱 더 안락함을 감싸주었다.
포근하다.
그닥 춥지도 않고, 동시에 덥지도 않고, 누워서 자기 딱 좋은…데, 잠만!! 지금 이러고 있을때가 아니잖아?!
나는 눈 밭에서 나를 유혹하는 안락함을 떨쳐내기 위해 재빠르게 자리에서 벌떡! 급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 차에 독이 들어있었다고……?”
나는 방금 전까지 나의 심장을 아프게 조여왔던 가슴팍 부분의 옷깃을 한 손으로 꽈악 움켜쥐었다.
두번째 죽음, 이 사실은 나를 깊은 생각을 빠지게 만들었다.
일단 방금까지 있었던 일을 곱씹어보자……, 그러니까 나는 얼굴을 보여주는 조건이였지만, 어머님의 초대로 모자가 살고 있는 집을 방문했고, 그리고 나는 거기서 어머님이 주신 차를 먹었다. 그때 독이 들어있었던가?
‘리네 말대로 그 사람들을 믿으면 안됐었나…?’
…… 아니 잠만! 지금 나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
두 손 들어올려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스스로 내 뺨을 두 번 차악차악! 때렸다. 이러다가 만나는 사람마다 의심하게 될 지경이네!
… 그러고보니, 이번에는 리네도 같이 이곳에 왔을까?
같이 왔다면 나를 보자마자 엄청나게 화를 낼 것 같았다. 물론… 이해는 가지만.
아까 내가 혹시나 모르니까, 라는 이유만으로 리네의 충고를 무시하고 마음가는대로 수긍하는 쪽을 선택해버렸으니까. 나도 ……깊이 반성하고 있다.
나는 한참을 뜸… , 가만히 얼음장처럼 몇초간 멈춘 채로 고민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불러보는게 낫겠지?
“리네~!”
나는 자리에서 엉기적거리며 움직일때마다 들리는 뽀득. 소리를 들으면서, 눈 밭 위에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곧장 하얀색으로 뒤덮힌 장소에서 허공에다 크게 소리 쳐 유령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내려오는 눈송이들이 살포시 내려오는 들릴듯 말듯한 소리와, 서린 바람이 부는 소리 뿐이였다.
그럼 이번에도 나 혼자 여기 떨어졌나?
아아, 이제 어떡해야하지? 싶었던 즈음에, 다른 무언가가 생각이 났다.
하얀 문!!
그래! 내가 전에 이 곳에 왔었을 때 생겼던 하얀 문!
내가 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WANT TO CONTINUE?」 (이어가시겠습니까?)
「WANT TO RESET?」 (재설정 하시겠습니까?)
두 개의 선택지가 내 눈 앞에 떴다. 그때랑 똑같이, 달라진 점 한 톨도 없이.
침을 꼴깍 삼켰다.
나는 두 개의 선택지 창 뒷 편을 바라보았다. 하얀 문은 안 보이네. 그래도……
다시, 그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한참, 뒷편을 향해 보던 나는 다시 두 개의 선택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역시 이번에도 [이어가기]를 택하는게 맞겠지.
물론, 호기심은 있었다. [이어가기] 말고 [재설정]을 누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전에 이곳에 와서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을 때, 그때, 사실 나는 이미 하나의 가능성을 내놓았었다.
모든게 다시 처음부터 되돌아간다.
그러니까, 즉슨. 그동안 했던 모든 행동들이 무용지물이 된 채로 다시 처음부터 되돌아간다는 가능성이 있다, 라는 것이다.
물론 그 처음부터라는 시점의 기준은 잘 모른다. 내가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눈을 뜬 시점일수도 있고, 좀 더 예전으로 가면 내가 이 세계에 오기 전 시점 일수도, 아니면 더 가서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을 뜬 시점일수도 있지않을까?
일단은 ……아무래도 [재설정]이라는 선택지는 보류해두는게 낫겠지?
나는 어김없이 이번에도 [이어가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톡⸻.
[이어가기]<<
역시나! 선택창을 누른 뒤에는 하얀 문이 바로 생겨났다. 그러니까, 이 문만 지나가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소리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다시 살아나는거지?
처음에 내가 이곳에 오기 직전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거의 죽기 1분……, 1분 전으로 다시 돌아갔던거 같은데.
그렇다면 이번에도 죽기 직전으로 돌아가는걸까? …… 그렇게되면 조금 곤란한데.
왜냐하면 집에 초대된 상황에 차까지 대접 받은 상황에서 어머님이 주신 차를 안 마실 수는 없다. 일단은 예의는 기본적으로 챙겨주어야하지 않겠어?
리네라면 이 상황에서 무슨 예의따위를 차리냐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
음.
그건 리네가 나쁜 걸로 하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차는 잘 못 먹는 체질이라고 거짓말하고 거절할까? 아니지 아니지, 다른 방법으로 나를 죽일수도 있잖아.
제 앞에 있는 하얀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온갖 고민과 방안을 생각하려하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나는 머리쓰는 타입이 아니였던거 같기도…….
… 그래, 방안은 나중에 생각하자. 즉흥적으로 행동 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방어기제를 발휘해서 새로운 기발한 방안을 생각해낼지도 모르잖아?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조금 머리쓰는 타입인거 같기도 하고?
나는 문에서 내뿜는 새하얀 옅은 빛을 향해 눈을 뽀득. 뽀득. 밟아주며 거리를 좁혀나갔다.
빛의 품 안으로 조금씩 내 몸을 넣어갔다.
……빛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나를 향해 느껴지는 시선들을 무시하고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새하얀 세상에서 느껴지는 시선들을 애써 등을 돌려 무시하였다.
그리고, 또 다시 내 시야는 정전되었다.
*
눈 질끈!
아 진짜. 빛 때문에 눈 안까지 저려오네!
그러고보니, 전에도 다시 부활할 때 내 손바닥으로부터 섬광이 일시적으로 뿜어져나왔었다는 걸 새까맣게 잊고있었다. 부활할 때마다 이런 고통을 겪어하는거야?!
‘뭐어, 죽기보다야 낫기는 하지만…….’
나는 느릿느릿, 제 두 눈을 두 손으로 뺀질뺀질하게 비비적댔다. 이렇게 하니까 조금 괜찮아진거 같기도…….
“저, 저어……"
“응?”
어머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살짝 올려 후드를 쓴 뒤집어쓴 채로도 볼 수 있도록 시야의 범위를 확보하였다.
몇 분전으로 돌아온거지?
나는 주변을 제 시선으로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아직 의자 위에 앉지않은 내 몸.
보이지않는 아이.
그리고 저기 주방 쪽에 계시는 아이의 어머님.
그리고 또…….
- …뭐냐?
든든한 파트너가 옆에 있었다.
아마도 어머님이 차를 대접하기 전으로 돌아온 모양이다. 그것도 내가 얼굴을 드러내기 전으로.
찬스다. 이김에 제대로 거절해서 빨리 여기를 뜨는거야!
“저기, 괜찮으신가요……?! 아까 뭔가가…"
“아, 괜찮아요. 그냥 제 발작증세니까 신경쓰지마세요.”
- 단단히 미친건가? 이젠 헛소리도 나오나보네?
미쳤다는게 무슨 말이지?
“그런가요? ……그렇지만 아까 갑자기 섬광이 뿜어져나왔……,”
“그, 으게…! 제가 증세를 일으킨다기보단 제 손바닥이! 발작증세를 일으키는 편이라서요.”
“아…….”
- 니 진짜 거짓말 X나 못한다.
‘이정도면 잘한거 아닌가?!’
어머님은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는건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는건지 모르겠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시더니 고개를 휙, 돌려 다시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어머님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저기에서 중간에 내 차에만 독을 넣으셨다, 이건가?
“금방 차를 내려드릴테니까 먼저 앉아계세요~. 다리 아프실라.”
“아, 앗. 넵. 감사합니다!”
나는 그 전과 똑같이 어머님의 권유에 먼저 의자에 착석하였다.
그리고 조용히…… 나에게 찻잔이 내어지는 순간까지 입을 다물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때마침 내 앞에 찻잔이 내어졌다.
찻잔 안을 주전자를 살짝 기울여서 붉은 색 차로 찻잔 안을 절반 채우셨다.
“펠레우스~, 잠깐만 방에서 나오지 말고 있어주겠니?”
전과 똑같이 아이는 “네에.” 라며 큰 소리로 어머니의 말에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정말 눈만 깜빡였어도 보지 못했을 중요한 광경을 확인했다.
아이에게 당부를 하는 그 사이에 독을 탔다. 제 검지와 엄지를 내 찻잔으로 추정되는 잔 위에다 비비적거리더니, 회색 비스무리한 반짝이는 작은 가루들이 내 찻잔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저러니까 내가 독을 타는 걸 못 봤지!
나는 후드로 뒤집어쓴 빈틈으로 시선을 돌려 내 옆에 있는 유령을 보았다. 리네도 봤나?
리네는 팔짱을 낀 채로 유심히 어머님을 바라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않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어머님이 내 찻잔에 독을 탔던걸 못 본건가?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려보았다.
어머님은 내 찻잔 위에 독을 타신 후에야 나와 식탁 맞은 편에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으며 붉은 색이 절반 채워진 찻잔을 한 손으로 빙빙 돌렸다.
“아이한테는 잠깐동안 방 안에 있어달라고 했으니 안 나올거에요.”
“… 네.”
아이가 안 보는 사이에 나를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던건가…. 아이가 나한테 너무 관심을 보이니까?
나는 맞은 편에 있는 어머님을 흘긋 쳐다보았다. 차 한 잔을 홀짝, 마시며 전과 똑같이 내가 후드를 벗을 때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차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게 된 한 마실수가 없는데.
나는 우물쭈물 내어진 찻잔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보신 어머님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한 말투로 나에게 말을 건네었다.
“왜 그러세요? 마시지 않으시고.”
“…… 그게, 저, 혹시 이거 무슨 차인가요?”
홍차였겠지.
“홍차에요. 저희 남편이 홍차를 좋아하거든요.”
“어머님도 홍차 좋아하세요?”
어머님은 예상하지 못한 내 질문에 살짝 의아했는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찻잔을 빙빙 돌리며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셨다.
“처음부터 좋아하던건 아니였어요. 처음에는 냄새 때문에 꺼림칙해서 잘 마시려고 하지 않았는데, 남편 때문에 처음으로 홍차를 마셔보고 그때부터 입맛이 변한거 같네요.”
“그렇구나~, 아이는 홍차를 잘 안 마시려고 할 거 같은데, 아이도 홍차를 먹나요?”
“아니요~. 전혀요, 마시려고 하지도 않아요. 냄새 때문에 절대 안 마실거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예전에 냄새 때문에 홍차를 안 마시려고 했던것처럼 말이에요.”
아이의 어머님은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셨다.
“홍차 안 좋아하세요?”
지금이다!
“안 좋아한다기보단……, 제가 사실 차 같은 걸 잘 못 마시는 체질이라서요……. 기껏 절 위해서 차를 내려주셨는데, 어떡하지……,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예의있게 차를 안 마시겠다는 바로 이 정중한 표현! 이렇게 말하면 기분 안 상하시겠지?
“……네?”
어머님은 나의 말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은 듯 잠깐 눈을 번뜩 크게 뜨더니 한 손으로 찻잔을 쥔 채로 몇초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래요? 나 참, 제가 배려를 못했네요. 먼저 뭐 드시고 싶은지부터 물어봤어야 했는데.”
“아, 아니에요! 오히려 제 쪽에서 먼저 말을 안한 탓도 있으니까요! 사과 안해주셔도 괜찮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굽어 앞에 계신 어머님에게 깍듯이 사과의 표현을 건넸다.
“후드…… 답답해 보이는데. 안 답답하세요?”
“……아, 딱히….”
“여기는 집 안이니까 벗으셔도 괜찮아요. 게다가…”
……
“저희 집에서 …… 확인시켜주기로 하지 않았나요?”
“네, 네에…. 그랬죠……."
나는 후드 모자를 제 두 손으로 살짝 집어들어올리려는 제스처를 취하다가, 멈췄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두 번 들이내쉬었다.
후우…….
“어머님.”
제 두 손으로 후드 모자 겉을 꽈악, 움켜쥐었다.
“저를 죽이실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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