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 시리즈

[미오슬레] 짧지만 길었던 나날들

콰이어트 제로 (전투) 이후, 에필로그 이전 시점의 짤막한 날조 이야기입니다.

  • 스킨십 묘사가 존재합니다. (손잡기, 뽀뽀, 포옹 등)


건담들과 콰이어트 제로가 사라진 우주 공간에서 ‘핫츠 씨’가 된 에리크트와 함께 부유하는 슬레타를 구조하려 추아츄리가 임시로 조종하는 브리온사의 신형 모빌슈트를 타고 다가가는 이 순간, 1초가 마치 1년인 것처럼 길게 느껴져.

미동 없이 무중력 공간에 몸을 맡기고 있던 너를 붙잡고 말을 걸고 흔들어 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아.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곳의 한가운데에 혼자 남겨진 것만 같이 아득하기만 해.

홀더, 약혼자, 토마토가 있는 온실을 믿고 맡길 수 있던 사람, 엉망이 된 모습을 보여줘도 괜찮은 유일한 사람, 

나의 창백한 푸른 점. 슬레타 머큐리.

네가 이대로 영원히 내 곁을 떠나버리는 건 견딜 수 없어. 

너를 잃으면, 네가 해줬던 말들 덕분에 모든 것을 견디고 해냈던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해? 지구에는 또 어떻게 가고? 이런 상황을 상상은 해 봤었지만, 막상 닥치니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 두려워

이대로 사별하기 싫어. 네가 필요해. 평생 내 곁에 있어 달라고 했잖아,,,

실 낱 같은 희망의 한 줄기라도 잡아보고 싶어서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강하게 헬멧끼리 부딪쳐.

혹시라도 아직 영원의 잠에 들지 않은 거라면, 너를 깨울 수 있을까 봐. 충격으로 머리가 아프든 말든 그런 건 중요치 않아. 제발 눈을 떠서 엉망으로 울고 있는 나를 봐줘.

고요했던 칠흑의 우주에서 너의 작은 목소리가 전달되어 울리고, 내 이름을 부르며 웃어줬어. 살면서 이렇게까지 감사함을 느낀 적이 있을까? 너는 정말 바보야.

구조 이후 슬레타는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 해 중환자 집중 치료실에 입원했고, 병상에 눕혀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잠깐 눈을 붙이겠다는 말을 남기곤 잠에 빠져들었어.

평온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피부엔 과부하된 붉은 파르메트의 잔상이 여전했는데, 의료진의 말로는 한동안 그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며 어쩌면 흉터가 남을지도 모른대.

신체기능 또한 이전과 같지 않을 거라고, 경과를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현재 상황으로선 중추신경계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것에 덧붙여, 조심스럽게 과거 ‘건담으로 인한 퍼맷 스코어 과부하 피해자’들의 의료 기록에 따르면 영구한 신체장애가 남을 소지가 다분하다며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조용히 얘기를 듣고 있던 내 안색을 살피기까지.

예전의 튼튼한 너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건 조금 슬프지만, 아무렴 어떨까.

그 저승길에서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감지덕지야. 나의 슬레타.

그렇지만 죽음의 길목이라는 게 너를 쉽게 놓아주진 않더라. 밤이고 낮이고 가슴 졸이게 하는 응급상황이 몇 번인가 지나갔고, 그때마다 너는 늘 그렇듯 대견하게 이겨내 주었어.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병동에 자주 갈 수 없어서 더욱 애가 탔지만 말이야.

어쩌다 짬을 내어 잠깐 병문안을 가면, 여전히 미동 없이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너를 멍하니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곤 해.

네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물어보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말도. 나를 담은 깊고 푸른 바다 같은 눈동자, 다정함이 묻어있는 음성, 조심스럽고 떨리던 손길, 마음을 진정시켜 주던 숨결과 따뜻한 품, 그 모든 것이 그리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면 네가 깊은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아, 그 모든 것들을 다시는 느끼지 못할까 두려워서 몇 번이고 이름을 불러보기도 해. 유리창 밖에선 들릴 리가 없는데.

병실에 홀로 누워있을 너를 생각하면 쉬이 잠이 오질 않아. 

그렇게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인 지 며칠이나 됐을까. ‘핫츠 씨’가 된, 슬레타의 유전체 원본이자 언니라고도 할 수 있는 에리크트가 무언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땅한 소통 장치가 없으니, 그와 대화를 하기 위해선 ‘매개체’부터 만들어야 해.

이제 더 이상 전투 병기 모빌슈트로서의 건담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가 어머니인 프로스페라를 비롯해 동생인 슬레타, 그리고 머지않아 가족이 될 나와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

밤이 지나고 오전에 벨메리아 주임님을 비롯한 기술자들에게 에리크트와의 소통 매개체 제작을 부탁하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했고, 약 일주일 후에 조악하지만, 간단한 터치 동작으로 에리크트와 대화할 수 있는 ‘인이어 송수신기’가 완성됐어. 임시제품이라 이후에 보강을 거쳐 제대로 된 송수신기를 만들겠다는 기술담당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지.

에리크트는 너보다 수다쟁이더라. 작은 호기심부터 업무에 관해 이래라저래라 핀잔을 주기까지.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못 하는 말이 없어 아주.

오랫동안 딸을 그리워하고 함께 하고 싶었을 프로스페라에게 ‘에리크트’와 여분의 ‘인이어 송수신기’를 건네주었지만, 무슨 연유에선지 며칠에 한 번은 에리크트 스스로가 나의 침실에 와 함께 잠을 청하고 싶다기에 허락했어. 

신기하게도 그런 밤엔 불면을 겪지 않아. 그가 들려주는 귀엽고도 바보 같은 어릴 적의 네 이야기에 모든 불안과 걱정이 녹아내리는 것 같으니까.

에리크트가 지속해 보내온 구조신호 덕에 그 광활한 우주에서 오래 헤매지 않고 무사히 너를 찾을 수 있었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 넷은 일생을 동고동락할 가족이 될 거야.


 꿈을 꿨어.

어린 나와 엄마, 그리고 에리크트가 함께 하는 꿈.

우리는 추운 밤을 이겨내기 위해 함께 머그잔에 코코아를 타 마시기도 하고, 인공잔디밭을 신나게 뛰어다니며 잡기 놀이도 했어. 나란히 누워 동화책을 읽어주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소박하지만 에리크트의 아홉 번째 생일도 함께 축하 해줬어.

나는 계속 자라는데, 에리크트는 여덟 살 이후로 전혀 자라질 않아. 엄마는 꿈에서도 열한 살 이후론 더 이상 내 생일을 함께 축하해 주지 않았어. 서운하지만 괜찮아. 에리크트와 함께하는 엄마는 진정으로 행복해보였으니까.

엄마는 에리크트의 생일을 매번 축하해 줬어. 딸기가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 어쩐지 초는 계속 8이 쓰인 채로였지만, 색은 항상 바뀌었고 이번에는 분홍색이야.

.

쑥쑥 자라서 난 17살이 되었고, 엄마는 이번에도 생일을 축하해 주지 않아. 바쁘시대. 에리크트는 웅크려 앉아 혼자서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줬어.

마음이 슬퍼서 조금 걸었어.

한낮의 태양 빛을 재연하는 인공조명이 너무 눈부셔서 벤치에 앉아 고갤 숙이고 있는데, 옆에 어른스러운 정장을 입은 미오리네 씨가 다가와 앉으시더니 아무 말 없이 웃으며 토마토를 건네주셔. 동시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크게 울려서 부끄러웠지만, 토마토를 받아 한 입 베어 물으니 곧 미오리네 씨도 같은 부분을 한 입 베어 무셨어. 

우, 우리 간접키스 했어요!

나보다 입이 작은 미오리네 씨의 입가에 토마토가 묻어서 닦아드리고 싶은데 자꾸 어지러워져. 몸이 조금씩 휘청이는데도 미오리네 씨는 아무 말 없이 웃으시며 나를 바라보고만 계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미오리네 씨가 “수고했어, 슬레타”라고 말해 주셨어. 기쁜데, 답을 해주어야 하는데 입은 떨어지지 않았고 몸이 너무 무거워져서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어.

.

눈을 떴어.

여긴 미오리네 씨의 아버님이 누워계셨던 곳과 비슷한 병실이구나. 꿈에서 깨어난 걸까? 아니면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어지러웠고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유리창 밖으로 나를 바라보는 미오리네 씨가 보여. 조금 우셨었는지 눈가가 살짝 부어 보이는 미오리네 씨는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어주셔서 마주 웃어주고 싶은데, 같이 손을 흔들어 주고 싶은데, 근육이 마음처럼 움직이질 않아. 꿈이 아니구나.

무거운 눈꺼풀을 여러 번 감았다 뜨며 답하자, 유리창에 오른 손바닥을 대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웃어주시는 미오리네 씨가 이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셨어. 어깨가 조금 떨리고 있으셔서 애달파.

이제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만 우세요. 미오리네 씨.

.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입원 이후 내리 3주를 잤대.

깨어나고 3달이 지났을 무렵부턴 목을 잘 가눌 수 있게 돼서 보살펴 주는 의료진분들이랑 간병사분들의 수고를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 있게 됐어.

미오리네 씨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주에 한 번은 시간을 내 나를 만나러 와주셨어. 팔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손을 잡는 것조차 할 수 없었지만, 최대한 밝게 웃으며 이야기는 나눌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지 뭐야.

병문안을 오실 때마다 미오리네 씨는 근육이 굳으면 안 된다면서 매번 몸 이곳저곳을 부드럽게 마사지해 주신 뒤에 손을 깍지 끼고 잡아주시거나, 이마에 뽀뽀를 해주시곤 몸을 숙여 잠깐의 포옹을 해주셔. 그런 미오리네 씨에게 화답하고 싶어서 힘을 내 고개를 움직여 볼끼리 맞대면, 볼과 입술에도 뽀뽀를 해주시니까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개지고, 그런 나를 보며 하하하 소리를 내며 웃는 미오리네 씨가 예쁘고 좋아서 따라 웃게 되곤 해. 

이런 나도 좋아해 주셔서 기뻐요.

긴 머리카락은 돌봐주기에 걸리적거리고 불편해. 에리크트가 생각하기에도 그렇대. 

언제 스스로 머리를 감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분들을 번거롭게 하는 것 같아 죄송해서 미오리네 씨에게 부탁해 머리카락을 잘랐어. 거울에 비친 모습이 어색했지만, 어깨를 조금 넘을 만큼 짧아진 머리카락을 미오리네 씨가 빗겨주시며 잘 어울린다고 웃어주시니까 같이 환하게 웃어 보였어. 머리카락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랄 테니까.

바쁜 일이 있다며 그로부터 이 주 뒤에 병문안을 오신 미오리네 씨의 머리카락도 짧아져 있어서 깜짝 놀라니까 아직 혼인신고도, 예식도 올리지 못했지만, 우리는 부부가 될 운명공동체니까 뭐라도 같이 공유하고 싶었다고, 함께 다시 기르자고 말씀하셨어. 기쁜 마음에 그만 엉엉 울어버렸는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시면서 “울지 말고 웃어야지, 이 바보야!”라며 본인도 눈물을 흘리고 계셔서, 이런 말은 조금 이상할 순 있지만 지금 무척 행복하다고 말씀드렸어.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니까, 몇 주 만에 슬레타에게 병문안을 가는 미오리네에게 같이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어. 

병실에서 미오리네는 잠깐 우리와 대화를 하는가 싶더니, 슬레타의 머리를 빤히 바라보곤 직접 감겨주겠다고 그러네? 간병사가 하면 될 일을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는지. 슬레타는 활짝 웃으며 좋다고 화답했는데, 아직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 하는 사람인데 덩치도 작은 녀석이 어떻게 머릴 감겨주겠다고. 그러다 슬레타가 다치기라도 하면...

“이봐, 예비 제수씨. 그렇게 하면 슬레타 목이 불편하잖아?”

“잔소리 하지 말아 줄래?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난 괜찮아 에리크트! 미오리네씨, 고개 이쪽으로 돌릴까요?”

“응, 고마워~ 슬레타”

“서운하네, 벌써 올케 편드는 거야?”

“미오리네 씨도 모처럼 만에 시간을 내셨고, 이번엔 직접 머리도 감겨주시는 거잖아. 그냥 다 좋은 걸 어떡해.”

슬레타가 좋다면야 괜찮지만, 역시 불안한 건 사실이란 말이지. 예전보단 말랐어도 조그만 미오리네에 비하면 확연히 큰 체구인데, 곱게 자란 아가씨가 제대로 돌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미오리네, 너도 참 별나다. 간병사에게 맡기면 될 일을.”

“넌 모르겠지만, 예전에 슬레타가 머릴 감겨준 적이 있어. 나도 똑같이 해주고 싶을 뿐이야.”

“뭐? 슬레타가?”

“에헤헤, 부끄러워요옹~ 미오리네 씨이...”

“너희 혹시, 뭐, 했...다거나 그런 사이냐?”

“.....”

“.....”

왜 둘 다 말없이 얼굴을 붉히는 건데!

“미오리네, 너 순진한 슬레타를!!!”

“아니야, 에리크트!  나도, 원했는걸!”

“약혼한 사이에 그럴 수도 있지. 입원한 후로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상식인이라 다행이네...”

정말로.

“미오리네씨! 머리도 말려주실 거죠?”

“당연하지. 자 컨디셔너도 끝났고, 수건으로 닦기 편하게 앉혀줄게.”

“헤헤, 네!”

이제는 슬레타도 나나 엄마에게 모든 걸 말하지 않을 정도로 컸구나. 살짝 서운하기도 하지만,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동생’을 보면 흐뭇한 것도 사실이어서, 둘은 사이좋은 부부가 되겠구나 하고 안심이 됐어.

처음 미오리네를 만났을 땐 상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무수히 많은 일들을 지나왔고 결과가 어떻든 간에 슬레타가 스스로 선택하고 나아간 방향의 삶에서 행복할 수 있게 되어서 기뻐. 

너에게 축복을 가득 담아 전해주려던 마음이 나에게도 축복으로 되돌아왔는지, 엄마도 나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 평온하다고 할 만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되었고 우리 넷은 오래 지나지 않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공동체가 되겠지. 

미오리네에게 고마운 것도 사실이야. 말로 하긴 부끄럽지만.


-몇 주 뒤-

“슬레타.”

“네, 미오리네 씨?”

“나, 머리카락 기르지 않기로 했어.”

“네에에??”

“짧은 머리카락으로 지내보니까, 편하더라고.”

“그러...시군요...”

“응. 미안, 같이 기르자는 말은 지키지 못하게 됐어.”

“... 괜찮아요. 미오리네 씨가 지금이 편하시다니까...”

“그렇지만, 슬레타 너는 머리카락 계속 길러줬으면 좋겠어.”

“네? 음, 원래 기르려고 한 걸요.”

“응, 다행이네. 넌 긴 머리카락이 훨씬 예뻐.”

“헛! 저 예뻐요?”

“당연한 거 아니야? 내 아내 될 사람인데.”

“아, 아내!”

“슬레타 얼굴 빨개졌다! 아학하하하하하”

“에리크트, 우리 대화에 끼지 말아줄래?”

“제, 제가 미오리네 씨의 아내면, 미오리네 씨는 저의... 뭔가요?”

“응? 나도 슬레타의 아내지.”

“아, 아내.”

“둘 다 여자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아내.”

“그, 아내라고 하니깐, 저희가 나중에 부부가 되는 게 정말 실감 나요!”

“음... 혼인신고 먼저 해버릴까?”

“네?”

“빨리 가족이 되고 싶어. 슬레타랑.”

“나랑 엄마도 있다고?”

“알고 있으니까, 가방 속에 집어넣기 전에 입 좀 닫아 제발.”

“슬레타는 이런 여자가 뭐가 좋다는 건지.”

“뭐라고?”

“으아아, 그만! 싸우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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