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득, 까드득. 인간 취급 없이 살아남은 생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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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4. 21

 

하얀 바탕에,

테두리를 새빨갛게 혹은 초록색으로 칠한 게임 칩들. 킨센트는 뭉뚱그려 보면 식용 색소로 가공한 설탕 덩어리 같은 그것들을 두 입술 틈으로 밀어 넣었다. 승냥이가 뼈를 핥아 살코기를 바르듯 칩에 달라붙은 손때를 떼어내 삼켰다. 텁텁한 먼지 맛이 났다. 칩은 빈말로라도 그 외견처럼 설탕 맛이 난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의식 한 켠은, 눈앞에 수북한 칩을 전부 뱃속에 밀어 넣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수확은 영원할 때 가치 있다. 배는, 죽기 전까지 열어보지 못하고. 그래도 삼키기엔 제법 부담스럽다. 할 수 있을까. 킨센트는 입안에서 칩을 세우고 칩의 딱딱한 끄트머리로 혀 안쪽을 지그시 눌렀다. 그 이물감이 손으로 칩을 깔짝이던 감각의 배가 되는 자극을 주었다. 하릴없으면 어때. 기분, 좋은데. 킨센트는 불현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입꼬리는 호기롭게 치솟아 여상한 표정 안을 파고들었다. 덕에 미인의 가지런한 이목구비가 저들끼리 맞붙거나 멀어져 일그러진 인상이었다.

킨센트는 문득, 제 행동이 다소 우악스럽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런 기행이 제삼자의 눈엔 더욱 기괴한지 그의 팔뚝을 잡아끄는 손길이 있었다. 줄곧 편의를 봐주던 딜러였다.

 

딜러는,

식은땀을 흘렸다. 마치 그의 목덜미를 번개가 수시로 타격하는 듯했다. 목덜미 털이 피뢰침처럼 쭈뼛 솟았다. 귀한 상아 소재 칩이 훼손되는 일보다도 저 정신 나간 고객을 카지노에서 내보내고 싶은 갈망이 전신에 경고를 보냈다. 이상스러웠다. 눈앞의 와인색 머리 청년은 그저 칩을 입에 물었을 뿐이다. 딜러는 청년을 칩의 화려한 도색을 보고 그것을 먹을 것으로 착각한 아이처럼, 혹은 물건에 비이성적인 집착을 가진 미치광이로 치부할 수 있었다. 한데 지금 당장 청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식은땀만 났다. 킨센트를 잡은 딜러의 손아귀로부터 이어지는, 손등의 핏줄이 어느새 도드라져 있었다. “손님, 건강에 안 좋습니다. 뱉으세요. 물 한잔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숨 돌리면 눈이 뭐에 돌아가셨든 간에 나아질 겁니다. 손님, 손님?” 딜러는 급기야 울먹이는 것처럼 눈에 물기가 어린 채 소리쳤다. “손님, 제발요, 그거 내려놓고 진정 좀 하세요!” 어린아이가 악을 쓰는 듯한 목소리였다.

화려한 조명은 딜러의 눈물을 송곳처럼 뚫고 파고들었다. 딜러는 눈앞이 미러볼처럼 정신없이 깜빡이는 걸 참아내면서 다시금 킨센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딜러는 생각했다. 자신이 왜 우는지. 킨센트가 딜러를 무시하고 입안에 계속, 계속 칩을 쑤셔 박는 행동이 슬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행위의 뜻을 알 수 없어 자신이 그 일에 특정한 감정을 느낀다고 판단할 수 없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공포가 목젖에 칼등을 맞붙인 듯 차가웠다. 딜러는 또한 생각했다. 도대체 포커 칩의 무엇이 이 청년을 이토록 맹종하게 하는가? 딜러의 생각은 어느새 킨센트가 카지노에 입장한 순간으로 뻗어나갔다.

 

청년은,

인상이 강아지를 닮아 있었다. 백인의 붉음을 찾아볼 수 없이 하얀 피부였다. 와인색 앞머리에 은으로 장식한 스페이드 모양 핀을 꽂은 채였다. 핀 뒤로 너저분한 머리는 금방이라도 가닥마다 다른 곳으로 튀어 나갈 듯했다. 청년은 오늘 처음 꺼낸 양 때 묻지 않은 새 셔츠를 입고, 사파이어 브로치를 단 크라바트를 스스로 곁눈질하고 있었다. 청년의 차림은 귀족 신분 신사가 보기에도 퍽 귀공자였다. 그러나 큼지막한 소매를 지닌 하얀색 외투 안쪽의 팔다리가 매우 가늘었다. 와인잔 손잡이처럼 가냘프다. 딜러가 그의 체격에서 이상함을 알아채기 전에, 그런 그의 어깨를 그러쥐고 동반한 백발 장신 여성은 자리 안내를 부탁했다. 그는 한창 포커 플레이 중인 테이블을 지나며 자기가 안타고 신분이라 떠들었다. 딜러는 청년에의 생각을 접은 대신 두 사람의 인상이 닮았으므로 이런 데를 함께 올 만큼 긴밀한 모자지간이구나 생각했다. 허나 지금 떠올려 보면 안타고는 청년에 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으며, 청년 또한 그를 어머니라 명명한 적이 없었다. 청년의 신원은 불명이다. 신분도.

킨센트는 카지노에 입장할 때만 해도 파리한 안색을 지니고 비틀거렸다. 지금은 근육질의 군견처럼 자기 앉은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딜러가 아무리 그를 제재하고자 그의 팔을 잡아당겨도, 바닥에 주저앉다시피 놓인 얇은 다리는 철근처럼 붙어 있었다. 딜러는 한때 이런 자에게 붙잡힌 적이 있다. 인근 거리가 정화 사업 대상지라 하여서, 작업이 시작되기 전에 그 거리를 구경하러 가보았었다. 초입부터 눅눅한 오물 냄새가 나더니 몇 블록 깊이 들어가자 어느 주름진 손이 딜러의 고급 원단 바지 밑단을 꽉 쥐었다. 광대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노인이 초점 잃은 눈으로 딜러를 올려다보았다. 노인은 목구멍의 물기조차 말라버린 듯, 입술을 벙긋대기만 할 뿐 구걸조차 하지 못했다. 딜러는 노인의 손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핏기가 없었다. 그럼에도 손아귀 힘이 어찌나 드센지 걸음이 전혀 떼어지지 않았다. 딜러는, 꼼짝없이 노인에게 금전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오늘 하루 배곯지 않기를 간절히 염원하던 손에 힘이 풀렸다. 딜러는 거리에서 도망쳐 나왔다. 바지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힘이 빛의 세상에 닿을 때까지도 종아리에 생생했다. 지금 청년이 버티고 앉은 힘은 그때 감각을 떠올리게 했다.

딜러는 이마로부터 툭, 툭 빗물처럼 떨어지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킨센트를 보며 마른 입술을 씹었으나 결국 뒤로 물러섰다. 노인에게 은전 하나 던져줄 때처럼 순순히 비켜섰다. 킨센트는 여전히 상아 칩을 입에 물고 느릿느릿 핥아내는 중이었다. 그것을 부식시켜 먹을 것처럼. 그리하고 나면 그는 사람의 뼛조각이나 발톱도 게걸스레 먹어 치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킨센트는 사람이 느끼기에 생경한 공포를 어떤 점액질처럼 흘렸다.

 

까닭은,

그가 인간 취급 없이 살아남은 생명이기 때문일 터다. 칩에 고개를 처박았던 킨센트는 점차 고개를 들었다. 무덤에 꽂은 비석같이 꼿꼿하게 세운 허리, 고개, 어깨를 한참 지나는 와인색 머리카락이 한눈에 들어오는 뒷모습. 킨센트의 반신은 예쁘게 머리를 빗긴 인형처럼 보였다. 아기자기한 맛은 없고, 주인이 잠든 밤에 눈을 뜰 것 같은 섬뜩한 물건과 같다. 그 인형 같은 청년은 어쩌면 ‘살아서’ 처음 숨을 쉴 수 있게 되어 깊이 심호흡하는 듯했다. 그리고 거친 날숨을 토했다.

킨센트는 칩을 씹어 삼키다 못해 허파 안까지 채워 넣은 것마냥, 가슴을 주먹질로 쳐댔다. 그러다 입에 넣은 크리스마스 색 칩들을 하나둘 뱉었다. 잘그락, 하고 소리를 내며, 타일 바닥을 도우 삼아 페퍼로니 칩으로 장식했다. 잘그락. 잘그락, 찰그락, 또, 잘그락. 슬롯머신에서 잭팟을 냈을 때나 쏟아질 법한 동전 소리를 제 입술 틈으로 뱉었다. 분침 바늘이 장장 검지 두 마디 정도 움직일 때까지 시끄러운 침묵이 이어졌다. 결국 킨센트가 마지막 칩을 뱉었다.

딜러도, 게임 하던 이들도, 그가 칩을 입에 밀어 넣을 때 경악을 금치 못하며 몰려든 손님들도. 이제 그의 기행에 지친 눈으로 킨센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킨센트를 에워싸고 있었다. 킨센트는 가만 고개를 들었다. 그것을 기울였다.

 

위에서부터 쏟아지는,

시선. 왜, 나는. 괴물 같은 것을 보는 눈빛들,을. 지극히 아래에서 받아내야만 하지. 이유를 아세요? 육성으로 꺼낸 말인 줄 알았건만 아니었는지 다들 대답 없이 겁에 질려 있기만 했다. 용기 내 똑바로 말했다. “제가 이긴 것, 맞지요?” 대답이 없었다. 무정하신 분들. 어쩌면 내가 아까 육성으로 뱉었음에도 전부 묵인했는지 몰라! 킨센트는 입술을 맥없이 벌려 실소를 내보냈다. 그렇게 웃음을 꺼내놓고 나니 속이 다시 허했다. 킨센트는 딴 칩 전부를 양팔로 쓸어 제 무릎 앞에 끌어모았다. 칩 더미에 주먹을 박고 팔을 휘저었다. 손가락에 정통으로 걸린 것은 테두리를 갈색으로 칠한 풀 포커 칩이었다. "이거, 최고 가치 아닌가요? 오늘 운이 좋네요. 퍽 행복해진 것 같아요. 이런 게 그쪽네들 행복이 맞나요?" 중얼거리며 그것을 또 입에 문다.

칩을 손쉽게 앞니 안으로 넘기고, 어금니로 칩 중심부를 물어 까득거렸다. 새하얀 눈밭에 발자국을 남길 때보다 조심스럽게, 중심서부터 칩의 외곽까지 씹어 나갔다. 기어이 잇자국에 칩 끄트머리가 자갈을 깬 것처럼 부서졌다.

 

킨센트는,

상아 가루를 삼켰다. 약지 손톱만도 못한 부스러기라 목구멍에 무엇도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은 절절히 울렸다!

비유하자면, 샹들리에를 비스킷처럼 잘라 먹는다면 이런 속사정일까. 청년은 상상해본다. 샹들리에의 유리 조각을 삼키면 그것들이 목구멍을 못처럼 찌르고 위장 속에 침잠해 가겠지. 속이 메스꺼우리라. 또한 유리 조각을 앞니로 물고 입 밖에 내밀면 내장이 유리 조각에 비쳐 보여서, 검붉은색을 립글로스처럼 바른 듯 보이겠지. 그때 자신은 고혹적이겠지. 만일 궁핍한 생활을 매끄럽게 펴고 나면 다음으로 돈을 펑펑 써댈 곳은 그 자신밖에 남지 않을 테니, 외견을 치장함이 곧 부의 정점이겠지. 그때 자신은 매력이 있을 터다. 하늘의 눈에 들어 다음에 꺾을 한 줄기 꽃이 되겠지. 그리 꺾이어 단명하면, 나는 생명이 다 죽은 거리에 핀 예외 하나 되겠지. 청년은 숨죽여 뇌까렸다. 내가 소위 예외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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