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나또비빔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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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남몰래, 신속하게, 시나브로 시작되었다. 처음은 ‘나무’부터였다. 세계 각지의 숲과 산, 거리에서 하룻밤 새 지나치게 커다래진 나무들이 발견되었다. 풀이나 꽃에도 예외는 없었다. 나무 하나가 휴양지의 고층 빌딩만큼 자라났고, 아기 손바닥만 했던 들풀이 어른 머리통만큼의 크기로 커졌다. 수많은 식물학자들이 비대하게 자란
“개회(開會)합니다.” 또렷한 선언과 함께 불꽃이 튀며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의 면면이 드러났다. 둥글고 넓은 회장 안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정연히 앉은 사람들은, 생김새도 나이도 인종도 모두 제각각으로 이렇다 할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다만,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자리가 보통 자리가 아니라는
안녕하세요! 에피니예요! 오늘은 햇볕이 아주 아주 좋아요. 이런 날에 소풍을 가면 행운이 따르는 법이라고 칼립소 언니가 알려 줬지요. 메이벨 언니는 오늘 드레스 쇼핑을 간다고 했어요! 하지만 에피니는 따라가지 않았답니다! 왜냐하면 오늘은 유리 오라버니랑 공부를 하기로 한 날이니까요! 그래서 정말 정말 따라가고 싶었지만 따라가지 않았어요! 에피
라케아니아 남부에서 손꼽히는 명문 카르마의 수장 에두마 카르마는, 세간에 알려진 대로 엉덩이가 가볍고 행실이 가뿐한 자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의 애인 편력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지조도 절제도 없이 방자하다는데 있었다. 항간에 떠도는 ‘고자가 아닌 성인이라면 한 번쯤 에두마의 침대를 보았을 것이다’라는 말이 이유 없이 생겨난 게 아
그 날은 오전부터 일진이 좋지 않았다. 밤새도록 창 밖 고양이 울음에 시달리다 눈꼬리에 커다란 눈곱을 붙이고 일어났을 때, 그 때까지만 해도 아양은 사실 그리 대수롭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른 발정기가 왔든, 뒤늦은 발정기가 왔든, 영역 싸움이 났든 뭐 고양이가 좀 울 수도 있지. 사지를 쥐어짜 기지개를 켠 그녀는 부스스해진 머리만 한 번 긁적이고
깜깜한 밤. 새카만 하늘에 작은 별만이 총총히 빛나는 은하수의 밤, 마법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찬란한 별빛이 부드럽게 내려와 다정한 손길로 그의 온몸을 감싸는 듯했다. 별은 모든 마법의 근원이자 모든 마법사들의 어버이. 마법사로 태어난 이는 자연히 밤하늘의 모든 별을 경외하고, 사랑한다. 마법사치고 유독 냉랭하다는 소리를 듣는 그라도
미국 동부 뉴욕 주의 뉴욕에서, 미국 서부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까지의 거리는 자그마치 2,550 마일(육로 기준). 자동차로는 38시간, 기차로는 2일, 걸어서는 35일,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더라도 6시간 가깝게 걸리는─ 빈 말로도 절대 ‘가깝다’고는 할 수 없을 거리이다. 제 아무리 시간이 썩어 나는 대재벌이라도, 운전에 도가 튼 레이
0. 태양이 지지 않는 도시 존경하는 형님과 그리운 형수님께. 건강히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이제 곧 라스페로사에 도착해요. 우나이솔라에서 열차를 탄지 열흘만에요. 아직 도착하려면 반나절 정도는 남았다고 하는데,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려서 견딜 수가 없어요! 열차 창을 통해 내다보는 서부의 풍경은 정말 근사하답니다. 들쑥날쑥한 지평선이 끝없
8주에는 22번. 12주에는 38번. 16주에는 57번. 이게 무슨 숫자냐면. 배은망덕한 애새끼들이 에우리페의 배 속에서 자라나는 동안, 밥도 못 먹고 비실대던 에우리페가 꼴까닥 쓰러져버린 횟수이다. 길을 가다 픽 쓰러져버린 적도 있고, 침대에서 일어나다 도로 드러누워버린 적도 있다. 책을 읽다 까무룩 고개를 떨군 적도 있고. 밥을 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