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거

흩어지는 남자

발더스게이트3 승천아스타브인데 타브는 없어요

미무백업 by 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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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와 마주친 것은 축축하게 비가 쏟아지는 밤이었다. 질척이는 땅, 술에 취해 흔들리는 발걸음들… 어느 하나 특이할 것 없는 비오는 밤의 발더스 게이트였지만 딱 하나, 그 남자만이 여느 날과는 달랐다.

그 남자는 후드를 뒤집어 쓴 채 시끄러운 홀 구석 자리에 앉아있었다. 폼잡기를 좋아하는 로그나 불량배들이 꼭 저런 자리에 저렇게 앉아있곤 하던데 싶어 잠시 눈길을 준 것이었으나, 이내 시선을 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손에는 거의 마시지도 않은 술잔이 하나 들려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가 술잔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사실 잘 모르겠다. 그는 그저, 정물처럼 가만히, 그것에 시선을 박아 넣고 있었다. 짙은 속눈썹과 후드의 그늘에 가려진 그의 눈동자를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가 정말로 물건을 바라보고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미동조차 없이, 눈꺼풀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한 점 흔들림도 없이 앉아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조금의 들썩임도 없이, 그곳에 박힌 듯 앉아있었다.

그의 정물같은 존재감에 압도되어 조금 늦게 깨달았지만, 더욱 이상한 점은 그의 몸 어디에도 물기 한 점 없었다는 것이었다. 잔을 들고있는 그의 손, 후드 밖으로 빠져나온 매끄러운 코끝은 물론, 그를 온통 가리고 있는 검은 후드에도. 이렇게 온 세상이 젖어들 정도로 습하게 비가 오는 날에 어디 하나 젖지 않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가 꽤나 귀하신 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마차 따위를 타고 여기까지 왔으리라. 이 도시에서 마차를 타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 아랫동네 무지렁이들은 아니라는 소리니까. 자세한 사정이야 모르겠지만, 아랫동네에 모험가 체험이라도 하러 온 귀족이나 졸부겠거니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긴몰라도 비오는 날에도 물 한방울 튀지않을 정도의 귀한 집 놈이라면야 슬쩍 어울려주면 술 값 정도는 내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행동을 개시했다.

“형씨, 왜 그렇게 청승맞게 앉아있으셔? 술 다 식겠네~”

그러자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 거뭇한 눈가. 그의 안색은 창백했다. 처음 그의 얼굴을 봤을 때는 그의 기묘한 안광에 놀라 일순 소름이 돋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니 예쁘장하니 귀티가 났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아주 무표정했지만 그를 정면에서 바라본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저 사람은 상태가 안좋다. 젠장, 모험가 놀이 하러 온 귀족인줄 알았는데, 청승떨러 온 놈팽이였나? 나는 입이나 털고 공짜 술이나 좀 얻어마시고 싶었을 뿐이지 남의 우울한 이야기나 들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서 발을 뺄 준비를 했다.

“안좋은 일 있으면 저~기 드로우 남매한테 가보면 좋을걸? 죽상이던 사람도 헤벌레 해져서 나온다는 소문이 자자해. 난 그럼 이만…”

“술이 식은지는 오래야.”

그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그르렁거림이 섞여있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입을 떼지 않고 있다가 입을 연 사람이 으레 그렇듯이 낮게 잠겨 약간 갈라지는 듯 했다. 그게 고운 얼굴과 영 안 어울렸다. 나는 곱상한 얼굴을 해서는 꽤나 동물적인 목소리라는 생각을 지워내며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붉디 붉은 눈. 두 번째 보지만 여전히 이상한 눈이었다. 색도 색이지만, 그의 시선은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것 같다는 두려움과 그가 당장이라도 부서져내릴 것 같다는 느낌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이런게 사연있는 놈의 눈인가? 아니, 내가 얻어마신 공짜 술만 몇 잔이었건만 사연있는 놈이라고 다 이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왠지 모를 위압감과 불길함에 나는 어쩐지 더욱 발걸음을 돌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라고 어디가서 쪽도 한 번 못 써보고 쪼는 그런 놈은 아니다.

“하이고, 그럼 여기 오래 앉아계셨나보네? 왜, 누구 기다리는 분이라도 있으셔?”

나는 애써 느물느물 웃으며 그의 맞은 편 의자를 빼 앉았다. 다행히 그는 내 행동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사실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의 시선은 다시 그가 쥐고있는 술잔에 내리꽂히고 있었다. 나는 그가 다시 한 번 입을 열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계속해서 미동없이 그놈의 술잔을 꼬나보기만 했다. 아까는 잘만 입 열어놓고 뭐하자는거야?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바보같아 질 만큼 시간이 흘렀고, 나는 공짜 술 노리기고 뭐고 이 뭣같은 곳을 그만 뜨고 싶어졌다. 입도 안 여는 놈에게 예의차릴 것도 없겠다 싶어 그만 몸을 일으키려는데 불현듯 음성이 들려왔다.

“앉아.”

그의 말이 떨어지자,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나는 그의 앞에 정자세로 다시 앉아있었다. 마치 잠시 뭐에 홀렸던 것 마냥, 왜 그랬는지도 모르게 말이다. 불현듯 눈을 깜빡이자 가지런히 모아 앉은 무릎 위에 주먹쥔 내 두 손이 곱게 놓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아니, 진짜, 뭐지? 파드득 놀라 고개를 들자 그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앉아, 똑같이 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잔을 조금씩 빙글빙글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 말 대로야.

기다리고 있지… 내 하나뿐인 반려(consort)를.”

오 쒯, 그냥 청승떠는 놈인줄 알았는데 개같이 염병떠는 놈이었네. 귀한 집 자식일 줄은 알았지만 국왕폐하 놀이 씩이나 하는 놈일줄은 예상 못했다. 나는 사춘기 청소년들이 잠시 거쳐갈 것 같은 어둠의 염병스러운 그의 말에 조금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바로 그 때, 그가 내려다보던 방향 그대로 얼굴을 둔 채로, 눈꺼풀만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 앞에서 무표정을 가장하려고 애써서인지 몰라도, 나는 목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소름이 돋아 쭈뼛한 목덜미를 벅벅 문질러댔다. 쉽게 가라앉지는 않았다.

“아, 예, 그러십니까? 아무렴 나으리같은 분이 이런 곳에 혼자 오실리가 없습죠, 예에… 어디, 빗길이 험할텐데 아내되시는 분 오실 걸음이 영 걱정이시겠습니다.”

나는 어느샌가 그에게 굽실거리며 말을 하고 있었다. 아닌게아니라, 그는 후드 아래로도 감춰지지 않는 금실과 보석으로 장식된 그야말로 환장하게 비싼 옷을 입고 있었다. 저런 옷을 한 벌 팔면 나같은 아랫도시 촌놈은 몇 달이고 배터지게 먹고 마시며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눈깔을 굴려 그가 입은 옷 따위를 스캔하기 전에도 이미 느끼고 있었다. 부정하고 싶지만 나는 이곳에 내 자의 만으로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어떠한… 압박감을.

“오,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아. 나는 계속 기다릴테지만 내 반려는 이제 여기로 올 수 없거든. 사실, 내 반려가 두 발로 걷는 것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지. 얼마나 지났더라… 내 반려가 나만 두고 떠나간 지 말이야.”

씨발, 그런거였나. 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걸 꿀꺽 삼켜냈다. 잘나신 부자 나으리가 이토록 무게 잡고 청승떨고 있던 이유가… 배우자가 가출해서였냐고! 아니, 안사람이 가출했으면 따라가든지 찾아보든지 해야지, 왜 윗동네도 아니고 여기와서 염병을 떨고 있담? 이거 아무래도 함정을 정면으로 밟아버린 것 같았다. 나는 화약폭탄을 잔뜩 끌어안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기분으로 말을 받았다… 어떻게든 화는 피하려고 시도는 해봐야 할 것이 아닌가.

“아… 예에… 그…… 사,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그러나 내 입 밖으로 꺼내진 말이라고는 이정도가 다 였다. 평소 입 터는 것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의 앞에서는 바람에도 날릴 내 입술도 쉽사리 떨어지질 않는 것 같았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도 슬슬 힘겨워졌다. 특히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이 때까지는, 나는 이것이 이 면구스러운 상황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 내가 너같은 이에게라도 털어놓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그렇다고 밖에 할 말이 없군. 이러고 있는걸 걔가 봤다면 정말 좋아했겠어. 걘 항상 내가 많은 사람에게 좀 더… 친근하길 바랐거든. 난 다른 놈들따위 하등 상관도 하지 않는데도, 내 반려는 항상 나 외의 다른 놈들까지 친히 굽어 살폈지… 그게 그다지 효과는 없더라도 말이야.”

“아, 그러셨군요… 좋은 분이셨겠습니다…”

“좋은 사람이었지만…좋은 반려는 아니었던게지.

나를… 나만 두고, 그렇게, 떠나다니.”

그가 짖이겨 씹듯 한 마디 한 마디를 뱉어낼 때 마다 그가 손에 쥔 술 잔이 우그러들었다. 나는 이제, 그저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빌고 있었다.

“…아, 아무렴요. 떠나는 사람이야 가뿐히 떠나겠지만 남은 사람은 서럽잖습니까. 거 참, 매정하셨네… 나으리도 참 야속하시겠습니다…”

나는 파리가 그러하듯 두 손을 싹싹 비비고 싶은 충동을 이겨가며, 최대한 그의 맘에 들 법한 말을 쥐어짜냈다. 그의 손아귀에서 잔뜩 오그라든 술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텅- 하는 소리가 났다. 검붉은 술이 그의 손을 타고 흘러 소매까지 적시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눈과 술잔을 쥐었던 손 외의 신체는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것은 나를 더욱 겁에 질리게 했다. 이쯤되면 슬슬 인간의 움직임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건… 자연스럽지 않았다.

“야속하다라… 그래. 야속했지. 내가 가지 말라고 한 곳에 기어코 가고, 내가 하지 말라고 하는 일도 기어코 할 때마다 야속했다. 더는 흙바닥에 눕지 않고 귀한 것만 걸치는 안온한 삶을 약조했는데도 내 반려는, 도무지 말을 듣질 않았어…”

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어쩐지 한기가 몰려왔다.

“그때마다 나는 좋은 말로 말렸어. 명령으로 통제하지도 않았다고. 말 한 마디만 하면 바닥에 엎드려 내 구두를 핥게 만들 수도 있었는데 난 절대로 그러지 않았어. 걔는 내 스폰 따위가 아니니까… 그런 궂은 곳에서하는 궂은 일은 네가 신경쓸 일이 아니라고 좋게 좋게 타일렀단 말이다. 내가 얼마나 많은 인내심을 발휘했는지 도무지 누구도 모를 걸…”

그가 하는 말은 더 이상 나를 향한 말이 아니게 되었다. 작은 소리로 읊조려 알아듣기 어려운 그의 목소리는 마치 땅을 긁는 듯한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변해갔다. 나는 눈동자를 돌려 그가 아닌 다른 곳을 보려고 애썼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와 눈이 마주치는 것은 위험할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내 반려는 기어코, 또 그렇게 남 좋은 궂은 일을 하다가 가버렸지. 내가 없는 사이에, 내가 손쓸 틈도 없이…”

“…내가 같이 있었다면,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몰라. 적어도 내가 근처에 있기만 했더라도… 그 애와의 연결을 느낄 수 없게 되자마자 흔적이 끊긴 곳을 미친듯이 뒤졌지만 유해조차도 발견할 수가 없었어. 작은 뼛조각 하나도. 그렇게 어떤 흔적도, 연결도 느낄 수 없는 채로 모든 수색을 마친 후에야… 그애가 죽었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지.”

“왜 너는 나 아닌 다른 것들에게도 마음을 내줬을까? 왜 너를 기릴만한 무엇 하나도 남기지 않고 갔어?

왜 내게서 멀리 떨어지려 했어? 왜 네가 죽어야 했을까? 왜?

내가 모든 것을 쥐어주겠다고 했잖아. 우리 함께 몇 십년씩 여행도 하고, 몇 백년이고 이 곳을 통치하자고 말했을 때도 날 떠나지 않았잖아. 너도 나와 이 삶을 함께하겠다고 말했잖아.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어줬잖아…”

여전히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건지는 당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의 음성에 물기가 가득 어려있었다. 이것은 차라리 좋은 신호였다. 어쩌면 한바탕 속 시원하게 울게 해주고 이 곳을 뜰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기대를 걸며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눈알을 돌렸다.

오 씨발, 셀루네시여, 아니면 라샌더시여, 뭐가 됐든 신이시여… 그의 몸에서는 검은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제 아무리 마법이나 뭐 그런것에 문외한인 이라도 저것을 보면 단번에 ‘우와, 완전 삿되다’ 할 만한 광경이었다. 아니, 이딴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데 술집의 다른 놈들은 왜 여길 쳐다보지도 않지? 다들 이 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존재하지도 않는 양 신나게 여흥을 즐기고 있었다. 아무도 이 사악한 광경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에 잠시 화가 치밀었지만 금새 눈치챌 수 있었다. 이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구나. 나는 눈깔을 빨리 돌리면 소리라도 날세라, 아주 조금씩, 조심스럽게 시선을 다시 돌리려 했다.

“너를 지키고 싶어서 택한 삶인데 이제 너만 없네…”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그의 크게 뜬 눈에서 그의 울먹임이 툭 떨어져 나왔다. 그것을 기점으로, 오직 흉한 기운만이 이 곳을 감돌고, 그에게서 어떠한 인간적임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달달 떨리는 다리와 손을 안간힘을 써가며 제자리에 붙들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는 의자에서 떨어지면서라도 바닥에 개처럼 엎드려, 잘못한 적도 없는 잘못과 구할 필요도 없는 용서를 빌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이 곳을 벗어나야만 한다. 저것이 나를 붙들었으니, 저것에게 나를 보내줄 마음이 들어야만 할 것이다. 나는 턱조차도 떨려서, 혀를 씹지 않기 위해 되도록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기억해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붉은

ㅇㅣ

.

.

.

마치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지만, 의식의 끝자락 쯤에서 들리는 노랫소리가 내 정신을 돌아오게 했다. 단 두 소절이 지났을 뿐이었다. 나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다시 한 번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 분이 어떤 분이었는지, 그 분이 뭘 좋아했는지, 뭘 하고자 하셨는지… 그런 것들, 말입니다… 가신 분도 그걸 바라실 겁니다요. 그, 어쩌면 나으리가 어떻게 살아가시나 지켜보고 계실지도…모르고요…”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떠난 분은 적어도 내 앞에 있는 이것보다는 아랫 것들을 잘 챙기고 됨됨이가 좋았던 것 같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저것에게 떠난 분의 마음씨를 되새김질 시켜보고자 하는 발악과도 같은 말이었다. 반려를 잃은 슬픔으로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것이라면 적어도, 그다지도 사랑하는 이에 대해 추억할 때 쯤은 다시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 써주지 않을까 하는 소망도 섞여있었다.

“…감히 내게 그 애에 대해 충고하는건가? 나와 내 반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랬기에 내 말을 들은 그가 더욱 진노한 듯이 탁한 기운을 흠뻑 쏟아냈을 때, 나는 그냥 혀를 깨물고 까무러치고 싶었다.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슬슬 삶을 포기해가고 있었다. 염병할 술집 한 번 잘못 왔다가 이렇게 인생 종치는구나…

하지만 그 금방이라도 날 찢어발길 것만 같던 기색이 서서히 옅어졌다. 잠시 뒤, 그것은 아까와는 꽤나 다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금쯤 더 억양이 생긴, 그리고 어쩐지 조금 가벼워진듯한…

어쩌면 처음 만났을 때 보다도 더 인간적인 목소리였다.

“…하, 좆같은게 뭔지 알아?

…네놈 말이 맞다는거야. 너를 여기서 찢어죽이면 실망할 타브 얼굴이 눈에 선해.”

그것은 손에 묻은 와인을 털어내더니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실망하든 말든 결국 걔는 날 용서하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타브가 싫어할만한 일을 굳이 할 필요는 없지. 손톱도 망가질거고…

그래,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걔는 나를 못 떠나. 날 지켜보고 있을거야.”

그것은 이제 상당히 기분이 나아진 듯 했다. 그것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조금 남아있던 검은 연기 같은 것도 서서히 흩어져 사라졌다. 나는 이제 내 몸의 떨림이 상당히 잦아들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빠르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얼핏 들을 수 있었다.

“그래, 타브를 다시 데려올거야. 진정한 부활의 주문이 필요하겠어. 행할 수 있는 술자나 아티팩트를 찾아야겠군… 이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나야 뭐 있는건 시간뿐이니까. 그 동안 타브의 비위를 맞춰줘야겠네… 혹시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부활을 거부할지도 몰라. 쯧, 그렇게 대쪽같은 성질인데 어련하겠어.”

혀를 차며 투덜거리는 말과 달리 그것의 표정은 꽤나 천진하니 밝았다. 그것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술집을 나설 채비를 하는 듯 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슬쩍 내쉬었다.

“너, 입을 꽤 잘 털어? 나중에 자르 성으로 찾아오면 광대 면접이라도 보게 해줄테니까 꼭 찾아와.”

그것의 갑자스러운 말에 내 고개가 그것을 향해 휙 돌아갔다. ‘예? 제가 왜요?’ 라고 하고싶었다. 진심으로. 그러나 그것의 붉은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모든 전의를 상실했다. 기분이 나아진 그것은 한결 사람처럼 굴었지만 여전히, 그것이었다.

“어디가서 이 일 나불거리진 말고.“

그것이 씩 웃더니 이내 연기로 흩어져 사라졌다.

사람 하나가 말그대로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는데도, 술집의 어느 누구도 이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

이걸 다 쓸 때쯤 깨달았는데

통찰굴림과 내성굴림을 거의 모조리 성공한 모브캐가 제일 굉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디앤디 잘 몰라서 검색하면서 썼는데 혹시 고증이 틀렸다면 그냥 소설적 허용이라고 쳐주십사 부탁드립니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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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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