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때는 너를 꼭 안고

사랑스러운 미련에게

라하빛전

-주의: 6.0 효월의 종언 스포일러 포함 (Lv.89 던전 설정) / 빛전/그라하 사망 소재 / 시신에 대한 (아주)간략한 묘사 있음 / 특정 빛전 묘사 있음

케이아 위드의 경우

객사도 아니고 요절도 아니었다. 병에 시달리지도, 부상에 고통을 겪지도 않았다. 그저 연료가 떨어진 마법인형이 멈추듯이 저절로 숨이 멎었다. 그라하는 한 인간이 별바다로 떠날 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비극적인 사례를 피했다. 케이는 그 사실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라하는 케이와 함께 둘이 살던 집, 가장 좋아하는 의자에 앉아서 세상을 떴다. 그는 무언가 예감한 듯 모처럼 날씨가 좋으니 차를 좀 더 일찍 마시자고 했다. 그런데도 찻주전자에는 차가 반 넘게 남아 있었다. 놓친 찻잔이 테이블 위를 데굴데굴 구르다 바닥으로 추락했다. 흩뿌려진 찻물이 옷을 적신 순간 그라하는 케이의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잠시만 이러고 있자, 내가 금방 치울게.’ 그러곤 눈을 감았다. 오후의 볕에 깜빡 조는 줄 알았는데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유언은 그게 다였다. 마지막까지 어쩜 그렇게 거짓말을 잘하는지 몰랐다.

시신이 완전히 굳기 전에 눕혀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다. 말끔한 입성으로 그라하를 보내려면 정신을 차려야 했다. 하지만 굳어가는 손은 너무도 따뜻했고, 다시 뜨이지 않을 눈은 꼭 잠든 것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케이는 얼마쯤 그라하의 손을 잡은 채 앉아있었다. 평소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발치에 기대어서.

감상에 빠진 대가로 케이는 그라하가 제일 좋아하던 의자를 버려야 했다. 시신에서 흘러나온 노폐물 탓이었다. 침대에 깔개를 펼친 뒤에야 시신을 옮길 수 있었다. 급한 연락을 돌리고, 의자를 닦고, 찻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더러워진 시신에 온 신경이 쏠렸다. 싫어했을 텐데 저대로 놔둬도 괜찮을까 싶었다. 그러나 시신을 닦기 시작하면 그라하가 죽었다는 게 확실해질 것 같아서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연락을 받자마자 달려와 준 넷째 누나, 나타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위로해주었다. ‘엄마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잖니. 매트리스 하나를 통째로 버렸지. 큰맘 먹고 새로 장만했다고, 손녀의 손녀까지 물려줄 거라 좋아하셨던 그거 말이야. 그때 막내가 엄마를 제일 처음 발견했는데, 자기는 다른 건 다 해도 엄마 몸은 도저히 못 닦아드리겠다고 울었단다.’ 그는 케이를 대신해 시신을 닦아주었다. 마지막에는 억지로 수건을 쥐여주며 닦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권했다.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케이는 혈색 없는 뺨을 수건으로 조심스레 훔쳤다. 오래 사귀었는데도 눈을 지그시 맞추면 그라하는 종종 얼굴을 붉히곤 했다. 그런 얼굴을 하고서 시선도 피하지 않았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겠지. 저절로 입을 맞추고 싶어지는 표정의 너를…. 케이는 차가운 팔을 닦다가 문득 경직된 손에 이마를 댔다. 주술의 기원은 장례 의식이었다. 그리다니아는 습한 지역이라 부패가 빨랐다. 온도라도 낮으면 진행이 좀 늦춰질 것이다. 케이는 중얼중얼 주문을 외워 냉기를 피웠다.

장례 준비 때문에 온종일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타가 수배해 온 장의사는 손이 빨랐다. 관은 목수 길드에 의뢰했다. 나타에게 빈소를 차리는 걸 맡기고 케이는 그라하의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그동안 새벽의 혈맹이, 혹은 그들의 전언을 담은 편지가 앞다퉈 도착했다. 매장지는 나타가 멋대로 결정했다. 셋째 누나, 나쟈가 생전에 마련해 둔 가족묘였다. ‘너랑 20년 넘게 같이 살았으면 우리 가족이지. 가족묘 쓸 땅을 지키려는 사악한 술수기도 하고.’ 케이는 본가 쪽 가족묘에 묻힌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래도 고마웠다.

유품 정리가 끝날 때까지 나타는 돌아가지 않았다. 1세계의 인맥들을 포함해 주변에 나눠줄 물건, 기부할 물건, 버릴 물건을 분류하고 나니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그중에는 그라하가 마지막으로 썼던 찻잔도 포함되어 있었다. 험하게 굴렀는데도 이가 나가기는커녕 잔 가장자리의 도색조차 벗겨지지 않은 물건이었다.

나타는 나쁜 생각이 들면 언제든 부르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케이는 그런 일로 누나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라하가 없는 일상에 빠르게 적응했다. 한 달 만에 집안일을 하다 추억에 잠겨 손을 놓지 않게 되었고, 두 달 만에 ‘그라하가 살아있었다면 무척 좋아했을 거다’ 같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슬픔 앞에 무너지더라도 결국에는 얼굴을 닦고 일어나는 것이 케이의 천성이었다. 그러지 못했더라면 그라하가 사랑한 영웅은 세상에 없었으리라.

다만 그라하가 마지막으로 썼던 잔에 차를 따르면서, 케이는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그라하가 세상에 남기고 간 미련이 나였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내가 따라갈 때까지 세상의 수면을 올려다보며 나를 기다려줬으면 좋겠다고. 나란히 별바다를 유영했으면 좋겠다고. 기억이 씻겨나가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린 뒤에도. 그렇게 다시 이 세상에 떨어져서 한 번 더 만났으면 한다고.


그라하 티아의 경우

케이의 장례를 치르는 내내 그라하는 눈이 빠질 정도로 울었다. 관에 못을 박을 때, 매장지에 관이 내려갈 때, 생전에 남긴 편지와 유언장을 읽을 때, 유품을 정리할 때…. 도와주러 온 알피노가 상대적으로 덜 우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알리제 눈에는 둘 다 툭하면 울었다. 셋 중에 혼자만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다고 생각했더니 나오는 눈물도 쏙 들어갔다.

혼자 두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는 이유로 알리제는 손님방을 차지했다. 알피노도 그 점이 걱정되었는지 슬며시 남은 손님방에 짐을 풀었다. 그라하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사흘 뒤 자신이 오판했음을 인정했다. 혼자 이 집에 남아 있었더라면 지금쯤 눈물과 함께 눈이 녹아내렸을 것이다.

알리제와 알피노는 케이의 죽음에 관한 거의 모든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케이는 은퇴한 뒤로 가끔 몸살을 앓았는데 세상을 뜨기 며칠 전의 몸살은 특히 심했다. 아마 본인도 끝을 예감했던 것 같았다. 열이 떨어지자마자 유언장을 점검했으니까. 편해진 숨소리에 안심했더니 다음 날부터가 고비였다. 어쩌면 먼저 떠난 사람들이 케이의 고생을 보다 못해 그만 이쪽으로 오라고 손을 내민 걸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라하를 혼자 놔둬도 괜찮을 거란 판단이 서자, 쌍둥이는 자신들의 터전으로 돌아갔다. 그라하로서는 그저 고마웠다. 케이가 없는 나날에도 서서히 익숙해졌다. 때때로 파도처럼 덮쳐오는 기억에 뺨이 젖었고 케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했다.

알리제와 알피노에게 말하지 않은 건 모두 케이의 유언이었다. 그중에서도 그라하에게만 향하는 말들.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케이가 이 세상에 남긴 미련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는 아마도 별바다에서 자신이 제일 열심히 세상을 들여다보는 혼이 될 거라고 했다. 열에 들떠 앞뒤가 없는 말들이 이어졌다. 오래된 약속들, 때를 놓친 고백, 해묵은 원망. 마지막으로 케이는 미안하다고 했다. 너를 다시 혼자 남겨두는 셈이 되어서…. 그라하는 열심히 부정했지만, 케이에겐 그 말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잊지 마. 나는 그곳에서 너를 가장 오랫동안 보고 있을 거야. 내가 세상에 남긴 미련 중에 가장 사랑스러운 게 너인걸.

두고 가는 사과는 그걸로 하겠다는 말과 함께 케이는 까무룩 잠으로 굴러떨어졌다. 하고 싶은 말을 해서 마음이 편해졌던 것인지 몸 상태가 일시적으로 호전되었다. 유언장을 확인한 것도 이때였다. 케이는 죽는 소릴 하고서 글씨를 읽을 정도로 나아졌다는 게 민망하다는 농담까지 건넸다.

그런 기억들까지 눈물 없이 떠올릴 수 있게 되고서 그라하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 비슷한 상황을 언제 겪었더라? 기억을 헤집다가 마침내 성견의 방까지 도달했다. 내가 너를 지켜보며 때를 기다렸듯이 너도 나를 지켜보며 때를 기다리고 있구나. 그라하는 케이도 이 사실을 깨달았던 걸까 궁금해졌다. 어쩌면 케이도 뒤늦게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네가 가진 가장 사랑스러운 미련이 나라고 했지. 그건 내게도 마찬가지야, 케이. 이 이상 네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아. 너는 내게 네가 겪은 모험 얘기를 들려줬고, 우리는 얼마 전까지 여행을 함께했으니…. 이제는 내가 너에게 말해줄 차례겠지. 너에게도 재미있는 얘기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볼게. 다시 만난다면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까지도 나눌 수 있을 거야.

그라하는 약속을 잘 지킨 적이 없었으나 이번만은 예외였다. 케이가 자신의 약속을 잘 지켰음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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