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랑] 영혼의 연결
섹피 AU인데 개인설정 살짝 있음. 선조귀환으로 삵 혼현을 가진 반류가 되어버린 화랑이 진을 제 반려로 인정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 현대물이며 콩가루 집안은 없습니다.
* 개인설정 : 경종이래도 혼현의 기질에 따라 충분히 중종의 페로몬에 영향을 덜받을 수 있다는 설정. 삵은 최상위 포식자니까... 하나 더. 반류들은 원인들 사이에서 연예인과도 같은 존재로 원인들도 반류를 알고 있음.
* 짧연성에서 썼던 섹피 AU에서 묘하게 진화한 연성입니다. (화랑이 아무것도 몰랐다면 지금은 원인이었을 때도 반류에 대해 안다 정도)
그러니까... 내가 반류들 사회에서 프리미엄으로 손꼽히는 선조귀환이다? 그래서 중종의 집으로 들어가서 애를 낳아야 한다? 화랑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어느 때처럼 철권 리그에 출전하여 상대인 스티브와 싸웠을 뿐인데 갑자기 스티브는 사자로, 진은 뱀으로, 다른 사람들은 원숭이로 보여서 뭔가 했더니 반류, 그것도 선조귀환이라는 프리미엄이란다. 그래서 프리미엄이면 뭐가 좋으냐, 임신했을 경우 중종이 태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단다. 그래서 중종 집안과 결혼해서 애를 낳아야 한단다. 지금 장난하나. 화랑이 손에 들고 있던 검사 결과서를 힘차게 반으로 찢었다.
그 날, 선조귀환으로 각성했던 날 사범인 백두산에게 부축을 받으며 겨우 도장으로 돌아온 화랑은 다음 날 바로 백두산에게 이끌려 반류 전용 병원을 찾았고 그 결과... 선조귀환 경종 확정을 받았다. 혼현은 삵이라고 했다. 하필이면... 이왕이면 멋있는 동물로 안되나? 뭐 삵이면 우리나라에서는 최상위 포식자긴 하지만... 좀 아쉽네. 일주일 동안 백두산에게서 혼현을 컨트롤 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 화랑은 제 사범님의 혼현이 호랑이라는 것을 알게되자마자 이름값 하신다고 생각했다. - 백두산 호랑이라니 겁나 멋있잖아! - 그리고 제 현재 위치의 무게감도 알게 되었고. 그 무게감을 실제로 어디서 체감하게 되었냐면.
" ...지랄하고 자빠졌다, 아주 그냥 "
" 화랑 "
" 당장 안꺼지냐! 아침부터 짜증나게 진짜! "
겨우 혼현을 컨트롤하게 되어 사람들의 얼굴이 더 이상 짐승으로 보이지 않게 되자 간만에 바이크를 타고 바람이나 좀 맞을까 싶어 나가기 위해 실내 > 야외 대련장 > 도장의 문을 열자 문 밖에 자신이 그렇게나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 있는 걸 확인한 화랑이 다시 쾅, 문을 닫았다. 지금 몇시지...? 8시? 그럼 저 자식은 몇시부터 기다리고 있던건데? 누가 뱀 새끼 아니랄까봐 검은색으로 쫙 빼입고 기다리기는...!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일단 욕부터 박은 화랑은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았지만 10분 후 하늘에서 들리는 두두두두 소리에 고개를 들자 보이는건. 빌어 처먹을 미시마 재단, 진짜! 미시마 재단의 전용 헬기였다. 이래서 돈 많은 놈들이란!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헬기를 바라보던 화랑의 눈에 헬기에서 줄 하나에 의존해 하나둘씩 내려오는 철권중들이 보였다. 그리곤 저를 향해 공격 자세를 취하는 모습에 호오, 화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차라리 노골적이여서 좋네. 나도 이게 편하거든! "
낮게 비행하고 있는 헬기에서 미시마 재단의 총수인 미시마 카즈야는 가만히 철권중과 싸우고 있는 화랑을 바라보았다. 그 귀한 선조귀환이 등장했다는 이야기에 바로 그의 사범인 백두산에게 연락했지만 그는 들을 가치도 없는 이야기라며 연락을 끊어버렸고 결국 카즈야가 직접 행차하게 만들었다. 다수의 싸움에도 익숙해져 있는 듯 한대도 맞지 않고 처리해 나가는 화랑을 보고 있는 건 그 뿐만이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카즈야의 옆으로 다가와 슬며시 내려다보고 있는건 검은색 일색의 카즈야와 대비되는 순백의 그녀, 카자마 준이었다.
" 그의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건강하네요 "
" ...... "
" 특별히 중종급들로만 데려왔는데 경종이면서도 전혀 영향을 안받는 것 같군요. 왜일까요...? "
" 혼연의 기질이겠지 "
" 혼연의 기질? "
" 그의 혼연은 삵이라고 하더군. 비록 고양이과 경종이긴 하지만 삵은 그의 나라에서는 최상위 포식자. 덩치 큰 동물도 사냥해서 먹을만큼 강하지. 그 야생의 혼연이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중종의 페로몬 따위에 굴복할리가 없지 "
" 그의 강한 자존심하고도 연관이 있겠군요. 어라, 삵이라면 분명... "
" ...뱀도 먹잇감에 속하지 "
" 어머나... 재미있네요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작게 웃는 준에 카즈야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마지막 1명이 화랑의 돌려차기를 맞고 나가 떨어지는 걸 본 준이 작게 짝짝 박수를 치는 순간, 화랑이 고개를 들어 헬기를 바라보았다. 아침부터 예의도 없이 이게 뭐하는 짓이야? 덕분에 아침 운동은 잘했다만. 그나저나... 이제 어쩔거야. 제 주변에 나가떨어진 철권중들을 보던 화랑의 뒤에 언제 들어왔는지 진이 가만히 자신을 보고 있는걸 알아차린 화랑이 뒤를 돌아보며 한 말에 진이 어깨를 으쓱 들어보였다.
" 부모님까지 오실 줄은 나도 몰랐어. 난 몰래 나온거니까 "
" 네네, 그러시겠지 "
" ...화랑아. 일단 들어오거라. 그리고... 시끄러우니 빨리 나가주게 "
결국 이 난리통에 백두산까지 나와 화랑을 불러들이고 미시마 재단 사람들에게 축객령을 선포하고 나서야 겨우 소동은 마무리 되었다. 자신이 쓰러트린 철권중이 하나둘 일어나 도장 밖으로 나가는 걸 보고 있던 화랑은 슬그머니 다가온 진을 힐끔 바라봤다.
" 안가냐? "
" 사실 이럴 생각은 없었어. 그냥... 이야기를 좀 하고 싶었거든 "
" 하아, 진짜 선조귀환이 뭐라고 그 잘난 미시마 재단까지 나서는건지 "
" 네가 너무 모르는거야. 지금 자신의 위치를 "
" ...좋게 포장해봤자 결국 씨... "
" 화랑 "
원래부터 표현에 거침없는 화랑의 입에서 안좋은 단어가 나오는 걸 차단한 진의 굳은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랑은 칫, 혀를 차더니 다시끔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아무리 그래봤자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밖에 느껴지지 않아. 선조귀환이 되자마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달려든다? 결국 망할 놈의 중종을 위한 도구 취급이지. 아, 말하다보니 갑자기 짜증이 확 나네. 이야기는 나중이다. 머리 좀 식혀야겠어. 순간 열이 확 밀려온 화랑이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후, 숨을 내뱉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진도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려 도장을 빠져나갔다.
헬기가 시끄럽게 날아가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그 소리를 듣던 백두산이 흠, 소리를 흘렀다. 헬기까지 끌고 카즈야와 준이 모두 온 건 아마도 화랑을 살펴보기 위해서였을거다. 본인은 그저 귀찮은 일이라 생각해도 반류 세계에서는 대사건이니까. 그리고 순순히 돌아간 건 아무래도 화랑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 일거다. 그의 강한 기질과 육체는 분명 강한 중종을 낳기에 충분하니까. 다만 본인에 대한 의견이 1도 반영되지 않을거라는게 문제지. 천천히 백두산이 대련실로 향했다. 대련실에 들어서니 한가운데에 화랑이 앉아있었다. 차오르는 분을 참지 못하는 것인지 귀와 꼬리를 밖으로 꺼낸 체 꼬리로 바닥을 탁탁 내려치는 그를 본 백두산이 나지막히 이름을 불렀다. 화랑아. 움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꼬리가 일순간 멈췄다가 스르륵 사라졌다. 귀도 마찬가지였다. 남에게 함부로 혼연을 내보이는 건 무례한 일이라고 알려준 걸 기억하는 건 기특한 일이었지만.
" 괜찮다, 편하게 있거라 "
그 말에 다시 슬며시 나타나는 꼬리와 귀에 백두산이 작게 웃고는 그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자신도 혼연인 호랑이의 귀와 꼬리를 꺼냈다. 편안하게 혼연의 모습을 들어내고 반류의 이야기를 해보자는 암묵적인 행동. 탁탁,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꼬리로 계속해서 바닥을 치는 화랑에 백두산은 딱 한마디만 건냈다.
" 네가 원하는대로 하거라 "
그 말에 다시 꼬리가 멈췄다. 화를 식히라거나 아니면 순응하라는 그런 말이 아닌 지금 화랑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 반류, 선조귀환, 각인. 그런 것과 관계없이 자신이 원하는대로 하라는 그 말을 화랑은 너무나도 듣고 싶었다. 갑자기 이상한게 끼어들었지만... 그래도 결국 내 인생이야. 선조귀환? 중종의 아이? 웃기는 소리하지마. 내가 원하는대로 살거야, 나는. 백두산의 꼬리가 조심스레 화랑의 꼬리와 얽히고 그의 손이 화랑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이미 다 성장해서 성인이 되었지만 백두산 자신의 눈에 화랑은 여전히 어린 아이였다. 친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보다 더 끈끈한 사이. 잠시 백두산의 쓰다듬을 받던 화랑이 작게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사범님.
승리 축하드립니다! 아아, 고마워. 요새 컨디션이 좀 좋은 편이라. 철권 리그에서 승리 인터뷰 중인 화랑을 진은 제 대기실의 스크린을 통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날 이후 화랑을 본건 일주일 만이었지만 그 사이 생각의 정리가 끝난건지 그의 표정은 한결 가벼운 표정이었다. 더불어 자기 안의 혼연에도 익숙해진 것인지 혼연 컨트롤도 능숙해보였다. 천재는 저런 것도 잘하는건가. 한창 이런저런 승리 인터뷰 중이던 장내 아나운서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 약 2주 전이었나요? 화랑 선수가 갑자기 컨디션 불량을 일으키셨는데 그 이유가 선조귀환으로 반류가 되어서라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
우와. 진은 정말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무례한 질문이었다. 화랑의 기분조차 배려하지 않고 온 세상에 화랑이 반류, 그것도 중종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선조귀환이라는 걸 알릴 생각인가. 그것도 지극히 흥미 위주로. 저런 질문에 화랑이 얌전히 대답해줄리가 없지. 분명 화를 내거나 무시하고 내려오려나. 그러나 진, 그리고 이 승리 인터뷰를 보고 있는 반류들의 생각을 화랑은 완전 산산조각 내버렸다.
" 아아, 안그래도 그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잘됐네. 선조귀환으로 반류가 된거 맞아. 덕분에 며칠간 완전 정신이 없었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
" 그, 그랬군요. 근데 하고 싶은 말이라는건... "
무례한 질문이라는건 알았는지 순순히 대답하는 화랑에 당황한건 오히려 장내 아나운서였다. 그런 장내 아나운서의 모습에 코웃음을 친 화랑이 아나운서의 손에 든 마이크를 빼앗더니 내려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자신만 남은 링에서 그는.
" 뭐, 일단 질질 끄는 건 성미에 안차니까 다이렉트로 말하지. 선조귀환은 중종의 밑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 알바냐 그거. 난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할거고 그 하고 싶은거에 중종의 밑으로 들어가는 건 없어. 그러니 손에 넣고 싶으면 날 이겨봐, 그럼 한번 생각해줄게! 이건 내가 잘난 중종들에게 보내는 선전포고다! "
그 말과 함께 경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한페로몬을 내뿜은 화랑이 마이크를 집어던지고는 유유히 링에서 내려왔다. 화랑의 도발 멘트에 관중석은 난리가 났고 그 장면을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본 진은 제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화랑... 너... 너무 자극하잖아... 중종 치고는 비교적 얌전한 기질의 진의 혼연마저 저 경종을 잡아 먹는건 자신이라고 외치고 있는데 기질이 강한 다른 중종들은... 보나마나 뻔하겠지. 정말이지... 강한 자존심에 걸맞는 강한 기질의 혼연. 진이 손으로 입을 지긋이 눌렀다.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기 위해서.
자신의 대기실로 돌아가는 동안 화랑은 제 주변에 얼마나 많은 중종들이 득실득실 거렸는지 알게 되었다. 아, 귀찮고 기분 나쁘네. 달라붙지 말라고. 저에게 달라붙는 이름 모를 중종의 페로몬을 마치 먼지를 터는 것 처럼 털어내던 화랑은 제 개인 대기실로 들어가자마자 들어오는 공격을 가볍게 고개를 돌리는 걸로 피하곤 공격한 장본인을 바라보았다.
" 안녕, 스티브. 내가 그렇게 선전포고 하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기습은 좀 그렇다? "
" 네가 고작 이런 공격에 맞고 나가 떨어질 위인이냐 "
" 그건 그렇지 "
주먹을 거둔 스티브가 으쓱 어깨를 들어보이자 화랑이 귀찮다는 듯 문을 닫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후아, 진짜 귀찮아. 이거 의외로 신경이 많이 쓰이는데. 아직도 미세하게 남아있는 중종의 페로몬을 툭툭 털어내던 화랑은 뒤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중종의 페로몬에 쓰게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귀찮은데 너까지 이러지마. 그 말에 스티브가 천천히 다가와 화랑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 미안하지만 난 네가 날 의식해줬으면 하거든 "
" 그래, 생각해보면 너랑 싸우고 나서 각성했지... 진짜 더럽게 운도 없지 "
" 왜 책임져줘? "
" 꺼져. 말했잖아, 이기고 나서 말하라고. 근데 진심으로 중종들은 나 같은 거랑 그 사이에서 아이를 만들고 싶나? "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봐도 난 성격이나 이런 면에서 절대로 호감을 살만한 인간이 아닌데. 역시 중종의 의무 이런건가? 그 말에 스티브가 말없이 화랑을 내려보았다. 물론 성격도 입도 거칠고... 전직 양아치 두목의 행동거지가 남아있긴 하지만 따지고보면 그건 전부 중종의 입장으로서는 흥미를 끄는 요소 밖에 되지 않는다. 본인은 별 생각 없는 것 같지만 외모 또한 수준급. 그리고 은근 생각이 깊어서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배려심 같은 것도 있고. 역시 본인을 모르는 건 본인 뿐이라더니. 피식 웃은 스티브가 톡톡 손으로 가볍게 화랑의 머리를 두드렸다. 그걸 화랑 본인은 놀리고 있다고 생각한건지 툭, 스티브의 손을 뿌리쳤지만.
" 그나저나 왜 여기있어? 오늘 시합 있지 않아? "
" 있지. 그냥 그런 선전포고를 들으니 참을 수가 있어야지. 중종을 너무 얕보지마, 화랑 "
" 그 중종이야말로 날 너무 얕보는거 아냐? 그랬다가 역으로 잡아 먹힌다? "
크앙, 한 손을 동물의 발톱 모양처럼 만들며 입으로 육식동물의 울음 소리를 내는 화랑에 스티브가 피식 웃고는 하긴 천하의 화랑을 누가 얕보겠냐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명백히 자신을 놀리는 말에 조금 질린건지 화랑이 하품을 하더니 문득 질문을 던졌다.
" 상대는 누구야? "
" 그건... "
" 나야 "
제 3자의 목소리에 스티브는 굳었고 화랑은 조소했다. 대체 내 대기실이 언제부터 니들의 만남의 광장이 된건지 모르겠는데. 어느새 열린 문에 기대 서있는 건 진이었다. 진의 눈이 화랑을 담다가 이내 스티브를 담았다. 그리고 명백하게 자신에게 쏟아지는 위협의 페로몬에 스티브도 질세라 페로몬을 개방했다. 두 중종의 기싸움도 잠시. 화랑이 불쾌하다는 듯 소리쳤다.
" 남의 대기실에 페로몬 그만 묻히고 말했다시피 난 그 어떤 중종의 밑으로도 들어갈 생각이 없으니까 니들끼리 의미없는 기싸움은 그만둬. 그리고... 빨리 나가! "
화랑의 일갈에 스티브가 먼저 다시 화랑의 머리를 톡톡 두어번 건드리고는 진을 지나쳐 대기실을 나갔다. 있을만큼 있었고 봤으니까 충분했을거다. 하지만 진은 그렇지 않았다. 나가는 대신 스티브와 바통 터치를 하듯 안으로 들어온 진에 심기가 불편해진 화랑이 하아, 한숨을 쉬었다. 경종이라고 우습게 보는거야, 아니면 네가 생각보다 더 예의가 없는거야? 난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을 아직 못했으니까. 그 말에 코웃음을 친 화랑이 뒤를 돌아보면서 그래? 그럼 어디 한번 해... 라고 말한 순간. 제 앞에 있는 진의 얼굴에 움찔 입을 다물었다. 퍼스널 스페이스는 어쩌고 이 자식이. 무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역시나 말없이 응시하던 화랑은 진이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나가는 걸 보며 중얼거렸다.
" 하고 싶은 말 있다더니 뭐야...? 아, 문 닫고 나가지. 저 자식이 꼭 일어나게 만들어요, 아주 "
오늘의 마지막 경기인 진과 스티브의 경기는 그야말로 혈투에 가까웠다. 한발 앞서 벌어진 화랑의 도발 멘트로 한껏 흥분의 도가니였던 관객들은 이 마지막 경기에 와서는 흥분을 넘어선 열광 그 자체였다. 그 경기를 보고 있는 화랑마저도 호승심이 마구 들끓을 정도의 혈투. 그러나 결국 승패는 결정나기 마련이었고 결과는.
" 말 그대로 한끝 차이, 저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다니. 진짜 카자마 진, 저 녀석은 괴물이냐 "
화랑의 말대로 승자는 진이었다. 기회를 보던 뱀은 자신에게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사자의 목덜미를 물었고 그렇게 승자가 되었다. 서로 중종의 페로몬까지 마구잡이로 내뿜으면서 싸우는 통에 몇몇 관객은 - 아마도 기질이 약한 소수의 반류들과 약한 대다수의 원인들 - 중간에 실려나가기까지한 싸움이었다. 저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지, 있었으면 중간에 난입해서 진짜 개싸움 될 뻔했네. 경종이지만 제 안의 삵의 혼현이 날뛰는걸 애써 억누른 화랑이 후, 호승심이 가득 담긴 숨을 내쉬었다. 화면은 패자인 스티브가 진을 노려보다 링을 빠져나간 후 승자 인터뷰 중인 진을 비춰주고 있었다. 장내 아나운서의 질문을 얌전히 받아주던 진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손을 내밀어 마이크를 직접 붙잡았다. 그 진이 마이크를 빼앗아 간다고? 오늘 무슨 날이냐? 관중석의 웅성거리는 소음도 아랑곳 하지 않고 진이 천천히 제 페로몬을 풀며 입을 열었다.
" 네가 말했지. 자신을 손에 넣고 싶으면 쓰러트려보라고. 그래, 그게 너 다워서 좋지. 그리고 넌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도 그게 편하고 좋아. 난 말주변이 없어서 말로 설득시키는건 힘들거든.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선언하지. 널 이기는 건 오직 나 하나 뿐이야. 그러니 절대로 다른 녀석들한테 지지마라. 나한테 지기 전까지 "
자기 외에 화랑을 다른 중종들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미의 페로몬과 이겨서 너는 내꺼라는 걸 납득시키겠다는 말은 엄청난 파장이 되었다. 스크린 너머로 들리는 엄청난 환호성을 뒤로 하고 화랑이 제 대기실을 나가며 중얼거렸다. 건방진 자식,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봐...! 말은 거칠지만 화랑도 진 처럼 웃고 있었다. 그리고 화랑의 페로몬이 주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날뛰기 시작했다.
화랑은 납치를 당했다. 아니, 납치라고 해야하나 빌려졌다고 해야하나... 화랑과 진이 서로를 향해 선전포고를 - 화랑은 중종 전체에 대한 선포였으나 반류들은 암묵적으로 진에 대한 선포로 인식했다 - 날린지 한달 정도가 지났다. 그 한달 동안 화랑은 온갖 반류들의 플러팅 아닌 플러팅을 받아야했고 진은 진 나름대로 중종들의 견제 아닌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그나마 진은 그 유서 깊은 중종 집안인 미시마의 후계자로 대놓고 적대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화랑은 사방에서 그 카자마 진이 노리는 선조귀환 경종을 낚아채 자신의 트로피로 삼으려는 반류들에게 꽤나 시달렸다. 물론 성격 상 그런 녀석들을 가만히 냅둘 그가 아니었으니 하루가 멀다하고 리그 밖의 싸움에 신나하던 화랑도 한달이 지나자... 귀찮아졌다. 하루 이틀이어야지 그렇게 자신에게 깨지고 돌아가는데도 대체 어디서 또 반류들이 쏟아져 나오는지 화랑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점차 외출을 줄이고 있자니 이상한 소문이 퍼져나가고 그걸 막기 위해 억지로 밖으로 돌아다니니 또 습격당하는 악순환이 이어지던 어느 날.
화랑아, 밖에 누군가 있는 것 같은데 잠시 보고 오너라. 그 말에 제 방에서 늘어져있던 화랑이 몸을 일으켜 야외 대련장을 지나 도장의 문을 연 순간. 화랑은 떡하니 서 있는 왠 노신사와... 그가 잘 알고 있는 여성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뭐야, 부잣집 아가씨가 여긴 왜... "
" 세바스찬, 잡아 "
" 네, 아가씨 "
" 잡아? 뭘... 우왓! "
혼연의 반사신경으로도 반응하지 못한 화랑은 옷깃이 잡혀 미리 열려있는 고급 승용차에 그대로 던져졌다. 우당탕탕, 안쪽에서 꽤나 큰 소리가 나고 운전석에 세바스찬이 탄 사이 그를 납치하려는 장본인, 리리가 열린 문 틈으로 보이는 백두산에게 우아하게 인사를 건내고는 자신도 화랑이 던져진 뒷좌석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이내 부드럽게 출발하는 차를 보던 백두산이 흠, 잠시 빌리겠다는 의미가 이런 거였군. 하고 태연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아야야... 문에 제대로 부딪친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킨 화랑은 리리를 보며 버럭 소리를 쳤다. 갑자기 납치야? 당신의 보호자에게도 허락 받았다고? 어쩐지 갑자기 보고 오라고 하시길래 뭔가 했더니... 잠시 빌리겠다고 했더니 흔쾌히 허락해주셨는걸? 내가 빌려온 고양이야, 뭐야? 그런 시시하고도 아무런 이득도 없는 대화의 끝은...
" 그래, 날 여기까지 끌고 온 이유가 시덥진 않겠지? "
" 나와 티타임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
" 알게 뭐야! 그럼 그런 사람들이랑 하던가, 티타임! "
프라이빗을 위한 개인룸이 딸려있는 누가봐도 고급 카페에 그대로 잡혀 온 화랑이 제 앞에 놓인 커피를 보며 쯧 혀를 찼다. 자신을 납치... 아니, 본인의 말대로 자신을 빌린 리리는 커피 대신 자신의 집사가 타 준 홍차를 우아하게 들어 한모금 마시더니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세바스찬은 그 손 위에 작은 통을 올려주고는 조용히 개인룸을 나섰다. 리리는 그 통을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그대로 조용히 화랑을 향해 밀었다. 푸른빛에 가까운 통을 보던 화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이건 뭐야? 회충이야. 이게 있어야 남성도 임신이 가능... 그러니까 이걸 왜 나한테 주냐고, 이 부잣집 아가씨야! 어머, 신경 써서 최고급 회충으로 준비했는데 이 반응은 뭐야, 당신! 자신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리리의 모습에 화랑이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그래, 뭐 백번 이해한다고 쳐도 이걸 왜 그쪽이 주는건데? 막말로 나랑 딱히 뭐 관계가 있는게 아니잖아? 설마 미시마 재단에 뭐 부탁이라도 받았어? "
" 내가 그쪽이 부탁한다고 쉽사리 들어줄 사람으로 보여? "
" 그건 그렇지 "
" 뭐... 그래도 솔직히 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긴 했지. 반류로서 "
그 말에 화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에밀리 드 로슈포르, 속칭 리리. 그녀 역시 반류였다. 그녀의 혼연은 경종 샴고양이. 그래, 화랑과 같은 고양이과의 경종. 다만 그녀는 선조귀환으로 반류가 된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반류의 피를 가지고 태어나 각성한 쪽이었다. 선조귀환으로 반류가 될 경우 서열상 최고 서열인 인어 바로 다음 서열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종들은 보통 최하위 서열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유독 그녀를 과보호하는 이유는 무남독녀의 외동딸이라는 것도 있지만 서열 최하위의 경종이기 때문인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격투기 대회인 철권 리그에 나가겠다고 했으니 얼마나 걱정하고 반대를 했을까. 하지만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 넌 샴고양이 경종이었나 "
" 그래, 내 반려 고양이 솔트랑 같은 종이지 "
" 본인이 샴고양이 혼연이면서 키우는 고양이까지 샴인건 무슨 취향이야? "
" 초참견이야. 여하튼... 꽤나 소란스럽게 일을 저질렀잖아, 당신 "
" 내가 뭘? "
" 남들 다 보는 리그에서 그런 선전포고를 하다니. 아무리 선조귀환이라지만 너무 배짱 좋잖아! "
제 스스로 선조귀환이라는 걸 인정하고 중종들에게 선전포고를 했던 그때를 말하는 리리의 말에 화랑이 으쓱 어깨를 들어보였다. 그래서 뭐 불만이야? 화랑의 말에 리리가 다시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 오히려 통쾌하던데! 경종의 입장에서는 정말 중종은 물론이고 중간종에게도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니까 "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그거 하나야? 돌려서 말하지 말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면 좋겠는데 "
" 하아, 정말. 당신 성격 진짜 급해! 하지만... 뭐, 좋아. 우아한 내가 맞춰줘야지. 흠흠... 당신 때문에 아스카랑 못만나고 있으니까! 빨리 선택해 달라고! "
목을 가다듬은 그녀가 내뱉은 말에 화랑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왜 갑자기 거기서 또 다른 카자마의 이름이 나와? 카자마 아스카. 카자마 진의 먼 친척인 그녀 또한 반류였다. 아키타 견 중간종. 막말로 고양이과 경종보다 아주 약간 서열이 높은 중간종이지만 그녀는 그 어떤 중종에도 지지 않는 기질의 혼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질이 그녀를 지기 싫어하는 싸움 중재꾼이라고 불리우게 만들었다. 그 기질은 아마 화랑 자신과 비슷할 정도로 호전적인 기질이겠지.
" 거기서 갑자기 그 여자의 이름이 왜 나와? "
" 그거야... 잠깐. 아, 당신은 모르겠네. 아스카는 내 각인 상대니까 "
" ...각인이라고? 잠깐 그럼... "
" 그래, 아스카는 내 반려야 "
그 말에 화랑이 헤에, 소리를 흘렸다. 반류들의 각인은 평생에 걸쳐 딱 한번만 가능하기에 각인을 한다는 건 그야말로 평생을 함께 하며 자신의 것이라는 영역 표시나 다름 없었다. 그런 각인을 했다라... 잠깐. 너 이제 16살 아냐? 근데 벌써 각인을 했다고? 하긴 아스카는 17살이던가. 잘도 네 아버지를 설득했잖아. 분명 엄청 반대하셨을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말에 리리가 담담하게 말했다.
" 아빠의 걱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네 인생이니까. 싸움도 반려도 모두 내가 선택한거야. 당신도 말했잖아? 자기가 하고 싶은데로 할거라고 "
" ...그래, 그렇지 "
" 아, 이게 중요한게 아니라! 여하튼 당신 때문에 그 카자마 진이 자꾸 아스카한테 와서 조언을 구한다면서 시간을 다 빼앗기고 있다고! "
" 진이? 대체 무슨 조언을 구한다고 난리야? "
" 자세하게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고양이과 경종에 대한 조언이었던 것 같은데. 아마 당신 때문이겠지 "
" ...근데 그걸 왜 네가 아니라 아스카한테 하는건데? "
" 이렇게 둔해서야! 당신과 각인했을 때 그 반려자로서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한 걸 조언 받으러 간거야! "
" 얼씨구, 이미 날 자기거라고 생각하고 있네. 그 자식 "
" 하지만 그는 진지했어. 그 누구보다도 "
" ...내가 선조귀환이니까. 잘난 중종의 의무를 위해서라도 손에 넣고 싶겠지 "
" 정말? 당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
" ...... "
" 선조귀환이란 틀에 갇혀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는건 그쪽 같은데 "
그 말에 화랑이 팔짱을 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선조귀환, 반류. 이 모든 걸 알게된 건 두달도 되지 않았다. 그 사이 화랑은 저에게 달려드는 반류들에게 학을 뗀 상태였다. 자신들의 아이를 낳아달라는 중종들, 그런 중종들에게서 빼앗아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소수의 중간종들. 결국 자신이 선조귀환이기 때문에 벌어진 촌극. 이젠 지긋지긋해. 그렇게 강제로 달려드는 대다수의 반려들과 달리 진은, 그 녀석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미시마 재단을 제외하고서라도 그 녀석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지... 하지만...
" ...반류가 됐다지만 내 사고 방식은 원인에 가까워. 근데 갑자기 중종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 되었다?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겠냐 "
" 그래, 그건 이해해. 하지만 카자마 진이 단 한번이라도 당신에게 아이를 낳아달라고 말한 적 있어? "
" ...없지 "
" 그러니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자신의 혼연에게도 "
리리의 진지한 충고에 후, 숨을 내뱉은 화랑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하, 결국 반류로서는 네가 선배라 이건가. 그래... 진지하게 고민은 해볼게. 내 마음에도 그리고 혼연에게도. 그 말에 리리가 만족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더 회충이 든 통을 화랑에게 내밀었다. 한참 미래의 일이 되겠지만 이건 내가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니까. 경종 동료로서. 그 말에 다시 질색팔색하는 표정을 지은 화랑이지만 결국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 통을 손에 쥐고는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목으로 넘겼다.
" 그나저나 여기까지 와서 집사가 타주는 수제 홍차라니. 카페는 왜 온거야? "
" 이게 다 당신을 위해서라고. 회충이 든 통을 주는 걸 파파라치에게라도 들켰으면 또 시끄러웠을걸? 그리고 그런 콩가루 태운 물 보다 홍차가 더 좋다고? "
" ...커피 애호가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하고 있네, 이 아가씨가 "
진. 제 어머니의 부름에 고개를 든 진의 눈에 손짓을 하는 준이 보였다. 제 옆에 와서 앉으라는 손짓에 진이 천천히 다가와 그 옆에 앉아 숲을 바라보았다. 미시마 본가는 저택 여러 개가 모여있는 작은 마을과도 같은 모양새이며 미시마가 소유의 숲에 존재했는데 상당한 권력과 재산을 가진 것과 달리 진이 사는 저택은 상당히 소박했다. 그건 진 본인이 화려한 것 보다는 소박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어머니인 준의 영향도 있었다. 그녀와 카즈야가 살고 있는 집도 소박했으니까. 그런 그녀가 제 집에까지 와서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뻔할 것이다.
" 오늘도 아스카에게 다녀왔구나 "
" ...네 "
" 그가 마음에 들었나보구나. 선조귀환이기 때문이니? 아니면 그의 페로몬? "
" ...선조귀환도, 페로몬도, 혼연도 아니에요. 저는 화랑을... "
처음의 인상은 자존심이 쎈 시끄러운 사람이었다. 철권 리그 3부터 참가하기 시작한 화랑은 동갑인 자신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라이벌이라며 시끄럽게 굴며 자신과 마주치면 시비를 걸기 일수였다. 제 중종의 페로몬에도 조금의 위화감만 느낄 뿐 오히려 호승심을 불태우는 화랑에 자신과 같은 중종인가 싶었지만 그는 반류도 아닌 원인이었다. 격투기, 스포츠 쪽에 반류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혼연으로 인한 뛰어난 육체 능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사범인 백두산이 반류이기 때문일까, 그는 원인이면서 그 누구보다 강했다. 무엇보다 항상 진 자신을 올곧게 바라봐주는 사람이었다.
그 시절 진은 아버지인 미시마 카즈야와의 불화로 어머니인 카자마의 성을 쓰고 풍신류 대신 극진공수도를 사용하고 있었다. 뱀 중종의 정점인 미시마 가의 후계자가 엇나간다는 시선으로 보던 일부 반류들이 그를 우습게 보고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 반류들을 문자 그대로 개박살 낸 건 진이 아닌 화랑이었다. 안그래도 원인이라며 일부 반류들이 자신을 우습게 보는걸 못마땅해 하던 화랑은 리그에서 상대로 만나자마자 바로 처참하고 일방적으로 상대를 개박살 내고는 승자 인터뷰에서 원인인 나 하나도 못이기면서 반류라고 으시대지 말라며 일침을 놔버렸다. 그리곤 시합이 끝나고 제 대기실을 가다 마주친 진을 향해 미시마의 후계자고 나발이고 넌 카자마 진이니까 자신의 라이벌이라면 답답하게 굴지말라는 말까지.
" 넌 원인이라 아무것도 모르니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지만... "
" 참나. 반류고 원인이고 나발이고 넌 카자마 진이잖아. 카자마 진에 대해 말하는데 반류라는 타이틀이 꼭 필요해? 아니잖아? 난 네가 갑자기 정체불명의 무언가로 원인이 된다거나 아니면 마음을 바꿔서 다시 풍신류를 쓴다거나 해도 하나도 신경쓰지 않아. 그런다고 카자마 진이라는 인간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
" ...... "
그 날 이후 진의 화랑에 대한 인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점점 긍정적으로 변해가는 인상의 완성은 철권 리그 5 때 일어났다. 풀리그와 토너먼트 방식을 섞은 철권 리그의 방식 때문에 3와 4때 한번도 만나지 못한 둘은 드디어 5때 4강전에 만나 싸우게 되었다. 오래 기다린만큼 둘의 시합은 그야말로 차세대 최강을 가리는 싸움, 반류 최강과 원인 최강의 대결 등 온갖 수식어가 붙어져 홍보 또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진은 너무 과하네, 정도였지만 화랑은 그냥 누가 더 쎈지 붙어보는 건데 이러면 진짜 의미가 퇴색된다며 투덜거리곤 했다.
그리고 대망의 시합 당일. 승자는 화랑이자 진이었다. 영문을 모를 말이였지만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이성이 있는 상태에서의 승자는 화랑이었지만 그 직후 진의 혼연이 폭주하여 화랑을 처참하게 쓰러트렸기 때문이었다. 쓰러진 줄 알았던 진이 일어난 것 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점점 진의 공격이 손속이 없어진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이변을 직감한 백두산이 끼어들어 겨우 진을 화랑에게서 떨어트렸다. 백두산이 끼어들고 나서야 진의 혼연이 폭주했다는 걸 알아차린 심판은 황급히 시합을 중단했으나 이미 화랑의 의식은 없었다. 바닥에 뿌려진 피의 90%는 화랑의 것이었다. 화랑이 구급차에 실려 사라진 후에야 겨우 혼연의 폭주는 끝났고 진 역시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나중에 의식을 되찾은 진이 준에게 상황을 들었을 때 진은 그때의 기분은 정말 최악이었다고 회고 했다.
제가 화랑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과 혼연의 폭주에 대한 두려움이 진을 덮쳤다. 이대로 격투가를 은퇴해야하나 고민하던 진을 부른건 다름 아닌 3일만에 의식을 되찾은 화랑이었다. 그런 화랑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할 자신이 없던 진의 등을 밀어준건 준과 백두산, 그리고 피해자인 화랑이었다. 제대로 마주하고 오라고 말한 준. 화랑은 모든 걸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 백두산. 그리고.
죄책감이고 나발이고 당장 튀어와, 빌어 처먹을 자식아. 백두산이 전해준 화랑의 메시지에 정말 그 답다고 생각한 진이 각오를 다지고 화랑이 입원해있는 병실로 들어서자 보인 건 굉장히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은 체 온 몸에 붕대를 감고 링겔을 달고 있는 화랑이었다. 움찔, 순간 걸음을 멈춘 진의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눈을 뜬 화랑이 입을 열었다. 도망칠 생각말고 일로 와라. 그 말에 진이 억지로 다리를 움직여 가까이 다가가자 화랑이 순식간에 몸을 일으켜 진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다. 통증만 아니었다면.
" 아으씨... 아파라... "
" ...무리하지마 "
" 시끄러워.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그런 말을 하냐 "
" ...미안 "
그 후 진과 화랑은 매우 긴 시간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 화랑이 큰소리를 치고 진이 대답하는 식이었지만 화랑이 말하고자 하는 건 딱 하나였다. 네 자신의 혼연을 마주하고 다시 자신과 싸울 것. 원인인 자신조차 그때 진이 불안정하다고 느꼈다는 이야기에 진이 조용히 긍정했다. 왜지? 자신이 진 순간, 그때 나는 무얼 생각했지? 뭘 생각하고 떠올렸기에 혼연이 폭주한거지? 마치...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듯이.
" 뭐, 죄책감을 느끼든말든 그건 내 알바 아니야. 단지 다음 번에 싸울 때 이번 일로 미적거리면 그땐 진짜 가만 안둘 줄 알아 "
" ...또 싸운다고, 나랑... "
" 당연한거 아냐? 난 널 완벽하게 이기지 못했으니까. 네 혼연까지 이기는 걸 목표로 잡았어. 그러니 다음번엔 반드시 이겨주겠어 "
자신을 혼연을 다루지 못하는 중종이 아닌 그저 이기고 싶은 상대, 라이벌로 말하는 화랑의 모습에 진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패배한 순간 자신이 생각한 건. 더 이상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화랑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졌기 때문에 더 이상 흥미를 잃어버린 화랑이 저에게서 등을 돌리는 장면을 떠올린 순간 혼연이 그대로 폭주해 버린 것이었다. 어째서? 그는 그저 원인일 뿐인데? 그래, 진은 다시 한번 더 깨달았다. 제 혼연은 이미 그를 자신의 반려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반류든 원인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가, 지금 내 앞에 있는 그가 화랑이니까. 날 온전히 나 자신으로 봐주는 사람이 바로 너니까.
그 병문안 이후 마음을 다 잡은 진은 격투가를 그만두지 않았다. 다만 자주 명상을 했다. 제 안의 혼연과 진지하게 마주하고 자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정리하기 위해서. 그리고 화랑의 퇴원 후 철권 리그 6에 모습을 보였을 때 진은 다짐했다.
" 반류, 원인과 관계없이 저는... 화랑을 제 반려로 맞이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설사 그게 미시마 가의 뜻에 어긋난다해도... "
" ...그렇구나 "
" 그래서 원하지 않는다면... 아이도 갖지 않을겁니다. 저는 화랑이 곁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
" 후후후, 처음이구나. 네가 이렇게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게 "
제 이야기를 듣고 작게 웃는 준에게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옆에 있을 때면 나는 유서 깊은 뱀 중종 집안의 후계자가 아니라 격투가이자 너의 라이벌인 카자마 진으로 있을 수 있었다. 그건 분명 편안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네가 이대로 계속 원인이었다면 널 설득하는게 편해졌을까...? 아니, 선조귀환과 관계없어. 화랑, 난 널 원해. 그러니까 널 이길게. 결국 우린 싸움으로 말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러기 위해서... 진은 다음 날 그렇게 외면하던 카즈야를 직접 찾아갔다. 그리고.
진과 화랑은 서로를 만나기 위해서인지 계속 승을 이어갔고 드디어 결승에서 만나게 되었다. 화랑이 반류가 되고 처음 만나게 되는 두 라이벌에 또 다시 대대적인 홍보가 이어졌고 화랑은 이번엔 혀를 차는 대신 묵묵히 제 기량을 갈고 닦는데 집중했다. 저번과 같은 패배를 또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제 안의 혼연을 몇번이나 마주하던 화랑은 겨우 결심이 선 듯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나도 나네, 진짜. 영문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화랑이 찾은 사람은 제 사범인 백두산이었다. 사범님.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든 백두산은 화랑의 표정을 보고는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 결심이 섰느냐? "
" ...네 "
" 그래, 네가 생각하고 결정한 거라면 나는 그 어떠한 반대도 없다. 아니, 어떻게 보면 계기는 이전부터 있었지 "
" 이전부터...? "
백두산이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다. 철권 리그 5 때 진의 폭주한 혼연에 화랑 자신이 된통 당하고 겨우 깨어나 백두산에게 상황 설명을 들은 후 그 뒤에 덧붙인 그 일로 진이 격투가를 포기할 정도로 고뇌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그 표정은 그야말로 백두산이 한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고. 제 목표가 사라지는 것 치고는 너무나도 심각하고 두려움까지 깃든 그 표정에 백두산은 화랑에게 진이 어떤 존재인지 깨달았다. 아마도 화랑은,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는 듯 했지만 제 목표이자 라이벌인 진을 제 옆에 있을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다음 날, 화랑은 잠도 제대로 못 잔 얼굴로 백두산에게 부탁을 했었다. 진을 이곳으로 불러달라고. 처음엔 얌전히 불렀지만 두번, 세번 불러도 머뭇거리는 진에 질려서 결국 당장 튀어오라고 일갈하긴 했지만.
" 그때 너는 자신이 필사적인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반류가 되어서야 자각한 것 같구나 "
" ...우와... 흑역사 까발려진 느낌인데요 "
화랑의 말에 크게 웃은 백두산이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짓는 걸 본 화랑은 내심 긴장했다. 심지어 잔잔한 분노의 페로몬까지.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화랑은 한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 혹여 미시마 가가 너를 괴롭힌다면 그땐 말하거라. 간만에 뱀 사냥이나 해볼테니까 "
" ...... "
" 내 귀한 제자를 홀라당 채가는 것도 못마땅한데 너를 향한 대우가 별로라면 그땐 확... "
"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닌데 일단 진정 좀 해주세요, 사범님! "
그리고 결승 당일. 링에서 서로를 대면한 둘의 분위기는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평소라면 진을 보며 호승심에 불타 있어야 할 화랑은 거짓 하품을 하면서 왠지 모르게 진을 먼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진이 화랑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는 모양새였다. 양 선수, 위치로. 그 소리에 중앙에서 서로를 마주한 둘 중 먼저 도발을 날린 건 놀랍게도 진이었다. 진심으로 덤벼라. 그러곤 자세를 잡는 진을 화랑이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가볍게 웃고는 별 말 없이 자세를 잡았다. 뭐지? 평소라면 오히려 도발해 올텐데 오늘은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건가? 그리고 시합이 시작하자마자. 화랑이 순식간에 접근해 진의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발차기를 날렸다.
" 너 말이야, 시합 전에 그렇게 말이 많았던가? "
" 하, 그렇군. 그냥... "
호승심을 참고 또 참고 있을 뿐이었나. 본 시합에 들어갔을 때 한번에 터트리기 위해서. 서로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제 앞에 있는 것이 자기가 무릎 꿇려야하는 자라는 걸 인식한 순간. 둘에게서 폭력적일 정도의 페로몬이 뿜어져 나왔다. 중종과 경종의 차이는 선조귀환으로 메워졌다. 혼연의 기질 또한 오늘만큼은 둘 다 폭력적일 정도로 거칠었다. 아니, 정정. 화랑의 삵의 혼연은 본래부터가 호전적이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얌전한 기질이었던 진의 반시뱀의 혼연은 오늘 그 본성을 제대로 해방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든다고 생각될 정도의 싸움. 싸움은 풍신류를 거부하던 진이 제 극진공수도와 풍신류를 혼합해 사용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싸움 속에서 화랑은 생각했다. 네가 나 하나 얻겠다고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풍신류를 받아들였다라. 그렇다면 나는 더더욱... 질 수 없어. 네가 날 이기는 건 너 하나라고 했듯이, 널 이기는 건 나 하나 뿐이니까! 처음엔 환호했던 관중들도 서서히 두 반류가 내뿜는 살기 가득한 페로몬에 점점 환호성이 줄고 침만 삼키며 바라볼 정도인 두 반류의 처절한 대결은 이내.
" ...때가 아니었나보군. 널 이겨서 증명하고 싶었는데 "
" ...... "
" 왜 그래? 이긴건 너잖아? "
" 시끄러워,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런 것 뿐이야 "
진이 기절한 시간은 딱 10초였고 그 10초가 승패를 갈랐다. 예상하지 못한 공격은 아니었지만 순식간에 자세를 바꾼 화랑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관자놀이에 정확히 맞은 후 기절한 10초로 KO 패를 당한 진은 시원하면서도 섭섭한 표정이었다. 패배가 분한 것도 있지만 결국 이겨서 화랑에게 증명을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 진짜 우리 둘 다 서툴지, 결국 싸움으로 밖에 말할 수 없다는게 말이야. 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링을 내려가려는 순간이었다. 야, 진.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진은 저를 보는 화랑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안절부절 못하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만 달싹 거리던 화랑이 슬금슬금 승자 인터뷰를 위해 다가오는 장내 아나운서를 눈으로만 내쫓더니 이내 결심한 듯 소리쳤다.
" ...너 말이야, 나로 괜찮은거야? "
" ...... "
" 미시마 가 정도의 가문이면 나 말고도 어디선가 더 좋은 선조귀환을 데려올 수도 있잖아? 그런데 굳이... "
"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이 참에 아예 못을 박을까. 난 선조귀환을 원하는게 아니라 화랑, 너를 원하는거야. 네가 평범한 원인이었다고 해도 난 어떻게든 널 옆에 뒀을거야. 그래, 네가 언젠가 말했지. 날 논하는데 반류라는 타이틀이 필요하냐고. 그래, 필요없어. 그러니까... "
" 아, 알았어! 그만 말해, 충분하니까! "
결국 선조귀환에 꽃힌건 나 뿐이었다는건가. 칫, 그 부잣집 아가씨의 말이 진짜 일줄은. 그래도 확신이 필요했으니까. 화랑의 혼잣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진은 순간 불쑥 다가온 화랑에 한발짝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다음에 이어진 말만 아니었다면.
" 좋아, 들어가줄게. 네 밑으로 "
" 뭐? "
" 들어가 준다고 했잖아! 날 이기진 못했지만... 네가 나 하나 이기겠다고 뭘 포기했는지 알 것 같으니까. 공수도와 풍신류, 조합하는게 쉽지 않았을텐데 "
" 널 이기려면 그 정도의 노력은 해야지 "
" 말은 잘한다. 여하튼 그 노력을 봐서라도 밑으로 들어가줄까나 "
" 정정할게 하나 더 있네 "
진의 손이 화랑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밑이 아니라 옆이야, 난 널 그렇게 보고 있지 않다고 했잖아. 코 끝이 서로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눈을 마주치던 화랑은 진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럼 그런 걸로 해줄까. 이제 울며불며 다른 선조귀환을 찾아도 늦었어, 알지? 그 말에 진도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럴 일은 없어. 너만 있다면 다른 반류도 원인도 필요없으니까.
" 와, 짜증나. 언제부터 그렇게 말을 잘하게 됐어? "
" 글쎄...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저 말이 부족했던 걸지도 모르겠군, 우리는 "
" 말이 부족한건 너 뿐이겠지. 내가 평소에 얼마나 떠드는데 "
태연하게 서로 대화를 하며 링을 내려가려는 두 사람을 용기 있게 막은 장내 아나운서가 내민 마이크에 화랑이 웃으며 딱 한마디 내뱉었다. 그렇게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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