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카무이

박피와 커튼콜

히지카타 토시조 × 무코시미즈 유키오

*골든 카무이 히지카타 토시조 BL 짝사랑 드림. 신체 훼손, 구토 묘사 주의.


도이 신조, ‘칼잡이 요이치로’의 죽음은 의미심장하고도 허망했다. 히지카타 토시조가 네무로에서 고용한 아이누 사내가 그 가죽을 벗겨내기로 했다. 칼을 휘두르고 피를 보는 거야 익숙한 족속들이었으나, 사냥감 손질은 ‘시삼’보다는 아이누에게 맡기는 게 적격이었으니. 키라우시, 분명 그런 이름의 남자였던가. 말수가 적지만 제법 연륜이 느껴지는, 우직한 인상이었다.

키라우시는 손잡이에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칼을 꺼내 들었다. 한낮의 햇살이 칼날 끄트머리를 빛냈다. 그는 그대로 시신 가슴팍 정중앙에 긴 칼집을 냈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망설임 없는 손동작이었다. 그 길을 따라 옷을 벗기듯 살살 힘을 주면, 나이 들어 주름 가득한 피부가 살점에서 부드럽게 뜯겨 나온다. 아내를 잃고 외로웠던 노인은 몸에 새겨진 황금도 잃은 채, 진정 붉은 웃통으로 알몸이 된다. 유신에 지대한 공훈을 남긴 인간이 일개 곰과 늑대처럼 대우받는 순간이었다.

무코시미즈 유키오는 뒤늦게 이 자리에 합류하여 ‘손질’ 현장을 지켜보았다. 방금까지 우시야마와 함께 청어 어장 숙소에서 신정부 인사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온 참이었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연륜과 살아남으려는 발악을 사랑했다. 마음껏 사랑을 좇고, 모든 죽어가는 것이 황금 앞에 빛나다 스러지는 꼴을 보려고 했다.

그의 앞에 죽어 있는 요이치로는 죽고 싶지 않아서 울부짖었다고 한다. 노망이 나서도 세게 검을 휘둘러 몸부림쳤다던가. 그러므로 제 옆의 아름다운 이 만큼은 아니어도, 유키오는 이 가죽이 벗겨진 몸뚱이의 삶을 아름답게 보아야 했다. 그러나 이 오만한 젊음은 넋이 나간 채로, 감히 박한 평가를 하고 만다. 저것은 분명 추하다. 보고 있자니 전혀 기쁘지 않다.

점차 속이 메스꺼웠다. 이곳 어장에 오기 전 뱃속에 넣은 것이라곤 주먹밥 두어 개가 전부였을 텐데.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시선은 정처 없이 시신 근처를 떠돌았다.

“이대로 무두질만 하면 되나?”

그의 속내를 알 리 없는 히지카타가 키라우시에게 변함없는 낯으로 물었다.

“그렇지. 히지카타 니시파. 이후 작업은 다른 곳에서 이어가고 싶은데, 괜찮나? 계속하자니 비위가 상해서 말이야….”

고개를 들어 보인 키라우시의 낯은 대조적으로 조금 창백했다. 능숙한 손길을 보여주었으나, 맨정신으로 임하기 어려운 일이니 당연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돼. 제7사단이라면 당분간 여기 눈길을 주지 않을 테고, 가죽이 상할 날씨도 아니니까. 슬슬 뒷정리를 해 볼까.”

“친구네 코탄을 알아. 거기로 가지. 무두질 재료도 구할 수 있어.”

히지카타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들어 일행 하나하나에 지시를 내렸다. 우시야마에게는 도이 신조를 비롯한 여러 시신을 바다로 던져버릴 것을 명하고, 나가쿠라에게는 키라우시에게 지급할 보수 계산이 임무로 주어진다.

“그리고 무코시미즈…. 너는.”

진중한 목소리가 마지막 이름을 부른다.

“......”

그러나 어지러운 머릿속이 소리를 흘려낸다.

“유키오!”

“아, 네. 죄송합니다.”

다시 힘을 주어 이름을 부르면, 그제야 머리털이 쭈뼛 서듯 정신이 돌아온다.

“얼빠져 있지 말고. 항구 옆 우체국에 다녀와. 오타루 시내에 칸타로 쪽으로 전보를 보내.”

“알겠습니다.”

“이따 저기 있는 요릿집 앞에서 보도록 하지.”

히지카타가 다시 간결한 손짓과 함께 명령하자 일행들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유키오는 아까 전부터 눈여겨보았던 우체국으로 향했다. 가벼운 걸음으로 20분 거리. 이대로 나아가다 보면, 바닷바람에 기분 나쁜 피 냄새는 사라지리라. 메스꺼웠던 속도 점차 가라앉는다. 그는 부지런히 발을 움직이면서 거리의 유리창에 얼굴을 비추었다. 아까 난투로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머리를 다듬기 위함이었다. 평소보다는 다소 촌스럽게, 동시에 음울하면서도 고상한 낯을 만들어 본다. 배우가 될 시간이다.

 

제7사단이 규율로써 이 금괴쟁탈전에서 우위를 점하려 한다면, 히지카타 일당은 무질서를 무기로 삼았다. 그들은 규율이 억누르지 못한 불한당이었으니. 제 모습을 감추다가도 불쑥 튀어나와, 한바탕 헤집어놓으며 싸우길 즐겼다. 무대 위 배우가 하던 일과 제법 닮았다. 막이 오르길 기다렸다가, 실컷 뽐낸 뒤 다시 무대 뒤로 사라지면 그만이겠다.

그래서 유키오는 이 시시한 전보 심부름을 여정 내내 기쁜 마음으로 도맡아 왔다. 히지카타 일당의 암호 체계는 제7사단 정보장교 앞에서 너무나도 조악했다. 카도쿠라가 아바시리에서 간수들끼리 쓰던 것을 다듬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천의 얼굴을 가진 수신인 덕에 정보가 빠르게 새어나가는 일은 없었다.

그는 홋카이도의 모든 우체국에서 새로운 각본으로 이름과 얼굴을 바꾸었다. 삿포로에서는 먼 곳에 두고 온 연인에게 연서를 보내려는 소년 같았고, 아사히카와에선 출산을 앞둔 아내를 걱정하는 가장이 되었다. 오늘 네무로에서 유키오가 쓸 이름은 토미타 사부로. 오타루에 사는 누이에게 아버지의 부고와 함께 유산 상속 의논을 위해 귀향 신호를 보내야 한다.

 

그리하여 네무로 우체국에 도착했을 때, 무코시미즈 유키오는 완전히 토미타 사부로가 되어 있었다. 홋카이도 토박이 말투를 쓰며 살짝 촌스럽게 정장을 차려입은 사내. 머리카락은 앞으로 쓸어내려 잿빛 눈동자를 가린, 유산을 탐내는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 아까 벗겨진 살가죽을 보고 겁먹은 마음은 말끔히 숨긴지 오래다.

“저기, 실례합니다. 오타루에 있는 카네다 사다코 씨 앞으로 전보를 부치려고 하는데요.”

“기본요금은 20자 기준입니다.”

피곤한 인상의 젊은 직원이 그를 맞이하자, 조금 무뚝뚝하고 숫기 없는 투로 말을 건다. 평소대로 사근사근 호의를 베풀면 괜한 오해를 사기 쉬웠다. 언제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람처럼 구는 게 미덕이다. 유키오는 품속에서 미리 준비한 종잇장을 건넸다.

“네, 이대로 보내주세요.”

‘토미타 사부로: 부친졸 / 청어어장 / 상속고지 / 귀향요청.’

“25전입니다.”

순식간에 동전 몇 푼과 의미 없는 시선이 오간다. 자그마한 어촌 우체국에 수상한 방문객은 하나도 없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현장이다. 직원은 곧바로 점과 선의 향연으로 오타루에 신호를 보낼 것이다. 순조로운 임무 완료. 이대로 중심가 끄트머리에 있는 요릿집으로 향하여, 다른 일행을 기다리면 되었다. 다시 무코시미즈 유키오로 돌아올 시간이다.

그러나 무대에서 내려온 명배우는 값진 성취감 대신 불쾌감에 다시 사로잡히고 말았다. 다른 인격을 연기하며 잊었던 광경이 여전히 뇌리에 선하다. 한껏 늙어 탁해진 혼은 살고 싶다고 무릎 꿇으며 울었다. 분명 칼에 베여 쓰러지기 전까지는 제법 아름다웠을 텐데. 난도질 몇 번 만에 추악해진 육신이 떠올라 비위를 자극한다. 가슴팍을 답답하고도 집요하게 짓눌러댄다.

이상한 일이었다. 피범벅 난장판이나 시신이라면 질리도록 보았다. 꽁꽁 얼어 동상에 뜯겨나간 발가락, 헛간 돼지에게 뜯어먹힌 몸뚱이가 아바시리에 널려 있었다. 몸소 죽인 전처나 옛 연인의 시신을 은닉할 땐 죄책감에 떨었을지언정 욕지기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남자는 파리해진 낯으로 네무로 시가지를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가 사라지고, 마른 침을 삼켜댔다. 일행과 만나기로 했던 요릿집은 한참 지나온 지 오래였다. 그보다 지금은 숨어들 골목을 찾아야 했다.

큰 보폭으로 다섯 걸음 나아간다. 훤칠한 몸이 들어가고도 남을, 널찍하고도 으슥한 길목이 눈에 띈다. 재빠르게 들어가 담벼락에 머리를 기대었다. 얕고 긴 숨을 여러 번 몰아쉰다. 서늘한 공기가 목구멍을 할퀴며 조롱한다. 의식하지 않아도 허리와 가슴 위로 힘이 들어가서, 꼴사나운 소리가 나온다. 울음보다 주정뱅이 같은 몸짓이었다.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는 얼마 남지 않은 이성으로 고찰했다. 자신이 떨고 있음을 알아챘다. 역겹고도 두려워서 견딜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자, 때맞춰 목구멍이 열렸다.

잘게 으깨진 쌀알, 더욱 시큼해진 우메보시 조각이 담벼락 구석으로 쏟아졌다. 아침에 먹은 주먹밥이었다. 뒤늦게 발을 뺐지만, 구두와 바지 왼쪽 끝단에 약간 얼룩이 튀었다. 제 의지로 어쩔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이대로 배 속이 텅 비어버리고, 불길한 생각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 그는 이대로 아무도 이곳을 지나지 않길 바랐다. 더 주제넘게 기도해 보자면 연모하는 그 사람이 이 꼴을 보지 않길 빌었다.

지금 유키오는 더없이 추했다. 단순히 몸을 꺾어가며 오물을 뱉어내서가 아니다. 애욕 앞에 눈이 멀었다가, 진정 끔찍한 꼴을 못 보는 한심한 담력이 보기 흉했다. 호기롭게 금괴와 사랑을 좇아와 놓고, 어느 삶의 치열함과 실없음을 동시에 보고 있노라니 본능적으로 괴로웠다. 아바시리에서 저물던 고깃덩이를 볼 때와는 다른 혼란이 그를 집어삼켰다. 살가죽 아래 시뻘건 근육이 꿈틀대며 울먹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므로 그는 히지카타 토시조에게 이 광경을, 무대의 뒷편을 보여줄 수 없었다. 무코시미즈 유키오는 어디까지나 번듯하고 재주 좋은 수하로 남아야 했다.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만큼 각오를 보여줘야 했다. 덜컥 겁먹어 토해내는 꼴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구역질을 멈추지 못하면서도 곁눈질로 골목 끄트머리를 살폈다. 금방 비어버린 위장은 시큼하고 따끔한 감각을 올려보낸다. 위액을 외면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일찍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여기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운명은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래로 푹 꺾인 고개 너머로 익숙한 발소리와 음성이 들려왔다. 중심가로 이어지는 골목 끝, 히지카타 토시조가 서 있었다. 노장은 유키오의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멀찍이 거리를 두고, 팔짱을 낀 채로 담벼락에 기대었다. 젊은 영혼은 남은 위액을 뱉어내며 손을 잘게 떨었다. 가뜩이나 숙인 고개 아래 얼굴이 붉어졌다. 곁눈질로는 히지카타의 표정까지 살필 수 없어, 눈을 질끈 감는다. 그대로 두어 번 더 구역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 끝났나?”

상반신의 떨림이 멈추고, 거친 숨소리만 나오자 지켜보던 이가 넌지시 물었다. 조소나 분노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담담하고 위엄 있는 음성이었다.

“…… 네.”

유키오는 자세를 바로잡고 짧게 답했다. 추태를 보여 죄송하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잡아도 벌게진 얼굴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용기를 내어 히지카타의 낯을 살폈다. 히지카타의 단정한 이마와 뺨의 주름은 여전히 조화로웠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아름다웠다. 분노는커녕 놀라움도 느끼지 않은 얼굴이었다.

“전보는 부쳤나?”

멀찍이 벽에 기대어 있던 노인이 천천히 벽에서 몸을 떼어냈다. 오늘 저녁 식사를 묻기라도 하듯, 평탄한 어조였다.

“네, 오타루로 보냈습니다.”

“잘했다.”

“감사합니다.”

방금 난장판에는 어울리지 않는, 담백한 칭찬이 돌아왔다. 그 평온함 앞에서는 저절로 머리의 열기가 식어간다. 청년은 서서히 돌아오는 이성으로 가만 숙고했다. 애초에 히지카타는 유키오의 미추(美醜)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화려한 사내라 가까이 한 게 아니라, 쓸모를 보고 곁에 있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그리고 유키오는 시킨 대로 쓸모를 증명했으며, 여태 이 길고 고된 여정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수하로서 책무를 다한 셈이다.

물론 수하가 아닌 일개 연모하는 자로서 고뇌는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보답받지 못할 마음임에도 괜히 제 맵시를 돌아본다. 함부로 관록을 탐하고 유린하던 솜씨는 힘을 못 쓰는데, 주제넘은 상상과 기대를 품는다. 그래서 추하고 겁먹은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 더없이 부끄러웠다.

“슬슬 가도록 하지. 우시야마랑 나가쿠라가 기다리고 있어.”

히지카타는 이 모든 심정을 알면서도 의식하지 않았다. 젊고 무례한 유혹이라면 질리도록 보았으며, 너무나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능수능란한 관록은 젊은이를 수치심에서 빠르게 건져낸다. 지극히 사적이고 부끄러운 시간을 깨끗이 잘라내고, 다시 황금과 탐욕의 장으로 돌아가자며 재촉한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유키오는 충실히 그 부름에 응했다. 멀끔한 낯으로 골목을 빠져나가는 이의 뒤를 따랐다.

 


다시 모인 히지카타 일당은 키라우시를 따라 그의 친구가 사는 코탄으로 향했다. 원래도 시삼과 자주 교역을 했던 곳이라, 적당한 사례를 제안하자 바로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도이 신조의 가죽을 마저 손질할 재료도 얻었다. 식사는 간소했으나 굶주린 탓에 너도나도 밥그릇을 여러 번 비워댔다. 그러나 무코시미즈 유키오는 홀로 식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맞은 편에 앉은 히지카타의 눈치를 보며, 간신히 제 몫을 한 번 먹어치우는 게 전부였다.

애틋하고도 부끄러운 마음은 도통 가시질 않았다.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장정들이 작은 집에 몸을 욱여넣고 잠들 때, 유키오는 뜬눈으로 견디다 밖으로 나왔다. 지나온 문틈으로 누구 것인지 모를 코골이가 들려왔다. 코끝에 다소 날 선 냉기가 스쳤지만 춥지는 않았다. 기껏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으니, 이대로 멍하니 공상에 잠겨 드는 게 나았다.

홀로 서서 올려다본 밤하늘은 오늘따라 유독 삭막했다. 손톱만 한 초승달만 발광하여 별은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다. 흉터 난 왼눈은 한 손으로 슬쩍 가리고, 오른눈에 초점을 맞추어 달을 응시해 본다. 선명한 빛이 점점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으니, 동이 트기까진 아직 한 시간도 남지 않았으리라. 밤하늘을 보고 동틀 때를 읽어내기. 아바시리에서 배운 얼마 없는 기술이다. 창살 너머를 줄기차게 바라보던 족속들이 가르쳐 준 것이다.

“달이 밝아 하이쿠라도 읊으러 나온 건가?”

실없는 달구경은 상상도 못 한 훼방꾼의 등장으로 멈추었다. 유키오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면, 히지카타가 꼿꼿한 자태로 서 있었다. 저물어가는 달빛이 은발을 더욱 빛내서, 젊고 검은 머리카락의 빛을 앗아가는 것만 같았다.

“아, 히지카타 씨. 아뇨, 잠깐 잠을 설쳤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나이가 들면 놀랍지도 않은 일이지. 쇠창살 그림자가 없는 달구경도 좋아하고.”

히지카타가 바람 한 점 없는 밤공기를 가르고 다가와, 한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추었다. 달빛 아래 적당한 그림자는 청년의 상기된 뺨을 가렸지만 열기를 식혀내지는 못했다.

“속은 좀 괜찮나?”

침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유키오는 저절로 몸을 떨었다.

“……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대답을 해 보았지만, 은은한 긴장은 쉬이 떨쳐낼 수 없었다.

“다행이군. 오늘은 잘 해 주었어. 우시야마도 좋게 말하더군.”

“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히지카타는 그 말에 가벼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팔을 뻗어 청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검을 쥐어 사람을 베던 팔, 관록이 깃든 손끝으로 단단한 어깨를 가벼이 두들겼다. 잇따르는 말은 묵직하고도 퍽 다정했다.

“쓸모없는 놈에게 빈말하진 않아. 너무 겸손 떨지 말도록. 어울리지도 않고 말이야.”

이 말과 손짓이 곧 방아쇠가 되었다. 손끝이 닿을 때마다 유키오의 어깨는 물론 목과 얼굴까지 열기가 올랐다. 수치스럽던 떨림이 이윽고 환희로 변해갔다. 히지카타 토시조에게는 힘이 있었다. 단순히 오랜 원한과 야망만이 아니라, 제 손아귀에 들어온 것 중에 어느 것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돋보였다. 세월과 인연, 가혹한 운명까지 전부. 그 의지는 곧 아바시리에서 38년간 형형한 눈빛이었고, 오랜 숙적의 가죽을 벗겨 내며 되새기는 각오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서 무코시미즈 유키오는 수줍은 미소로 화답했다. 저무는 달은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에 빛을 뿌린다. 낡고 빛난 것을 사랑하는 자로서, 당연하게도 히지카타를 사랑했다. 세상 고루한 것 중에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이 없었다. 가장 빛나는 마음이 제게 닿아 도로 사랑을 부르는데,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이런 연극의 끝이라면 몇 번이고 다시 맞이할 수 있었다.

“어디 보자, 동트기까지 잠깐 시간이 있겠군.”

서서히 손을 거둔 히지카타는 유키오가 하듯 슬쩍 저무는 달을 바라보았다. 흐림 없이, 꿈과 생기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시 읊는 재주는 있나? 닭이 울기 전까진 어울려줄 수 있을까 해서.”

“어,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해 보겠습니다. 이런 달빛을 보고만 있기도 아까운지라.”

“좋아. 어디 한 번 들어볼까.”

크게 심호흡. 그리고 다시 부끄러움 많은 웃음 한 번. 곧바로 육신 대신 영혼의 가죽을 벗겨 낸 노래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어떤 대본을 읽는 목소리보다 초라했지만 진솔했다. 비틀린 미학이 올곧은 맹세가 되고, 두려움은 녹아 후회 없는 확신이 깃드는 밤이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