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3부 6화

솔라의 의심

“그리고, 저…, 집행자님. 솔라 부관께서 기다리고 있으십니다.”

“일이 그새 쌓였나….”

“그건 아니에요. 부관님이 일을 미루지 않고 잘 처리해주신 덕분에 집행자님 결재가 필요한 일 외에는 쌓인 게 없답니다.”

루카의 대답에 더욱 아리송해진 시도폰은 옷을 갖춰 입고 집무실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자 루카가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 나와, 솔라는 시도폰의 침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왜 거기서 기다리는지는 말 안 하던가?”

바로 고개를 끄덕인 루카를 뒤로하고 시도폰은 침실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보이는 솔라는 불안한 듯 시도폰의 방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해를 등진 얼굴엔 평소엔 보이지 않던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러다 그는 폰을 발견하자마자 무릎을 꿇었다가 일어났고, 시도폰이 무슨 일이 있길래 기다리고 있었냐 묻자,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께서 남부로 출발하기 얼마 전, 벼락 맞은 나무를 기억하고 계시지요? 혹시 그 나무를 타고 이 방까지 올라와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니, 그래, 해본 적은 있네만 그걸 왜 물어보는 건가?”

당황한 시도폰이 솔라에게 성큼 다가가자, 솔라는 두 걸음 물러섰다.

“실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미카에 관해서입니다.”

한층 진지해진 솔라의 표정에 시도폰은 복도에서 이야기할 게 아니지 않냐며 침실 문을 열었다. 시도폰이 먼저 들어가 의자에 앉았는데, 솔라는 자신이 들어가도 괜찮냐며 굳이 허락을 구했다.

“바깥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단 낫지. 이쪽에 앉게, 차를 마시면서 할 정도로 여유로운 이야기는 아닌 듯하니 루카는 부르지 않겠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제야 솔라는 방안으로 발을 내디뎠고, 문이 닫힌 뒤, 바깥에 인기척이 나진 않는지 살피고 나서 시도폰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길래 주변을 저렇게 경계하냐고 내심 두려워하던 시도폰은 솔라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반응에 솔라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실 거 압니다. 하지만 저는 미카가 그런 짓까지 할 만한 인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는 자네의 이야기가 근거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아, 다만 그런 짓을 할 동기가 궁금한 거라네. 비록 지금은 노예처럼 생활하고 있지만 삼 년이 지나면 그것도 끝이지 않나? 굳이 내 방까지 침입해서 무슨 짓을 저지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네.”

“동기…라고 하시면 저도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가 지난 4년 동안 어떤 감정을 키워왔는지를 저희는 알 수 없지만, 당신께서 그에게 자유 시간을 더 주자마자 도리어 이런 일이 생겼다는 걸 참작해주십시오.”

“알겠네. 어차피 침실은 잘 때 빼고는 이용하지 않으니 밤 시간대엔 미카를 더 주의 깊게 살피라고 말해두겠네. 자네가 나무를 뽑아버린 뒤로 거기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건 언제까지 확인했나?”

“바로 어제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땐 당신께서 계시지 않았으니까요, 오늘부터 무언가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시도폰은 알겠다고 대답하면서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솔라를 배웅했다.


창문에 아른거리던 나무 그림자가 없어진 지 한 달은 되었는데도, 여전히 텅 빈 창문은 어색했다. 양손으로 창문을 열어버린 시도폰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벼락을 맞아 볼품없이 반쯤 탄 밑동만 남은 나무가 정원에 덜렁 놓여있었다. 추억이 깃든 나무였지만 저대로 두면 미관상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도폰은 나중에 아예 뽑아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계속 열어둔 창문으로 봄바람이 불어왔다.

‘봄이라고 해도 꽃은 아직 없지만.’

그래도 폰은 봄이 주는 일렁임이 좋았다. 그 오묘한 느낌은 맑은 하늘과 온화한 햇살 아래, 작은 들꽃들이 피어 아름다운 남부의 들판을 생각나게 했다. 들판에 서 있을 사람을 상상하다가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에, 시도폰이 고개를 젓고 종을 울렸다. 얼마 뒤 루카가 도착했고, 시도폰은 그에게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겠노라 선언했다.

“당연하죠! 오늘 도착하셨는걸요. 저녁때 식사도 여기로 가져다드릴까요?”

“아니, 식사는 기사들이랑 같이 하려고 하네. 나중에 식당에서 봄세.”

짧게 용건을 마친 시도폰은 루카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침대에 덜렁 드러눕고는 잠을 청했다. 평소엔 체력이 좋다 못해 넘치는 그였지만, 오늘은 북부로 도착한 첫날이라 그런지 영 기운이 없었다. 결국, 그는 저녁에 그를 깨우러 온 루카가 포기하고 돌아갈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고, 꿈속에서 게이트 열 개를 단번에 통과해 카리타스를 만났다.

“꿈… 이었구나.”

‘답장을 기다리지 않아도 됐고, 직접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내가 그렇게까지 하는 건 다들 찬성하지 않겠지. 체력이랑 신성력도 엄청나게 닳았었어.’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제 식사 때 깨워드리러 왔는데 너무 단잠을 자고 계시길래요.”

“고마워, 아니, 고맙네. 좋은 꿈이었거든.”

아직 잠이 덜 깬 시도폰은 옛날의 친근한 말투로 루카를 대하려다가 말을 고쳤다. 루카는 시도폰을 등지고 커튼을 걷으며 잠깐 씁쓸한 미소를 지었지만, 이내 그것을 숨기고 방긋 웃으며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설명했다. 평소에 북부에서 하던 것에 밀린 결재만 추가된 일정표였기에 시도폰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나갈 채비를 했다.

중간중간 산책하며 미카의 동향을 살피기도 했지만, 폰이 지나가는 동안 미카는 그쪽을 쳐다도 보지 않았기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알게 모르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닌 시도폰은 어느 날 일찍 잠들었다.

“이후 일정은 미루고 내일 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북부로 돌아오신 지는 꽤 되었는데 여전히 피로가 풀리지 않으셨나 봐요. 어떡하죠?”

루카는 업무보고를 하러 온 솔라에게 물었다.

“우선, 제가 처리할 수 있는 건은 최대한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는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왜 그렇게 피곤해하시는지 짐작 가는 건… 네, 없으시군요.”

솔라는 침울한 표정의 루카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여전히 미카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고 착실하게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고 있다. 만약 솔라가 나무를 뽑은 그 날, 몰래 그것을 살피러 온 미카를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시도폰에게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했을지도 모르지만, 솔라는 이미 그걸 봐버렸기에 의심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빈 집무실을 두고 돌아선 솔라는 서류를 봉투에 넣으며 제 숙소로 돌아가려다가, 한 번만 확인해보자는 마음으로 시도폰의 침실로 향했다.

‘뭔가, 어수선하지 않나?’

침실로 뻗은 복도는 평소와 같이 깔끔했고, 이상하게 여길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솔라는 미묘한 어색함을 느꼈다. 굳이 따지자면 공기가 평소와 달랐다고 해야 하나. 불길한 마음에, 솔라가 달음박질쳐 단숨에 시도폰의 침실에 도착했다. 우선 노크부터 한 솔라는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문고리를 잡았다.

‘잠겨있어. 어째서?’

시도폰은 자는 동안에도 침실 문을 잠그지 않았다. 루카가 와서 깨워줘야 겨우 일어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문고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당황한 솔라는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며 시도폰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솔라는 십자가를 소환해 문고리를 부쉈다.

“미카!”

활짝 열린 창문 밖엔 다 자란 나무가 달빛을 등지고 있었다. 솔라의 부름을 아랑곳하지 않고, 긴 로브를 입은 이가 시도폰을 향해 무언가를 내리찍었다. 달빛에 반짝이며 빛나는 칼날은 시도폰의 얼굴 바로 옆에 박혔고, 솔라는 칼날의 방향을 바꾸는 바람에 그것의 옆에 박혀버린 십자가를 다시 불렀다. 챙-하고 울린 금속음에 마침내 시도폰이 눈을 떴다.

“깨어나셨군요, 당장 거기서 벗어나 주십시오!”

“이게 무슨….”

막 잠에서 깬 시도폰이었지만 상황파악이 느린 건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침대에서 벗어나 괴한의 팔을 잡아 패대기쳤고, 그 위에 올라탄 채 로브를 불태워 얼굴을 확인했다. 방으로 들어온 솔라는 괴한이 버둥거리지도 않고 얌전히 뻗어있는 걸 보고 눈을 게슴츠레 떴다.

‘이상해. 아까 문을 뚫었을 때 전혀 당황하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솔라, 이리 와서 보게. 이 사람은… 미카가 아니야. 루카의 아버지다.”

“….”

솔라는 의식을 잃은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이 사람이 루카의 아버지인지는 모르겠으나, 미카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젠장, 키가 비슷해서 속은 것 같습니다.”

“배후는 미카일지도 모르지, 여길 봐. 목에 이상한 주술 같은 게 새겨져 있네. 미카의 필체는 기억하고 있지 않나?”

하늘색 불꽃 아래에 구불구불 적힌 글자들은 확실히 미카가 쓴 것처럼 보였다.

“비슷해 보입니다. 당장 미카의 행방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일단 이 자를 데리고 베론에게 가보겠네. 나중에 내 집무실에서 만나도록 하지. 그리고 필요하다면 무력으로 미카를 제압해도 괜찮네, 권한을 허락하지.”

축 늘어진 남자를 들쳐 멘 시도폰은 방을 나섰다. 솔라가 미카의 방으로 향하려고 그를 따라나섰을 때, 시도폰은 솔라 쪽으로 몸을 돌렸다.

“급한 마음에 말하지 못했지만…,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네. 이 은혜는 잊지 않도록 하겠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당신께선 그런 변을 당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솔라는 미카가 갇혀있을 감옥으로 뛰어갔다. 잠시 후, 시도폰이 베론에게 상황설명을 다 끝냈을 즘, 홀로 돌아온 솔라가 시도폰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갔을 땐 이미 탈출한 뒤였습니다. 감옥을 담당하던 기사가 교대 직후 한번 순회를 끝낸 뒤, 누군가에게 둔기로 머리를 맞고 기절했다고 합니다. 기절한 그를, 미카 또는 저 인간이 끌고 가, 미카의 방에 집어 넣어둔 것 같습니다.”

여전히 미동도 없는 남자를 흘끔거린 솔라는 왜 저자를 깨우지 않았냐고 물었다.

“깨우지 못했다고 하는 게 맞네. 내가 뺨을 때리기까지 했는데 미동도 없었어.”

시도폰은 바닥에 묶인 채 놓여있는 남자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시체인가 싶어서 가까이 다가간 솔라는 그가 얕게 숨 쉬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문밖에서 피데이스가 ‘말씀하신 대로 데려왔습니다. 피데이스입니다.’라고 말했고, 솔라가 문을 열었다. 피데이스 옆에는 깔끔한 단발의 사제가 서 있었는데, 그는 피곤한 듯 풀린 눈으로 방안을 훑어보다가 시도폰을 발견하고 직각으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요란한 인사는 됐다며 시도폰이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 생장과 관련된 주술도 이분께 조언을 구했습니다. 이단의 주술에 대해서는 여기 계신 미리엄 님만 한 분이 안 계시니까요.”

“내가 교육받을 땐 이분이 안 오셔서 뵌 적이 거의 없었네. 이런 일로 뵙게 되어 유감입니다. 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네…. 그런데 제가 해야 할 건 저 이의 목에 그려진 주술이 무엇인지 해석하는 게 맞나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미리엄의 물음에 시도폰은 고민했고, 베론은 알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평소 같았다면 베론에게 너무 냉정하다고 지적했을 폰이 팔짱을 낀 채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미리엄과 마찬가지로 일의 정황을 정확히 모르는 피데이스가 미리엄에게 그냥 주술에 대한 것만 이야기해주면 된다고 설명했다. 무릎을 꿇고 남자와 책을 번갈아 보던 미리엄은 두 개의 주술이 섞여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지난번에 봤던 생장 주술과 평범한 신체 강화 주술이 걸려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이 있는데, 이 생장 주술이 목에만 있으면 발동이 되지 않는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주술의 부분만 이렇게 적혀있으면, 이건 발동할 수 없어요.”

베론은 자리에서 일어나 장갑을 꼈다.

“다들 물러나 주십시오, 옷을 벗겨보겠습니다.”

피데이스가 그를 도와 로브를 벗기자, 남자의 몸이 훤하게 드러났는데, 시도폰과 솔라가 고개를 돌리고 있는 동안 미리엄이 남자의 발바닥에서 주술의 나머지 부분을 발견했다.

“왜 하필이면 발바닥인 걸까요?”

목 위와 발바닥만 내어놓은 채, 로브를 덮고 누운 남자를 보며 솔라가 물었다. 다들 같은 고민을 했지만, 아무도 답을 내놓지 못한 상황에서 시도폰이 미리엄에게 생장 주술의 대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대상이라고 하심은… 생장을 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식물이나, 동물, 심지어 사람에까지 적용할 수 있다고는 합니다만 그런 식으로 섭리를 거스르는 일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으니 저도 확인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런 실체를 가진 대상만 적용이 된다는 건가?”

그러자 미리엄은 실체를 가지지 않는데 어떻게 생장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엉뚱하게 들릴 순 있겠지만, 미카의 의식이 이 사람한테 닿을 정도로 생장해서 그를 조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네. 발바닥에 있는 이유도, 사람이 서 있으면 발이 땅에 닿을 수밖에 없지 않나? 미카가 땅을 통해 이 자와 연결되어있는 거지.”

시도폰의 추리에 미리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술에 관심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 아니지. 이런 상황에 이런 걸 물어보는 건 아무래도 실례지요.”

창술을 배우던 첫날, 피데이스가 떠올랐던 시도폰은 미리엄과 그가 왜 친한지 어렴풋하게 알게 된 것 같았다. 시도폰은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남았는데, 그걸 미리엄에게 물었다간 장황한 설명에 빠져들 것 같아서 베론에게 고개를 돌렸다.

“주술이 목에 새겨져 있는 이유는 따로 있나?”

“목이 머리와 심장 중간에 있어서 주술을 그곳에 새겼을 때 가장 강력하게 작용한다고 합니다. 목이 긴 옷을 입으면 가려지는 위치에 새겨놓으니 이단자들을 바로바로 색출해내는 게 좀 힘들었습니다.”

시도폰의 예상대로 미리엄은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시도폰은 할 일이 많다며 피데이스와 미리엄을 돌려보냈다. 베론은 루카의 아버지를 피데이스에게 넘기며, 그의 발이 땅에 닿지 않게 주의하면서 감옥에 가둬두라고 명령했고, 시도폰은 베론의 집무실 의자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기운 없는 모습에 솔라는 시도폰에게 다가가 몸 상한 곳은 없느냐고 물었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고 조금 놀랐을 뿐이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시도폰의 손은 얕게 떨리고 있었다.

‘아까 팔짱을 끼고 계셨던 것도 이걸 숨기시려고 그러셨던 건가.’

베론은 솔라에게 따뜻한 음료라도 가져오라고 시켰고, 시도폰은 솔라가 오기 전까지 베론의 망토 자락을 꽉 붙잡고 있었다.

“두코나 프라이에를 불러오라고 할까요?”

평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베론이 물었지만, 시도폰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약한 모습 같은 거 보이기 싫었는데…, 근데 너무 무서웠어.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했구나, 미카.’

반짝이는 날붙이, 자신을 뚫을 것처럼 쳐다보는 눈빛과 저를 향해 망설임 없이 뻗어오는 팔이 계속해서 시도폰의 머릿속에서 얽히고설켰다. 솔라가 건넨 찻잔이 사정없이 흔들렸고 시도폰은 애써 괜찮은 척하려고 했지만, 물에 파동이 이는 건 멈출 수 없었다.

“저도 그날, 미카가 정말 무서웠습니다.”

솔라는 무심코 시도폰이 각성했던 날의 일을 떠올렸다.

“피로 칠갑한 기사가,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악마 같은 얼굴을 하고 칼을 이쪽으로 겨누는 상황은 전혀 상상해본 적 없었거든요. 그래서 당신께서 그렇게 진정하지 못하시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맙네.”

시도폰은 솔라의 말을 듣고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두 사람을 두고 남은 업무를 처리하던 베론은 시도폰에게 피곤하진 않냐고 물었고, 폰은 잠이 다 깨버려서 다시 자기 힘들겠다고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편, 미리엄은 시도폰의 추리를 되새기며, 피데이스가 데려온 프라이에와 이디스에게 탈옥범인 미카는 그리 멀리가지 못했을 거라고 이야기해준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지금은 어두워서 마음껏 움직인다 한들 눈치채는 사람도 없을 텐데요.”

“이 남자가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을 때 그와 연결되어있으려면 미카도 마찬가지로 땅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 말 같은 걸 타고 멀리 도망칠 순 없다는 거죠.”

이디스의 질문에 미리엄이 답하자 프라이에는 가까운 곳에 미카가 숨어있을 수도 있겠다며 나갈 채비를 했다.

“우리가 그를 찾으러 멀리 나갔을 때, 숨어있던 곳에서 튀어나올 수 있으니까 기사단 건물을 중심으로 숨을 법한 곳을 꼼꼼히 수색해보자. 어두우니까 조명등 챙기고.”

“넵!”

프라이에가 이디스를 데리고 나갔고, 그 뒤를 여러 기사가 따라갔다. 피데이스도 그중 하나였고 미리엄은 경과보고를 하러 다시 베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어라, 주무시고 계셨군요?”

“쉿. 방금 막 잠드셨네. 솔라, 넌 여길 지켜라. 우린 나가서 이야기하지.”

시도폰은 베론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있었고, 베론은 그를 조심스레 소파에 눕히며 일어섰다.


미카가 잡힌 건 다음 날 새벽이었다. 그것도 기사들이 한창 자고 있을 시간에 잡혀서 베론은 시도폰을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으나, 그가 집무실 문을 열었을 때 시도폰은 이미 깨어나 있었다. 반대로 솔라가 자고 있어서 시도폰이 그의 옆에 앉아있는 상황이었고, 베론이 미카가 잡혔다고 보고하자 시도폰은 그를 만나야겠다고 일어섰다.

“미카가 잡혔습니까? 저도, 가겠습니다.”

소파가 움직이는 걸 느낀 솔라가 비척비척 일어나서 시도폰 옆에 섰다. 시도폰이 피곤하지 않냐며 걱정했지만, 솔라는 자기가 곁을 지켜야 한다며 반쯤 뜬 눈으로 검집을 허리에 찼다. 죄인이 갇혀있다는 감옥에 도착한 일행은 재갈이 물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미카의 앞에 섰다. 프라이에는 무슨 이상하고 커다란 항아리에 숨어있길래 못 찾을 뻔했다며 투덜거렸고, 그 옆의 이디스는 하품을 간신히 참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한텐 말하지 말라고 했더니 정말 아무한테도 말을 안 해줬구나. 다행이다.’

시도폰이 수고했다며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베론은 시도폰의 요청으로 미카의 재갈을 느릿느릿 풀었다. 미카는 주술 같은 말을 외우며 시도폰을 노려봤는데, 그 앞에서 시도폰이 갑자기 쭈그려 앉았다. 베론과 솔라가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며 기겁했지만, 미카는 단단한 밧줄과 걸쇠로 묶여있었기에 시도폰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할 수 없었다. 축축한 지하 감옥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왜… 나를 죽이려고 했는지 궁금하네. 자네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기한이 무한한 건 아니었으니 시간이 지나면 끝날 일이었을 텐데.”

“시간이 지나면 끝날 일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요, 시간이 지나면 저도 죽을 테고 그러면 먼저 간 사람은 만날 수 있겠지요.”

뜬금없는 말에 시도폰이 입을 닫자 미카는 연이어 감정을 쏟아냈다.

“그날 당신께서 조금만 더 일찍 각성하셨다면, 내 동료들이 죽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당신에게 그런 강한 힘을 주기 위해 그들의 영혼을 제물로 바친 걸 수도 있겠지요. 혼자 살아남으시니 행복하십니까?”

“이딴 헛소리를 더 듣고 계실 이유는 없습니다! 다시 재갈을 물리겠습니다, 뒤로 물러나십시오.”

다가오는 베론에게, 시도폰은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솔라가 검을 뽑으려는 것도 막고, 폰은 미카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더 한심하게 생겼구나.’

탈옥 전에 입었던 죄수복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도로 잡혀 온 인간이니 지극히 당연한 평가였다. 이런 인간한테 두려움을 느꼈다는 게 이상하다며 시도폰이 말문을 텄다.

“내가 혼자 살아남았다고 이야기했지…. 그럼 자네는? 혼자 살겠다고 동료들이 버티고 있는 전선을 이탈한 자네는 왜 살아있지? 자신에게 해야 할 말을 나에게 해서 무엇하나, 그런다고 죽은 동료가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생각보다 말이 매몰차게 나왔지만, 폰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미 잊혔다. 미카가 그날의 일을 끄집어낸 덕분에, 시도폰의 머릿속엔 그날 제가 온몸으로 느꼈던 죽음과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나는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가 무슨 마음으로 그 난장판에 뛰어들었는지는 알고 있네. 보호소의 아이들과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서, 지금과 비교하면 없다시피 한 신성력으로 내 나름대로 버티려고 노력했어. 자네가 입었던 갑옷, 들고 있던 무기, 그 무엇도 내겐 없었네. 살아있으니 행복하냐고? 그래, 행복하네. 이제 모두를 지키고도 남을 힘을 얻었고, 잃은 이들을 추모할 여유도 있어.”

그렇게 말하는 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솔라도, 베론도 그날을 떠올리며 각자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고, 특히 베론은 한때 시도폰을 원망했던 마음을 반성했다. 당연히 그게 미카를 이해했다는 뜻은 아니었기에 그는 미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기사들의 순직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건 맞지만, 사과는 자네에게 할 게 아닌 것 같네. 자네는 내 사과를 받을 자격이 없잖나.”

미카는 시도폰이 말하는 동안 점점 흐느끼더니 이제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주술은 아닌 것 같았기에 베론은 내버려 두고 폰과 솔라를 데리고 지상으로 돌아왔다. 대화가 길지 않아서인지 밖은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두웠는데, 시원한 새벽바람을 맞으며 시도폰이 베론에게 물었다.

“미카가 말한 것 중에 내가 조금 더 일찍 각성했더라면 기사들이 죽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 있지 않았나?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베론은 비슷한 말을 헤일로가 푸념하듯 했던 걸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헤일로는 그 말을 하고 나서 바로 부정했고, 미카와 다른 행동을 했으니까.

“죽고 사는 것은 신께서 정해주신 것입니다. 희생자들의 영혼이 당신의 각성을 위해 쓰였다는 건 미카의 추측일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이후 미카의 범죄는 오전 기도 중 공표되었고, 몇몇 심약한 사제들은 헉-소리를 내며 수군거렸다. 슈바헨이 이런 중범죄는 남부 교회와 협의 후에 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어떤 벌이 내려질지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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