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봐

인간적으로 문창과는 봐줍시다 (2)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말을 하려고 하니 목에서 숨소리보다는 훨씬 거칠지만 말하는 것 보다는 숨소리에 가까운 정석적인 공기 반 소리 반의 음성이 나왔다. 나는 당황해서 내 목을 양손으로 잡았다. 다시 아, 하고 소리를 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어머. 목소리가 안 나오시나요?”

여자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네, 하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당장 가수로 데뷔해도 될 것 같은 불쾌하고 섹시한 음성이 허공에 흩어졌다. 내가 가**시가 된 것 같았다. 여자는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정말 가지가지 하시는군요.”

어? 상냥하고 나긋나긋한 음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폭언이었다. 내가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해 보았으나 그녀는 착각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은 듯 폭언을 이어나갔다.

“당신이 살아있는 이유가 뭔가요? 모두가, 심지어 당신마저도 당신이 죽길 바랐는데 그것마저 제대로 못 해내다니. 이번에는 목소리가 안 나온다는 핑계로 붙어있을 건가요? 참……. 당신을 대신해서 당신의 염치와 양심가 죽었다는 농담이 사실이었던 것 같군요.”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나를 향한 말이 분명한데 딱히 화가 나지는 않았다.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그런가? 일단 나는 이 여자를 처음 보았다. 여자는 나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인 것처럼 말했으나, 틀린 내용과 내가 알지 못하는 내용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설명을 요구하거나 항변하는 대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그녀는 특이한 옷을 입고 있었다. 재질은 비단이고 색깔은 옥색이었고, 옷의 형태는 원피스였으나 복식은 동양식이었다. 저고리가 없어서 한복은 아니고 오히려 기모노에 가까웠는데 기모노와 달리 치마가 넓게 퍼져 있었다. 위로 높게 틀어올린 머리에는 번쩍거리는 비녀가 꽂혀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평생을 오타쿠로 살았지만 이런 근본 없는 복장은 처음 보았다. 이윽고 합리적인 가설이 떠올랐다.

‘이거 설마, 빙의인가?’

요즘은 웹소설뿐만 아니라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빙의물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나 같은 문예창작과는 아무래도 모를 수가 없는 소재다. 그러나 문제는……. 나는 웹소설은 단 한 편도 읽은 적이 없었다. 그야 당연히 난 순수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이다. 세계 각지에서 깊이 있고 아름다운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내가 왜 불량식품밖에 안 되는 소설을 읽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 과에도 웹소설을 쓰는 녀석들이 몇 있었으나 난 그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어떻게 돈이 예술보다 먼저일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내게 변절자였다.

아무튼, 그래. 여자는 내게 비아냥과 폭언을 쏟아냈으나 남의 말을 한 귀로 튕겨내고 한 귀로 흘리는 건 내 특기였다. 나는 그녀를 뒤로 하고 제일 중요한 확인 절차를 거치기 위해 양손으로 내 가슴을 만져보았다. 음. 밋밋하군. 이번에는 허벅지를 만져보았다. 음. 잘 있군. 그렇다면 50%는 성공한 것이다. 이번에는 맞은편에 있는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

거울 안에는 깡마르고 안색은 창백한 데다가 쓸데없이 눈만 소처럼 큰 녀석이 있었다. 여자애라고 해도 믿을 법한 곱상한 얼굴이었다. 이걸 좋아해야 할 지, 싫어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서 떨떠름한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을 관뒀다.

내 새로운 얼굴을 구경하고 나는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여자는 어느새 나간 뒤였다. 아까 전에 그녀가 창문의 발을 올려둔 상태라 따땃한 햇볕이 침대 위로 부드럽게 쏟아내렸다.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뭘 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내가 어느 창작물에 빙의된 거라면, 빙의를 하게 된 경위나 이뤄야 할 목적이 있는 게 마땅한 일 아니겠는가? 지금은 햇볕이 너무 좋고 이불이 따뜻해서 머리 아픈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아무런 저항 없이 잠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갑자기 내 팔과 멱살을 잡아 일으키는 무식한 손길에 잠에서 튕겨나오듯 깨어났다. 누군가의 단단한 손이 나를 침대에서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내 팔을 포박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내 목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신발도 못 신고 허정허정 끌려다니는 게 수청을 거부하고 변학도에게 끌려가는 춘향이의 모습과 진배없었다. 나는 정신 없이 어딘가에 강제로 앉혀졌다.

“홍시현!”

단전에서 뽑아낸 듯한 우렁차고 단단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앞을 바라봤다. 홍시현은 내 이름이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눈앞에서 왕들이 앉을 만한 큰 의자에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로 노기를 뿜어내고 있는 중년의 남성은 나를 보며 홍시현이라고 말했다. 설마, 이 몸의 이름이 내 이름이랑 똑같은 건가? 아직은 확신할 수 없지만 정말로 똑같은 거라면 우연일 리가 없었다.

“변명을 해봐라!”

재차 쏟아진 노호에 나는 화들짝 놀라 위로 5cm쯤 떠올랐다. 목소리가 안 나와서 변명을 못하는데? 이 사정을 알 리 없는 그는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돌려 불안하게 주위를 살피는 모습을 보고 더욱 화가 나서 들고 있던 커다란 검을 들었다가 쿵! 소리가 나도록 땅에 박았다.

“제대로 대답은 안 하고 여전히 꼼수만 부리는 구나!”

아니. 저도 대답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안 나오는데요? 억울한 눈으로 사방을 보아도 나를 도와줄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어 보였다. 고개를 돌리다 왕 혹은 우두머리의 옆에 시위해 있던 여자가 아까 전 내게 폭언을 쏟아낸 여자라는 것을 알아보았으나 그녀는 내 시선을 모르는 척 했다. 그녀는 내가 말을 못하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 사실을 전달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우리의 첫 번째 규칙은 무엇이냐?”

“…….”

“우리의 첫 번째 규칙은, 살고자 하는 이는 살리고 죽고자 하는 이는 죽이는 것이다. 헌데 너는 이곳에서 누구보다 편하게 살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죽고자 하는 구나. 더는 네 방만한 꼴을 볼 수 없어, 나는 이 전목구의 지도자로서 홍시현의 퇴출을 명한다!”

“예!”

“명 받듭니다!”

내가 앉은 자리 근처에 있던 남자들이 내 팔을 포박하고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내가 똑바로 서기 전에 내 눈에 검은 안대가 씌워졌다. 당황한 마음에 팔과 다리를 버둥거렸으나 남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내 팔을 당장이라도 부러트릴 것 처럼 험악하게 쥐어서 제발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살살 붙잡아 달라고 애원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는 무서움에 엉엉 울었다. 인터넷에서는 17대 1로 키보드 배틀도 뜰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17대 1로 싸우는 현장에서 구경꾼밖에 안 해봤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체육 시간에 유연성 테스트를 한다고 선생님이 내 몸을 억지로 늘렸을 때 외에는 이런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손길에 노출되어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겁이 나 죽을 것 같았다.

퍽! 누군가 거친 손길로 나를 무자비하게 밀었다. 나는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무력하게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발소리도 없이, 나에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미친. 대박 서러웠다. 나는 눈물콧물을 훌쩍이며 손을 더듬어 안대를 풀어냈다. 갑자기 보게 된 햇볕이 너무 눈이 부셔서 인상을 찌푸렸다. 햇빛을 가리는 나무들이 빼곡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

나는 뒤늦게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무가 말도 안 되게 빽빽했다. 빽빽한 수준이 아니라 나뭇가지들이 엉켜서 하늘을 가리고 있는 정도였다. 나무에 이파리는 하나도 없었지만 가지 하나하나가 두툼하고 단단해 보였다. 나뭇가지들은 내가 손으로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있었다. 숲은 몹시도 고요했다. 바람이 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벌레들의 소리나 새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짐승의 소리도, 물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무는 지나칠 정도로 풍성했으나 바닥에는 풀이 한 포기도 없었다. 마치 황무지 같았다.

어렴풋이, 직감적으로 이 상황이 이해가 됐다. 그러니까 내가 빙의한 이 세계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재난 상황에 던져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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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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