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게 3] 사랑하는 아이 아스타리온
까마득히 오래 사는 엘프의 세월동안 유년기라는 것은 반짝이는 이슬방울보다 덧 없이 사라지는 것.
안쿠닌 가족의 새 생명은 태어난지 9년, 한창 전생을 기억할 나이였다. 아스타리온은 또래 아이보다 침착한 아이로, 동년배의 인간 아이는 물론 운 좋게 같은 시대에 태어난 다른 엘프 아이와 비교해도 좀 더 성숙했다.
“나는 옛날에 책 안 읽었어.”
한참 그림책에 몰두하고 있던 꼬마 아스타리온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예쁘고 큰 눈동자는 그림책의 그림보다는 큰 글씨로 또박또박 써진 간단한 문장을 해독하려고 열심히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다.
“근데 지금은 책이 좋아. 이번에는 글자 많이 읽을거야.”
다른 아이들이 자잘하게 흩어진 파편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전생을 아스타리온은 꽤 큼직한 덩어리로 기억하고 있을 때가 많아서 부모는 물론 다른 성인 엘프들도 한번씩 놀랄때가 있었다. 물론 이 세상에 환생한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아직은 표현이 미숙하고 자기 자신이 뭘 느끼고 있는지도 모를 때가 많았다. 그러나 장래가 기대되는 아이였다.
말재간이 좋은 아이였다. 책으로 읽는 어휘를 타고난 말솜씨에 덧입혔기에 이따금 혀 끝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곤 했지만 결코 남을 상처입히면서 즐거워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아이는 점점 커가면서 놀라운 판단력을 보여주곤 했는데 나이에 안 맞을 정도로 올곧은 논리와 이성을 생각해보자면 나중에 어느 분야에서든 두각을 드러낼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만 상대의 감정을 배려하지 못하고 완고하게 자신의 의지만을 관철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것만큼은 흠이었다.
어린 아스타리온의 총명함과 말재주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지만 신들은 이 아이에게 또 다른 선물을 주셨다. 아름다운 외모였다. 사랑스러운 아기로 태어난 작은 엘프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되는 귀여운 아이로 자랐고, 차츰차츰 외모에서 빛이 쏟아지는 것 같은 미소년으로 자라났다. 그토록 뚱한 표정으로 매사에 모든 것을 진지하게만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어린 아스타리온은 인생의 여명기에서부터 무수히 많은 연인과 무수히 많은 사랑을 나누었을 것이다.
입 바른 소리로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지 못하는 아스타리온은 엘프의 기준이 아니라 다른 종족의 기준으로 성년, 그러니까 육체 나이로 20살쯤 되어서 법조계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지역의 존경받는 명사 가문의 일원으로서 명예직에 가까운 치안판사 직위를 부여받은 것이다.
20살 하고도 몇년 간의 경력이 더 쌓였다곤 해도 어린 나이였다. 엘프의 기준으로 보자면 갓난아이와 다름 없었고, 다른 종족의 기준으로 봐도 사회 초년생이나 다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실하게 판사직을 수행했다. 뇌물을 받는 법이 없었고, 환담에 넘어가지도 않았으며, 미인계 따위의 성욕도 그를 매수할 수는 없었다.
일절 자비가 없는 판결과 사람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는 냉정함으로 원망을 사기도 했으나 그는 자신의 판단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세상의 더러움이 보였다. 그것을 용서할 수 없는 도덕적인 결벽증이 있었고. 진실이란 것은 사람의 감정보다 우선시 되야하는 것이었다. 정의는 최우선 사항이었다.
도시의 상류층과 귀족들 사이에서도 아스타리온의 대쪽 같은 성격을 싫어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도무지 융통성이라곤 없는 새파랗게 어린 놈이 권한도 얼마 없는 감투로 정의의 사도 노릇을 하고 있으니 뒤가 좀 켕기는 사람들에겐 당연히 눈에 거슬릴만 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예를 들면 카사도어 자르 같은 고명하신 귀족이 아스타리온의 행보를 좋게 보기도 했다. 요새는 저렇게 바른 청년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며.
카사도어는 이따금씩 자선사업을 일으켜 도시의 빈민들을 구제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말뿐만이 아닌, 행동으로 고결함을 증명하는 귀족이었다. 워낙 조용하고 은둔적이라 오해를 사기가 쉽지만 성품은 온화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자르 궁전에서 열리는 파티는 호화롭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사교계에서 그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스타리온을 주시하고 있다는 건 의도치 않게 아스타리온의 뒤를 지켜주는 일종의 방패막이 되었다.
정말 찬란한 인생이었다. 아침 햇살이 막 정오의 청년기가 되기 전에 한껏 강렬하게 내리쬐려고 발돋움 하는 시간이었다. 신들이 그에게 인생이라는 시간을 조금만 더 허락했더라면 그 완고하고 인정머리 없는 성질도 조금은 누그러들어서 사람의 마음을 고려하는 따뜻한 판사가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꽃은 피어나기 전에 봉오리째로 저버리고 말았다.
인생의 초반부를 살고 있던 젊은이가 그 짧은 시간 동안 쌓아올린 업보를 돌려받은 것일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놈이 비명횡사해서 꼴 좋았을테고, 누군가에게는 명판결을 내려주신 은인이 황망하게 돌아가신 것일테다. 그의 총명함과 아름다움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세계 그 자체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아스타리온은 조용히 묻혔고 장례식도 조촐했다. 무덤에 함께 묻힌 젊은 판사의 아름다움 때문에 도시는 잠깐동안 안타까워하며 그를 기억했지만 그것도 얼마 안가 잊혀지고 말았다. 세상은 그의 존재 없이 요란하고 꽉 찬 상태로 꾸준히 돌아갔고 그 무거운 수레바퀴 속에서 자식을 잃은 안쿠닌 가족도 빛바랜 부고란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어쩌면 자식을 잃은 도시에서 계속 살아갈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00년을 사는 인간조차 자식의 죽음을 평생 가지고 가는데 수백년의 세월을 살아야하는 엘프에게 자식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슬픈 기억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오래 기억하고 다음 생애까지 기억을 가져간다. 엘프에게 있어 참척이란 다른 종족이 쉽게 헤아릴 수 없는 저주였다. 아베르누스의 불길이 그보다 덜 고통스러우리라.
우리의 사랑하는 아이 아스타리온.
찰나의 순간 동안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가 아침 이슬처럼 가버렸구나.
전생의 기억을 잊기도 전에 급히 다음 생으로 떠나버리다니
내세에는 우리가 너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눈물은 너와 함께 이 곳에 묻는다.
바라건대 우리의 슬픔을 다음 생의 네가 기억하지 않기를.
아스타리온 안쿠닌.
존경받는 치안판사.
향년 39세.
후기는 유료 분량으로 넘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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