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백잡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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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새벽 일찍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가게 문을 열자면 그 즈음이었다. 채 새벽의 한기가 가시지 않고, 적당한 아침 햇살이 창가를 간질일 즈음. 누군가는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을 그 시간에 가게는 오늘 장사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올 겨울은 공사 소리가 안 들려서 좋네.’ 사계절 중에서도 겨울. 그 적막하고 서늘한 공기를 즐기는 명이다
“만년이나 살아놓고 그런 것도 모르는겐가.” 바보. 하고 덧붙여지는 말에는 다시 멋쩍게 웃는다. 목 뒤를 간질이던 손이 입가로 내려오면 또 어색하게 굳어버린다. 무엇 하나 익숙한 것이 없었지만, 당신의 손길에 천천히 입가를 벌려내었다. 입 안의 살덩이에 닿는 손끝의 감각이 요상했다. 조금 간지러운가 싶다가도, 꾸욱 눌러지는 감각에 흠칫 몸을 떨기도 했
당신의 능청스런 웃음이 사위를 점해간다. 흐드러진 꽃밭처럼, 그 향으로 온 세상을 덮어낸다. 또한 장난스런 질문에는 픽 웃으며 대답을 뭉개었다. “자네 꽃잎이-” 제게로 숙여지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일까, 본의 아니게 당신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그제서야 그런 당신을 눈치채곤 멋쩍게 웃었다. “화우동산이로다.” “화락연불소월명애무면이라.” “
이마에 닿는 입술에는 짐승으로의 본능이 자연히 꼬리를 세운다.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잇새로 새어 나오는 것 또한 그것이리라. 여전하게도 과거에 머무르는 흰 호랑이는 연회의 시끌벅적함을 잊지 못한다. 피워내는 불꽃은 색색의 종이 뒤로 화려하게 빛나고, 금방이라도 골목에서 장난스런 아이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다른 것은 그곳에 명과 당신만이 있다는 것일
어떤 죄업도 자신의 앞에서는 모두 용서되는 법이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명조차도 제 죄업에는 이런저런 핑계를 붙여대기 일쑤였다. 그러니 모순뿐인 이 밤도, 그리 큰 죄가 되지는 않으리라. 명은 감히 상상했다. 제 품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당신의 온기가 따스한 정오의 햇살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만년송 아래 너럭바위에 느긋하니 누워, 가만히 낮잠을 청할
당신의 안에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지, 명은 알 길이 없었다. 드러나는 것으로만 그저 추측할 뿐이었고, 어렴풋이 당신이 바라보는 것이 자신이 아님을 짐작했다. 과거는 종종 현재, 나아가 미래도 알게 해 주었으니. 제 눈 앞의 상대를 파악하는 것 쯤이야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다만 명은 개의치 않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보는
- 무엇이 문제였을까. 썩 즐겁게도 시작했던 자리, 별 문제랄 것도 없었더랬다. 차 한 잔 기울이며 적당히 덕담이나 나누면 되었을 것을. 다만 기나긴 세월은 그들로 하여금 상념에 젖게 만든단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으리라. 명, 난 말일세. 무엇이 그리도 서글픈가. 날 축복해 줄 이는 존재하는가 묻곤 한다네. 축복할 이 하나 없더라도 축
. … 미련한 녀석아. 작게 읊조렸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홀로 눈이 쌓인 채 누워 있던, 억지로 잡아두었던 시간이 급하게 흐르고 흘러 누군가 존재했던 흔적만이 남아있는 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핏자국. 먼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만 같은- 영감! 왜 이제서야 온 거야! -하는 천연덕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니 들리지 않던
트리거 워닝 : 유기, 갑작스런 이별, 상해, 죽음 암시 등. . 하얀 범은 가만히 자리를 깔고 앉아 먼 곳을 응시한다. 코 끝이 찡긋거리는 꼴이, 썩 기분이 좋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 듯 싶었다. . 제 기억이 시작될 즈음. 피어나던 생명도 다시 고개를 숙일 만큼 아주 차디찬 겨울날이었다. 눈발이 휘날려 한 치 앞도 분간키 힘들었을 정도였
그날은 비가 억수처럼 내렸더랬다. 끊일 줄 모르고 부어대는 빗줄기가 제 억장과도 같았더랬다. “ … 내 돌려줄 수 없는 것을. ” 뱉어지는 말은 더욱 잔혹했다. 적어도 명에게 있어서는. 질식할 듯한 감정의 파도에 그저 휩쓸리는 명은 무력했다. 바다 위 한 마리 미물이 된 것 마냥. “ 어찌 이리도 베풀어 주는 게야… ” 차디찬 빗물이 명의
명은 어리석고 어려 만 년을 견디고도 모든 것이 제 일인 양 고통스러웠다. 나기를 제왕으로 나, 누구보다 하찮게 마감할 생이었으나 결국에 제 명운을 거슬러 눈밭에서 일어나 산군이 되었으니. 극복하지 못할 것 만무했다. 다만 세상의 비극을 받아들이기에 명은 너무도 유약했다. 아니, 따지자면 누구보다 단단할 지도 모를 명이었다. 그 모든 고통을, 슬픔을,
… 어딘가의 마을이 불타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렸더랬다. 다만 그것이 당신이 머물던 마을인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알고도 부정했으리라. 그가 한동안 술식 연구에 목을 매었던 것도 결국에는 당신을 마주하기 힘들다는 무의식의 발현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귀신, 요괴. 사이하고 사특한 것이라 불리는 그것들. 명은 그저 괴이한 어둠을 퇴치하
- 영감이라. 그도 맞는 말이렸다. 제가 살아온 세월이 지극할 진데, 이제 와 영감이라는 호칭에 딴죽을 걸 생각일랑 추호도 없었다. 고집은 오래도록 생을 이어온 자들의 특권과도 같은 것이니. 그야 제 말 한 마디에 율이 녀석을 기절시킬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라. 글쎄. 그 한 마디에 울고 웃는 것이 결국 생을 영위
- 언제쯤이던가. 언젠가, 호랑이 앞에 서게 된다면. 얼른 냉큼 엎드려 형님! 하고 부르면 제 앞의 인간놈이 정말 제 아우인 줄로 착각하여 살려주게 된다던. 그런 허무맹랑한 소문이 온 천지를 울리던. 그런 시절이었다. - 그래, 내 그 때는 신선은 아니었네. 고작해야 영물 정도일까. 하루는 산길을 휘휘 돌아다니던 중이었다네. 어디 돌부리는 없는
-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면, 금새 훤하게 시야가 넓어진다. 동시에 온 시야를 채우고도 남을 거대한 호수에 별과 달이 비쳐들었다. 그 광경을 담는 눈동자에도 자연히 별빛이, 달빛이 흘러들었으리라. “쉿, 조용히.” 이제 곧이라네. 하며 속삭인다. 장난스런 웃음은 덤이었고. 가만히 숨을 죽이면, 찌르르- 하는 풀벌레 소리가 천천히 귓가를 채워온다
Trigger Warining : 유기 - 언젠가 어느 부잣집 아이를 도와준 적이 있었더랬다. 그 때의 보답으로 받았던 백차였으니. 이름도 백호은침인 것이-그 백호야 아니었지만.- 썩 어울리는 차로구나. 하던 참이었다. 마침 이렇게 꺼낼 기회가 생기어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휘두르는 부채에 불쑥 나타난 차상에 이것저것 다과를 꺼내어 올리길 두어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