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히스클리프 드림
10년 바주카 2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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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잠깐 머뭇거린 순간이 어색하지 않게 히스클리프는 주의를 기울이면서 평소처럼 웃으려고 노력했다. 숨은 어떻게 쉬더라? 마력을 모아서 마법을 어떻게 쓰는 거였지? 당연하게 반복 되는 것은 의식할수록 갈피를 잃고 헤매기 마련인데. 다행히 상대는 히스클리프의 짧은 이변을 눈치채지 못했다.
히스? 무슨 일 있어요? 괜찮아요? 되물어보지 않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장식물을 구경하는 카노를 보고 안심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히스클리프의 머릿속에 새로운 고뇌가 떠올랐다. 현자님이 모르시는 건 기쁘지만…. 기쁘긴 한데…. 시노만큼은 아직 아니지만 카노는 히스에 관한 걸 놓치지 않는 현자였다. 히스클리프가 땅을 파고 들어갈 기미를 보이면, 커다란 틈이 될 자그마한 흠집을 들고 있으면 신중하면서도 또 대담한 행동을 보이는데. 이번에는 히스클리프의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 그런 걸까? 동요를 능숙하게 숨겨서? 눈앞에 있는 장식물이 훌륭해서? 그런 거면 참 좋았을 텐데. 안심만 하면 되고. 답과 함께 무심코 튀어나오려고 하는 한숨을 삼킨 히스클리프는 카노를 곁눈질했다.
카노도 평소 같지가 않았다. 알리고 싶지도 알리고 싶지도 않고, 굳이 꺼내고 싶지도 않았던 진심이 나왔으니까.
본인이 직접 고백한 건 아니지만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에 어떤 사건으로 인해 동쪽 나라에 틀어박히게 된 마법사. 역전의 영웅 레녹스 램이 따라오는 걸 좋아하면서도 또 불편해하고. 중앙 나라를 찜찜하게 여기고 있는 저주상. 상황과 단어들이 엮이고 합쳐져 ‘동쪽 마법사 파우스트 라비니아는 중앙 나라의 성 파우스트와 동일인물이다.’ 결론을 이끌어내듯이. 카노의 태도에서 하나의 사실이 튀어나왔다. 아 현자님은….
원래 있던 세계를, 정확하게는 살았던 환경을 별로 안 좋아하셔.
그러니까 이 세계에 남고 싶으신거야. 아니 정확하게는…. 돌아가고 싶지 않으신거지. 굳이 돌아가야하나? 그런 마음으로 저울이 한 쪽으로 기울었어.
히스클리프는 카노가 좋았다. 카노 본인이 들으면 제 소개요? 히스 자기소개죠? 뜬금없이 그러면 어떡해요. 진심으로 황당해하겠지만 상냥하고 다정해서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이 기운 균형이 기뻤다. 좋아하는 사람과 앞으로도 같이 있을 수 있다니. 어떻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저번 현자님과는 달리 추억을 기억할 수 있다니. 자신의 미래에 카노 아카리가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쁘면서 또 쓸쓸했다.
있던 세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새로운 세계에 있고 싶다니. 그런 이유라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시는 게…. 히스클리프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작은 한숨을 뱉었다. 돌아가는 건 싫어. 역시 남아주셨으면 좋겠어. 그런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남아주셨으면 해. 어떤 이유면 좋겠는데? 흐름을 따라 의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 세계가 좋아. 마법사와 인간이 공존하는 기이한 세계가 마음에 들어서요. 그런 거면 좋겠어. 히스클리프는 최대한 욕망을 덜어낸 대답을 꺼냈다. 다른 세계에서 온 현자는, 일 년이 지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 정해진 순리가 그렇다고 해도 히스클리프는 그런 방향의 미래를 꿈꿨다.
그래서 그런가? 욕망은 덜어냈어도 욕망이라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솟아오르는 마음을 가지치기하듯 잘라내고 아무도 못 보게 묻어버렸어야 했나봐. 마법사니까 조심했어야 했는데. 마법사는 마음으로 마법을 쓰니, 무심코 일을 저지르는 게 흔했다. 어두워서 불을 찾으면 작은 광원이 손에 쥐어지고. 걷기 귀찮을 때는 은근슬쩍 옆에 빗자루가 나타나는 게 마법사의 삶이니 정신 똑바로 차렸어야 했는데…!
“히스 괜찮아?!”
“히스 무슨 일 있어요?!”
자괴감과 혼란스러움이 담긴 숨소리가 히스클리프의 입에서 새어나가자마자 격한 반응이 돌아와,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아, 저 그게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단번에 다가온 만큼 여자는 거리를 벌려 물러났고. 뭐가 문제야 말해봐. 소년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상해. 진짜 이상해. 평소처럼 기상했더니 방 안에 모르는 사람이, 아니 또 마냥 모른다고 하기엔 미묘한 익숙함을 가진 사람이 둘이나 있다니. 이게 무슨 일이지? 히스클리프의 눈이 말 그대로 ‘빙빙’ 돌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느껴지는 미묘한 익숙함. 이걸 뭐라고 하더라? 히스클리프는 전체적으로 인상이 날카롭고, 눈썹에 힘이 들어가 퍽 퉁명스러워 보이는 여성을 응시했다. 평소라면 긴장 할 상대인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황당하거나 당혹스러우면 무심코 눈썹에 힘이 들어가, 험악한 인상이 되는 사람이니까. 기억보다 길고 결이 좋은 머리카락은 여전히 햇살의 온기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아. ‘여전히.’야. 여전히의 흔적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 성장해도 달라지지 않는 근본적인 부분. 깊어지거나 옅어지기도 하지만 부분 부분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모습과 습관. 생각하고 있던 것에 답이 나오자 히스클리프는 옆에 있는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눈높이가…. 비슷한가? 가늠하고 있으면 처음에는 똑바로 마주보다가 꿍꿍이를 알아차리고 뚱해지는 표정. 어떨 때는 옆에 있어도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왜 이럴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다 알게 되는 걸까? 잔잔하게 타오르는 모닥불 같은 눈동자. 거칠면서도 잘 정제된 행동. 키를 비롯한 모든 것이 히스클리프가 아는 시노 셔우드인데. 느낌이 달랐다. 느낌? 기운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정도로 어른스러웠다.
한 눈에 알아볼 수는 없지만 익숙함이 감도는 인간. 한결 같음 속에 세월이 쌓여 차이가 돋보이는 마법사.
히스클리프는 두 사람을 탐색하다 결론을 내렸다. 이거, 미래의 현자님과 시노구나.
그럼 이건 꿈이겠네.
처음에는 정신이 없어서 가장 친숙한 마법이라 여겼는데. 차분하게 관찰하니 마법일리 없었다. 천둥번개 치던 하늘도 순식간에 잠재우고. 이 세상의 끝에서 다른 끝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왕복할 수 있는 게 마법사지만. 히스클리프는 그런 걸 할 수 있는 강한 마법사도 아니었고. 강한 마음으로 비롯 되는 게 마법이지만, 죽은 사람을 되살리거나 시간을 간섭하는 기적 같은 행위는 불가능하니까. 마법이겠어?
지금도! 히스클리프는 이 상황이 마법이 아니라는 근거를 찾았다. 괜찮아? 다급하게 다가온 것치고는…. 그들은 수동적인 행보를 보였다. 아니, 행동하지 않았다. 히스클리프가 물끄러미 쳐다보면 똑같은 시선을 돌려주고. 생각에 잠기면 옆에 있는 것도 까먹을 만큼 얌전히 있었다.
만약 정말, 마법을 써서 미래에 왔다면. 눈 앞에 있는 게 진짜 몇 년 후의 시노랑 현자님이라면. 이럴리가 없어. 왜냐면. 히스클리프는 뜨겁게 올라오는 창피를 삼키려고 애썼다. 느닷없이 어린 히스클리프가 나타났는데 반응이 얌전할 두 사람이 아니니까. 이건 꿈이야. 꿈이니까 꿈의 주인공이 움직일때만 반응 하는 거겠지. 진짜 그런 거면. 귓볼까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열에 히스클리프는 어딘가로 숨고 싶어졌다. 정신 똑바로 차렸어야지…. 도대체 현자님과 시노를 두고 무슨 꿈을 꾸는 거야? 아니 백보 양보해서. 양보할 일은 아니고 시노가 그만큼 안 소중한 건 아니지만. 시노는 블랑쉐 가 종자니 미래의 블랑쉐 저택에, 히스클리프 블랑쉐의 개인실에 있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현자님은? 다른 세계에서 와 언젠가 돌아가야하는 카노 아카리는? 창피해. 부끄러워.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파렴치한 욕망과 조우하고, 수치를 처음 안 어린아이처럼 벌벌 떠는 히스클리프는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히스, 지금 자기가 왜 여기 있는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죠?
네가 왜 여기 있는지 고민하고 있잖아. 말해줘?
하지마세요 진짜 하지마세요.
왜 하면 절교야? 앞으론 마님으로만 모실까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마요!
얌전히 꿈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꿈의 주민이, 서로 시선을 마주보면서 생생하게 떠들고 있다는 것을.
히스클리프는 오즈나 미스라처럼 대단한 마법사는 아니지만. 마법은 마음으로 쓴다는 원리와 하늘을 가릴듯이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위대한 재앙이 초래한 이변이 만나. 가끔 말도 안 되는 짓이 일어났다. 작별인사를 못한 아이들이 가엽다는 이유로 사람이 된 시계탑. 죽은지 오래 됐는데도 자기의 정원으로 사람을 초대한 오렌지 나무. 미래와 과거과 뒤바뀌는 순간. 이질적인 기색을 처음 느낀 시노 셔우드는 먼저 아카리의 안전을 확인했다.
아카리는 창문으로 난데없이 뛰어들어온 시노를 보고 놀랄 틈도 없이, “히스 방에서 이상한 기색이 나. 이건…. 분명 내 구둣발을 핥게 했는데. 모자랐나?” 당사자가 여러모로 무서운 발언과 함게 스윽 사라지는 바람에. 대충 가디건 하나 걸치고 히스클리프 방으로 뛰었다. 시노처럼 마법사도 노련한 사냥꾼도 아니지만 아카리 역시 이변을 해결하기 위해서 뛴 현자였고, 지금은 동쪽 나라 그 블랑쉐의 안주인이었다. 무슨 상황이 있어도… 얼마나 대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상황이 있는데 자기만 모르는 건 싫었다.
방주인인 히스클리프가 부재 중인 게 그나마, 다행인가? 아니 주인이 없는데 이변이 일어난 게 더 불행인가? 어떤 일이라도 제발 무슨 일 아니게 해주세요. 별 일 없게 해주세요. 아니 별 일 없어야 해!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연 그곳에는.
위대한 재앙의 화신을 봐도 그렇게 놀라지 않을 시노랑 함께 - 이때 카노는 진심으로 오즈를 부르러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 어린 히스클리프가 천사처럼 자고 있었다.
몇 살 같아요? 열 여덟? 현자의 마법사 초상화랑 닮았잖아. 아, 그러면 안 되는데. 뭐가 안 돼? 너무 어려서…. 진짜 새파랗게 어린 상대인데 내가…. 그래서 안 잡아먹었잖아. 아 진짜!
그러고보니 의뢰로 온 이변이 흉흉한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변과 관련 없어도 스산하고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고. 이변과 관련 있는데도 평화롭고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도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런가보다. 경험으로 만든 안심을 가지고 둘은 새근새근 자고 있는 히스클리프를 구경했다.
일어난 히스클리프가 어, 어어. 어어어어. 눈을 빙빙 돌리며 당황하고 있으니 거기에 잠깐 이끌리긴 했지만. 반응을 보아하니 어디 이상한 건 아닌 모양이고. 어떻게든 상황을 파악하려고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귀여워서. 넘어져도 안 울던 아이가, 주변에서 걱정해주면 그제야 눈물을 보이는 것처럼. 히스클리프는 섬세한 성격이니 어떤 반응을 보이면 더 당황할 테니까. 그런 이유로 아카리와 시노는 서로 시선을 주고 받고 침묵했다. 히스클리프가 진정해서 차분하게 결론을 내릴때까지만 얌전히 있자. 그리고 그 결론을 꺼내면 장단을 맞춰주고 적당히 해결하고 보내자.
“꿈이구나….”
꿈으로 생각하기로 했구나. 다행이다. 여기는 사실 10년 후의 미래인데 히스클리프가 잠깐 왔어요. 미래의 히스클리프는 일이 있어서 모레 즈음 올 예정이니, 일정은 걱정 안 해도 괜찮아요. 속으로 정한 설명을 아카리가 빠르게 쳐내고 새로운 설명을 뽑는 동안, 시노가 짓궂은 미소와 함께 다가갔다.
“그걸 말하면 어떡해.”
제일 하면 안 되는 말인데. 목소리의 고조가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가. 열면 안 되는 것을 열어버리고. 보면 안 될 것을 담아버렸다. 아차, 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어떠한 사건이 시작된다는 그런 공포를 꺼내는 울림이었다. 시노가 친 장난인 걸 아는 아카리마저 장난친거죠? 물어보고 싶은 생생한 연기라니. 진짜. 아카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히스를 가장 높은 곳에 올려두고 우러러 보고 싶어하면서 가끔 이렇게 동네 친구처럼 살가운 장난을 친다니까.
“말해야지. 내 꿈이니까.”
헉, 히익. 거친 숨소리 대신 평온한 반응이 히스클리프 입에서 나왔다. 어어? 시노랑 아카리는 그 말이 신호라는 듯이 다시 서로를 마주봤다. 시노의 장난끼를 눈치채고 일부러 퉁명스럽게 답하는 것도 아니었고. 몰라 시노는 바보야! 빽, 외치는 삐짐의 전조도 아니고. 시큰둥하게 느껴질만큼 잔잔했다.
“혀, 현자님.”
꿈 속에서는 대범해지나봐. 그런가봐요. 시노에게 맞장구 치기도 전에, 들린 호칭에 아카리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현자님이라니! 현자 시절에는 하도 현자라고 불려서 카노 아카리라는 이름이 어색했는데. 최근 들어 그렇게 호명 된 적 없다 보니 반응이 늦었다.
“손을 잡아도 될까요?”
“물론이죠.”
현자로 나설 때에도 ‘현자인 아카리님.’으로 호명되다 보니, 아카리는 이 상황이 참 풋풋하고…. 낯간지러웠다. 히스클리프의 수줍은 태도가 그대로 붓이 되어 가슴을 간질이는 것 같아서. 힘을 풀면 그대로 몸을 배배 꼴 것 같았다. 히스클리프가 이 상황을 꿈으로 여기고 있는데. 왜 내 손을 잡지? 아니 진짜 왜 내 손을.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꾸 온 몸이 간지러웠다.
맛있는 걸 먹고 싶으면 산해진미가 떨어지고. 하늘을 날고 싶으면 그대로 뛰어 내리면 되고. 어떤 욕망을 토해도 하룻밤 사이에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는 곳. 그런 게 꿈이라면.
히스가 왜 네 손을 잡았겠어. 실실 웃은 시노가 그런 말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현자님.”
아. 아카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상대가 10년 후의 히스클리프라면 모를까, 지금의 히스클리프라면 절대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경보가 머릿속에서 크게 울리고 있었으므로.
현자님이 이 세계를 조금 더 좋아하실 수 있도록.
……제가, 노력할게요.
그러니까. 그때까지 저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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