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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는 내가 왜 좋아요? (3)

지게차 운전사 청년 X 구청 공무원 아줌마

유현에게서 받은 꽃은 직장에서 받은 축하 선물로 둔갑해 집에 보관되고 있었다. 작은 아이들은 그걸 믿는 눈치였지만 희영은 왠지 큰 애 눈빛이 무서웠다. 뭔가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 내가 왜 가슴 졸여야 돼? 그냥 감사 인사 받은 건데. 희영이 뜨끔한 가슴을 안심시켰다.

꽃이 좋구나. 나이 들면 아줌마가 되어 자연물에 집착하게 된다고 하던데(?) 희영도 어느새 그 대세를 따르고 있었다.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이고 애들에 치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자연이란 매 시기마다 성실하게 옷을 갈아입고 아름다운 모습을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희영은 그런 자연의 부지런함이 좋았다.

그렇지만 화분을 키우면 키웠지 금방 시드는 꽃을 사지는 않았던 희영이었다. 보통은 선물로 주고 받기도 하지만 스스로에게 선물한답시고 사더라도 쓰레기만 생기고 처치 곤란이니까-라고 생각했다. 막상 받으니 기분은 좋네. 화병에 물을 갈아주며 희영이 생각했다.

한가로운 주말이었다. 벌써 대학생, 초등학생이 된 아이들은 어느새 자라 주말마다 약속을 다니느라 바빴다. 오늘은 혼자구나. 빨래를 다 갠 희영이 TV 채널을 돌려댔다. 뭐 재밌는 거 없나? 딱히 보고 싶은 영상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적막을 채우려 말소리라도 틀어놓고 싶었던 희영이었다.

적당한 채널을 찾기를 포기한 희영이 휴대폰을 들었다. 카톡 알림이 무진장 쌓여 있었다. 할 말이 이렇게 많을까? 단톡방도 다 정리해야지, 생각하며 카톡들에 전부 답장을 하고 나니 꽤 시간이 흘렀다.

'꽃 시들면 말해요.'

희영은 문득 유현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연락을 안 했네. 이미 유현에게 받은 꽃은 개화한지 한참 되어 시들해진 지 오래였지만 아깝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아직 정리하지 않은 희영이었다. 이대로라면 다음 주가 지나기도 전에 말라 비틀어질 텐데. 이미 시든 건가? 그럼 연락 해?

뭐라고 해야하나. 고민되는 부분이었다. 연락 하면 또 돈 갚는다고 밥 먹자고 하려나? 설마 또 꽃 들고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이래 저래 드는 생각이 많았지만 머리를 비워내며 희영이 유현에게 문자했다.

- 선생님, 잘 지내시죠? ^^

- 꽃 버리기가 아깝네요 ^^

그러곤 바로 답장이 왔다.

- 버려요

맥 빠지는 대답이었다. 낭만이 없구만.

- 내일 뭐하세요?

오늘 저녁을 예상했지만 예상과 달리 내일 일정을 묻는 유현이었다. 내일? 내일은 월요일인데. 출근하는 날이었다.

- 월요일이니까 출근 해야죠

너무 딱딱하게 보냈나, 희영이 애들이랑 자주 쓰는 땀 흘리는 이모티콘을 함께 보냈다.

- 쉬면 안 돼요?

당돌한 말이었다. 애들 때문에라도 잘 못 내는 연차를 내라고? 반차면 몰라도 하루 종일 빠지기는 어려웠다. 안 그래도 월요일 바쁜데.

- 출근 해야죠 ^^

이번에도 너무 딱딱했나, 이모티콘을 찾는 손이 바빴다. 희영이 아직 채 고르지도 못했는데 벌써 답장이 날아왔다.

- 가고 싶은 데가 있는데

- 혼자 가기가 좀 뭐해서요

- 아줌마가 같이 가주시면 안되나요?

한 번 밥 먹어줬더니 아예 데이트 신청을 하는 구나. 흔하디 흔한 수법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도대체 어디길래?

- 어딘데요? ^^

일단은 들어나 보자는 희영이었다.

- 평일 아침에만 열어요

- 내일 같이 가요

데이트 코스...라기엔 시간대가 좀 독특한 곳이었다. 희영은 어쩐지 유현을 만나고 근무에 태만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반차를 고민했다.

- 내일도 5만원 갚으시나요? ^^

휴가까지 쓰게 하는데 꼴랑 5만원일까?

- 내일 나오시면 10만원 갚을게요

헛웃음이 나오는 제안이었다. 내 시간을 단돈 10만원에 사는구나.

- 아침 7시에 아줌마 집으로 갈게요 그때 나오세요

그런데 희영의 속마음도 모르고 대뜸 찾아오겠다고 선포한 유현이었다. 얘 뭐야. 진짜로? 희영이 당황했다. 도대체 어딜 가길래 반차까지 쓰고 나오래? 

그러나 희영은 한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던 것이다. 어린 애한테 또 말려든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근원 없는 호기심에 희영이 지고 말았다.

- 네 내일 봬요 ^^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급하게 애들 밥을 차린 희영이 7시를 조금 넘겨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출근할 때보다 이른 시각에 희영이 반차 생각이 다시 났다. 나도 미쳤지. 오늘까지만 상대해주고 다음부터는 돈만 받든가 해야겠다, 하고 희영이 생각했다.

"늦으셨네요."

유현의 목소리였다. 편안한 복장을 한 유현이 희영을 쳐다봤다. 유현은 희영의 신발이 불편할 것 같았다. 오늘 많이 걸을 텐데.

"아, 애들 밥 하느라."

"빨리 가야돼요. 차 어딨어요?"

"차 타고 가야되는 거예요?"

"네."

뻔뻔하기 그지 없는 태도였다. 그럼 지하로 가야되는데. 뭐야, 진짜.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며 다시 희영이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고원 도매상가로 가주세요."

내가 무슨 택시야? 희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유현은 인사도 없이 희영을 맞고는 차에 타자마자 목적지만 띡 대는 것이었다.

"거기가... 어딘데요? 호호."

화를 꾹 참으며 희영이 되물었다. 유현이 대답 대신 네비게이션을 조작하려 손을 뻗었다. 내가 하는 게 더 빠른데. 희영이 오른손을 뻗자 유현이 왼손으로 희영의 손을 붙잡고 다시 화면을 누르는 것이었다. 손을 붙잡힌 희영이 황당하다는 듯 붙잡힌 손을 쳐다봤다. 화면 조작이 끝난 뒤에도 유현이 제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언제까지 잡고 계실 거예요?"

"아. 죄송합니다."

유현은 원래 이런 애였다. 무례하고 뻔뻔하고 예의 없고. 다시 한 번 좋게 생각했던 걸 재고해야겠다고 다짐하는 희영이었다.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다. 뭐하는 짓이냐 이게. 희영은 유현에게 실망하는 마음이 드는 제 자신이 은근히 속상했다.

생각보다 도로를 꽤 달려 도착한 곳은 시장이었다. 가로로 큰 건물이 내부에 실내 전시장이라도 있다는 듯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여기에요. 고원 꽃 시장."

꽃 시장이었구나. 난 또 뭐라고. 입구로 향해 걸어가면서 희영은 흔한 꽃집을 상상하며 꽃 시장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식물원 같은 느낌이려나?

"아줌마 화났어요?"

눈치를 보던 유현이 말했다. 이번에도 본인이 잘못한 건가, 찔리는 유현이었다.

"반차 내고 오는 곳이 겨우 시장이라고 생각하니까 좀 아까워서요."

드물게 솔직해진 희영이었다.

"아..."

그렇지만 이미 수리된 반차를 되물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반차가 수당으로 얼마더라. 머릿 속으로 계산이 오갔다.

"죄송해요. 저는 그냥...."

"이미 왔는데 어떡해요. 시간 없다면서요."

"최대한 빨리 구경할까요?"

"선생님이 오고싶다고 한 거 아니었어요?"

꽃을 보고 좋아하던 희영의 모습에 더 많은 꽃 구경을 시켜주고 싶었던 유현이었다. 이렇게 싫어하는 모습을 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유현은 속상해졌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혹시 꽃가루 알레르기 같은 건 없으시죠?"

"네."

"알겠습니다...."

말이 없어진 두 사람이 꽃 시장 내부로 진입했다.

"헥!"

눈이 휘둥그레진 희영이 놀라는 소리를 냈다. 꽃 시장 안에는 종류를 알 수 없는 꽃들이 적게는 몇십 송이, 많게는 백 몇 송이까지 쌓여 있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눈에 닿는 모든 면들이 꽃과 식물들로 꽉 차 있었다. 붉은 색부터 시작해서 노랑, 오렌지, 핑크, 하늘, 보라 등등 총천연색의 꽃들이 이루는 풍경이 확실히 압도적이었다.

"와...."

언제 짜증냈냐는 듯 희영이 입을 벌리고 주변을 구경했다. 유현도 화면으로만 보던 꽃 시장의 경관을 보니 놀란 마음이었다. 길게 늘어진 상가 사이로 희영과 유현이 줄지어 걸어갔다. 복도마다 새로운 꽃들이 두 사람을 반겼다. 

"와 진짜 많다."

뭐라 더 좋은 표현을 하고 싶었지만 놀람으로 할 말을 잃은 희영이었다. 희영은 시선을 돌릴 때마다 나타나는 새로운 꽃들에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꽃 구경에 푹 빠진 희영이었다.

"진짜 예쁘네요."

희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유현이 말했다.

"여기는 왜 오고 싶으셨던 거예요? 꽃 좋아하시나보다."

기분이 좋아진 희영이 들뜬 목소리를 냈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유현의 존재도 잊은 채 희영의 시선은 여전히 꽃들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얘 꽃 진짜 좋아하는구나? 그때도 나한테 준 걸 보면.

"아, 너무 예쁘다. 집에다 하나 꽂아놔야겠다."

그 와중에 희영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하얀색 꽃잎이 아름다운 리시안셔스였다.

"이거는 카네이션이에요? 아닌가?"

희영이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상인에게 말을 걸었다.

"보는 눈 있네, 제일 비싼 건데."

"헉. 진짜요?"

"결혼식 때 제일 많이 쓰는 꽃이에요. 화이트 리시안셔스."

"아~."

꽃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희영이 상인의 말을 귀기울여 들었다.

"장미만큼 예쁘고 유명해요. 근데 가시는 없어."

"아 진짜요?"

"응, 꽃아놔도 오래 가고."

"오~."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는 희영이었다.

"저것도 예쁜데. 저건 뭐에요?"

"취향이 고급이시네. 이것도 비싸요. 얘는 카타리나. 장미. 지금은 덜 폈는데 피면 또 달라."

"아~"

집에 꽃 꽂아둘 데가 있던가? 생각해보는 희영이었다.

"마음에 들어요?"

유현이 희영에게 다가와 물었다.

"네. 얼마예요?"

유현은 희영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마치 치즈 더미에 둘러싸인 생쥐 같다고 생각하며 귀엽다고 느끼고 있었다. 계산을 마친 희영이 카드를 받고 포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데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유현이었다.

"아니, 선생님 때문에 나왔는데 제가 왕창 사버렸네요."

시간은 어느새 아침 10시 정도 되어있었다. 차에 돌아온 희영과 유현이 뒷자리에 구매한 꽃들을 놓고 출발하려고 하고 있었다.

"저는 구경만 하고 싶었어요."

하긴, 안 살건데 기웃거리기만 하면 가게들이 싫어하긴 하겠다. 희영은 왠지 모르게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이미 마음에 들어버린 꽃들을 생각하며 잊어버리기로 했다.

"같이 와 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 덕분에 좋은 구경 했죠, 뭐."

유현에게 받은 10만원을 거의 다 꽃 값으로 지출해버린 희영이었다.

"저 오늘 회사 반차라서, 이거는 집에다 놓고 2시까지 출근해야 돼요."

"네. 아줌마 집으로 가요."

그러고 보니 점심 먹어야 하는데. 집에 도착하면 10시 반, 출근까지 약 3시간 정도 비는데 그동안 뭐하지? 집에 남은 걸로 그냥 떼울까.

"선생님은 오늘 일 안 하시나봐요? 일하는 날이 그때 그때 다른가?"

"아."

"가는 길이면 태워다 드릴게요. 일정 없어요?"

"저는 오늘 쉬어서. 괜찮아요."

"그럼 선생님 집에다 데려다 드릴까요?"

유현이 아차 싶었다. 유현의 동네는 꽃 시장에서 희영의 집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다른 약속이 있다고 할걸. 희영과 더 있고 싶었지만 마땅한 핑곗거리가 없었다.

"저 이제 15만원 남은거죠?"

"음, 네. 근데 병원비가 30만원 딱 떨어지게 안 나왔을 텐데."

"딱 30이었어요."

그랬나? 졸려서 대충 수납한 탓에 정확히 얼마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희영이었다. 할 말이 없어진 희영이 입을 닫았다.

"나중에... 15만원은 한 번에 갚을게요."

"그러세요, 그럼."

"선생님 주소로 찍을게요."

희영이 유현의 동네를 네비게이션에 입력하고 운전을 시작했다.

"엄마."

"응?"

퇴근하고 꽃을 정리한 희영에게 큰 딸인 예원이 물었다.

"엄마 남자 생겼지?"

"뭐?"

예원은 올해 스물 두 살로 대학교 3학년이었다. 어려서부터 희영과 혼자 자라온 예원은 대견스럽게도 엄마의 일을 많이 나눠가져갔다. 예를 들면 죽은 남편과 가졌던 작은 아이들의 등하교 문제라던가, 집안일은 물론이고 잊고 살아갈 법한 소소한 기념일 같은 것도 그것들을 챙기는 건 예원의 몫이었다. 사랑만 받고 크기에도 바빴을 텐데 자란 환경 탓인지 눈치도 빠르고 뭐든 빠릿빠릿한 예원이 고마우면서도 안쓰러운 희영이었다.

"아니야~."

그런데 그런 예원이 희영의 변화를 눈치챈 것이다. 

'남자? 남자라곤 주변에 있지도 않은데 무슨 소리지?'

"엄마 남자 생긴 것 같애?"

의아한 표정으로 희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꽃 같은 거. 아무나 주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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