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은 잊히지 않는다.

단편 연성소재_73

단편 by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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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요?"

연인이 있는지 묻는 말에 아니라고 하면 곧잘 따라오는 질문이다. 남자는 미지근해진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시고는 도로 종이컵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반쯤 남겨진 커피에 파장이 일며 남자를 비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요. 일언반구 하며 대화의 맥을 자르는 것이 영 껄끄러운지 상대도 더 이상의 물음을 물어오진 않는다. 상대가 자리에서 일어난 후에도 말쑥한 남자는 한참 동안 커피잔 속을 들여다보았다. 싸구려 커피의 쓴맛이 입안을 텁텁하게 했다.

 그대로 의자에서 고꾸라져 커피에 잠길 듯한 남자는 창문 밖 풍경이 어둑해져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밖으로 향했다. 시멘트 길을 걸으며 버스 정류장 표지판을 지나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을 밟는다. 집으로 가는 길이 멀건만 무식한 방식이었다. 하물며 겉보기에 말끔한 양복은 오래 걷기에 좋은 선택은 아님이 분명했다. 다만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 그의 행보를 바꾸는 계기가 되지는 않았다. 남자는 걸었다. 자신도 왜 미련한 걸음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채. 남자의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정수리에 닿는 한 감각이었다.

"아 이런.." 가방에서 있을 리도 없는 물건을 찾는다. 일기 예보를 보지 않은 것이 문제였는지, 그날엔 장대비가 내렸다. 정수리뿐만 아니라 잔뜩 깊어진 미간의 골까지 흠뻑 적신 빗줄기에 남자는 자포자기한 듯 웅덩이조차 움푹 밟고 간다. 발목을 잠그는 불쾌한 냉기를 느끼며 발을 빼낼 때 불쑥 여느 기억이 섞여 들어간다. 햇빛이 뜨거운 날, 어느 계절. 더운 얼굴을 하고는 수돗가에 발을 적셨다. 옆으로는 구릿빛 색에 못생긴 발.

웅덩이를 벗어난 구두 깔개가 흙탕물을 머금고 거친 숨을 쉬어댔다. 질퍽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길이 멀다. 빗물이 가죽 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며 얼마 남지 않은 구두의 수명을 떠올리다 결국 멀리 보이는 신발점에 들러 싸구려 슬리퍼를 사고 나온다. 양말까지 벗어 빳빳한 검은 삼선 슬리퍼에 하얀 맨발을 끼워 넣는다. 신호등에 멈춰 서 기다리는 동안 슬리퍼의 흰 줄 모양에 시선이 닿았다.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공란에 어떤 것을 덧씌워본다. 앞창이 다 닳은 슬리퍼 흰 줄 위에 쓰인 번진 네임펜.

좀 전의 찝찝한 기분은 이것 때문이었을까. 생각에 잠긴다. 신호등이 초록 불로 바뀌면 멍하니 걷다가 구정물에 비친 자신이 스쳐 지나간다. 입이 바싹 마른다. 입맛을 다시면 다시 싸구려 커피 맛이 났다. 혀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이 불쑥 떠오르는 것이다. 100원짜리 커피 자판기에 종이컵 가득 채워주던 그 손. 한창 쥐고 있다가 다 식어버린 커피. 웃는 네 표정. 꿈처럼 한없이 추상적이기만 하던 그날의 분위기. 흐리멍텅하기만 한 너의 얼굴...

네 이름 석 자 하나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없건만. 

나는 너를 떠올린다.

그랬구나.

첫사랑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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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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