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열

미열 #1.

루른 동양물 3부작

달콤한 숨결 by 유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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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우거라, 카에데. 이 나라는 너의 것이다. 절대 센도 가에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싸우거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라.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네가 상처 입어 만신창이가 되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황제란 본래 가장 깨끗하면서도 가장 더러운 자라이니라.

#1.

“…재미있군.”

센도 아키라는 황제의 명을 전한 미야기 료타가 떠난 뒤 몸을 일으켰다. 두 손으로 받아든 황금색 비단을 둘둘 말아 꽉 쥐었다. 퍽 성의 없는 태도였다.

황제의 명이라면 그보다 더 정중하게 다루어야 하건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누구도 그런 아키라를 불경스럽다며 탓하지 않았다. 센도 가에서 황제가 지닌 권위란 그 정도였다.

“걱정하지 마라, 아키라. 이 아비가 오늘 당장 입궁하여 태후 폐하와 방도를 논의하마.”

센도 아키라의 아버지, 센도 준이치로가 주먹을 쥐고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 황제가 감히 너를 후궁으로 삼다니,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 센도 가의 명예를 걸고 네가 비가 되어 입궁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하며 큰소리를 쳐댔다.

아키라는 말만 많을 뿐 무능한 아버지가 멋대로 떠들도록 내버려두었다. 아무리 저택 안이라고 한들 황제와 관련해서는 제발 입조심을 하면 좋으련만, 아비는 그런 소양은 갖추지 못하였다. 생각나는 대로 말을 다 해버려야 조용해질 사람이었다.

그 목소리가 퍽 시끄럽고 듣기 싫었다. 아키라는 화를 내는 일에 열중한 아버지를 피해 슬쩍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쩔 셈이야?”

센도 가의 방계이자 아키라와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사촌 코시노 히로아키가 그 뒤를 따라왔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아키라의 의중을 물었다.

아키라는 힐끗 사촌의 얼굴을 보고는 실없이 웃었다. 히로아키는 오늘 내려온 칙령이 퍽 분하다는 표정이었다. 누가 보면 황제가 자신이 아니라 히로아키를 후궁으로 들였다고 착각할 만한 모양새였다.

“칙령을 어길 수야 있나. 폐하께서 ‘려(麗)’라는 봉호까지 내려주셨는데.”

말투는 평온하였으나 손에 쥔 황금색 비단에 굵은 주름이 졌다. 얇은 천을 힘주어 움켜잡으니 형편없이 구겨졌다. 이번 일로 인해 센도 아키라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온통 그곳에 쏠려 있었다.

“아직 입궁도 하지 않았는데 봉호가 ‘려’라니.”

폐하께서도 참 짓궂으신 분이야. 그리 중얼거리는 입매가 사납게 비틀렸다. 한껏 끌어올린 입꼬리를 타고 차마 감추지 못한 분노가 뚝뚝 떨어졌다.

‘려’라는 글자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 오히려 좋은 뜻으로 쓰이는 단어다. 본래 아름답다, 어여쁘다는 뜻을 가졌다. 그렇지만 사실 그보다는 보통 짝을 짓다, 부부라는 뜻으로 더 널리 쓰였다.

황실에서는 민간에서보다 더 깊고 내밀한 뜻으로 이용되었는데, 황제가 후궁에서 ‘려’라는 봉호를 내린다는 것은 그를 내명부에서 가장 총애한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보통은 입궁한 뒤 받는 글자였으니 아직 입궁도 하지 않은 센도 아키라가 받을 만한 봉호가 아니다. 황제와 센도 아키라는 서로 존재는 알고 있을 뿐, 아직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만난 적이 전혀 없었다.

황제는 아직 어리지만, 그래도 황궁 안에서 나고 자랐으니 그 문화에 익숙하고 단어 하나 하나에 어떤 뜻을 담아 사용하는지에 능통한 사람이다. 그러니 봉호가 가진 의미를 절대 모를 수가 없다.

그런데도 굳이 ‘려’라는 글자를 아키라에게 준 이유는 투명했다.

여기서 ‘려’는 부부라는 뜻이 아니다. 아름답다, 어여쁘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센도 아키라를 진정한 반려가 아니라, 센도 가에서 그렇듯이 ‘종마’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황제가 짊어진 많은 의무 중에서 훌륭한 후계자를 낳아 승계를 튼튼히 해야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온 제국에는 우수한 인재로서 그 명성을 떨쳤으나 사실 센도 가에서는 아키라를 종마로 여겼다. 아버지는 아들이 우성 양인이라는 사실을 이용해서 몸값을 흥정하고 있었다. 아키라는 센도 가에 도착하는 혼인 단자를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금품이 오간다는 사실을 애써 모른 척했다. 

부모라서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을 뿐, 속에서는 불만이 드글거렸다. 그런 와중에 황제가 이런 식으로 도발하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촌이 단단히 부아가 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히로아키는 입을 꾹 다물었다. 태어날 때부터 사촌과 함께 자란 그는 이런 상태의 아키라는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괜히 위로한답시고 어설프게 말을 붙였다가는, 저 시원스러운 입매 사이에서 쏟아지는 비웃음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고 말 것이었다.

“걱정하지 말래도. 아키라, 네가 입궁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이 아비를 믿거라. 내 지금 당장 황궁에 다녀오마.”

주변 사람들을 상대로 한참 분풀이를 해댄 아버지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얼굴로 걸음을 서둘렀다. 황궁에 있는 태후를 만나겠다며 저택을 나서는 뒷모습은 퍽 믿음직스러워 보였지만, 그를 내려다보는 아키라의 시선은 북풍처럼 싸늘했다.

“고모님을 만난다고 해서 무슨 수가 있으려고.”

어리석인 아버지를 두었기에 평소에도 고생이 많은 아키라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푹신한 의자에 몸을 내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왜 그렇게 생각해? 태후께서 칙령을 철회하라고 하실 수도 있는 거잖아.”

히로아키는 조용히 손짓하여 시종을 불렀다. 소리내지 않고 입모양만으로 국화차, 하고 말하자 가져오라는 뜻임을 알아듣고 소년은 재빠르게 방을 나섰다. 사촌 옆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자, 아키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히로아키.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지 마.”

“내가 뭘….”

“꼭 내 입으로 말해야겠어? 입만 아프지.”

핀잔을 주는 목소리가 퉁명스럽다. 아키라가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고 하는 말은 사실이기도 해서 히로아키는 멋쩍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선황이 조강지처인 태후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 아니다. 그와 같은 사내이자 음인으로서 입궁한 후궁이 낳았다. 선황에게는 앞서 두 황자가 있기는 하였으나 모두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남은 아들이라고는 황제뿐이었다.

양인과 음인이라는 존재가 출연한 후 민간에서는 남녀라는 성별이 갖는 의미가 많이 희석되어, 가문을 물려받는 이가 굳이 남성이 아니어도 되었다. 그런데 황실만큼은 유독 장자계승을 고집하였기에 현 황제는 음인이면서도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 다만 태후가 양자로 삼아야 한다는 조건이 뒤따랐다.

그렇게 선황이 남긴 유일한 아들이 8살의 어린 나이로 황위에 올랐을 때, 태후는 나이를 핑계 삼아 수렴청정을 행하였다. 어린 황제를 손아귀에 넣고 황궁을 장악한 이래 태후는 황제 주변에 거미줄처럼 촘촘한 감시망을 쳐두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양자의 일거수 일투족은 모조리 태후의 귀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 일을, 아버지보다 훨씬 더 영악하고 눈치빠른 고모조차도 몰랐다. 황제가 은밀히 움직이는 동안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지난 시간 동안 그랬듯이 매일 아침마다 조정에 나가 양자 뒤에서 나랏일을 참견했지만, 정작 제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였다.

사실 황제가 내리는 칙령을 작성하는 일은 단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쓰는 시간도 오래 걸렸고 과정도 복잡했다. 그러니 어느 순간에는 그 사실이 흘러가는 게 맞다. 그런데도 미야기 료타는 기습적으로 센도 가에 들이닥쳤다.

이는 곧 황제가 태후의 통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였다. 더는 양모의 뜻에 따라 순순히 움직이는 효자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역시 후카츠 카즈나리 짓이겠지.”

무심결에 속마음을 중얼거린 히로아키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청년을 떠올리고 미간을 좁혔다.

작년부터 후카츠 가의 장남 카즈나리가 병환을 핑계삼아 고향으로 돌아간 아버지를 대신하여 삼공* 지위를 맡은 이후로, 황궁의 분위기가 예전같지 않았다. 본래도 삼대에 걸쳐 권력을 장악한 센도 가를 경계하는 무리가 항상 있기 마련이었으나, 이제는 대놓고 배척하는 분위기가 스물스물 피어오르고 있었다.

센도 가를 반대하는 세력의 대표자는 단연 후카츠 가였다. 센도 아키라에게 혼인을 청하는 무수한 귀족 가문 중에서도 유일하게 혼인단자를 보내지 않은 가문이기도 했다. 센도 가처럼 개국공신을 시조로 삼은 후카츠 가는 청렴결백함과 황제에 대한 변치 않은 충성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러니 황제가 곧 성인이 될 나이임에도 수렴청정을 거두지 않고 도리어 그를 허수아비처럼 부려먹는 태후에 맞서 홀연히 일어선 것이다.

이번 후궁 책봉은 후카츠 가가 센도 가에 던지는 도전장이나 다름 없었다. 후카츠 가를 이끄는 선봉장이 후카츠 카즈나리였고, 센도 아키라는 그런 후카츠 가에 맞서 센도 가의 부귀영화를 지켜야 했다.

“…골치아픈 상대야.”

저보다 한 살 연상인 청년은, 자신과는 다르게 수시로 판도가 바뀌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는 정치판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노회한 정치인인 아버지를 두고 있었다.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배울 점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러니 대담하게 이런 일을 벌였겠지. 센도 아키라는 눈을 뜨고 손을 내밀었다. 시종이 가져온 국화차를 얼른 내주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게 나을지도.”

적당히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센도 아키라는 불쾌한 기분을 애써 긍정적으로 돌이켰다.

태후는 황제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후카츠 가가 본격적으로 나선 이상 예전으로 돌아가기란 어려울 터다. 아니, 불가능했다. 한 번 새장을 벗어난 새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황제는 태후의 손에서 벗어나 훨훨 날아오를 것이다.

어차피 맞붙을 것이라면, 하고 센도 아키라는 중얼거렸다. 황궁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으니, 후궁이라도 차라리 안으로 들어가 황제를 다시 사로잡는 게 낫지 않겠나.

“만약 실패한다면….”

히로아키가 우물쭈물거리며 아키라의 눈치를 살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차마 입밖으로 내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센도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잔잔한 찻물의 표면에 제 얼굴이 떠올랐다. 얼음처럼 차갑고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럼 우리 가문이 가장 잘 하는 짓을 하면 돼.”

현 황제가 감히 고마움도 모르고 센도 가를 거부한다면 그를 끌어내리면 된다. 선대께서 그러하셨듯이, 센도 가의 입맛에 맞는 황자를 찾아 새로이 황제를 옹립하면 되는 일이다. 태후는 만약을 대비하여 황제가 특정한 양인을 곁에 두지 않도록 철저히 정리해두었다. 아직 황후는커녕, 후궁도 없는 황제는 자손이 없었다. 센도 가에 방해된다면 그 뱃속에 아이가 생기기 전에 헤치우면 되는 일이다.

불충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태연하게 내뱉으면서 아키라는 찻물이 반쯤 남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시종은 무표정한 얼굴로 찻잔을 치웠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둥근 창을 통해 새빨간 노을이 선명한 이목구비로 길게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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