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ALLEL WORLD

[D-7]

PARALLEL WORLD by Iy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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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택시 탈까.”

지금부터 100까지 세서 그 안에 택시가 오면 택시 타고 가야지. 극도로 피곤한 상황에서 사람은 편리함을 찾는다. 자기 자신과 타협점을 찾은 시현은 1부터 천천히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1, 2, 3, … 52, 53, 54, ….

고개를 들 힘조차 없는 시현이 속으로 센 숫자가 50이 넘어갈 때 쯤 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시간이 꽤 많이 흘렀다. 그래도 이쯤되면 택시가 올 법도 하건만 택시의 ‘ㅌ’자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버스 타고 가…?”

울상을 지어 보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시현의 귓가에 차 소리가 들렸다. 차 소리에 고개를 들자 호텔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는 고급 외제차 한 대가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뭐야, 택신 줄 알았네. 부럽다. 차도 있고.

호텔 로비에 들어가서도 현타가 이렇게까지 오지도 않았는데 버스 정류장에 이렇게 현타를 맞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류장에 이렇게 앉아있는 자신의 처지가 왠지 모르게 처량해지는 것 같아 시현은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콜택시라도 부를가 싶어 핸드폰을 들었다.

연락이라곤 단 한 곳에서도 온 흔적이 없다. 심지어 기우에게 조차 말이다.

“이 형은 분명 술먹고 뻗었겠지.”

차 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오기 시작해 다시 한 번 희망을 가지고서 고개를 빼고 들어 택시를 찾아 헤맸지만 이 역시 택시는 아니었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며 다시 정류장 의자와 하나가 된 시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현의 집에서 근처 정류장까지 걸어서 10분이다. 가까우면 아주 가까운 거리지만 현재 시현의 몸상태는 그 10분이 100분과도 같이 느꼈다. 더이상 걸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시현은 절망감을 느끼고 있을 때 쯤 시현이 앉아있는 버스 정류장 앞에 차 한대가 정차했다.

“?”

“베타 웨이터님.”

뭐지? 하고 정차된 차를 쳐다보자 조수석 창문이 스르륵 하고 내려갔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살피니 아까 박강우 회장의 아들인 그 남자의 모습이 천천히 슬로우 모션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시현은 놀라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것을 차마 막지 못했다.

“아, 아니…. 어떻게.”

“잠시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할… 말이 있으시구나….”

미친. 드디어 올 게 왔구나. 그럼 그렇지. 자신의 가장 수치스럽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였는데 괜찮을리가 없잖아. 나는 바보 멍청아.

속으로 자신에게 욕을 잔뜩 퍼부으며 시현은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어설프게 아는 척 인사를 했다. 남자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차 안으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내보였다. 좆됐다. 진짜…. 시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남자의 차에 탔고, 시현이 안전벨트를 매기도 전에 남자는 차를 곧장 출발시켰다.

진짜 좆된 거구나. 나…. 아까 괜찮다고 한 건 다 거짓말이었어….

“혹시 태시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기다리지 않는게 좋아요.”

“네?”

“여기 택시 잘 안 다니거든요. 프론트에서 직접 불러야만 옵니다.”

“아….”

어쩐지. 아까부터 택시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아서 의아했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시현은 한성연이 왜 자신에게 택시를 불러주느냐고 권유했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대박. 그럼 난 100넘어서까지 미련하게 택시 기다리고 있던 사람 될 뻔 했잖아. 왜 기다렸지.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까지 택시 하나만 기다렸던 시현이 허탈감에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남자는 흘깃 시현의 머리꼭지를 바라보며 운전을 계속해나갔다. 손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시현의 얼굴 표정은 보지 못했지만 울상을 짓고 있을 것 같은 이 시현의 모습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빤히 바라보았다. 때마침 걸린 신호에 차를 멈춰 세운 남자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시현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아깐 감사했습니다. 돌려드리죠.”

“그냥 가지셔도 됐는데…. 감사합니다.”

남자가 시현에게 준 것은 시현의 손수건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물건의 등장에 시현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시현이 손수건을 건네받자마자 신호가 바뀌어 남자는 다시 앞을 보며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참, 제 소개를 안 했군요. 박도영이라고 합니다. 아까 보셔서 아시겠지만 박강우 회장님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박도영씨….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뒤에 하시네…. 시현은 손수건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쥐며 웃음을 지었다. 등에는 식은 땀이 줄줄 나고 있어 지금 당장이라도 이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현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이 예의라는 것이 있기에 시현도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저는 현시현이라고 합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본인을 소개한 시현이 괜히 도영의 눈치를 보았다.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 지금부터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잠은 다 달아난 상황이다.

“이야기가 꽤 길어질 것 같으니 집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니, 저 괜찮은데…. 얘기가 많이 길어질까요…?”

시현은 굴러들어온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 택시가 안 오니 버스라는 선택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따뜻한 도영의 차 안에 있다. 그러니 이 차를 타고 따뜻하게 바로 집까지 가는 선택지가 새롭게 생겼다. 하지만. 이 선택지를 택하면 시현은 그 뒤에 벌어질 일을 감당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지지만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선택지는 이미 하나로 좁혀진 듯 했다.

“그럼….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잘나신 알파. 그것도 KW그룹 박강우 회장의 아들의 말을 거역할 수가 있겠는가. 이름까지 알았겠다, 집주소도 뚝딱하면 알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자다. 일단 굽혀 들어가기로 마음 먹은 시현이 단단히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도영에게 부탁하며 자신의 집 주소를 울며 겨자먹기로 공개했다. 도영은 시현이 불러주는 대로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찍고 차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데, 무슨 이야기일까요…?”

“아까 본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역시. 그냥 넘어갈 알파가 아니지. 그것도 어떤 그룹인데.

“네…. 그건 제가 절대 못 본 걸로,”

“소문을 내주시죠.”

“네?”

무슨 소리세요? 얼굴 표정으로 말을 하는 시현을 힐긋 바라보던 도영이 이어서 말을 해나갔다.

“호텔 지배인께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그 파티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은 함구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제 소문은 퍼트려 주십쇼.”

“싫어요. 제가 왜 그래야 되는데요? 이해가 잘 안 돼요.”

시현이 하기 싫다는 얼굴로 도영에게 조근조근 따져 물었다. 소문냈다가, 그 소문 찾는다고 박강우 회장이 난리난리 쳐서 그 출처가 저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날에는 고소엔딩으로 끝나는 자신의 모습까지 상상한 시현이 단박에 거절하니 도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분간은 저와 함께 다니시지 않겠습니까?”

“그건 왜요…?”

이젠 어떤 말이 나올까 두려워 경계심을 잔뜩 가지고 묻자, 도영이 그런 시현을 보고 살풋이 웃었다.

“당분간 제 애인 대행을 요청합니다. 현시현씨.”

이건 또 뭔 소리? 시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영을 바라보자 도영이 이어서 말을 해나갔다.

“저는 아버지의 유일한 단점이자 오점이거든요. 고장난 알파라니 박강우 회장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시현은 잠시 아까 들었던 박 회장에 대한 찌라시 내용과 박강우 회장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생각해내었다.

“분명 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박강우 회장과 저에 대한 이야기들을요.”

차마 부정은 하지 못 하겠다. 안 들었다기엔 너무나도 생생하게 들었고, 생생하게 보았기 때문에.

“네…. 들었어요.”

“그 소문 또한 제가 낸 소문입니다.”

“네??? 아니, 왜요?”

진심으로 궁금해진 시현이 상대가 누구인지도 순간 잊어버릴 만큼 큰소리로 도영에게 물었다. 아아아아니, 이해가 안 돼네. 도대체 왜?

“잘나디 잘난 저희 아버지의 유일한 오점이 되고 싶거든요. 아까 보셨듯이 제가 아버지한테 좀 많이 맞고 다녀서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도영이 말하자 시현은 더 이상 엮여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도영과 엮였다간 더 큰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불안감이 시현을 엄습했기 때문이다.

“사례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아니요. 그 제안 거절해도 될까요?”

“죄송하지만, 시현씨. 시현씨에게는 선택지는 없습니다.”

도영이 정중하고도 또 단호하게 시현에게 말했다.

“왜요?”

“시현씨가 베타이기 때문이죠.”

“아….”

시현의 얼굴이 단박에 굳어져갔다.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존재인 베타다. 그런 베타와 잘나신 알파, 오메가가 사귄다고 소문이나면 그들과 사귀는 베타는 물론 알파와 오메가들에게 좋지 못한 소문이 따라다닌다. 그리고 그 알파, 오메가의 위상 또한 나빠지게 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런 이유라면 더더욱 안 돼요. 박도영씨가,”

“전 꼭 시현씨여야만 합니다.”

이미 본 것도 있기도 하니까요. 덧붙여서 말하는 도영의 말에 시현은 그를 작게 노려보았다. 결국에 협박이나 다름없는 소리다.

“애인 대행을 하면 저한테 오는 이득은 뭔데요?”

“시현씨에게 일정량의 금액을 드리겠습니다. 또한 박강우 회장에게서 오는 위협이 있을시 제가 다 막아드릴 거고요.”

아이씨…. 어떡하지.

시현은 머릿속에서 생활비와 월세, 휴대폰 요금과 보험료 등 빠져나갈 금액들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이 드는 시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만요. 여기서 바로 정하는 건 아니죠? 시간이 필요해요.”

“시간 드리죠. 하지만 많이는 못드립니다. 이번주까지 시간을 드릴게요.”

이번주라고 해봤자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그 이틀내로 시현은 이 중대한 상황을 그 누구와 상의도 하지도 못하고 오롯이 혼자 이 결정을 지어야 한다. 시현은 입술을 작게 깨문뒤 굳은 결심을 한 표정으로 도영의 새까만 눈을 바라보았다.

“네. 그럼 이번주에 말씀 드릴게요.”

“그럼 여기에 번호 좀 찍어주시겠습니까?”

“아, 네.”

도영은 자연스럽게 시현의 전화번호를 손쉽게 얻었고, 시현은 ‘당했다….’ 생각하며 바보같이 순순히 번호를 찍어준 자신에게 속으로 다시 한 번 욕짓거리를 내뱉었다. 그 사이 시현의 집에 도착한 도영의 차가 부드럽게 동네 안으로 들어갔고, 시현은 힘없는 몸짓으로 도영에게 인사하고 그의 차에서 내려 집 앞으로 걸어나갔다.

“좋은 결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싱긋 웃으며 동네를 빠져나가 멀어지는 도영의 차를 바라보던 시현이 그대로 머리를 감싼 채 주저 앉았다.

“무슨 협박을 저렇게 정중하게 하냐, 저 인간은….”

진짜 좆됐다. 싶은 시현은 한강물 온도를 체크할까 진지하게 고민을 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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