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느낌의청연서진을보고싶었어

유청연 X 천서진 동갑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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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은 그렇게 쉽고 만만한 곳이 아니다. 마주치는 어른들께 인사 잘 하고, 쓸데없는 짓 하면서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아버지가 하진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서진이 너도 알지? 이화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아버지는 거듭 그 말만을 반복했다. 일곱 살 난 서진은 아버지의 말을 전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할 수 있어요, 하는 말에는 이미 인이 박혔다.

아버지로부터 이화원에 대해 들은 적은 많았으나 직접 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넓은 대지 위로 건물 몇 개가 여유를 두고 들어 서 있었다. 서진은 차창에 양 손을 대고 바깥을 내다 보았다. 정문 초소를 넘어선 뒤에도 한참을 달리던 차가 끝내는 어느 한옥 앞에 멈춰 섰다. 비서쯤 될 듯한 젊은 남자가 문을 열고 서진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 주었다.

“아가씨는 처음 오시죠. 여기가 월백재입니다.”

남자는 서진과 명수를 중앙의 석조 계단으로 안내했다. 서진은 계단을 오르면서도 연신 주변을 둘러 보았다. 처음 신은 에나멜 구두는 뒤축이 뻣뻣해 자꾸 발목이 긁혔다. 서진은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아픈 것보다도 아버지가 무서웠다.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내실 앞에 선 남자가 커다란 미닫이문 너머에 대고 말했다.

“회장님. 천명수 이사장님 오셨습니다.”

잠깐의 침묵 끝에 건너편으로부터 으음, 하는 소리가 돌아왔다. 그것이 일종의 신호인지 남자는 미닫이문을 양 손으로 밀어 열었다. 서진은 땀이 베어난 손바닥을 치맛자락에 대고 조심히 문질렀다. 긴 테이블 너머에 한 노인이 장기판을 앞두고 앉아 있었다. 짙은 눈썹 아래 이 편을 건너 보는 검은 눈동자가 맹수의 것 같았다. 그 노인이 바로 하진의 유택현이었다.

“그간 별 일 없으셨지요. 이 쪽은 저희 큰 앱니다. 서진이, 인사해야지. 뭐 하고 섰어.”

“아, 안녕하세요….”

“아이고. 천 이사장 딸내미가 이래 컸나. 니가 나가 우예 된다 캤지. 딸래미야. 일루 와 봐라.”

“이 애랑 청연이랑 동갑입니다.”

유택현 회장은 경상도 태생이었고, 여전히 말씨에 사투리가 강하게 남아 있었다. 서진은 유 회장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 천명수가 서진의 등을 살짝 떠밀며 가 봐라, 재촉한 뒤에야 걸음을 뗐다. 유택현은 서랍 안을 뒤적여 커다란 알사탕 하나를 서진의 손에 쥐여 주었다. 서진은 얼결에 감사합니다, 고개 숙이며 사탕을 받아 들고도 아버지 눈치를 살폈다. 단 것은 목에 좋지 않았다.

“먹어도 된다. 회장님이 주신 건데.”

“아…. 감사합니다.”

“오야. 무라. 우리 청연이는 이거를 참말로 좋아한대이. 오 실장아. 청연이 어디 갔노. 공놀이 하러 나갔나?”

“아마 수영장에 있을 겁니다. 데려올까요?”

“가가 오라 카면 오겠나. 가는 내가 오라캐도 안 온다.”

“청연이는 그렇죠.”

“가는, 오라가라 할 수 있는 아가 아이다.”

유택현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서진은 그 웃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손주가 도통 말을 듣지 않는다는 말을 하며 무엇이 그렇게 즐거울까. 아버지라면 크게 화를 내고 매를 들 일이었다. 그러나 유택현은 외려 제 손주의 반골 기질을 자랑스러이 여기는 것 같았다. 유택현의 웃음이 천천히 잦아들다 멎자 천명수가 말했다.

“어차피 사업 상 이야기도 해야 하고 하니, 서진이를 그 쪽으로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라믄 그라지, 뭐. 오 실장아. 아 좀 수영장까지 델따 주고 온나. 둘이 인사도 하라 카고.”

“서진이. 인사 하고 가야지.”

“안녕히 계세요….”

서진은 유택현을 향해 허리를 푹 숙였다 몸을 세웠다. 오 실장을 따라 월백재를 나서며 행여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주머니 속의 알사탕을 꼭 쥐었다. 집에서는 함부로 먹지 못하는 것이었다. 사탕 생각을 하면 무섭고 어렵던 유 회장도 조금쯤 다정하게 느껴졌다. 오 실장은 수영장까진 거리가 제법 멀다며 골프 카트를 끌고 왔다. 서진은 조수석에 올라탄 뒤에도 내내 사탕 생각만 했다. 오 실장이 문득 물었다.

“청연이는 만난 적 없으시죠. 하긴. 유치원도 다르고…. 청연이가 바깥 행사에 적극적인 편도 아니고…. 친구를 잘 사귀는 편도 아니고 하니까.”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청연이라는 애에 대해 아는 것은 그 애가 서진과 동갑이라는 것과, 하진 가의 늦둥이 둘째딸이라는 것 뿐이었다. 아버지는 그 애를 하진을 뒤이을 어린 범이라고 생각하며 유별나게 신경을 쓴다는 것, 그러니 서진은 그 애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것까지도. 서진은 금세 마음이 불편해졌다. 친구를 사귀는 데에는 서진 또한 크게 재능이 있진 않았다. 더군다나, 할아버지 말도 안 듣는 애라는데.

수영장은 야외에 있었다. 근래에 날이 풀리자 청연이 수영장을 열어 달라고 요구해 겨우내 덮어 두었던 비닐막을 치우기는 했는데, 아직 물은 채우지 않았다고 했다. 유청연은 그 수영장 타일 바닥에 서 있었다. 오른손에는 제 키보다도 긴 솔대를, 왼손에는 물이 나오는 호스를 든 채였다. 젖은 면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반팔티의 소매를 어깨 위로 걷어붙인 차림새가 제법 그럴싸했다.

“어이. 꼬마 청소부. 청소는 좀 잘 돼 가나?”

오 실장은 청연을 향해 외쳤다. 솔대로 바닥을 문지르던 청연이 고개를 들었다. 서진은 일순 유청연이라는 애는 남자애였던가, 생각했다. 목덜미를 겨우 덮는 기장의 곱슬머리에 까만 눈동자와 곧은 콧날이며 단호하게 다물린 입술 따위가 소년의 것 같았다. 청연은 오 실장과 서진을 번갈아 보다 호스와 솔을 바닥에 던져 두고는 수영장 벽면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가까이서 마주한 낯은 무심히 아름다웠다.

“인사해. 여기는 서진이. 천명수 이사장님 큰 딸.”

“청아?”

“그래. 청아재단. 너랑 동갑이란다.”

청연은 서진을 위아래로 훑어 보았다. 공주님 같은 애가 와 있네. 청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까맣고 긴 머리카락부터 예쁜 원피스까지 무엇 하나 공주님 같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얼굴도 하얗고. 눈도 크고. 인형 같이 예쁘다. 청연은 서진이 마음에 들었다. 연극 배우인 어머니 성희는 미적인 것에 까다로웠고 어린 청연 또한 어머니의 그런 면을 꼭 닮아 아름다운 것을 유난히 애호했다. 그 속을 모르는 서진은 청연의 눈길이 불편해 시선을 굴렸다.

그것이 서로의 첫 인상이었다. 청연은 서진이 미학적으로 마음에 들었고, 서진은 청연이 어쩐지 불편했다. 천명수 이사장은 내심 서진과 청연이 가까운 사이가 되기를 바라는 듯 그 후로도 종종 서진을 대동했고 그럴 적마다 일 이야기를 핑계로 서진과 청연을 붙여 두었다. 유청연은 유독 말수가 적고 차분했다. 자기만의 세상이 확고한 애였다. 처음에는 그 침묵이 어색했으나 시간이 흐른 뒤에는 외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둘은 중정에 매트리스를 깔고 누워 함께 서로가 골라 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 잠이 들었다. 여름이면 풀장에 물을 받아 놓고 물장구를 쳤다. 이따금은 풀장 가에 걸터앉아 발목만을 물에 담가 둔 채 칼라스며 네트렙코의 음반을 듣기도 했다. 둘은 그렇게 자라 중학교에 들어갔다. 서진은 청아예술중학교 음악과에 수석 입학했고, 청연은 하진중학교에 입학했다. 유독 서진을 아끼는 유택현은 서진과 청연이 중학교 입학 후에도 주말이면 함께 과외를 받을 수 있도록 해 두었다.

청연이 피아노에 관심을 보인 것은 그 때부터였다. 이따금 월백재에 놓인 제 할머니의 피아노 건반을 몇 번인가 눌러 보더니 이내 음대 교수로부터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조모가 한 때 동경대 음대에 유학을 다녀왔다더니. 그 핏줄이 어디 가지는 않는 듯 유청연의 실력은 금세 늘었고 끝내는 서진과 함께 청아예술고등학교에 원서를 썼다. 합격 발표가 나던 날도 서진은 청연의 서재에 있었다. 아버지는 아랫층 유 회장의 내실에서 합격 발표만을 기다리고 계실 터였다.

서진은 초조함에 흘러내리지도 않은 옆머리를 연신 쓸어 넘겼다. 반면 유청연은 고등학교 합격 발표 따위는 관심사가 아니라는 듯 장기 기보만을 읽고 있었다. 장기말을 여기 두었다 저기 두었다 옮기는 손짓이 한껏 여유로웠다. 하기야 실력으로나 집안으로나 떨어질 리가 없으니 걱정할 까닭도 없기는 했다. 그렇단들 지나치게 태연한 태도였다. 서진은 청연의 손과 장기판을 번갈아 보다 물었다.

“넌 신경도 안 쓰여?”

“뭐가.”

“합격 발표. 오늘이잖아.”

“아. 그거 뭐. 붙었겠지. 너네 아버지가 날 떨어트렸을 리도 없고. 너도 그건 마찬가지 아닌가.”

청연은 들고 있던 장기말을 판 위에 내려 두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제 침대에 앉은 서진을 건너 보는 눈길이 여상스러웠다. 유청연은 좀처럼 긴장하는 법이 없었다. 실기 시험 당일까지도 복도에 앉아 상법전을 읽던 애가 아니었던가. 주변의 아이들이 쟤가 유청연이지, 같은 말들을 주고받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알은 체 한 번 하지 않았다. 이내 유청연의 방에 설치된 내선 전화가 울렸다. 서진은 바짝 긴장했다. 청연이 전화를 받고는 내려갈게요, 대꾸하곤 끊었다.

“내려오래.”

서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청연은 앞장 서 계단을 내려갔다. 서진은 손으로 난간을 짚어 가며 그 뒤를 따랐다. 몸이 떨렸다. 떨어졌을까 겁이 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단지 합격이 아니라 수석이었고 그건 자신이 없었다. 서진은 앞서 가는 청연의 등을 보았다. 하진중학교의 남색 교복에 감싸인 몸은 마르고 단단했다. 태생적인 여유를 휘장처럼 두르고 태어난 애였다. 어쩐지 그것이 조금쯤 얄미웠다. 계단을 중간쯤 내려와 청연이 문득 뒤를 돌았다.

청연은 서진을 물끄러미 살폈다. 서진은 청연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서진이 한 칸 위에 서 있는데도 청연의 눈높이가 더 높았다. 유청연은 늘 또래보다 키가 컸다. 그게 또 어쩐지 얄밉게 느껴졌다. 서진은 괜히 청연에게 투정을 부렸다. 뭐, 하고 불퉁한 목소리로 내어 뱉어도 유청연은 아무런 답을 않았다. 다만 난간을 붙든 서진의 손을, 그 손 위로 이는 잔떨림만을 물끄러미 보다 돌아섰다. 뭐 하자는 거야, 진짜. 서진은 유청연의 뒷통수를 노려보며 계단을 마저 내려왔다. 미닫이문 앞에 서 둘을 기다리던 오 실장이 청연의 눈짓을 받곤 문을 젖혀 열었다.

내실에는 유 회장과 천명수 두 사람뿐이었다. 서진은 재빨리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버지의 기분을 읽어내려는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유택현 회장은 기분이 좋은 듯 연신 웃는 낯이었으나 그 또한 속내를 감추는 데엔 일가견이 있는 사람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등 뒤로 미닫이문 닫히는 소리가 꼭 지옥 문이 닫히는 소리 같았다. 붙들 것 없는 손이 허공에서 떨렸다. 서진은 또 머리칼을 쓸어 넘기려 했으나 손을 들기도 전에 청연의 손이 서진의 손을 잡아 손마디를 얽어 왔다. 서진은 놀라 청연을 보았다.

청연은 서진을 돌아보지 않았다. 서진은 유청연이 저를 도왔음을 알았다. 아버지는 서진의 멘탈이 약한 것도, 쉽게 긴장하는 것도, 불안해질 때면 머리칼을 만지며 티를 내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유택현이 있으니 이 자리서 싫은 소릴 하진 않을 테지만 집에 가는 차 안에서라면 혼이 날 게 빤했다. 서진을 어릴 적부터 봐 온 유택현도 유청연도 서진의 습관과 그에 대한 천명수의 마뜩찮은 속내를 이미 알았다. 유택현의 시선이 맞잡은 손으로 향했다. 유택현이 그 내막을 모를 리가 없었다. 유택현은 호방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이고. 둘이 손을 다 잡고 다니나.”

“그러게 말입니다. 둘이, 사이가 제법 가까워졌나 보다?”

“원래도 멀진 않았는데요. 결과는요?”

“서진이랑 청연이, 둘 다 수석 입학했다. 축하한다. 성악과 수석, 기악과 수석. 이제 둘 다 입학식 무대 준비하느라 바쁘겠구나.”

“진짜예요, 아버지?”

“그래. 그동안 수고 많았다. 잘 했다. 청연이 너도.”

청연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연습도 안 했는데요, 하는 대꾸는 구태여 하지 않았다. 그런 소릴 했다간 천서진에게 무슨 욕을 얻어먹을지 몰랐다. 별 감흥 없는 청연과 달리 서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여 환히 웃었다. 잘 했다는 아버지의 말이 기뻤다. 청연은 무심코 서진을 돌아 보다 그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는 어쩐지 뒷덜미가 더워져 고개를 돌렸다. 얘는 이게 이렇게 기쁠 일인가. 왜 이렇게 신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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