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산들바람의 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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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문득 눈을 떴다. 서늘한 밤이었다. 그를 깨운 것은 창문 밖에서 몰아치는 빗방울로,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간절기의 시작을 알리는 폭풍우였다. 밤이 긴 때의 서막이 으레 그랬듯 새벽의 기온은 낮았다. 코로 들이마신 냉기 서린 공기에 마른기침을 몇 번 터뜨린 여자가 침대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창문이 매서운 바람과 부대끼며 덜컹거렸다. 마른
나는 사람이 일평생 살아가며 겪을 수 있는 기묘한 이야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제 마법은 언어가 아닌 체계가 되었으며,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고, 장성과 군주가 영토를 다스리는 시대에 미지未知가 어디 있겠는가? 여전히 필부들은 영웅과 서사시에 대해 떠드나 무릇 세계는 정해진 이치로 돌아가는 법이거늘, 그네들이 믿는 전설이란 시대를 거쳐 부풀려
나는 오래도록 헤매고 있었다. 아주 지독하게. 모험에는 목적이 필수불가결하므로, 나의 여행은 예컨대 방랑이었다. 목표 따위 없었으며 이루고 싶은 것을 구태여 꼽자면 도망 뿐. 발 닿는 대로 그저 떠돌고, 내키는 대로 싸웠으며, 이 모든 것은 나의 의무를 위한 일이라며 자위했다. 의무, 그래. 그 빌어먹을 의무! 그것 하나가 나를 살게 했지. 나의 손에
목동은 지친다. 제아무리 하루종일 양을 몰 수 있다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숨바꼭질을 한나절 내내 해대는 일은 그의 체력에도 무리였다. 지팡이를 쿵 소리 내며 짚은 청년이 가쁜 숨을 고른다. 뺨은 이미 딸기주 색으로 물든 지 오래였다. “저, 정말 돌려주실 생각이 없으신가요…?” 이제는 숫제 애원까지 하는군. 기사의 자존심이고, 에버그린의 이름이고,
먼젓번엔 놀라움의 비명이었다면, 이번에는 안타까움의 탄성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청년은 손에 잡은 요정의 분신이 펑 소리를 내며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숨을 찬찬히 골랐다. 자고로 사냥은 장기전이렷다. …라고, 마을의 사냥꾼 블레이크 아주머니가 말씀하셨지. 사냥이라고는 먹고 살기 위해 이 태초의 대지에 들어와 행한 서투른 것밖에 없다
“어디 보자. 피피는 도난이 아니라 가출이구, 여행가방은 잘 있구, 대검도 잘……, 어마나, 창이—!” 어딘가에서 높은 비명 소리가 들린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뒤적이던 목동이 놀람에 펄쩍 뛴 탓이다. 평소와 달리 그 곁을 지키던 것 중 꼭 두 가지가 부재하였는데, 첫째는 서른 하고도 일곱 번째로 집을 나가버린 아기 양 피피요, 둘째는 요정들이 훔쳐간 게
“있지, 반드시 창대하고 숭고한 사상을 가진 자들만이 이 세상을 구하는 건 아냐.” 청년의 눈이 과거를 더듬었다. 그 또한 제가 이런 거창한 말을 쉽게 풀어하는 재주나, 유려한 미사여구를 붙여 비유하는 재주 따위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솔직함의 재주마저 없지 않다는 것은 다행인 일이겠다. 꾸미어 내밀 수 없다면, 있는 그대로 내밀면
알레이는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내려놓았다. 나이 든 집사장이 붉은 머리칼의 용기사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어느덧 성숙한 청년이 된 목동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이미 그 잔인한 손에 희생당한 적발 몇 올이 종이 위로 떨어진다. 보다못한 집사장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머리카락을 험하게 대해시면 안 됩니다, 알레이 님. 부디 진
알을 깨고 나온 아기새는 언젠가 둥지를 떠나고 말듯이, 무릇 세상은 어린 것들이 그저 안주하기만을 바라지 않는다. 어린 것들은 날갯짓해야 할 때를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붉은 머리카락의 어린 용기사도 마찬가지였다. 깨달음은 그저 어느 순간부터 자리했다. 계약이 이루어졌으므로, 머지않아 이곳을 떠나야 할 것이라고. 힘을 받았으니 응당 그에 맞는
돌이켜 보자면 어린 목동은 꾸준한 이였을지언정 빠른 이는 되지 못했다. 처음 무기란 것을 손에 쥐었을 때도 그랬으며 새로운 지식을 익힐 때도 그랬다. 내달리는 것을 즐겼으나 속도는 그의 장기가 아니었고, 내세울 만한 것은 그 끈기였으므로. 그에게 기민함이란 난제였다. 내내 부러움에 좇으면서도 제가 얻을 수 없음을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나 어
“양측, 차렷!” 드넓은 공터에 한줄기 싸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한 용기사와 한 이종족이 각자의 무기를 든 채 서로를 노려보는 모습은 이 사크라 테라에서도 진귀한 광경이 아니었을는지. 그러나 바라보는 모습에 악의는 없었고, 그저 순수한 투지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자, 잘 부탁합니다!” 상호 주고받는 짧은 인사. 준비! 두 투사의 몸에 팽팽히 힘이 들
나는, 그대들을 불멸할 자의 축으로 쓰고자 한다. 명명하노니, 그대들이야말로 수호수의 쐐기다. 고룡은 거대했으며, 그가 몸을 일으킬 적에 부는 바람은 참으로 포근했다. 그것이 십구 년을 살아온 프라툼 아분단티아의 어린 목동, 알레이 에버그린이 고룡을 목도한 뒤 떠올린 첫 감상이었다. 그 뒤에야 푸른 마력을 발견했고, 그 뒤에야 거대한 뿌리와 늙
목동이 즐기는 것은 춤과 노래, 그리고 단련이 전부는 아니었다. 기실 상록의 초지가 된 것은 몇 년 되지 않은 일이요, 그 이전의 십육 년 내내 알레이 에버그린은 양치기로 살았으니 촌민의 삶이 익숙한 것도 당연할 테다. 그는 고아한 가극물보다 경쾌한 민요를 즐겼고, 교양 넘치는 무도회보다 여럿이 짝을 지어 추는 전통 무용에 능했으며, 각잡힌 기사의 창술보다
참으로 길고도 고된 날이었다. 알레이 에버그린은 바닥에 드러누운 채 창을 쥐고는 한 번 몸을 뒤집었다. 적당히 서늘한 사크라 테라의 바람이 잔뜩 달아오른 뺨을 식혔다. 그대로 눈을 감았고, 두방망이치는 심장이 찬찬히 진정할 때까지 깊고도 긴 숨으로 호흡했다. 청년은 딱 잠에 빠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본디 규칙적인 삶이 일상이었으므로 아직 수마에 빠지기에는
평화의 초원에서 서로, 또 서로 가다 보면 순환의 산맥이 나온다네. 온세 요르툼, 자유 도시 오셀로, 기술의 군집체, 소문이 도달하는 곳. 등에 봇짐을 바리바리 짊어진 보부상이 이곳으로 발걸음할 적이면 진기한 물건과 함께 다양한 이야기를 팔아대어서, 무릇 아크사버그 마을의 아이라면 그곳에 대한 환상을 품기 마련이지. 보부상이 파는 서사시의 출처가 어디 서쪽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마는, 이 알레이 에버그린이란 인간이 다소 특이한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보라! 사크라 테라에 발을 딛고서도 꿋꿋이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는 바로 저 모습을. 어디선가 묵직한 바위를 기어코 찾아내더니 번쩍 들어올리고야 만다. 잔뜩 용을 쓰는지 우스꽝스러운 소리가 그 입에서 흘러나오고, 낯빛은 불타는 듯한 머리칼과 다를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나! 위대한 세계수시여!” 한참을 기쁨에 재잘거리던 목소리는 쉬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를 않았다. 여즉 짐도 풀어놓지 않은 채 창과 대검과, 손에 쥔 목동 지팡이와, 다른 손에 안아든 어린 양과 팔꿈치에 건 여행 가방을 바리바리 짊어지고 혼잣말하는 청년의 발걸음이 이리저리 노닌다. 굵고 단단한 뿌리 위를 거닐었다가, 이슬에 젖었던
잘 지내고 있니? 나는 잘 살고 있어. 요사이는 날씨가 퍽 좋아서, 맨발로 풀숲을 거닐다 보면 햇살이 이파리에 스며드는 게 느껴질 지경이야. 구름은 잿빛을 띄는 날이 없고, 언제나 그렇듯이 바람은 상냥하지. 네게 보낼 편지를 쓰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얼마만이지? 백 년? 천 년? 혹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아주 오랫동안 너는 떠돌고 나는 정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