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2 ss

LUCA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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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나이가 든 모양이다, 라고 월요일 아침 오전 열 시 사십 이 분 이불 속에서 이대림은 생각했다.

시간은 그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고 그저 묵묵하게 흐른다. 예의 외딴 건물에서 일어났던 살인사건이 벌써 몇 달 전의 일이다. 사건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도망친 범인은 어떻게 되었고 몇 달이 지난 지금 사건 종결의 형태를 띠고는 있는지에 대해서 대림은 영 아는 바가 없었다. 

수사 집단 여기저기에 뚫어둔 인맥을 동원하면 알 수야 있겠지만, 왜인지 그 정도의 흥미는 생기지 않았다. 아니, 실은 있던 흥미가 꺾이고야 말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이 세상 여기저기에 툭하면 일어나는 살인사건보다 좀 더 중요한 이슈가 그의 인생에 한 톨의 기미도 없이 갑작스레 툭 튀어나왔었으므로...

죽은 줄 알았던 옛 연인이 살아있었다. 다시 만나고 싶어 접근했지만 상당히 예상도 못한 방법으로 거절당했다. 

이것은 보편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준비한 포장이다. 의도적으로 표현을 고르고 맥락과 전말을 도려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실연의 경험으로 조립해낸 가짜다. 문장에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긴 하지만 고작 지나가는 화제를 파고들 사람은 별로 없다. 마음 고생이 심하시겠어요, 정도의 상투적인 위로를 들을 수 있을 거다.

가스라이팅으로 잘 조련해 자살까지 이끌었던 옛 연인이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다시 만나고 싶어 접근했지만 이미 조련은 전부 풀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를 보호하는 친구까지 곁에 있었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포장의 내용물이다.

대림의 조련 취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 세 손가락으로 전부 꼽을 수 있다. 대림 그 자신과, 대림에게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옛 연인과, 생뚱맞게도 대림의 사랑놀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외부인 강상호다.

옛 연인에게는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이미 그 자신이 뼈저리게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림은 몇 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그를 조련했고, 실제로 자살 직전까지 몰고 갔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여태 죽지 않고 있었다. 

대림은 아직도 그가 왜 죽지 않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에게는 내가 삶의 전부였을 텐데, 나 외의 인간관계를 전부 끊어두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내가 없는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게 된 걸까...... 며칠이고 생각해 보았지만 결론은 내려지질 않았다.

강상호에게는 말할 수 없다. 말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에게선 이미 신 노릇을 그만두라는 이야기를 들은 참이다. 자기한테서 도망간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참 모양도 빠지고 꼴도 사나운 짓을 하는 줄은 몰랐는데, 이대림 씨. 같은 매도의 말을 듣고 싶지는 않다.

강상호......

그러고 보니 오늘 낮에 얼굴 좀 보자고 하지 않았나?

머리맡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손에 쥐었다. 전기장판의 열을 받아 기기가 다소 달궈졌다.

오늘의 날짜를 표시하고 있는 캘린더. 그 밑에 적힌 오늘의 일정. 강상호 점심이라는 간략한 문자가 기록되어 있다.

몇 번 젖은 기침을 했다. 거친 숨이 이미 부을대로 부은 목구멍을 할퀸다. 아침 약은 먹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겨우 한 번의 투약으로는 나아지질 않을 모양이다. 대림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에게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연락이 늦어 미안하지만 몸이 좋지 않아 약속에 나가지 못할 것 같다, 라고.

발신 화면을 확인하고 휴대전화를 도로 머리맡에 던졌다.

땀이 나는 것 같다. 물을 좀 마실까 생각하던 차에 휴대전화가 알림음을 뱉었다. 다시 몸을 비틀어 따뜻하게 데워진 휴대전화를 손에 든다. 강상호가 빠르게도 답장을 줬다. 아쉽다, 몸조리 잘 해라, 라는 내용이었다. 더 답장을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이번에는 휴대전화를 손 부근에 내려두었다.

약한 어지럼이 일었다. 눈을 감고 삼 초를 센다. 형이상학적인 도형이 컴컴한 눈앞에서 춤을 추다가 사라졌다.

시간은 어느덧 열한 시.

조금 더 잘까. 오늘은 사무실에도 안 나가겠다고 이야기를 해 두었는데. 그러고 보면 그 말을 들은 관리자 A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일주일 푹 쉬고 와. 어차피 근 이 년 동안은 소장 없이 잘 해왔으니까, 일주일은 없어도 별 상관 없어. 대림은 그녀에게 젠틀한 말투를 유지하느라 애를 좀 썼다.

대림이 소장 직을 맡고 있는 소규모의 업장은 이 근처에 있다. 공급이 과다해 공실률이 심각한 무슨무슨 센터의 몇 칸을 손쉽게 빌려 개업한 바이오 분석 전문 업체인데, 적당한 기업명을 내건 채 오늘도 성황리에 영업 중이다.

업장의 규모는 썩 크지 않다. 대림도 직책은 일단 소장이지만, 그것은 어쨌거나 자신이 이 업장의 대표라는 사실만을 나타낼 뿐이다. 출근해서 하는 일은 사원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일감의 지휘를 한다는 점은 좀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몸을 누이고 있는 이곳은 가산동.

생각해 보면 이곳에서는 제법 오래 살았다. 옛 연인과 한참을 살았던 곳도 이 동네였으니. 그 때 살았던 집은 이미 처분했다. 근처에 있던 연인의 집도 이제는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자주 드나들었던 동네 카페 역시 이제는 눈에 익은 프랜차이즈 카페로 바뀌었다. 시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를 착실하게 지워나간다.

하릴 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걸 보아하니 정말로 잠에 들고 있는 모양이다.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렸다. 이질적인 비음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코에서 나온 소리라는 걸 깨닫고, 대림은 크게 한 번 숨을 들이마시기나 했다.

시간이 묻어버린 자신의 역사를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이사가 잦았던 사실과, 수없이 바뀌는 주변 환경과, 연결과 단절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인간관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하지 않는 그들의 중심, 흐름, 그리고 틀, 모든 게 똑같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조금 지루했던 것 같다, 유전자의 의지로 인해 외견은 모두 다르고 후천적인 개성을 위해 노력하는 모양새가 눈에 띄긴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이형이 아닌 동형이라서......

우리는 모두 하나의 조상에서 분화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최초의 그에게는 이형을 갖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던 건가......

하지만 수십 억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모두 근본적으로 동형이니 실패했다......

의식이 끊겼다가 돌아왔다가를 반복했다. 그런 자각이 있는 게 대림은 다소 신기했다. 나는 지금 졸고 있다, 라는 객관적인 시선이 유지가 되면서도, 맥락이 없고 그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사고는 동시에 끊기지가 않는다. 인간의 뇌는 무엇을 위해 이런 고등한 진화를 거쳐왔다는 말인가.

그리고 어느 순간 의식은 완전히 암전한다.

맥락이 제거된 사고만이 무의식의 무대에 등장한다.

그러므로 제가 고양이 귀와 꼬리를 단 선글라스 남자의 멱살을 잡고 있어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다. 애시당초 이상함을 느낄 수 없다. 이것은 순전히 수면 중 주도권을 잡고 있는 무의식의 명령에 따라 보여지는 환각이기에, 눈을 감고 의식을 잠재우고 있는 이상 저항은 불가능하다.

"넌 뭐야?"

대림이 물었다. 고양이 남자는 꼬리를 좌우로 살랑대다가 입꼬리를 쓱 올렸다. 선글라스에 가려진 두 눈은 보이지 않는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연령대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20대는 아닐 것 같은데. 아무리 적어도 30대가 아닐까.

"야~옹."

고양이 남자는 사람의 말을 하지 않았다. 기분이 나빠졌다. 문득 주변의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건물 옥상이다. 그것도, 가을의 찬바람이 쌩쌩 부는.

난간은 높지 않다. 힘을 주어 밀면 사람 정도는 쉽게 넘어갈 성싶다. 그래서 대림은 고양이인지 사람인지 모를 것을 난간으로 밀어냈다.

"넌 못 죽여."

고양이가 사람의 말을 했다.

"도진이도 못 죽였잖아. 그렇지?"

고양이가 지근거리에서 이쪽을 보고 웃었다.

기분이 나빠졌다.

밀쳤다.

떨어진다.

무언가 박살나는 소리가 났다.

내려다 보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게 그가 난간을 붙잡고 살아있을 것만 같았다.

음이 미묘하게 어긋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음량이 일정하다.

이쪽으로 오지 않는 건가......

일정한 음량의 사이렌이다.

어,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음인데......

이건......

눈을 떴다.

사이렌은 여전히 울리고 있다.

일정한 음량으로.

그것이 사이렌이 아닌 초인종 소리라는 걸 인식하기까지는 오 초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집 안에 들어올 생각은 없는지 현관 앞에서 요지부동의 자세로 서 있던 관리자 A는 평소와 같은 무심한 얼굴로 대림의 가슴팍에 종이 봉투를 들이밀었다. 봉투 전면에 박힌 가게의 로고는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무엇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짤그랑, 하며 봉투 안의 내용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유리병 같은 게 들어있는 건가.

"과일청."

"음?"

무심코 얼빠진 소리를 냈다. 관리자 A는 그가 봉투를 받아드는 것을 확인하고 손을 거둔다.

"사무실 근처에 점심 뷔페 있잖아. 그 옆에 새로 생긴 카페인지 찻집인지, 거기서."

"은수 씨가 이렇게 사려깊은 사람인 줄은 몰랐네."

"다시 줘."

"진심이야. 고마워."

막 자다 일어나서 그런지 목소리가 훨씬 더 갈라졌다. 관리자 A, 최은수는 목을 괜히 가다듬는 소장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기나 하다가.

"내일 나올 수는 있어?"

"음, 아마도."

"그래? 그럼......"

최은수는 간결한 인사를 남기고 문 앞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떠나고도 삼 초 정도를 현관에 멍하니 서 있던 대림은, 제 한쪽 손에 걸린 과일청의 하중을 깨닫고 현관문을 닫았다.

띠리리, 하고, 도어락이 착실하게 제 할 일을 하는 소리.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 보았다. 열두 시 반을 조금 지나고 있다. 그새 한 시간을 훌쩍 넘게 잔 건가.

점심시간이지만 배는 고프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약을 먹고 한참을 누워있다가 자다가 했으니 당연한 처사다. 약을 먹어서 그런지 입도 묘하게 쓰다. 뚝 떨어진 입맛을 구태여 돌아오게 하고 싶지는 않았고, 동시에 동료 관리자의 사려 깊은 마음씨가 떠올랐으므로, 대림은 종이 봉투의 내용물을 꺼냈다.

유자청과 레몬청이다. 둘의 색이 비슷해 한순간 같은 청을 두 개 사 온 건가 했지만, 병 겉면에 붙은 라벨지로 구별이 가능했다. 기실 그녀는 같은 청을 세 개도 사 올 사람이긴 하다.

커피 포트로 물을 끓였다. 우선은 유자청의 포장을 뜯었다. 잘 봉인된 유리병의 뚜껑을 연다.

뻥.

먹을 만큼의 설탕 절임을 컵에 옮겨 담는다.

달콤한 냄새가 났다.

재채기를 연달아 두 번 했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오한이 훅 들었다. 

때마침 알맞게 끓어오른 커피 포트의 물을 컵에 부었다. 냄새 분자는 온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운동 속도가 빨라진다. 이제는 부엌 뿐만 아니라 거실에도, 안쪽 방에도 유자 절임의 냄새가 배지 않을까.

무엇이든 혼자 사는 남자의 어떤 짓을 해도 가릴 수 없는 쾌쾌한 냄새보단 나을 터였다.

꽤 오랜만에 먹어 본 유자차는 혀가 아릴만큼 달았다. 닳아빠진 미뢰에는 자극이 다소 심하지만 어쨌거나 당 보충에는 좋을 것 같다. 대림은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해 본다.

연달아 두 잔을 마셨다.

몸 안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든다. 위장 안에 온기가 충만하다. 체온은 이미 높은데 여기서 더 높여도 되는 건가. 그야 괜찮지.

헛배이긴 하지만 배가 차고 몸이 따스해지니 하루종일 면역 작용으로 애쓴 40대의 몸은 급속도로 노곤해졌다.

대림은 점심약을 부스럭대며 까먹은 후 다시 침대 속으로 기어들었다.

그리고 오늘의 불청객은 한 명이 더 찾아온다. 사람도 만나지 않고 있는데 손님이 이렇게 많은 건 또 별 일이라고, 오후 네 시가 지나 겨우 몸을 일으켜 집을 정돈하고 있던 대림은 초인종 소리를 듣고 이렇게 생각하고 만 것이었다.

초인종 소리를 일정한 간격으로 내뱉던 도어폰의 액정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던 건 다름 아닌 강상호였다.

대림은 문을 열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문을 열어서 좋을 일이 뭐가 있을지 생각했다. 약속을 파토냈는데도 굳이굳이 집까지 찾아와 당당하게 초인종을 누른 그 저의를 예상해 봤다. 애초에 내가 집 주소를 알려준 적이 있었나. 형사님이니 남의 개인정보야 전부 손 안에 있겠지만서도......

초인종 벨소리가 세 번 반복된 후에야 대림은 현관문을 열었다.

"집에 없는 줄 알았잖아."

죽 가게의 마크가 그려진 종이 봉투를 들고 강상호는 투덜거렸다.

"죄송합니다. 자다 깨서요......"

삼십 분 전부터 깨어있었지만 아무튼 자다 깬 건 맞다. 대림은 스스로를 그렇게 납득시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호는 어느새 신발을 벗고 현관 안으로 들어선다. 대림은 몸을 틀어 육중한 덩치의 그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광역수사대가 속한 신청사는 마포에 있다. 가산까지 딱히 먼 거리는 아니긴 하다.

"근처에 탐문 올 일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산하면 또 우리 이대림 씨 홈 그라운드 아닌가."

이쪽에 오래 살긴 했지만 홈 그라운드라는 자각은 없다. 그런 반박을 참고 있으니, 상호는 부엌 테이블 위에 종이 봉투를 올려놓는다. 일련의 행동이 마치 이미 한 번 와 본 사람 마냥 자연스럽다.

"제 집은 또 어떻게 아시고 오셨어요."

"에이, 우리가 그런 것도 모를 사인가."

모를 사이인 것 같은데.

"밥은 잘 챙겨 먹었어요? 챙겨줄 사람도 없잖아."

"못 움직일 정도로 아픈 건 아니라서요."

"그래 보이네. 그래도 약 먹으려면 세 끼는 챙겨 먹어야지. 그렇죠?"

테이블에 굴러다니던 약 봉투를 보고 하는 말이다. 대림은 직감한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의자에 걸터앉아 봉투 안의 죽 용기를 꺼냈다. 용기 겉으로 비치는 색을 보니 무난한 전복죽이다. 상호는 그 맞은편 의자에 슬쩍 엉덩이를 대고 앉아있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이며 부엌을 돌아다니다가, 반쯤 열린 침실 안쪽을 흘겨보기나 한다.

꼭 용의자의 자택을 수사하는 모습이 아닌가. 황당해진 대림은 작게 코웃음을 쳐 주의를 끈다.

"저, 아직 사람을 죽인 기억은 없는데요."

"하하하하하, 신기해서 그래요. 신기해서."

"뭐가 신기합니까?"

"이대림 씨 집은 언젠가 한 번 쯤 와 보고 싶었거든."

히죽거리는 얼굴을 보니 원래도 없었던 입맛이 더더욱 떨어졌다. 죽 용기를 열려던 마음도 싹 사라졌다. 잘 보관해두고 이 사람이 떠난 밤에 먹는 편이 낫겠다.

"난 말이죠, 전공이 프로파일링은 아니긴 하지만. 아무래도 몇십 년 동안 형사 일을 하다 보면 눈에 보이는 게 있어요.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분위기라는 게 대충은 느껴지거든요."

그는 그제야 다시 맞은 편 의자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올빼미를 닮은 부릅 뜬 눈이 대림을 향했다.

"이제는 별로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으신가 봐, 이대림 씨."

여기서 대답을 고민하면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이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는 것 자체가 고민이며, 지체며, 확증이다.

묘한 패배감을 느꼈다. 실제로, 당분간은 사람을 물색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 년을 일본에서 보내다가 귀국하니 할 일이 많은 것도 있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요소다.

직전의 결별이 아직 정신에 파멸적인 흔적을 남겨두고 있다. 그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을 물색해 제대로 조련할 자신이 그에게는 없었다.

"네, 귀국하니 바빠서요."

적당한 답변을 내어주었다. 그는 물론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만족할 것이다. 사람 하나 골라잡아 조련하는 신 노릇은 슬슬 그만두라고 충고했던 게 그이니 당연하다.

문득 그에 대한 신상 정보가 떠올랐다.

그는 과거의 언젠가 결혼을 했었다. 그리고 이혼했다. 그런 사실을 그 스스로의 입으로 내뱉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 말을 하시니 궁금한 게 있는데요, 형사님."

"으응?"

"이혼은 왜 하신 겁니까?"

"갑자기 그런 게 궁금한가? 이대림 씨도 참 유별나네."

"형사님이시라면 뚜렷하고 건강한 연애관이 있으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저랑 다르게, 라는 뒷말은 애써 삼켰다.

반응을 살핀다. 테이블에 한 팔을 대고, 나머지 한 팔은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둥그런 눈을 둥그렇게 뜬 묘한 표정이다. 대답해 줄 수야 있지만 그게 그쪽한테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슨 도움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다.

그래도 이쪽에 호의적인 형사는 선뜻 입을 열어 주었다. 어느새 가늘게 뜬 두 눈이 초승달 모양을 그린다.

"우리는 말이죠, 서로를 너무 잘 이해했거든."

이해하기 어려운 답변이 돌아왔다. 대림은 따뜻한 죽 용기를 매만지고 있던 손을 멈춘다.

상호는 등받이에 걸어두었던 팔을 물려 그대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 말을 잇는다.

"아내가 살해당하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남편이라는 속설이 있습니다. 이대림 씨라면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이건 사실 단순히 속설이라고 치부할만한 게 아닙니다. 실제 수사 현장에서도 무난하게 통용될 정도로 신뢰도가 높은, 일종의 법칙이죠."

목덜미에 한기가 들었다. 컨디션에 그닥 좋지 못한 상대를 만나 갑자기 열이 오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림은 죽에게서 온기를 나눠받은 손을 테이블 아래에서 맞잡는다. 따뜻하다.

"그러니 형사라면 자신의 인생 파트너를 죽이려는 짓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내가 죽으면 범인은 남편인 것이 상식이니까."

하지만 말입니다, 하고 상호는 쉴 틈 하나 없이 잇는다.

"저 같은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형사님 같은 사람이요?"

"가까운 사람을 죽이는 건 하나의 로망이죠. 이대림 씨, 당신도 동의하는 바가 있지 않아요?"

숨을 삼켰다.

목 뒤에서 시작된 한기가 신경을 타고 퍼져나간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 감각을 도무지 견딜 수 없어서, 대림은 한쪽 팔을 쥐었다.

테이블 너머의 형사는 웃고 있다.

"그런데 그걸 알아버린 거예요. 우리 똑똑하고 참한 아내가."

"그걸?"

"우리는 너무 잘 맞았으니까요."

"그러니까, 그 이전에...... 형사님이 사람을 해치고 다닌다는 걸 아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아, 뭐. 그건 상당히 일찍 들켰어요."

대림은 잠시 눈앞의 형사가 어떻게 이 자리에 멀쩡히 앉아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사유했다. 어쩌면 아내와 정당한 절차를 거쳐 이혼한 것이 아니라, 그저 아내를 이 세상에서 없애 혼인 관계를 끊은 게 아닐까.

"그 사람은 세상 사는 걸 재미없어 했거든. 직업도 멀쩡하게, 교수 일을 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것보단 추리소설을 읽을 때가 그나마 즐겁다고 했지."

교수......?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나한테 말이죠, 소설 속 세계는 즐거운데 왜 현실에는 이런 재미있는 일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추리소설 속 세계요?"

"그럼, 당연하지. 내가 좋아하고 아내가 좋아했던 본격 추리소설 속 세계."

본격 추리소설 속 세계. 그곳에는 인간이 희박하다, 라고 대림은 늘 느끼고 있었다.

희박한 인간성으로 비워진 서사의 자리에는 잿빛 뇌세포를 십분 활용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기상천외한 트릭이 들어앉는다. 그러니까, 피해자는 다음의 트릭으로 살해되었고 이 밀실은 그 다음의 트릭으로 만들어졌으며 사건 현장에 남은 증거는 논리 A 그리고 논리 B 그에 후속되는 논리 C로 인해 단 한 명의 용의자만을 가리킨다, 라고 우스꽝스러운 꼴의 탐정이 나불나불 이야기해대는 게 정석적인 플롯이다.

그런고로 대림은 본격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마니아들이 흔히 말하는 압도적인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사건을 해결하고 트릭을 해명하는 것에 있어 원초적인 퍼즐러적 재미는 있었을지 몰라도, 동시에 그곳에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이라는 건 세상사에 있어 생각보다 중요한 팩터야. 대작가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런데...... 이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나는 그 사람을 위해 사람을 죽였어요. 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 내가 담당하는 사건이라고 거짓말을 치고, 온갖 사진이며 조서를 전부 위조해서 그 사람한테 넘겨줬는데, 그걸 들여다 본 지 하루도 채 안 되어서 하는 말이라는 게."

재미있었어. 풀어 볼 가치도 있었고. 그래도 다음부터는 눈에 띄는 이런 짓은 하지 말았으면 해.

그리고 그는 이후로도 사건을 몇 번 더 일으킨다. 본격 추리소설 속 세계를 원헀던 아내는 계속되는 그의 범죄 행각에 질려서 이혼 서류를 들이밀었다, 라는 멀쩡하고 보편적인 결말은 아니었다.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죽이게 될 거야.

단순한 이혼이라기보단 차라리 범인에게서 도망친 탐정이라는 묘사가 옳았다.

이제야 조용해진 집에서 한 술을 뜨자 조각난 전복이 씹혔다.

낮까지만 해도 퉁퉁 부었던 편도선이 다소 가라앉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좋은 일이다. 하루를 통으로 쉬고 나서도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동업자에게 무슨 모멸적인 말을 들을지 모른다.

턱을 매만지니 까끌하다.

생각해 보니 오늘은 면도를 한 기억이 없다.

나갈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가......

나가지 않았는데도 얼굴을 보았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자신에게 기이할 정도로 호의적인 형사를 떠올린다.

아내를 위해 사람을 죽인다......

전복죽의 밥알이 씹혔다.

그렇다면 그 두 사람은 지금도 만나고 있겠군.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에서 벗어난다. 그것으로 둘 사이의 긴장은 해소된다.

당연한 이치다.

더이상 아내가 아니라면 남편은 의심받지 않는다.

의심받지 않는다면 죽일 이유도 없다.

원초적인 재미를 위해 살인이라는 밑도끝도 없는 리스크를 지는 인간들의 심리란 대체로 그렇다......

또한 나도, 그러하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죽일 이유가 없다.

사랑해서 다른 사람을 죽여 바치거나, 사랑해서 그 사람의 말로를 내 손으로 디자인해주거나.

그 형사와 나는 근본적으로 같은 사람이다......

모두가 동형이다.

대림은 조금 지루해져서 죽이 반도 더 남은 용기를 테이블 한구석에 밀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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