少女ケシゴム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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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노 마시로는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난 길쭉한 창문으로는 한낮이면 뙤약볕이 아슬아슬하게 기어들곤 했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원치 않는지 암막 커튼을 친 상태였다. 하기사 6월의 볕이 가까스로 낮춰둔 서재의 온도를 올렸다가는 그의 심기가 아주 나빠질 것임이 분명했다. 이 안에서 허용된 열감은 담뱃불이 전부다.

창문의 양 옆 벽을 꽉 메운, 천장까지 오는 책장 두 개는 그 안이 실상 듬성듬성했다. 단행본과 문고본이 어지럽게 뒤섞여 꽂힌 칸이 있는가 하면 어느 칸에는 단행본만이 쭉 늘어서 있고 또 다른 칸에는 문고본만이 이중으로 꽂혀있었다. 시계 따위의 잡화가 한 칸을 차지하기도 했고 책도 잡화도 그 어떤 것도 없는 텅 빈 칸도 책장 한구석에 존재했다. 류는 그곳에서 서재 주인이 지닌 미묘한 공허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간만에 면상을 들이민다 했더니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물고 왔군.”

반쯤 타들어간 담배가 그의 입가에서 흔들렸다.

“별 것도 아니라니. 우리한테는 한낱 가십이겠지만, 거기에 휘말린 인간들은 지금도 여전히 사건의 여파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을.”

부러 연극조의 어투를 꾸며 말해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우노는 잘 깎인 콧대에 잔뜩 주름을 잡았다.

“농담하냐?”

“그야 농담이지.”

남들에게 불행을 떠넘겨 먹고 사는 뒷골목 협잡배들이 남의 안위를 걱정해봤자 신에게 노여움이나 사게 될 테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양아치들을 몰래몰래 치료해 뒷골목에 도로 풀어두는 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편으로 과거 거대 야쿠자 조직의 수뇌였지만 이상한 일을 계기로 일선에서 물러난 우노 마시로의 경우, 신에게 노여움은 물론이고 어쩌면 천벌마저 받을지도 모른다. 네 손으로 죽인 수십 명의 명복을 빌기는 커녕 남의 불행을 가벼이 여기다니. 너에게 줄 자리는 지옥불 한가운데 뿐이다, 하며.

더군다나 조직의 보스 자리에서 내려온 그는 이젠 지면에서 사람을 죽이고 있지 않나.

괴상한 사건을 계기로 야쿠자를 그만둔 우노는 더욱 괴상하게도 추리소설 작가로 등단했다. 우노 마시로라는 이름은 작가로 등단했을 때 사용한 가명이다. 본명은, 적어도 류는 알지 못한다. 조직 시절에도 그는 그저 보스라고 불렸을 뿐 이름 한 번 댄 적이 없다.

류는 물론 그의 소설을 읽어보았다.

추리소설이라면 셜록 홈즈 같은 걸 말하는 걸까 싶었다. 셜록 홈즈를 읽어본 적은 없지만 머리가 비상한 탐정이 나온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노의 소설에는 명석한 탐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뭐가 있었는가 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다.

“네 덕분에 나도 추리소설이니 탐정소설이니 미스터리니 하는 거 꽤 읽어봤다고. 백엔 염가 세일 매대에 널린 걸 하나씩 주워읽다 보니 시간도 잘 가고……. 아, 우노 대작가님의 소설은 백엔 매대에 없더군.”

“요점을 말해라.”

마호가니 책상처럼 묵직한 목소리가 서재의 가라앉은 공기를 진동시켰다. 네 발 짐승의 저주파와 비슷한 울림이다. 류는 은근한 동요를 숨기기 위해 다리를 꼬아 앉았다. 다리를 꼬는 것만으로 허리에 힘이 들어간다.

“내가 여태까지 얘기한 건 헛으로 들은 건가?”

“헛으로 듣다니?”

“이건 말이지, 쌍둥이의 부재증명에 관련된 수수께끼라고.”

류는 책상 위로 상반신을 들이밀었다. 우노의 오뚝한 코가 훅 다가온다. 처진 눈꺼풀 아래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시커먼 눈동자. 그 앞을 가는 테 안경의 렌즈가 막고 있었다.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시커먼 동공에서 스며나오는 살기를 한꺼풀 벗겨내는 효과가 안경에는 있는 것이다.

우노는 대답이 없다. 그저 살기등등한 눈으로 류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다.

“이런 수수께끼를 좋아하시는 우노 대작가님이라면 뭐라도 코멘트를 할 수 있지 않겠어?”

이빨이 무뎌진 호랑이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면서, 류는 여태까지 이야기했던 수수께끼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20여 년 전, 아이치 현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고등학교 2학년 소녀가 산비탈에서 추락해 목숨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최초발견자는 에노키지마 리쿠토라는 동갑의 소년으로, 평소 친분이 있던 소녀가 그를 불러내어서 산속 공터로 향했었다고 한다.

작은 마을의 가운데에 위치한 산. 어른들은 이따금 산나물이나 버섯을 캐러 오르고 꼬마들은 자연을 놀이터 삼기 위해 오르던 산. 그 산의 공식적인 등산로는 두 개가 있었다.

제1등산로는 입구가 시내에 면해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출구는 산의 반대편에 있으나 그곳 역시 주택가에 접해 틈만 나면 사람들이 오갔다. 주택가와 시내는 산을 가운데에 두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일찌감치 산에 터널을 뚫고 도로를 깔아두어 통행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가용이나 자전거를 타고 터널을 지나 시내를 오갔다. 그저 건강을 중시하는 장년들이나 봄만 되면 산나물을 캐려 드는 요리사들이 산행에 나섰던 것이다.

제2등산로는 제1등산로에 비하면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았다. 주택가와 시내를 잇는 도로 한가운데에 입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출구 역시 뜬금없이 입구 근처 논밭에 면해 있어 그곳으로 나오면 보이는 거라곤 곡식을 지키는 허수아비 뿐이 없었다.

입구와 출구가 반대편에 있는 제1등산로는 산을 일직선으로 관통했다. 시내에 면한 입구에 들어서면 경사가 좀 있는 등산로가 산 정상까지 이어진다. 입구에서 정상까지는, 어른 걸음으로 삼십 분 정도 걸린다. 등산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당연하게도 반대편의 출구까지 이어진다. 이것 역시 삼십 분이 걸린다.

제1등산로를 따라 산을 횡단하다 보면 갈림길 두 개와 공터 하나를 마주친다. 첫 번째 갈림길은 입구에서 정상 사이에, 두 번째 갈림길은 정상에서 출구 사이에 있다. 이는 제2등산로와 교차되는 지점이다. 입구와 출구가 비슷한 곳에 있는 제2등산로는 산의 허리를 따라 한 바퀴 도는 형태였던 것이다. 아마 두 등산로를 위에서 본다면 커다란 원을 그린 제2등산로를 제1등산로가 일직선으로 관통하는 모습이 될 거다.

그리고 공터는, 정상과 두 번째 갈림길 사이에 있었다. 정상에서 내려가다 보면 산속 공터를 만나고, 공터에서 조금 더 내려가다 보면 두 번째 갈림길을 만난다. 이 때 두 번째 갈림길에서 우회하지 않고 똑바로 나아가면 산 반대편의 출구가 나와 주택가로 들어갈 수 있다.

정상에서 공터까지가 십오 분, 공터에서 두 번째 갈림길까지가 오 분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갈림길에서 주택가에 면한 출구까지는 십 분이라는 게 되겠다.

다시 소녀의 추락 사건으로 돌아가자.

에노키지마 리쿠토는 시내에서 친구들과 시끄럽게 떠들다가 소녀와의 약속을 떠올리고 산으로 향했다. 그가 시내와 접한 제1등산로의 입구로 향하는 모습을 그의 친구들이 모두 목격했다. 그게 오후 다섯 시 정각의 일이다.

당시는 하지에 근접한 여름이었다고 하니 6월 말이었을 거다. 여덟 시나 되어야 떨어지는 해는 아직 하늘에서 사라질 생각을 않고 있었지만 오후 다섯 시라는 절대성은 산에서 놀던 아이들을 집으로 물리기 충분했다. 오직 에노키지마 리쿠토만이, 소녀를 만나기 위해 한여름의 산행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노키지마 리쿠토는 공터 근처에서 추락한 소녀의 시신을 발견한다.

공터라고는 하지만 본디가 산속에 위치했다. 그러니 공터 가장자리에서 발을 조금만 잘못 디디면 곧장 산비탈 아래로 미끄러져 심하게 다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소녀가 그러했다. 공터 저 아래로 추락한 소녀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에노키지마 리쿠토는 소녀의 시신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공터를 빠져나갔다. 등산로를 허둥지둥 달려 출구로 튀어나와 주택가에 당도한 그는 곧바로 파출소에 들어가 경찰을 불렀다. 오후 다섯 시 오십 분의 일이었다.

하지만 짧은 조사 후 에노키지마 리쿠토는 현행범으로 체포되기에 이른다. 경찰의 체포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1. 경찰이 에노키지마 리쿠토를 따라 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소녀는 사망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2. 그 한 시간 동안 산에서 나온 사람은 에노키지마 리쿠토가 유일했다.

2-1. 이는 등산로의 출구에서 소꿉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던 초등학생 세 명이 증언했다.

3. 에노키지마 리쿠토는 불량학생들과 어울린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3-1. 소녀와 단둘이 약속을 잡아 불량학생들에게 배운 나쁜 짓을 하려다가 실수로 죽이고 만 게 아닌가?

경찰에게 체포된 에노키지마 리쿠토는 자신의 결백을 강하게 주장했다. 조사실에서 고성을 지르고 난동을 피우다가 제압까지 당했었다는 모양이다.

한편으로 소녀와 관계가 있는 인물은 또 한 명이 있었다. 에노키지마 리쿠토의 반응에 주춤한 경찰이 다른 방향으로도 조사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에노키지마 리쿠토의 일란성 쌍둥이 형, 에노키지마 치카토가 바로 그 인물이었다.

치카토와 리쿠토, 그리고 소녀는 묘한 삼각관계에 있었다. 주변 학생들의 증언으로 재구성한 바에 의하면 이러하다.

형인 치카토는 소녀를 짝사랑하고 있었고, 소녀는 동생인 리쿠토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일란성 쌍둥이라고는 하지만 치카토와 리쿠토는 성격이 극명하게 달랐다. 형인 치카토는 독서와 다도를 좋아하는 온화하고 조용한 성격이었으며, 동생인 리쿠토는 운동과 게임을 좋아하는 활기찬 성격이었다. 그러니 소녀가 쌍둥이 중 한 사람만에게 호감을 보여도 이상치 않았다.

그러니 학생들은 일련의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소녀가 리쿠토에게 고백을 하기 위해 공터로 불러냈던 게 아닐까. 그런데 리쿠토가 거절했고, 충격에 빠진 소녀가 비틀거리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산비탈로 추락한 게 아닐까.

하지만 학생들의 추측은 부정되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리쿠토는 경찰에게 곧장 말했을 터였으니까. 이 소녀가 자신에게 고백을 했는데 거절했더니 그만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고. 그러나 리쿠토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소녀가 죽어있다며 허둥댔을 뿐이었다.

경찰은 자연스럽게 이하의 추측으로 의견이 모였다.

소녀는 리쿠토를 만나기 전 같은 장소에서 치카토를 만났던 게 아닐까? 소녀를 좋아했던 치카토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소녀와 무어라 말싸움을 벌이다가 소녀를 추락시킨 게 아닐까.

경찰은 바로 에노키지마 가로 찾아갔다. 에노키지마 가는 등산로 출구에 면한 주택가에 있었다. 어디서나 볼 법한 이 층 짜리 양옥이 그들의 자택이었다.

에노키지마 가는 어머니, 아버지, 쌍둥이 둘 그리고 시어머니의 5인 가정이었다. 대문 앞에 선 경찰은 거두절미하고 사건 발생 당시의 치카토의 행적을 물었다. 시신이 발견된 게 6시 전후고 사망 추정 시각이 한 시간 안팎이니 5시부터 6시까지의 알리바이를 묻는 게 되었다.

“다섯 시부터 여섯 시까지요? 그 날 순경 분이 오셔서 얘기해주셨던 게 일곱 시니까, 아아……. 그 땐 아마 치카토랑 어머님만 집에 있었을 텐데요.”

에노키지마 부인이 말했다.

에노키지마 가의 가장인 남편은 아침마다 신사로 나가 신관 일을 한다. 퇴근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대체로 여섯 시 이전에는 귀가한다. 하지만 그 날은 마을에서 일이 많이 들어와 귀가가 한참 늦어졌다고 한다.

에노키지마 부인 역시 직업을 갖고 있다. 남편처럼 아침부터 나가지는 않지만, 점심 무렵에는 집을 나선다고 한다. 그녀는 일곱 시 전후로 귀가하는 편이고 그 날도 그러했단다.

에노키지마 형제는 고등학교 2학년이다.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형인 치카토는 귀가부라 늦어도 네 시면 집에 돌아온다. 그와 반대로 동생 리쿠토는 서클 활동이 있어 귀가 시간이 오락가락 한다. 그 날도 서클 활동이 있었고, 서클 친구들과 밥을 먹고 올 예정이라고 가족에게 미리 얘기해두었단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못해 대부분의 시간을 자택 1층 자신의 방에서 누워 보내는 신세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을 먹고 약을 먹고 책을 보다가 잠든다. 그렇게 다시 일어나면 저녁이고 이따금 저녁을 먹기 전에 손자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그 날도, 그러했단다. 다만 그 날엔 치카토만이 그녀의 곁에 있었다.

“할머니, 저녁 드셔야죠, 하고 그 애가 깨웠어. 시계를 보니깐 다섯 시 이십 분이야. 요즘은 다섯 시가 넘어도 날이 훤하구나 하면서 얘기했지. 벌써 한 해가 절반은 가고 있구나 하면서……. 그렇지?”

그녀가 손자 치카토를 보면서 물었다. 치카토는 왠지 동생에 비해 선이 가늘어 보였다. 곱상하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네. 저, 아버지가 슬슬 돌아오실 것 같아서 미리 저녁을 준비하려 했습니다. 준비라고 해봤자 어머니가 만들어 두신 반찬을 꺼내는 것뿐이지만……. 그런데 아버지가 오시질 않아서 다시 생각해보니, 아침에 오늘은 일이 있으니 저녁을 먼저 먹으라고 하신 게 생각이 나서, 할머님이랑 같이 먼저 저녁을 먹었습니다. 리쿠… 리쿠토는 친구들이랑 밥을 먹고 온대서 생각도 않고 있었는데…….”

저녁을 먹은 후 치카토는 그의 친할머니와 함께 대화를 나누다가, 여느 때와 같이 그녀가 잠에 든 것을 확인하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에노키지마 가에 처음으로 경찰이 방문해 소녀의 추락 사건을 전한 건 사건 당일 오후 일곱 시 즈음이었다.

경찰이 리쿠토를 따라 사건 현장에 도착한 것이 여섯 시 전후였는데, 수사반을 불러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될 때까지는 삼십 분 가량의 지체가 있었다. 수사 시스템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고, 단순히 사건 현장이 산 중턱 공터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리쿠토는 현장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경찰에게 조사를 받다가 했다. 사건의 최초발견자가 범인인 경우는 적잖이 있으니 경찰은 초장부터 리쿠토를 의심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리쿠토는 경찰의 허가가 내려질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경찰이 방문한 사건 당일 일곱 시. 에노키지마 가에는 에노키지마 부인과 시어머니, 그리고 치카토가 있었다. 후일 증언에 따르면 에노키지마 부인이 귀가한 게 일곱 시 십 분 전이며 에노키지마 부인이 귀가했을 때 집에는 잠든 시어머니와 치카토가 있었다고 한다.

치카토는 그날도 학교에 다녀왔다. 네 시 전후로 귀가한 걸 역시 방에 누워있던 시어머니가 목격했다고 한다. 귀가한 치카토는 할머니와 적당히 인사를 나누다가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시어머니는 그 후 잠들어, 치카토가 깨운 다섯 시 이십 분까지 수면을 취했다.

그러니 치카토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네 시에서 다섯 시 이십 분 사이라고 할 수 있다. 소녀의 사망 추정 시각이 다섯 시에서 여섯 시 사이니 만일 그가 범인이라면 다섯 시에서 다섯 시 이십 분 사이에 집과 산중턱의 공터를 오가야만 한다.

주택가에 위치한 에노키지마 가는 확실히 제1등산로의 출구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걸어서 오 분, 뛴다면 삼 분 안으로 오갈 수 있는 거리다. 등산로 출구에서 공터까지는 십오 분이 걸리니 편도 이십 분 왕복 사십 분이 소요된다. 네 시에 귀가한 치카토가 다섯 시보다 조금 이르게 집을 나온다면 충분히 범행을 저지를 수 있는 거리였으나.

문제는 등산로 출구 근처에서 초등학생 세 명이 오래도록 소꿉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다는 점이다.

초등학생들은 오후 세 시 반부터 제1등산로 출구 근처에서 풀과 돌을 모아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돌로 풀을 찧으며 노는 동안 등산로에는 사람이 오가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 뒷산이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6월 한낮의 땡볕 아래에서 산행을 하고자 하는 주민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소꿉놀이를 하던 초등학생들은 물론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놀고 있었다.

그러니 네 시에 귀가한 치카토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제1등산로의 출구를 통해 산중턱의 공터로 향할 수 없었다.

“정리하자면.”

짧아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호랑이가 낮게 읊조렸다.

“쌍둥이와 소녀의 삼각관계. 소녀의 추락사. 문맥 상 용의자는 쌍둥이 형과 동생 두 사람. 동기가 희미한 동생은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체포. 형은 동기가 있지만 시간 상 범행이 불가능했다.”

소녀의 사망 추정 시각은 다섯 시에서 여섯 시. 동생 리쿠토가 제1등산로의 입구로 향한 게 다섯 시이며, 제1등산로의 출구로 빠져나와 주택가의 파출소에 당도한 건 다섯 시 오십 분. 누가 보아도 그가 공터에서 소녀를 만나 다툼 끝에 살해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니 경찰이 리쿠토를 현행범으로 체포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형 치카토는 학교에서 네 시에 귀가하여 다섯 시 이십 분에 친할머니를 깨워 저녁을 먹었다. 소녀의 사망 추정 시각에 맞추기 위해서는, 치카토는 적어도 다섯 시까지는 산중턱 공터에 도달해야 하며, 또 다섯 시 이십 분까지는 집으로 돌아가 친할머니를 깨워야 한다. 전자에도 후자에도 걸림돌이 있었다.

전자에는 제1등산로 출구 앞의 초등학생들이라는 걸림돌이 있다. 초등학생들은 오후 세 시 반부터 계속 그곳에서 소꿉놀이를 했지만, 갑자기 튀어나와 허둥지둥 파출소로 달려간 리쿠토 외에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니 네 시부터 주택가의 자택에 있던 치카토는 제1등산로를 이용하지 않은 게 된다.

후자에는 공터와 자택의 거리라는 느슨한 걸림돌이 있다. 공터에서 제1등산로의 출구까지는 십오 분이 걸리고, 출구에서 자택까지는 오 분이 걸린다. 치카토가 어찌어찌 초등학생들의 눈을 속여 제1등산로의 출구를 드나들었다 해도, 다섯 시에 소녀를 죽이고 하산한다면 자택까지는 이십 분 가량이 소요되는 것이다. 다섯 시 이십 분에 친할머니를 깨우는 게 가능할지는 몰라도 심히 빡빡한 일정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경찰은 최초발견자인 동생 리쿠토에게 모든 혐의를 씌웠다.

“네놈은 의도적으로 어떤 정보를 숨기고 있군.”

모든 상황을 파악한 우노가 한 자 한 자 짓씹는 듯한 어조로 내뱉었다. 꼰 다리에 두 손을 올리고 있던 류는 눈동자를 빙글 굴려 시치미 떼는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숨기다니, 뭘?”

“제2등산로에 대한 설명은 어디로 갔지?”

마을 가운데에 위치한 산. 그 능선을 따라 한 바퀴를 도는 완만한 길. 입구와 출구가 도롯가에 있어 사람의 출입이 드물었던 곳.

우노의 말대로였다. 류는 제1등산로에 대한 견해만을 이야기했을 뿐, 제2등산로에 관한 정보는 전혀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간단한 이유가 있었다.

“아아……. 미안, 숨길 생각은 없었어. 범행에 제2등산로가 사용된다면 뭔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 묻는 거겠지?”

류는 꼬나물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들고 빙빙 돌렸다. 우노가 피우는 것과 같은 담배다. 그에게서 한 개비를 빌렸으니 당연한 이치다.

“안타깝지만 짭새들도 바보는 아니라서 제2등산로를 수색해보긴 했지. 주택가의 파출소에서 걸어서 삼십 분 걸리는 도롯가에 제2등산로의 입구와 출구는 나란히 뚫려있었어.”

그러나 그곳에서 별다른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특별히 눈에 띄는 발자국이 있지도 않았고 수상한 혈흔이 남아있지도 않았으며 누군가의 유실물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애초부터 별 기대가 없었던 경찰은 소득 없이 파출소로 돌아갔다.

“치카토가 제2등산로를 이용해서 공터에 드나들었다고 얘기하고 싶은 거겠지? 물론 제2등산로에서도 공터로 접근할 수는 있어. 제1등산로와 제2등산로는 이어져 있으니까. 하지만 명심하라고. 파출소, 그러니까 주택가에서 걸어서 삼십 분이야.”

삼십 분을 걸어 제2등산로의 입구와 출구에 도착하는 게 다가 아니다. 제2등산로를 거쳐 공터까지 가려면 또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입구와 출구는 거의 붙어있으므로 출구를 기준으로 하자면, 공터까지는 또 삼십 분이 걸린다.

따라서 치카토가 초등학생들의 눈을 피해 제2등산로를 이용했다고 친다면, 등산로 출구까지 삼십 분이 걸렸을 것이며 공터까지는 거진 한 시간 가깝게 걸렸을 것이었다. 그가 네 시에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공터를 왕복했다고 해도 두 시간이다. 도저히 다섯 시 이십 분까지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두 루트를 섞는다 해도, 제1등산로가 이십 분이 걸리고 제2등산로가 한 시간이 걸리니 총 한 시간 이십 분. 네 시에 칼같이 집에서 나왔다 쳐도 다섯 시 이십 분까지는 역시 빡빡하지.”

물론 치카토의 친할머니는 그가 학교에서 돌아온 뒤로도 얼마간 깨어있었던 듯하니 그녀 몰래 네 시에 칼같이 집에서 나오는 건 불가능했으리라.

이런 까닭을 근거로 하여 경찰은 치카토에게 잠시나마 씌웠던 혐의를 거두었다.

일각에서는 친할머니가 위증을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지만, 그녀가 위증을 해서 얻을 건 없다는 결론이 나와 금세 묵살되었다. 손자를 소녀 살해의 범인으로 몰기 위해 위증을 할 정도로 에노키지마 가는 가족 관계가 뒤틀려있지 않았다. 주변 이웃들이 입을 모아 그리 증언했던 것이다.

“체포된 쌍둥이 동생은 결국 형刑을 받았나?”

우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책상 아래로 둔 두 손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 점을 류는 다소 경계하고 있었다. 얼굴에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아니. 그러지 못했어. 소녀가 추락사한 건 분명했지만 시신에서 동생의 지문 같은 건 나오질 않았거든. 소녀를 일부러 밀쳤다면 살인이지만, 소녀가 발을 헛디뎠다면 그건 단순한 사고야. 살인이라는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건 단순 사고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게 사고라면, 범인으로 추정되는 쌍둥이 동생에게 물을 죄도, 내릴 벌도 없다.”

“시시해 빠졌군.”

우노는 가슴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겼다.

“경찰은 그렇게 생각하고 체포했던 쌍둥이 동생을 풀어주려고 했지. 그런데 파출소 안 분위기가 조금 느슨해졌을 때, 구류되었던 쌍둥이 동생이 파출소를 뛰쳐나가 버린 거야.”

그의 굵은 눈썹이 브이 자로 기울어졌다. 의자 등받이에 붙어있던 넓은 등이 조금 뜨이는 게 류의 시야에 잡혔다.

“그 뒤로 그는 마을에서 자취를 감췄다더군. 이십 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마을에 얼굴 한 번 비추지 않고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어.”

“경찰이 추적하지 않았나?”

“했지. 했는데, 어린 녀석이라 그런지 순식간에 아이치 현을 벗어난 모양이더라고. 이튿날 쯤엔 경찰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실종 수사를 진행했지만 골든 타임을 놓쳤다고 할까. 영영 찾을 수 없게 됐지. 일본이 좀 넓어?”

“멍청하군…….”

뜨였던 등이 도로 등받이에 닿았다.

우노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코틴과 타르가 만든 누런 무늬를 구경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 생각할 게 있으면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제 머리 위를 올려다보곤 했다. 눈앞에 글록을 든 양아치가 있어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사고회로의 회전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팔을 뻗어 살육을 계속했던 것이다.

류는 잠깐의 침묵을 견디다가 입을 열었다.

“좀 전에 내가 그랬지. 우리한테는 한낱 가십이겠지만, 거기에 휘말린 인간들은 지금도 여전히 사건의 여파를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다고.”

우노의 시커멓고 커다란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에노키지마 가의 쌍둥이 형은 아버지를 따라 신관이 되었어. 평생을 마을 안에서만 살면서, 결혼도 않고 그저 신사만 지키고 있는 처지지. 꼭 속죄를 하는 것 같지 않아?”

“아아……. 뭐.”

“그러니 단언해 주겠어. 이 사건에서 쌍둥이 형이 소녀에게 어떤 위해를 가해 추락사하게 만든 건 확실해. 그런데 그는 대체 어떻게 소녀를 만났던 걸까?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무리라고 내가 계속 설명하고 있는데 말이야.”

“아니……. 딱히 무리는 아니지.”

무표정하게 우노 대작가님은 대답했다. 무표정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네가 하는 이야기는 아무런 재미가 없다. 두 번째는, 그러니 재미없는 이야기로 내 시간을 뺏은 답례는 해 주어야 한다.

류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시간과 공간이 문제라고 말하는 건가? 그럼 그 두 가지를 조작하면 되는 일 아닌가.”

우노는 표정 없는 얼굴로 대단한 소리를 지껄였다.

“쌍둥이 형이 소녀와 만날 약속을 잡았는지 안 잡았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그놈이 범인이라면 사건 현장인 산속 공터에 갔다는 건 확실하지. 그럼 네 시에 주택가에 있었던 놈이 산속 공터에 갔다가 다섯 시 이십 분까지 돌아오는 방법을 생각해 보면 된다.”

길고 얄쌍한 손가락이 마호가니 책상 위에서 직선을 그었다. 주택가와 공터를 잇는 루트를 형상화한 제스처일까. 그림을 그리면서까지 설명해 줄 상냥함은 없는 듯했다.

“제1등산로. 이건 주택가에서 아주 가깝다면서? 여길 지나면 고작 이십 분만에 공터에 도착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앞을 초등학생 애들이 막고 있었다는 거지만. 그리고 제2등산로. 이건 주택가에서 삼십 분 정도 떨어진 도롯가에 입구가 있다. 여길 거치면 한 시간만에 공터에 도착한다고 네놈이 그랬지.”

“그래. 제1등산로에 비하면 상당히 우회하는 경로니까 경찰들도 아예 상정을 하지 않았어.”

“나로서는 잘 이해가 안 된다만, 하여간 그랬다고 치자고.”

우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잇는다.

“주택가와 공터를 왕복하는 방법. 총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제1등산로만 사용하는 방법. 이건 왕복 사십 분이 걸리지만 초등학생들에게 목격된다. 두 번째는 제2등산로만 사용하는 방법. 이건 왕복 두 시간이 걸리지만 초등학생들에게 걸리지 않을 수 있지. 세 번째는 두 등산로를 다 사용하는 방법. 이십 분 플러스 한 시간이니 왕복 한 시간 이십 분이 걸린다. 물론 초등학생들한테 발각된다.”

네 시에 귀가한 치카토는 다섯 시 이십 분에 친할머니를 깨워 저녁을 먹었다. 그렇다면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두 번째 방법은 불가능하다. 세 번째 방법도 한 시간 이십 분이 걸리니 상당히 빡빡하다.

“여기서 범인이 조작할 수 없는 요소를 생각해 봐라.”

우노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리며 그리 물었다. 손가락으로 두드렸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위협적인 소리가 날 수 있는 건가. 류는 수염이 올라오기 시작한 턱을 살살 쓰다듬었다.

“조작할 수 없는 요소라니. 갑자기 그렇게 물으니 당황스럽군.”

“답을 알고 있는 거 아니었나?”

“아아, 뭐. 쌍둥이 형 본인에게 들었지.”

“그런데 왜 모르는 거지?”

호랑이가 으르렁대는 소리와 꼭 닮은 울림이었다.

“그야 풀이 과정은 듣지 않고 제가 범인이라는 해답만 덜렁 들었으니깐.”

“멍청하군…….”

이러다간 물려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어울려 주는 게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은 류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시선을 피하고 있으니 우노는 콧바람을 흥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절대로 조작할 수 없는 요소. 그건 제1등산로 앞에서 소꿉놀이를 하던 초등학생 증인들의 존재다.”

“음? 아아……. 그렇지. 자기가 여길 지나간 걸 비밀로 해 달라고 한들, 경찰 아저씨 앞에선 다 불고 마는 게 어린애들이니.”

“그 애들은 세 시 반부터 쭉 제1등산로 앞에 있었다고 했지? 그런데 그동안 등산로를 오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렇지. 파출소로 뛰어간 쌍둥이 동생 말고는 아무도 없었댔지.”

“그렇다면 그건 바꿀 수 없는 진실이다.”

우노가 가볍게 책상을 쳤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 가볍게 친 거고, 충돌로 난 소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주택가와 공터를 왕복하는 방법. 그 중 제1등산로를 사용하는 방법은 아예 불가능했다는 게 진실이라는 거다.”

“에이, 그건 좀 이상한데. 쌍둥이 형이 제2등산로로만 오갔다는 얘긴가? 아까 말했잖아. 왕복 두 시간이 걸린다고.”

주택가에서 제2등산로 출구까지가 삼십 분, 그리고 제2등산로 출구에서 공터까지가 삼십 분. 편도 한 시간에 왕복은 두 시간이 걸린다. 네 시에 출발해 다섯 시 이십 분까지 돌아올 수 있는 루트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우노는 한쪽 눈썹을 쓱 올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2등산로는 도롯가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도롯가가 뭔지 몰라? 도로 근처에 있다는 거 아냐. 그렇다는 건 자동차 내지 자전거로 접근할 수 있다는 거겠지. 걸어서 삼십 분이면 자전거로는 십오 분 자동차로는 십 분도 안 걸린다. 고등학생이 차를 몰았을 리는 없으니 아마 자전거를 탔을 거다. 그러면 편도 한 시간짜리 여정은 사십 오 분으로 줄어든다.”

생각해 보지 못했지만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왕복 두 시간을 왕복 한 시간 반으로 줄여서 뭐가 된다는 말인가. 네 시에 칼같이 출발한다 한들 한 시간 반이면 다섯 시 반이다. 친할머니를 깨웠다는 다섯 시 이십 분까지는 절대 돌아가지 못한다.

류가 대답을 못하고 그저 얼굴만 찡그리고 있으니 우노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선 또다시 말을 이었다.

“이러면 네 시 반에 나와도 여섯 시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 이게 내가 말한 공간의 조작이다.”

“여섯 시까지 돌아가면 안 되지 않나? 쌍둥이 형은 다섯 시 이십 분에…….”

시간의 조작, 이라는 말을 미리 마음속으로 되풀이하고 있던 류의 뇌리에 순간 섬광이 스쳤다.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이다. 잘만 움직이던 혀가 딱 굳어선 움직이지 않는다.

“깨달았나?”

사건이 일어났던 때는 하지에 근접한 6월 말. 다섯 시가 넘어도 밖이 이렇게 밝구나, 하고 치카토의 친할머니는 이야기 했다고 한다.

그래……. 하지에는 해가 오래도록 하늘에 머무른다.

그러니 분명 여섯 시가 넘어도 밖은 무척이나 밝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지의 일몰은 여덟 시에나 일어나니까…….

“네 시에 나왔든 네 시 반에 나왔든, 제2등산로를 왕복하는 이상 다섯 시 이십 분 이전에 귀가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때 집에는 누가 있지? 아버지와 쌍둥이 동생은 귀가가 늦어진다고 했고, 어머니는 항상 일곱 시 전후로 귀가하신다. 그렇다면 집에 있는 건 늘 방에 누워만 있는다는 친할머니 뿐.”

류는 사건 당시의 치카토의 심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소녀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치카토는, 잠든 친할머니 몰래 집을 나선다. 집에서 가까운 제1등산로로 가려고 했지만 보는 눈이 많아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자전거를 끌고 도로까지 나와 제2등산로로 향했다. 공터로 향하는 30분 간 수많은 잡념이 머릿속에서 사라질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뱃속에 모이고 모여 꼬일대로 꼬인 연심이 공터에 도착한 순간 터져나오고 만다.

그리고 소녀는 추락한다.

치카토는 추락한 소녀를 도우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소녀는 추락하고 얼마간 의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공터에서 겨우 십오 분을 내려가면 제1등산로의 출구가 나온다. 전력질주를 하면 십 분만에 주택가로 나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 발빠르게 움직인다면 소녀는 응급처치를 받아 얼마간 요양을 하고 건강을 회복할 수도 있다.

그런 속죄의 길이 치카토의 앞에는 있었다.

하지만 치카토는 그 길로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길로 갔다간 자신에게 오명이 씌워지는 걸 피할 수 없으니까.

그 길 앞에는 초등학생들이 있다. 등산로 출구로 달려나온 치카토를 본 초등학생들은 후일 퍼져나갈 소녀의 추락 사건과 어떤 연관을 지어 멋대로, 또 선명하게 상상할 것이다. 치카토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은 소녀를 그가 공터에서 밀어 버렸다고. 사실과는 많이 다른 이야기지만 어쨌거나 상상은 자유고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간다.

치카토의 눈에 그 길은, 속죄의 길인 동시에 오명의 길로 보였으리라.

얄궂게도 신은 그에게 빠져나갈 길을 하나 주었다. 제2등산로다. 이 길은 원체 인적이 없다. 여기로 오는 길에도 아무도 보지 못했으니, 가는 길에도 마주치지 않는다면 자신이 이 시간에 공터에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된다. 이른 바 완전 범죄다.

그래서 치카토는 가지 않은 길에 등을 돌렸다.

제2등산로를 되돌아갔다.

속죄도 않고 오명도 씌워지지 않는 아주 편안한 길을 치카토는 걸었다. 도망과 회피의 길이었다. 달콤한 죄악의 길을 걸으며 치카토는 자신의 결백을 조금 더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작전을 세웠다. 악마의 속삭임과 같은 계략이 머릿속에 착착 세워졌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할머니가 주무시고 계신다면 빠르게 작전을 실행하자고,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면서 치카토는 다짐하고 만다.

“그놈은 아마 네 시를 좀 넘겨서 할머니가 잠든 사이 집을 빠져나갔던 거겠지. 그런데 여섯 시 즈음에 돌아와서도 할머니는 잘 자고 계셨다. 그래서 그놈은 자신의 알리바이를 위해, 증인을 확보하기 위해, 시간을 국소적으로 조작할 계획을 세웠다. 할머니가 누워있는 방 안의 시계, 어쩌면 더 나아가 집 안의 시계를 전부 다섯 시 이십 분으로 바꿔두는 짓을 벌인 거지. 이게 바로 공간의 조작에 이은 시간의 조작이다.”

다른 때였다면 다섯 시와 여섯 시의 차이는 극명했을지도 모른다. 원래 저녁이라는 시간대는 대기를 샛노랗게 물들이는 노을 탓에 하늘빛이 상당히 변화무쌍하니까. 하지만 하지에 근접한 때는 다르다. 일몰이 여덟 시라면, 다섯 시와 여섯 시는 아무런 차이 없이 파란 하늘만을 보인다.

“그놈은 다섯 시 이십 분에 시계를 맞춰두고 할머니를 깨웠다. 그리고 같이 저녁을 먹고, 평소처럼 할머니를 재웠다. 이건 억측이지만 아마 밥에 할머니가 먹는 약을 섞어두었을지도 모르겠군. 그 할머니는 매일같이 방에서 잠을 잤다고 하지 않았나? 아마 약 기운이 세서 틈만 나면 잠들었던 거겠지.

아무리 다섯 시와 여섯 시가 비슷하다고 해도 할머니가 오래 깨어 있으면 곤란해져. 집안 시계는 여섯 시를 가리키는데 일곱 시에 귀가하는 어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둘러대기 어려워지잖나. 어머니가 돌아오기 전에 돌려둔 집안 시계를 원래대로 복구도 해 두어야 하고……. 그러니 그놈은 할머니를 일찍 재울 필요가 있었던 거다. 실제로 그 할머니, 밥먹고 손자랑 얘기 좀 하다가 잠들었다고 했잖아?“

치카토가 소녀와 리쿠토의 접선 약속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할머니를 재운다는 치카토의 전략은 유효했다. 일곱 시 쯤 하여 리쿠토의 신고로 소녀의 추락 사건을 접수한 경찰이 에노키지마 가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원래 같았으면 가족의 증언 같은 건 경찰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지.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달라. 그 할머니가 쌍둥이 형을 감싸면 살인 혐의는 쌍둥이 동생에게 가해지는 거다. 손자를 지키기 위해 또다른 손자를 내어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런 위증을 해서 그 할머니가 얻을 게 없다는 거다. 그러니 경찰도 할머니의 증언을 신뢰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

저는 이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이따금 그 날의 꿈을 꿉니다, 하고 아이치 현의 신관은 신사에 걸터앉은 채 말문을 열었다.

말다툼을 하다가 발을 헛디뎌 산비탈로 굴러떨어지고 만 소녀. 두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는 소녀를 어린 신관은 내려다 본다. 지금 사람을 불러와 응급처치를 시킨다면 소녀는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앞에 펼쳐진 두 갈림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왼쪽에 난 길은 주택가로 이어져 산을 나가기만 한다면 어른들을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어른들을 불러온다는 건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뜻도 되었다. 소녀를 직접 밀어 떨어뜨리진 않았지만, 소녀에게 큰 소리를 내 추락의 계기를 제공한 건 분명 어린 신관이 맞았다.

주민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알음알음 아는 작은 촌동네에서 그의 평판이 어디까지 떨어지게 될지, 어린 신관은 예상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의 시선이 오른쪽에 난 길로 향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오른쪽에 난 길은 인적이 얼마 없는 도롯가로 이어진다. 길을 따라 도로로 나가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그래, 어쩌면 소녀는 그저 잠깐의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깨어날 테고, 스스로 몸을 움직여 산을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꿈속의 그는 이것이 끔찍한 자기합리화라는 자각을 갖는다. 보편적인 윤리 법칙에 기대어 보자면 당장 왼쪽 길로 향해 어른들을 불러오는 것이 옳았다.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더군다나, 아직 생기지도 않은 추문이 두려워 죄없는 소녀의 목숨을 내던지는 건 말도 못하게 흉악한 짓이니까.

하지만 다리는 오른쪽 길을 따라 움직인다.

몸을 돌려 쓰러진 소녀를 쳐다보아도 발은 멈추지 않는다.

소녀의 머리맡에서 피가 흥건하게 배어나오다가, 이윽고 새하얀 천이 소녀의 몸을 덮는다.

가려진 소녀의 시신 뒤에는 신관의 쌍둥이 동생이 서 있다.

열 일곱에서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은 소년이 무표정하게 신관을 바라본다.

치카, 왜 그쪽 길로 간 거야?

소년이 묻는다.

소녀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치카, 왜 이쪽 길로 가지 않은 거야?

두 사람이 입을 모아 묻는다.

메아리처럼 울리고 반복되는 환청 속에서 시야가 점점 붉게 물드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신관은 수없이 반복한 악몽에서 깨어난다.

“만약 쌍둥이 형이 제1등산로로 나가 사람들을 불러왔다면 누명을 쓴 쌍둥이 동생이 마을에서 도망쳐 나오는 일은 없었겠지. 형이야 평판이 좀 떨어졌겠지만 소녀는 헛되게 목숨을 잃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지금은 신관 일을 하고 있는 에노키지마 치카토는 매일같이 그 날을 떠올리면서 나름의 속죄를 이어가고 있는 모양이야.”

“그래봤자 죽은 소녀도 도망친 동생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야말로 헛된 자기위로군.”

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는 두 사람 모두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다.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보아하니 우노는 슬슬 이 주제에 대한 흥미를 잃은 듯했다. 애시당초 쌍둥이의 부재증명이라며 너스레를 떤 것치고는 시시한 수수께끼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글쎄, 죽어버린 소녀는 모르겠지만 도망친 동생은 또 이야기가 다르지. 죽은 사람을 천국에서 끌고 올 수는 없지만 산 사람은 두 손으로 잡아올 수 있잖아.”

“네놈이 아까 그랬을 텐데. 일본은 넓다고. 짭새도 포기한 실종 수사를 대체 누가 맡는다는 말이지?”

“수사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는 좀 그렇지만, 내가 적당히 맡아주기로 했지.”

실력이 좋은 뒷골목 의사는 발이 넓다. 일반 병원에서 치료했다간 신고가 들어가는 환자나, 지명수배가 내려져 병원 문턱조차 넘지 못하는 환자를 남몰래 치료해주다 보면 자연스레 야쿠자들과 얼굴을 트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실력까지 좋은 뒷골목 의사는 상당한 희귀종이라서 야쿠자들이 건들지 않는 건 물론 때로는 호감까지 보이고는 한다.

류는 뒷골목 의사 일로 쌓은 인맥을 십분 활용했다. 아이치 현에서 도망나온 남자애를 하나 찾고 있는데, 올해로 아마 마흔이 좀 넘었을 거다. 얼굴은 이 사진이랑 비슷하게 생겼을 거다……. 에노키지마 치카토의 사진을 내밀면 야쿠자들은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기억해두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바로 지난 달에 쓸만한 정보가 들어왔다. 류가 퍼뜨린 사진과 비슷한 건달이 하나 있다는 것이었다. 이름은 에지마 아다무라고 하는데, 척 봐도 가명이긴 하지만 그놈의 본명은 아무도 모른다고 정보를 흘린 야쿠자는 덧붙였다.

“갑자기 무슨 약을 판다고 지랄이더니……. 그 건달놈 잡으려고 그랬던 거냐?”

“걔가 약 배달을 자주 한다고 하더라고. 손 좀 뻗쳐보면 닿지 않을까 했지.”

“네놈이 조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리 없으니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만.”

“한 달 동안 약 팔아서 주머니에 돈 좀 넣어줬잖아. 좋은 게 좋은 거 아냐?”

“그딴 껌값을 보내놓고…….”

아는 야쿠자에게 요즘 돌고 있는 약의 윗물과 연결시켜 달라는 부탁을 했다. 연락이 트인 윗물에게, 이쪽으로 물건을 좀 보내주는 대신 뒷골목 의사가 무해성을 보증한 약이라는 홍보를 하면 서로 좋지 않겠느냐고 컨택도 했다. 그들에게서 무사히 물건을 받은 류는 그날부터 약 배달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류는 정말로 에지마 아다무와 만났다.

주기적으로 약을 사는 밴드맨에게 추가 주문을 받아 라이브하우스에 들어선 참이었다. 사진으로 주구장창 보아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라이브하우스 뒤쪽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가 왜 라이브하우스에 있는 건지는 모른다. 밴드맨이 다른 약팔이에게 이중 주문을 했던 걸까. 하여튼 그런 걸 생각할 때는 아니었다. 당장 그를 붙잡아 아이치 현으로 끌고 가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 불쌍한 신관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고뇌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그 아담인지 뭔지 하는 놈을 납치했다는 거냐?”

“내가 병원에 잡아 넣은 게 어제니깐, 아마 지금쯤 마취 상태로 옮겨지고 있겠군.”

류의 대답을 들은 우노는 왠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뭐야,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시동을 걸지?”

서재에 들어선 후 처음으로 보는 그의 미소인데도 류는 전혀 안도감을 찾을 수 없었다. 우노는 앞으로 몸을 기울여 두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대고는 손을 모았다.

“시골 마을에서 도망쳐 나와 아무 연고 없는 곳에서 건달로 이십 년을 산 녀석이야.”

중후한 목소리에 끈적한 감이 섞인다.

“네놈이 병원에서 부리는 초짜 녀석들. 그 녀석들이 과연 오래 묵은 맹수 같은 녀석을 잘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조직의 수뇌로 한참을 있었던 우노는 사람을 보는 눈이 무서울 정도로 정밀했다.

그런 그의 말이라면 한순간이라도, 믿을 수밖에 없다.

시커먼 눈동자를 바라보던 류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오래 묵은 맹수여도 마취제에 쩔면 별 방도가 없지. 나도 나름 의과대학에서 수련했던 사람이야. 약 용량 정도는 잘 계산한다고.”

“약은 맞춰야 소용이 있는 것이지.”

“글쎄, 병원으로 옮길 때 내가 이미 재우고 왔다니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스마트폰의 착신 진동이다. 류는 짧게 양해를 구하고 스마트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병원 데스크에서 온 전화였다.

“받아 봐.”

말을 잃고 있으니 우노가 관대한 표정으로 권했다.

수신 버튼을 눌렀다. 전파 너머에서 뒷골목 수련의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큰일입니다! 선생님이 데리고 오셨던 환자가 난동을 부리더니 병원을 탈출해서…….”

곁눈질로 본 우노는 그제야 굴곡이 뚜렷한 얼굴을 구기며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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