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연성

모노몬의 마지막 수업

2020.10.11

 

스산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오가며 마주칠 수 있는 해파리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고, 그나마 보이는 이들은 평소보다 더 유령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안개협곡이 이렇지는 않았다. 퀴렐은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결국 배회하는 해파리 하나를 붙잡아 물었다.

 

“저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말씀 좀 묻겠습니다.”

 

다리가 긴 해파리는 천천히 돌아섰다. 가닥이 흩날리며 따라왔다.

 

“모험가인가요? 미안하지만 근래의 이곳은 외지인을 환영하지 않아요. 돌아가시겠나요?”

“그거 이상하군요. 안개협곡이 언제부터 외지인을 배척했단 말이지요?”

“당신이 아실 것 없어요.”

 

해파리는 그대로 떠날 모양새였다. 퀴렐은 다급하게 덧붙였다.

 

“일단 오해가 하나 있군요. 저는 이곳에 살아요. 단지 며칠 자리를 비웠는데 분위기가 바뀌어있어서 당황하던 차입니다.”

“이곳에 산다고요.”

 

해파리는 별로 믿지 않는 투로 말하고는 퀴렐을 훑어보았다. 퀴렐은 어깨를 으쓱였다.

 

“네, 기록보관소에서 기거합니다.”

“혹시, 그렇다면 모노몬의 제자인가요?”

“맞습니다. 그분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해파리가 탄식을 내뱉었다. 불신의 시선이 측은함이 담긴 눈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기록보관소로 가시면 알게 될 거예요.”

“네? 말씀은 감사하지만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제 입으로 알려드리기에는 송구스러운 일이에요. 직접 가보세요.”

 

그쯤에서 퀴렐은 눈치챘다. 아, 그 일 때문이구나. 마음속에 꽁꽁 묻어두어야 했던 사실이 발치로 툭 떨어졌다. 씁쓸했고, 해방감은 들지 않았다. 이곳의 눅진한 안개는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차고 습했다.

 

해파리들은 천성이 맹렬하거나 둔탁한 몸짓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은 발소리도 없이 몸을 나풀거리며 매끄럽게 유영하였다. 가끔은 제 몸을 물살에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런 해파리들이 하나의 방향을 가지는 일은 몹시 드문 광경이었다. 수백 개의 반투명한 자락이 급하게 굴며 퀴렐을 앞서갔다. 퀴렐은 걸어서 그들의 뒤를 따랐다. 굳이 뛰지는 않았다. 고작 뛰어가는 정도로 바꿀 수 없었다. 퀴렐은 그것을 잘 알았고, 깊은 체념에 물든 지 오래였다.

 

그러나 슬픔이 무디어지지는 못했다. 기록보관소에 들어섰을 때 퀴렐은 목이 턱 막혔다. 그곳에는 애절하고 간곡한 흐름이 있었다. 수백 마리의 해파리들이 커다란 문에 들러붙었고, 그러지 못한 자는 방황하였다.

 

“모노몬님. 다시 생각해주세요, 네?”

“한 번만 나와주세요, 저희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신성 둥지의 이들이 뭐라고 속삭였지요? 뭐든 거짓말이에요. 믿지 말아요!”

“안 돼요, 부디 그러지 마세요.”

“나와서 저희를 보고 말해요. 날 봐요!”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요. 그러니까 모노몬님. 제발......”

“절대 안 돼요! 그렇게 놔둘 것 같아요?”

 

아우성이 울렸다. 기포 방울이 우글거렸다가 터졌다. 물결이 어른거렸다. 전기 빛 파리들이 빙빙 돌았다. 유리 플라스크 몇 개가 깨지고 산성 액이 흘러나왔다. 퀴렐은 눈가를 훔쳤다. 지독히도 엉망이었다.

 

“제발요, 모노몬. 이렇게 많은 이들이 반대하잖아요.”

 

그 난장판에 섞여 퀴렐도 작게 속삭였다.

 

기록보관소가 다시 평소의 정적을 되찾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밤이 되어서야 그 많은 해파리들이 물러갔다. 순순하게 물러간 것은 아니었고, 그들을 어르고 타일러 돌려 보내는데 무수한 노력이 필요했다. 기록보관소의 소동을 잠재우는데 기여한 이들은 저마다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홀이 텅 비고, 퀴렐은 아무도 없는 홀을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거대한 문을 작게 두드렸다.

 

“모노몬. 저 퀴렐입니다. 다른 이들은 물러갔어요.”

 

낮의 긴 시간동안 어떤 답도 하지 않던 문 너머에서 응답이 돌아왔다.

 

“들어와요, 퀴렐.”

 

퀴렐은 문을 열었다. 문은 가볍게 밀렸다. 퀴렐은 작은 틈을 만들고 들어갔으며 문은 다시 닫혔다. 잠깐이라도 열렸다는 흔적을 부정하듯이.

 

커다란 문 너머에는 거대한 유리관이 가득했다. 안에는 형광 빛을 뿜는 산성액이 채워져 있었는데 그 안에서 글씨가 부유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기록 매체였다. 스승의 기록보관소를 상징하는 물건. 그리고 또 하나, 그 장소를 상징하는 인물이 그 사이에 서 있었다. 스승, 그들의 스승, 모노몬.

 

“돌아왔습니다. 스승님.”

 

퀴렐은 고개를 숙였다. 모노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았다.

 

“수고했어요. 퀴렐. 언제 왔나요?”

“오늘 오전에 왔어요.”

“많이 기다리게 했군요. 면목 없네요.”

“괜찮아요, 모노몬.”

 

그 사이에 있었던 소동은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모노몬은 작은 산성 용기를 닫고 돌아서서 손을 씻어내었다.

 

“이야기가 길어지겠지요? 일단 앉아요, 퀴렐. 차를 내오겠어요.”

“고맙습니다.”

 

퀴렐은 의자에 앉았고, 말린 이끼를 우려내어 차를 끓이는 모노몬을 지켜보았다. 모노몬의 행동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퀴렐은 문득 묻고 싶어졌다. 아까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아무렇지 않아요? 그 무수한 애원을 듣고도 그리 태연할 수 있나요?

 

모노몬은 찻잔을 퀴렐 앞에 놓았다. 수증기가 위로 떠올라 흩어졌다. 퀴렐은 찻잔을 잡았고 모노몬은 맞은편에 앉았다. 제 몫의 차를 따르고 모노몬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상황은 어떤가요?”

 

퀴렐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놓았다. 마실 마음이 나질 않았다.

 

“영혼 성소의 학자들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모노몬이 가닥을 들어 올려 턱을 감싸 쥐었다. 모노몬 특유의 신중한 표정을 살피며 퀴렐은 말을 이었다.

 

“제가 파악한 바를 최대한 말씀드리겠습니다. 눈물의 도시 시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몇 달 전 영혼 성소의 학자들이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원래도 성소에 틀어박혀 교류 없이 지냈다고는 하지만 아예 접근을 막은 것은 다른 일이지요. 그리고 도시 경비병은 순찰 시 영혼성소 인근을 우회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기가 하루 이틀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난다고 하는데 언질을 받은 것이 분명하지요. 경비병들 몇몇과 이야기해봤는데 지침이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누가 바꾸었을까요? 학자들이 경비대에게 경고하였고, 경비대가 그 말을 따라주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흠, 제 생각에는 경비병이 그들의 말을 순순히 따라서 비켜 주었을 리는 없을 것 같군요. 학자들이 경비병들과 원만하거나, 압력을 가할 만한 위치는 아니지 않습니까? 도시의 경비병들에게 지침을 바꾸라 할 수 있는 자는 감시자 루리엔 정도이지요. 그러나 감시자 루리엔은 웬만하면 감시탑에서 은둔하며 도시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더군요. 그런 루리엔을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누구일까요? 루리엔이 창백한 왕의 수족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퀴렐은 사람들 사이에 대화로 정보를 취하는 것에 재능이 있는 자였다. 눈에 튀지 않는 평범한 모습과 호감을 사는 말재주로 눈물의 도시에 섞여들어 시민들에게 말을 붙여 이것저것 알아냈을 것이다. 때때로 유능한 정보원이 되어주는 고마운 제자이다. 모노몬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고맙군요, 퀴렐. 하지만 사실만 요약하면 영혼 성소가 문을 걸어 잠갔고, 경비병이 그런 영혼 성소를 피하고 있다, 가 되는군요. 루리엔에서 창백한 왕까지의 개입은 다소 비약으로 보이는군요. 그리고, 그 폐쇄가 반역으로 이어졌다는 증거는 어디 있나요?”

“꼭 루리엔이 아니더라도, 경비대를 움직일 수 있는 세력의 끝에는 왕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퀴렐이 멋쩍게 웃었다.

 

“사실, 대화나 추측으로 얻을 수 있는 내용에 한계가 있어 직접 들어 가봤어요.”

“어느 곳을 말하는 건가요? 영혼 성소? 백색 궁전? 감시자의 탑?”

“영혼 성소입니다. 외부인의 왕래를 막긴 했으나 학자들이 드나들 장소는 있기 마련이지요.”

“퀴렐.”

 

모노몬은 질책하는 어조로 퀴렐을 불렀다. 퀴렐은 손을 내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들키지 않았어요.”

“그 문제가 아니지요. 위험해지면 어쩌려고 그랬나요?”

“중요한 문제니, 좀 더 확실하게 파악하고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모노몬.”

 

퀴렐은 이해를 구하듯 모노몬을 보았다. 모노몬은 퀴렐의 대못으로 시선을 내렸다.

 

언젠가 모노몬은 퀴렐에게 대못을 다루는 법을 배우게 했다. 신성둥지를 자유롭게 오가기 위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퀴렐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도록 도우기위한 마음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된 제자에게 더더욱 많은 짐을 지우게 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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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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