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연성

야수 호넷

2020.10.11

호넷의 위치는 애매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했다.

 

호넷의 아버지는 왕국을 재건하여 신성 둥지에서 강대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호넷의 어머니는 그의 지배를 거부하는 야수들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각각 창백한 왕과 야수 헤라라고 불리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서로는 각자의 세력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적이었다. 그 사이에서 호넷은 태어났다.

 

눈물의 도시의 호사가들은, 개중에서도 왕을 두고 입방아를 찧을 만큼 겁이 없는 자들은 하룻밤의 불장난이라고 떠들어댔다. 갈라진 운명에도 피어오른 사랑이니 어쩌니. 물론 신성시되는 왕을 그리 말할 자는 많지 않았으므로 이런 종류의 소문은 번지지 못했다. 창백한 왕의 정식 반려인 백의 여사의 존재도 한몫했다. 그들의 신성을 걷어내고도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이들은 결합 자체를 믿지 않았다. 가장 적대적인 두 세력이 그런 식으로 자손을 만들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 식으로 소문은 사라져 갔지만......

 

이유는 있었다. 바로 호넷에게 있었다.

 

호넷은 깊은 둥지에서 자랐다. 깊은 둥지에서 호넷은 가장 흰 존재였다. 그 시대에 백색 존재들은 대표적인 위대한 존재들이었다. 강인하나, 절대적인 힘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던 야수들에게 위대한 힘이 주어진 것이다.

 

이쯤 읽었으면 당신은 호넷이 수단으로 자라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백색 궁전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야수들은 외부의 이들에게는 가차 없을지라도 내부의 결속력은 강했다. 이미 야수의 일원이라면, 희다는 것은 문제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호넷은 사랑받는 공주였다. 야수들의 무리에서 공주라는 것은 엄격한 예의범절과 그에 걸맞는 품위를 지낼 것을 요구받지 않는다. 사랑받는다는 것이 대중 사이를 고고하게 걸으며 탄성과 환호성을 듣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야수들은 하나의 공동체였고, 가까운 가족이었으며, 공주란 모두의 아이란 의미였고, 사랑이란 가족으로서 아이에게 주어야 마땅할 존중과 애정이었다.

 

호넷은 비단을 짜는 것을 기웃거렸으며 때로는 실을 타고 환호성을 지르며 활공하였고 또래 거미들과 굴을 파고 비밀기지를 만들었다. 깊은 둥지에서 그 나이대의 활기는 마음껏 펼쳐졌다. 이곳저곳을 쏘다니다가 다치고 가끔은 따끔하게 혼도 나고, 그러다가 풀이 죽은 호넷을 누군가는 달래주었다.

 

그렇게 자랐다. 호넷이 발이 닿는 모든 안락한 곳은 깊은 둥지였으므로 그곳을 집으로, 호넷이 마주하는 모든 이들은 거미들이었으므로 그들을 가족이라 여기며 자라났다. 자신의 소속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둡고 복잡한 장소였지만 호넷의 웃음소리는 환하게 울렸다.

 

호넷의 어머니, 야수 헤라도 빼놓을 수 없다. 헤라는 호넷에게 좋은 어머니였다. 때때로 손수 비단을 짜서 딸을 위한 옷을 지어주었다. 호넷은 어머니를 사랑했고, 지도자로서 존경했다. 사마귀와 전쟁이 벌어지는 날에는 깊은 둥지 전체가 열기로 물들었는데, 헤라는 그런 야수들에게 지시를 내렸고 야수들은 힘차게 바늘을 다잡았다. 호넷 또한 그 열기에 달뜨며 자긍심을 공유했다.

 

그러니 호넷 또한 야수였다. 야수로 자라지 않을 수 없었다.

 

*

 

그와는 대조적으로, 호넷은 백색 궁전에 딱 한 번 발을 디뎠다.

 

언젠가 호넷의 방문이 예고되고 창백한 왕과 혈연적인 관계가 있음이 알려졌을 때 백색 궁전의 몇몇 이들은 왕의 핏줄이 창백한 왕에게 드디어 돌아온다는 쪽으로 결론을 짓고 환영회를 준비했다. 모든 이들이 숭배에 물들었던 무리의 굳은 사고였다.

 

백색 궁전에 들어온 호넷은 등장부터 기대를 깨뜨려주었다.

 

예법이 억제하지 않은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호넷은 궁전에 들어섰다. 선명한 붉은 옷이 모든 이의 이목을 집중했다. 옷의 형식은 둥근 망토로 간단했지만, 색상은 도드라졌다. 백색 궁전에서 처음 나타난 색이었다. 거미들에 의해 짜인 비단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손에 들린 건 기사들의 눈에 익던 대못이 아니었다. 거미들의 상징인 바늘이었다. 이쯤 되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호넷은 거미의 일원이었으며, 야수였다.

 

백색 궁전에서는 왕의 세력이 아닌 자를 볼 일이 없었다. 창백한 왕의 무한한 영광 아래....... 라는 인사말을 꺼내려던 시종은 잠시 대처를 잃었다. 호넷이 쏘아붙였다.

 

“뭘 그리 보지?”

“저기, 실례지만 귀하께서는 성함이......”

 

다른 이의 방문은 예정되어 있지 않았지만, 시종은 혹시나 싶어서 신분을 물었다. 호넷은 깔끔하게 답했다.

 

“호넷. 깊은 둥지를 대표하여 창백한 왕을 만나고자 왔다.”

 

이름을 확인한 이는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왕의 자식을 기대했지 야수를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둘이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반면에 호넷은 불청객이 된 느낌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야수로서 이들에게 벌벌 떠는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왜 가만히 있지? 내가 와선 안 되던가?”

 

얼빠진 채 호넷을 보던 시종들이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호넷을 창백한 왕에게로 안내했다. 그러면서 공주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준비된 행사가 흐지부지 되었고, 과연 야수의 일원을 왕과 대면시키는 것이 옳은지, 폐하의 자식을 그런 식으로 재단해도 되는지, 방금 그 자식이 깊은 둥지를 대표한다고 하지 않았냐는 늦은 왈가불가는 뒤에 남겨진 신하들의 몫이 되었다.

 

호넷은 복도를 걸었고 왕좌 앞에 섰다. 의식할 일이 없었던 아버지와 딸이 서로를 살폈다. 백색 존재라는 공통점이 있었으나 그뿐이다.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서 있었다.

 

“처음 뵙겠어요.”

 

호넷이 고개를 들고 창백한 왕 앞에 서자, 절이나 경례도 없이 바로 얼굴을 마주하는 광경에 측근들이 기겁하였다. 그들이 웅성거리자, 창백한 왕은 손을 들어 입을 닫게 했다. 주위가 고요해지자 창백한 왕이 말했다.

 

“그래, 처음이구나.”

 

창백한 왕의 말에 사적인 대화 특유의 부드러움이 들어갔다. 창백한 왕이 호넷을 혈육으로서 약간의 무례를 넘겨준다는 신호이다. 측근들은 민감하게 파악하고 허리를 더 숙였다.

 

“평안히 지내셨는지요.”

“글쎄. ......”

 

그날의 결합에서 헤라에게 중요했던 것은 호넷이었지만, 창백한 왕에게 중요했던 것은 차후의 계약이었다. 그렇기에 창백한 왕은 호넷에 대해서는 기억이 희미했다. 따라서 그는 자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또한 창백한 왕은 자신이 처신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맞춰주는 위치의 사람이었다. 물론 가족관계만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표면적으로라도, 손을 내민다거나 다정하게 굴어야 했지만 미숙했고, 어설픈 정을 펼쳐 보이지도 않고 본론으로 넘겨버렸다. 그것도 하필이면 대립할 소재를 꺼내버리는 방향으로.

 

“왕국의 변두리에서 들려오는 사고들이 나를 골치 아프게 만들지.”

 

측근 몇몇은 움찔거렸다. 왕이 불편을 호소하는 것은 신하들이 제때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결과이며 잘못이자 중대한 문제다. 호넷은 만족스러웠다. 그 사고들은 거미들이 제대로 저항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웃음을 내보이는 대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절 노릇을 할 수 있을 만큼은 충분히 자랐다.

 

“깊은 둥지에서의 전차 건설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사실 저번의 경고로 이미 전해졌으리라 생각하는데, 부족했던 모양인가 봐요.”

 

저번의 경고라 하면 거미들이 인부들을 습격하고, 그들이 파던 굴도 무너뜨린 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사장이 망가졌음은 물론이고, 그 일로 왕국은 타격을 제법 입었다. 창백한 왕은 팔을 팔걸이에 얹고 되물었다.

 

“내가 신성 둥지에서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이 있지?”

“깊은 둥지는 야수들의 영역이지요.”

“감히 누구 앞에서!”

 

신하 하나가 윽박질렀다. 호넷은 어깨를 으쓱였다. 신성둥지의 모든 땅이 그들의 소유라는 인식은 왕국민의 것이었다. 그리고 호넷은 왕국민이 아니었다. 왕이 자신의 아버지래도 다르지 않다. 왕국 이전부터 살아오던 거미들이 어엿하게 지키고 있는데 누가 제멋대로 소유를 주장하지?

 

호넷이 어디에 서 있는지는 선명해졌다. 맹랑하게도, 왕의 자식이기보다 야수이고자 하는 자에게 예의가 필요할까? 신하들이 적의를 표명하려고 했고, 왕은 다시 한번 손을 들어 발언을 막았다. 호넷은 ‘아하, 그렇게 나오겠다는 말이지?’ 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슥 보고 말을 이었다.

 

“어떤 타협도 없고, 모든 형식의 접근을 침범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야수들의 전언입니다. 하실 말씀이 있나요?”

 

창백한 왕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전언은 들었다. 하지만 차후에 이야기를 더 나눠보고 싶구나.”

“이야기를 나누어봐도 달라질 것은 없을걸요?”

“왕국에서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많지.”

“그 어떤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시선이 맞부딪혔다. 서로 적으로 간주하는 눈이었다. 관계가 있다는 이유로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호기심도 싹 사라졌다. 제 뜻대로 되지 않는 흔치 않은 상황에 창백한 왕은 눈이 꽤 매서워졌으나 호넷은 한 발도 물러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거미들은 현명하다. 그들이 자존심 때문에 노면전차 건설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깊은 둥지는 복잡하게 꼬인 길을 이점으로 삼아 방어하고 있다. 추가로 함정을 잔뜩 만들어 접근을 차단하기도 했다. 그런 깊은 둥지로 한 번에 통할 수 있는 전차를 통하게 만들겠다고? 그러면 그 전차에는 군인이 타고 돌격해오겠지. 적에게 심장을 내주는 꼴이다. 그 어떤 이유로도 허락할 수 없다.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돌아가 보겠어요.”

“얘야, 잠시만.”

“어머니께서 기다리셔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 호넷은 분명하게 말하며 알량한 수작을 단칼에 끊어냈다.

 

어쩌면 호넷은 유연하게 굴 수도 있었다. 야수들의 사절이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하고, 창백한 왕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와의 관계를 강조하며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처신에 능란한 도시의 귀족들처럼. 하지만 호넷은 그러지 않았다.

 

호넷은 휙 돌아섰다. 흰 궁전에 오롯하게 선 모습은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궁전의 방식에 길들지 않은 걸음걸이였다.

 

호넷에게는 깊은 둥지가 있었다. 어머니 헤라가 있었다. 그곳에서 받은 애정은 호넷을 채워주었다. 그곳에서 배운 야수다움은 호넷을 용맹하게 만들어주었다. 호넷은 그들이 준 것을 제 안에 쌓으며 자랐다. 단단함은 그로 인한 결과였다. 이미 속이 꽉 채워진 호넷에게 백색 궁전의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백색 궁전의 얄팍한 관계가 호넷을 붙잡지 못했고, 권위가 호넷을 누르지 못한다. 호넷이 위치하는 곳은 깊은 둥지였다.

 

호넷이 떠난 자리에서 신하들은 속삭였다. 어쩌면 폐하께서 위협적인 적을 만드셨을지도 모른다고. 야수에게 우리를 겨냥할 칼을 안겨주었다고. 저 아이는 자라 훗날 신성 왕국을 위협하리라고.

 

미래를 예지할 수 있다는 창백한 왕은 턱을 괴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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