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上
북부대공 혼테일과 주카
눈바람이 칼처럼 휘날렸다.
주카는 하얀 옷을 입은 숨을 내쉬며 힘겹게 발목까지 쌓인 눈을 헤쳤다. 천으로 만들어진 신은 축축한 눈이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지 못했다. 최대한 두껍게 입었다지만 어디까지나 남부의 기준이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추위에 눈조차 걷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아직 가을인 것이 다행이네. 겨울이었으면 북부에 발을 딛지도 못한 채 동사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주카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단출하게 입은 여인을 귀신 보듯이 힐긋였다. 북부에는 외지인의 출입이 흔치 않으니 절로 시선이 쏠렸다.
처음 마주한 북부는 건축 양식이며 길이 남부와 전혀 달라 헤메일 수밖에 없었다. 주카는 누가 빼앗아 갈까 현재 자신의 전 재산이자 모든 것이 들어있는 가방을 단단히 붙들었다. 붉은 눈으로 조심스레 행인들을 살피다가 주카는 개중 약간의 걱정을 담아 그녀를 살피는 중년의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대공의 성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원래 정치 싸움이 다 그런 거였다. 형제자매 없이 귀한 독녀로 자라 진흙탕 싸움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이 주카의 패인이었다. 급작스레 몸을 불린 귀족 세력과 갑자기 병세로 쓰러진 아버지. 유일한 황위 계승권자는 곧 그 자만 없으면 왕족이 아니라도 황위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과 의미를 같이했다. 시시각각 숨통을 조여오는 죽음의 위협에서 주카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애썼다. 그러나 5번째로 은수저가 검게 물든 날 주카는 혼수상태인 아버지 옆에서 한참을 섧게 울었다. 누가 볼새라 짓무른 눈가를 문지르며 일어서려는 찰나 정신을 잃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팔을 잡아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흐린 눈을 뜨고 속삭였다.
도망치렴. 주카.
주카의 아버지는 숨겨 둔 황제의 상징인 인장을 주카 손에 안겨 주었다. 이것이 없으면 황위에 오르지는 못할 거란다. 우선 몸을 피한 다음 세력을 불리렴. 한사코 거절했지만 주카도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주카는 이틀 후 달이 뜨지 않은 밤 궁을 뛰쳐나왔다. 정든 고향인 오르비스를 떠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주카는 최대한 울지 않으려 애쓰며 몰래 가져온 이동 스크롤을 펼쳤다. 궁전 속에서 자라온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곳. 의탁할 만한 곳. 그래서 선택한 곳이 이곳이었다.
지리적 위치 때문에 오르비스와 정치적 관련성이 낮으며, 척박한 기후와 몬스터들을 막는 최전방인 북부의 요새. 이곳이라면 암살자도 쉬이 좇아오지는 못하리라. 과연 날카롭게 하늘을 찌를 듯 고개를 치켜든 성문은 낯선 자의 입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의심스러운 눈초리와 날카로운 창끝이 주카를 향했다.
“누구십니까?”
“오르비스의 제1왕녀, 주카라고 합니다.”
“오르비스? 오르비스라 함은….”
“대공을 뵙고자 하는데, 문을 열어주시겠어요?”
추위에 입꼬리조차 끌어올리기 어려웠지만 주카는 애써 생긋 웃는 낯을 지어 보였다. 경비병은 적대감을 지우지 않은 채 주카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왕녀라 하기엔 주카 스스로도 자신이 호위 하나 없는 혈혈단신으로 온 것을 알기에 조용히 품에서 굼화 한 닢을 꺼냈다. 손에 떨어진 작은 뇌물에 그제야 철문은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뱉으며 아가리를 벌렸다.
실내라고 특별히 더 따뜻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바람은 불지 않았기에 더 이상 몸이 덜덜 떨리지는 않았다. 시종을 따라 응접실로 안내된 주카는 대공께서는 현재 출타 중이라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 언제 돌아오실 예정이신가요?”
“그, 그것이 아마…”
말꼬리를 흐리는 것을 보아서는 정확한 일정이 잡혀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주카는 그러면 기다리겠다는 말과 함께 약간은 딱딱한 소파에 앉았다. 기다리는 건 매서운 눈보라를 헤치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한참 의미없는 시간이 흘렀다. 눈바람이 창을 때리는 소리가 더욱 짙어지고 어둑어둑한 밤이 되어서야 대공은 얼굴을 비쳤다.
“나를 찾았다고.”
“대공을 뵙니다. 오르비스의 제 1왕녀. 주카라고 합니다.”
주카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마 끄트머리를 잡고, 무릎은 살짝 숙여서. 궁중 예법을 따른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어올리니 보랏빛 동공이 주카를 찬찬히 훑고 있었다. 용의 핏줄을 이어받았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사내는 키가 보통 사람과 다르게 매우 컸고 날카로운 눈을 하고 있었다. 실내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그는 온 몸에 차가운 공기를 휘감고 있었다.
“왕녀? 오르비스의.”
“네.”
“오르비스의 왕녀라면 더 좋은 조건의 사람과 만날 수 있을 터인데, 왜 구태여 이곳까지 친히 행차하셨지?”
잔뜩 날이 선 어조에 주카는 놀라 눈을 깜박였다. 그는 저 밖의 눈보라처럼 주카를 쫓아내려 하고 있었다. 주카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실례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내게 혼담을 넣은 자들 중 하나가 아닌가.”
“아니에요! 저는 그저…!”
무언가 오해가 있음을 직감한 주카는 급히 손을 흔들었다. 아, 아니, 아닙니다. 그런 의미로 방문하지는 않았습니다. 주카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자안의 대공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례했군. 요새 혼담 제의가 많이 들어와서 말이야. 혼테일이다. 알고 있겠지만. 무슨 일로 찾았지?”
그리 말하며 혼테일은 소파에 풀썩 앉아 주카와 시선을 맞추었다. 드디어 이름을 밝힌 남자는 대화를 나눌 의향을 보였다. 그러나 많이 피곤해 보이는지라 주카는 망설이지 않고 본론부터 꺼냈다. 최대한 왕녀로서의 품위를 보이기 위해 짧게 헛기침을 한 주카는 억지로 목소리를 깔았다.
“당분간 이 곳에 몸을 의탁하고 싶습니다.”
“여기는 마냥 살기 좋은 곳이 아니야. 가출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군.”
“가출이 아니라…”
주카는 가방을 열어 금빛 인장을 꺼내 보았다. 인장 상단에 자리한 왕가의 상징이 빛을 어지러이 산란시켰다. 주카의 손바닥만한 인장이 탁자 위로 묵직하게 떨어지자 혼테일도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한 듯 눈을 크게 떴다.
“황제의 상징입니다. 이게 제 손에 있다는 뜻은 제가 곧 오르비스라는 뜻이니 이제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걸 내게 보여주는 의도는?”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대공께서 절 보호해 주신다면 오르비스는 당신의 은혜를 잊지 않고 무엇이든 지원해줄 것을 약조합니다. 설령 그것이... 군사라 할지라도요.”
혼테일이 쉬이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아는 주카는 살짝 웃어 보였다. 가장 부강한 제국의 황태자. 그러나 지금은 척박한 북부에 유배된 반역자의 아들. 아무리 몸을 숙이고 웅크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한때 황태자였던 몸이었다. 모두가 쉬쉬하고 있었지만 많은 자가 그가 복수를 계획하고 있으리라 예측했다. 의중을 살피고자 낯을 살피자 이마에 손을 짚고 주카를 꿰뚫듯 빤히 바라보는 혼테일이 보였다. 그 눈빛에 주카는 괜히 위축이 되어 눈을 맞추는 대신 아래에 깔린 러그로 시선을 내렸다.
“…그렇다면 여기에 머물러도 좋다.”
잠깐의 침묵 끝에 제안을 승낙한 혼테일은 짤막한 숨과 함께 손을 들었다. 곧바로 다가온 하인으로 보이는 자에게 그는 무어라 질문을 던졌다. 엿듣지 못하게 함인지 목소리는 흐릿해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하인은 왜인지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혹여나 대공이 지금 당장 오르비스에 황녀를 데려가라는 전갈을 넣으라 속삭이는 건 아닌지 하는 불안감에 주카는 일부러 러그의 짜임새에 집중했다. 고동색과 하얀색 모피의 패턴을 청천히 훑는 사이 혼테일과 대화를 나누던 하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비웠다. 다시 둘만 남은 응접실에서 혼테일은 고개를 돌려 주카를 응시했다.
“그 대신 나도 보험이 하나 있어야겠어. 그쪽이 입을 닫고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보험이라 함은…?”
“정혼자가 있나?”
“예? …없습니다.”
의외의 말에 주카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혼테일은 금세 다시 온 하인에게서 서류를 받아들고 개중 하나를 주카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종이부터 받아들고 그를 쳐다보자 혼테일도 똑같은 종이를 들고 있었다.
“혼인 서약서야.”
“네?”
그, 그게 무슨….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주카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외교에서는 패를 보이는 순간 지는 거란다. 아버지의 교훈을 따라 말을 아낀 채 잠자코 기다리고 있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황실과 친인척을 맺고 싶어하는 자들이 꽤 있지. 거절해도 혼약이 끝없이 들어오니…. 거기에 황제의 직인을 찍으면 이쪽에서도 그대를 적극 보호해 줄 것 약조한다.”
“잠, 잠시만요.”
애써 꾸며낸 기품있는 어조가 당황에 무위로 돌아갔다. 혹시 이것이 일종의 농이나 그 나름대로의 시험인가 싶어 혼테일의 낯을 살폈지만 농담을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눈빛에는 진지함이 실려 있었다. 진담이라면 꽤 큰 일이었기에 주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지나치십니다. 혼인은 국가 중대사니까요. 이런 식으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식을 올릴 생각은 없어. 공표할 생각도 없고.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서류, 그것만이 필요해. 게다가 이 정도는 해야 그대가 변방의 대공에게 군사를 빌려준다는 결단을 해도 밑에서 반발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주카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의 직인은 돌이킬 수 없다. 결혼이라니. 설령 나중에 파혼을 한다 해도 이 일은 주카를 계속 따라다닐 터였다. 게다가 만약 그가 훗날 황권에 도전했다가 그의 부친처럼 성벽에 목이 내걸리기라도 한다면…. 순간 소름이 돋아 주카는 목을 만지작거렸다. 연대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걸 거라면 모든 것을 걸라는 의미. 분명 위험한 제안이었으나 주카는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다.
여기서 내쫓긴다면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이미 오르비스에 왕녀의 부재가 알려졌을 터이니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북부에 집을 구하자니 아는 사람도 없고 그 전에 추위를 견디지 못해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주카는 고민 끝에 결국 황제의 인장을 손에 들었다. 흰 종이에 꾹 하고 눌러지는 붉은 인주가 지나치게 선명했다.
“잘 생각했어. 이 자를 따라 가도록. 성을 안내해줄 거다.”
“…네.”
날인을 찍자마자 바로 후회했으나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었다. 주카는 권력 없는 자의 설움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황위에 오르면 가장 먼저 파혼부터 해야겠어. 하지만 지금은 너무 추우니까 따뜻한 물에 몸부터 담구고….
하인은 생각보다 싹싹했다. 주카는 우선 휴식부터 취하고 싶었으나 하인은 먼저 당분간 머물게 될 성을 둘러볼 것을 권했고, 주카는 굳이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주카 님이라 하셨죠? 오르비스는 사시사철 온화한 곳이라 들었는데, 그래서 옷차림이 얇으셨군요.”
“나름 두껍게 입은건데. 이 정도로 추울 줄은 몰랐어.”
살갑게 말을 거는 하인은 성 안내보다는 주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듯 했다. 하인은 온 전신에 두터운 가죽과 털을 두르고 있었다. 주카는 잠시 자신도 저렇게나 두껍게 입어야 이 추위를 견딜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웃음으로 무마했다. 화제는 북부에 관한 이야기에서 자연스레 북부의 주인으로 넘어갔으므로, 주카는 망설이다가 혼테일에게는 물어보지 못할 질문을 던졌다.
“저기, 대공… 그러니까 혼테일. 그 분께 혼담이 많이 들어오시니?”
“네. 주로 자작이나 공작가의 영애들이 혼담을 넣으십이다. 지위도 지위지만 대공 전하께서는 기품이 뛰어나시고 매력적이시니까요. 왕녀인 주카 님이 대공 전하와 연을 맺어 저로서는 기쁠 나름이죠.”
“그…렇구나.”
충성심이 깊은 사내내. 그가 그리 잘생겼나? 주카는 걸으며 방금 전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잔뜩 긴장한 탓에 그의 얼굴은커녕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자안의 눈동자만 뇌리에 박혀 있었다. 기품보다는 무서운 사람이지. 잇속을 빠르게 챙기고. 상대하기 쉬운 상대는 아닐 것 같지만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어쩔 수 없나. 말없이 생각에 잠겨 걷다가 주카는 하인이 한 문 앞에서 서자 따라 멈추어 섰다.
“대공 전하께서는 시녀를 많이 두지 않으시니 필요하다면 저를 찾아 주십시오. 침대 옆에 시렁줄이 있을 겁니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알겠어. 나 때문에 고생이 많네. 너도 어서 쉬렴.”
주카가 부드럽게 웃어 보이자 하인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주카는 이곳에서 어디까지나 을의 위치였으나 깍듯이 예의를 차리는 모습에 긴장이 풀려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였다. 감각이 거의 없다싶이 한 발부터 녹이고 싶었으나 우선은 눈에 젖은 몸을 씻는 것이 먼저였다.
드디어 살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주카는 하얀 김이 솟아오르는 욕실에서 나왔다. 다행히 따뜻한 물은 잘 나왔지만 대공은 검소한 편인지 침실임에도 공기는 추위를 머금고 있었다. 수건으로 물에 젖은 머리를 감싼 채 주카는 가운의 끈을 허리에 맞게 매느라 애를 써야 했다. 북부 사람들이 남부 사람보다 체구가 크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가운은 땅에 질질 끌릴 정도로 지나치게 컸다. 결국 주카는 드레스를 입은 것처럼 가운 끝을 손으로 잡고 걸아야 했다.
큰 침대 하나. 벽난로. 그리고 그 옆에 위치한 소파와 약식으로 정무를 볼 수 있게끔 했는지 작은 테이블과 의자. 침대는 가운과 마찬가지로 주카 한 명이서 쓰기에는 지나치게 컸으며 그 옆에 늘어져 있는 줄은 방금 하인이 말했던 설렁줄인듯 해 보였다. 찬찬히 내부 구조를 훑은 주카는 얼른 벽난로 앞에 가 앉았다. 다홍빛 불길이 타닥타닥 숨을 내뱉고 있었다. 나른하게 늘어지고 싶었으나 막상 육신의 피로가 해결되자 앞으로의 불안이 밀려 들어왔다. 무작정 북부로 오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앞으로도 할 일이 산더미였다. 우선 나에게 우호적인 국가와 연락해 협력 관계를 맺고, 현재 정세도 파악해야 하고…. 상념에 잠겨 있다가 돌연 불길이 타닥이는 소리 사이로 타인의 발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그 하인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시야에 들어온 것은 뜻밖에도 그 자안의 대공이었다. 혼테일은 들어오다 말고 자리에 우뚝 섰다. 곤혹스러운 눈이 커다란 가운 하나만을 걸친 채 벽난로 앞에 앉아있는 주카를 훑었다. 주카는 혼테일의 시선 끝에 걸린 것이 무엇인지 눈치채고 급히 느슨하게 어깨 부근에 늘어진 가운을 고쳐 입었다. 늦은 시간에 노크도 없이 방에 들어오다니, 이곳 예절은 다른 건가? 주카는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눈을 내리깔았다.
“할 말이 있으신가요? 아무리 대공이라 할지라도 노크도 없이 찾아오는 건 실례인 듯 합니다.”
“달리 할 말은 없어. 그리고 여기는 내 방이니, 따지고 보면 그대가 기별도 없이 들어온 것이 아닌가.”
“네?”
“…로비가 쓸데없는 짓을 했나 보군.”
“미, 미안해요. 지금, 지금 나가겠습니다. 불편할 테니…”
“이 시간에 여자를 내쫓을 만큼은 아니야.”
혼테일은 소파에 몸을 뉘였다. 삐그덕거리는 소파 사이로 들리는 나즈막한 신음 소리에 주카는 작게 몸을 움츠렸다. 그는 전신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바지 끝단이 젖어 말라붙어 있었다. 저것이 녹은 눈인지, 아니면 몬스터의 피인지. 어쩌면 본인의 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주카는 몸을 일으켰다. 침대는 하나뿐이었으므로 주카는 조심스레 그에게 침대에 누울 것을 권했다.
“침대에서 자. 나는 여기서 잘테니.”
“아, 아닙니다. 제가 소파에서….”
“됐어. 그리고 너무 격식 차릴 필요는 없어.
혼테일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손을 저었다. 실제로 주카는 이런 어조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결국 그럼 편하게 하겠다는 말과 함께 다시 자리에 앉았다. 벌써 침대에 눕기보다는 아직 벽난로 앞에서 몸을 더 데우고 싶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혼테일은 주카가 계속 벽난로 앞을 차지하고 있자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주카는 눈치를 살피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옆으로 비켜 앉았다.
“비켜드릴까요?”
“됐어. 그쪽도 춥지 않나.”
“…추우세요?”
왜 너도 내가 우스워? 그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주카는 어색하게 웃으며 검지 손가락으로 돌돌 말린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아뇨…. 추위같은 건 안 타는 줄 알았거든요. 당신은 용의 피를 이어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그렇지. 그래서…”
혼테일은 사양하지 않고 주카의 옆에 가 앉았다. 옆에 앉은 건 귀신이 아닌 사람이었으나 어쩐지 공기를 타고 냉기가 느껴졌다. 두려움인지 어색함인지 등허리께에서 저린 감각이 올라왔다.
“…그래서 추위에 약하다는 거다. 변온동물은 추위에 민감하니.”
“아….”
변온동물, 파충류. 드래곤이 파충류였나? 파충류는 추위에 민감하다고 했지. 언젠가 책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리며 주카는 눈을 굴렸다. 그런데 용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말은 그저 전설이 아니었나? 주카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눈치챘는지 혼테일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편히 물어. 어찌되었건 당분간 같이 살게 된 셈이니.”
“그, 그럼…”
주카는 우물쭈물하다가 곁눈질로 혼테일을 흘긋였다. 동그란 눈이 호기심을 담고 빛나다가 결국 입 밖으로 처음부터 계속 하고 싶었던 질문이 흘러나왔다.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어요?”
“궁금하나?”
“어… 네. 솔직히 말하면요.”
그 소리에 혼테일은 입고리를 당겨 피식 웃었다. 웃는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아 멍하니 바라보자 혼테일은 가볍게 웃으며 여기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 여기서는? 주카는 눈을 반짝였다.
“그럼 다른 곳에서는 괜찮아요? ”
“글쎄. 적어도 여기서 변했다가는 성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겠군.”
“아….”
변할 수 있었구나. 전설인 줄만 알았는데. 주카는 거대한 드래곤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불도 뿜으려나. 그러면 따뜻할지도 모르겠는데. 혹여나 그의 몸에 용의 비늘이라도 있지는 않은지 목덜미를 바라보자 혼테일은 그 눈빛이 달갑진 않은지 손으로 목을 가렸다.
“이만 밤이 늦었으니 자. 옆에 사람이 있으면 자지를 못해서 이만 침대로 가줬으면 좋겠군.”
“네. 그럼 잘 자요. …혼테일.”
그를 대공이라 부를지 이름으로 부를지 고민하다가 주카는 후자를 택했다. 어쨌든 당분간 함께 지낼 이였으니 친해지는 게 좋아 보였다. 그러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너무 일렀나 후회하던 도중 혼테일은 소파에 앉아 느리게 주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주카.”
다행이다.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주카는 가뱝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큰 침대에 몸을 뉘였다. 낯선 침실과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는 잠이 잘 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걱정이 무색하게 주카는 몇분도 채 지나지 않아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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