落花

이화가 운영에게.


연모한다는 말 만큼이나 이리도 어려운 말이 있었을까요.

冬. 

당신을 기다리는 계절.

운영이 무주로 떠나기 직전까지도 여전히 그들은 함께 있었다. 그 사이에 이화는 터질 듯한 감정을 속으로 삭이는 법에 아주 익숙해졌다. 늘 그랬듯이 감내하고 삼켜내면 될 일이었다. 운영을 향한 연정도 그랬다. 연모한다는 말 만큼이나 이리도 어려운 말이 있었을까요. 진통에 좋다는 탕약을 마셔도 통증은 가시지 않았으나 운영을 영영 보지 못하는 것에 비하면 그 편이 훨씬 나았다.

청호각에서 되돌아온 후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끔찍한 통증도, 눈을 감을 때마다 목을 졸리는 악몽도 아니었다. 한 사람이 그리웠다. 웃는 얼굴을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보고 싶었다. 사무치는 그리움은 병든 몸을 더 쇠약하게 만들었다. 꿈에서도 보여 주지 않는 무심한 얼굴이 그리워 앓다가 깨어난 어느 밤, 으스름달이 비추는 어두운 그림자가 곁에 있었다.

예서 낭자.

운영이 한밤 중에 나타날 때면, 이화는 이 모든 게 꿈임을 알아챘다.

운영이 이화의 곁을 지키고도 이화는 종종 운영의 꿈을 꿨다. 벚꽃 만연한 정원을 거니는 일, 시전을 구경하다 당과를 선물한 일. 이화는 대개 운영과 함께 했던 시간을 다시 새기는 꿈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운영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같은 기묘한 표정을 하고서 이화를 바라봤다. 저를 품에 꼭 안은 채 무언가를 말하려다 사라져서는, 이화는 황급히 눈을 떴다. 꿈이구나. 이화는 제 방문을 열고 중정을 지나 곧장 운영이 있는 별채로 향했다. 밤잠을 설칠 때면 정원을 거니는 것도 오랜 습관이 되었다. 커다란 벚나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본 곳. 일찍 잠자리에 드는 운영을 알아서, 늘상 걸음하지 못하고 그 앞에 머무르다 결국 물러나는 것이 오랜 습관의 끝이 되었다. 드물게 운영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얇은 문 틈 새로 잠시 소란이 일었다. 이화는 힘 없이 손에 쥔 서책을 떨어트렸다.

떠나는구나.

이화는 이별의 향을 아주 잘 알았다. 언젠가 내 곁을 떠날 사람. 이화는 운영에게서 짙은 매화 향 사이로 종종 이별의 향을 맡았다. 이레 전부터 짐을 하나 둘씩 줄이던 운영을 알아서가 아니었다. 다만, 이화는 운영의 말에서 끝을 가늠했다. 

올해도 소인이 낭자의 곁에 머물러도 될까요?  

이화는 묻고 싶었다. 이렇게 한 해가 지나면, 그 때는 정말로 이곳을 떠날 셈인지. 허나 이화는 어느 것도 묻지 못한 채 다만 꽃구경을 가 달라고, 다음 봄을 약속해달라 되물었다. 이화는 운영에게 평생을 약속 받고 싶었다. 얄궂은 어절 뿐이래도 운영이 약속한 영원을 믿고 싶었다. 

문틈 새로 비치는 인영이 분주했다. 이화는 돌려주려던 서책을 주워 방으로 돌아갔다. 유독 긴 밤이었다. 밤 허리를 잘라내어 제 품에 묻어두어서라도 붙잡고 픈 밤이었다. 雲煐, 두 글자로 밤을 꼬박 지새웠다. 동이 트고도 이화는 밖으로 걸음하지 않았다. 모두가 잠든 이른 묘시, 방문이 닫히고 정원으로 걸음하는 소리가 멎어들 때까지 이화는 제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공자께서도 결국 제 곁을 떠나실 셈인가요? 

마주치면 그리 물을 것만 같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척, 붙잡고 싶은 인연이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 앉는다. 이화는 작게 침음한다. 별당을 지나 사립문이 닫히고 운영이 기어코 대문이 나서서야 이화는 문 고리를 붙잡았다.

"공자께서 멀리 가시는 길에 어려움이 없도록, 네가 뒤를 살펴드리거라. 이 시간부로 너는 공자의 사람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공자를 지켜 드려야 한다. 먼저 낯을 내비쳐서는 아니 되며……."


*

더는 운영이 없는 정원을 이화는 홀로 거닐었다. 주인은 떠났으나 중정의 매화 향은 한층 짙어졌다. 내년 봄, 함께 꽃을 볼 것을 기약하며 심어둔 매화나무는 이미 한참 자라 꽃몽우리를 틔워낸 후였다. 함께 꽃을 보는 일이 익숙지 않다 말했던 것도 분명 이 계절이 지나기 전이었다. 

 我會再回來的 不用擔心我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제 걱정은 마세요.

돌아온다는 기약 없는 약속만을 남겨 두고 소운영은 원주를 떠났다.

우리가 다시 함께 꽃구경을 갈 수 있을까요. 

春.

당신을 연모하는 계절.

이제 소운영이 아는 류이화는 사라지고 없었다. 한동안 그의 곁에서 계절마다 피는 꽃들을 볼 수 없으리라. 제 모습이 변한 것은 제 탓이 아니었건만, 이 껍데기로는 그의 곁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화는 울었다. 이후 모든 것을 준비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간 이화를 지탱한 것은 류 가의 이름, 그리고 꿈 속에서도 놔주지 않은 제 반쪽 그림자였으나, 이화는 더는 류 가의 이름 자를 새기지 않는다. 류 가는 제 발판이었다. 저가 묶여 있을 족쇄가 아닌, 저가 밟고 디딜 발판. 이화는 더는 운영이 없는 계절을 추억하지 않는다. 매화 꽃이 만연한 정원, 그와 함께 했던 한 해가 조금 넘는 시간들을 되새기는 것으로 충분했다. 

 

보름 하고도 이레, 운영이 없는 동안 류 가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그 모든 일들의 중심에 이화가 서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이화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일이 없었으나, 세간에서는 병약하고 영특한 류 가의 막내 소저를 탓하지 않았다. 정쟁에 휩쓸렸다는 연유로 장자 류한의는 유배를 갔고 부친 병부상서 류석남은 근신하라는 명과 함께 여섯 동안 녹봉을 삭감 당했다. 류 가의 대인 류 설은 관직을 박탈당했으니 그 수치를 못 이겨 자결했다. 

세간에 떠도는 진실은 사실이 아니었다. 수치를 못 이겼다는 오명을 쓰고, 이화의 품에서 류 설은 명을 다했다. 가장 죄가 중한 조부의 목숨은 제 손으로 직접 거두겠다는 이화의 의지였다. 류가의 꼭두각시로 생을 마감하길 바라셨나요? 애석하게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제 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으셨어야죠. 차게 식은 몸을 끌어 안고 이화는 한참을 중얼거렸다. 이 일을 알고도 류 가에 남은 사람은 제 오랜 여종 심월과 노집사, 가주가 될 둘째 오라비 뿐이었다. 그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으리라. 이화는 피를 뒤집어 쓰고도 어여쁘게 웃었다. 피 묻은 침의를 보고도 문득 이화는 홍의가 잘 어울린다는 운영의 말을 떠올렸다. 이 모습을 한 나를 보고도, 당신은 나를 사랑할까. 만일 운영이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이화는 두려웠으나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더는 멈출 방도도, 돌아갈 길이 없었다. 그 누구도 이화를 막을 수 없었다.

세상 전부가 알아도 운영은 몰라야만 했다. 

운영은 모를 것이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류 가의 죄를 뉘우친다는 명목으로 조부상은 사흘 간 고요하고도 조속하게 치뤄졌다. 이화는 흰 무명옷을 입고 사흘 밤낮을 뜬 눈으로 자리를 지켰다. 제 목숨을 건 승부에서 이화는 승기를 잡았다. 장례식은 이를 축하하는 연회와도 같았다. 이화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세를 낮추지 않았다. 한 치도 일이 흐트러져서는 안됐다.

이미 다 타버린 향은 형상을 간신히 유지하는 모양이었다. 손 끝이 닫자마자 재로 바스라졌다. 이화는 한참동안 손에 남은 재를 바라봤다. 알싸한 향내음이 코 끝에 감돌았다. 운영이 보고 싶었다.

"아가씨! 해주 공자께서 사저에……."

이화는 중정에 서서 봄바람을 맞는다. 매화는 저버리고 벚꽃잎이 나리는 계절에 운영이 돌아왔다. 믿기지 않았다. 운영을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돌아오겠다는 약조를 믿지 않은 것이다. 운영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화가 모르는 척 찾아 뵈면 될 일이라 생각했다. 이화는 사람에 큰 기대나 수를 걸지 않았다. 이는 오랜 습관과도 같은 성정이었으니 연심에도 예외는 없었다. 믿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속이 상할 일도 없으리라 여겼던 탓에. 그럼에도 당신은.

"예서 낭자."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 앉는다. 매일 같이 그리던 안온한 음성. 정신이 혼미했다. 운영이 없는 사저에서 이화는 단 한 번도 편히 눈 감은 적이 없었다. 꿈에서라도 당신을 만나면 연모한다 말하며 주저앉을 것만 같아서. 하여 이화는 꿈을 꾸지 않는 밤을 위해 날을 지새웠다.

운영을 사랑하다 못해 제 목숨을 건 싸움에서 돌아오고도 이화는 연심을 고백하지 않았다. 대신에 운영에게 단 한 번도 묻지 못한 물음을 내었다. 연모한다는 말은 수백 번도 속삭일 수 있으니, 이화는 운영의 약조가 필요했다. 다시는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 

애석하게도 가장 먼저 입 밖으로 나선 것은 원망의 말이다.

"공자께서도…… 결국 제 곁을 떠나실 셈인가요?"

가녀린 품을 끌어 안는 두 팔이 단단했다. 연모합니다. 언뜻 그리 속삭인 것도 같았다. 얼마나 바라왔던 순간인가. 코 끝에 매화 향이 스치자 이화는 꿈이 아님을 깨닫는다. 창백한 눈가가 붉게 달아오르고, 이화는 그제서야 운영을 마주 안았다. 떠나지 않기 위해 떠났음을 이화는 알았다. 그런 운영에게서 이화는 평생을 약속 받고 싶었다. 이젠 진실로 오직 운영의 약속만이 필요했다. 

"연모하신다고요. 저를…."

말마디 따라 꽃향기가 이어졌다 끊기는 듯 했다. 오랜 길을 둘러 종점에 도착했으니, 남은 것은 고하고 아뢰는 것뿐이었다.

때로는 죽음도 갈라놓지 못할 연심이 있답니다. 

애닳고 소중하여 미처 입 밖에 내지 못할 마음이요.

"혼인해요, 우리." 

다음 생은 감히 바라지도 않을 테니 이 생만큼은 제게 약조해주세요. 부부의 연을 맺고 오직 나만을 사랑하겠다고…….

*

난 다음 생에도 彛樺가 되고 싶어요.

오직 그대만을 위해 피는 꽃이 될게요.

낭자께서 영영 지지 않을 꽃이라면,

다음 생에도 나 雲煐이 되어 낭자를 지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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