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자존심
성식은 둔탁한 통증을 무시한 채 벽에 등을 기댔다. 공간을 찢어발기듯 울려대던 경보음이 지금까지 귓가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변을 서성인다. 솟구치는 분노를 가라앉히고자 하는 사람들이 공간 안에서 숨을 내쉰다. 그저 이 상황을 받아들일 뿐인 사람들이 방어적으로 서 있다. 성식은 자신이 그중에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사라졌다. 천경조 주임과 동 부장님이 붉은 피 웅덩이와 찢어진 옷자락을 남기고 돌아오지 못했다. 그 상황을 보고 온 영길이 단언하듯 죽음을 알렸지만 성식은 와닿지 않았다.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는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영길의 분투로 인은 돌아왔다. 그렇다면 그 둘도 누군가가 힘을 내면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그저 그 정도의 생각. 경보음이 울리고 아무도 오지 않고, 류 령 혼자 처량한 꼴로 문을 넘어올 때까지만 해도 심장은 제법 빠르게 뛰고 있었다. 어쩌면 바닥으로 뚝 떨어진 걸지도 모르지. 그 덕에 모두가 그들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고 불안에 잠식당할 때 성식은 차분할 수 있었다. 어쩌면. 등에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가 심장을 대신하고 있을수도 있고. 아무튼 성식은 괜찮았다. 지금까지 모두에게 진실을 숨길 수 있었고, 꺼진 휴대폰 없이도 딸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
사람들이 걱정된다. 몸 성한 녀석들이야 알아서들 하겠지만 다친 친구들이 많으니까.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도 않은 채 다른 사람들이나 보러 다니는 꼴이 불만이기도 했다. 어쩌면 미덥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괜찮다고 웃어 보이는 모든 형태들이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그 상황에서 성식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건 자신을 닮은 저주 인형 하나와 그나마 강부장님이 주신 초콜릿 하나 뿐이었다. 간신히 초콜릿 하나를 노이지에게 건넸지만, 먹지도 않고 그저 주머니 안에 처박아 두기나 했지. 조사를 나가 무언가 잔뜩 찾아온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양손 가득 도움이 될만한 걸 가져왔으면 무엇 하나 아낄 필요 없었을 텐데. 정작 성식은 제대로 찾아온 건 없고 보급 상자에서도 별 볼 일 없는 결과나 내보인다. 평소의 신성식과 크게 다를 건 없었지만… 성식은 그게 불만이었다.
과장이라는 자리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치기 시작한 사람들의 시작점이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시간, 최소한의 노력. 성과. 그 모든 것이 한데 뭉친 것이 자존심이니까.
그래서 성식은 무언가가 하고 싶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뛰쳐나가고 싶었다. 멍청하게 혼자 돌아다니다가 죽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여기 가만히 앉아서 있고 싶지 않았다. 혈기 왕성한 누군가가 저 대신 뛰쳐나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나갔다가 다치는 꼴을 보고 싶지도, 그 누군가가 자신보다 먼저 무언가를 이뤄내게 두고 싶지도 않았다. 이기적이고 어린 생각이었다.
하지만 성식은 언제나 너무나도 어렸다. 그 나이와 위치에 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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