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이 되어 주세요 - 下 w. 주인장 거, 되게 거슬리게 하네. 기현은 늦게 강의실로 들어온 온 탓에 가운뎃줄 맨 앞자리에 앉아 버린 자신을 꾸짖으며, 제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려 제 손바닥 두 개를 올려 놓아도 여백이 남는 큰 시험지 위에 고개를 부러 더 처박고 있었다. 산문집을 몇 번이고 읽었는데도, 피피티를 밤새도록 읽고 외
내 사랑이 되어 주세요 - 中 w. 주인장 그냥 한 학기 더 쉬고 복학할걸 그랬나. 기현은 여느 때와는 달리 한산한 강의실 앞 복도에서 90도로 열린 제 몫의 캐비닛 문을 잡고 우두커니 서서 생각한다. 그의 맑고 검은 눈동자의 끝을 따라가 보면, 캐비닛 입구 가까이에 잔뜩 시들어서 흰색 꽃잎 끝자락부터 갈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비쩍 마른 토끼풀 한 송이
내 사랑이 되어 주세요 - 上 w. 주인장 행여나 여즉 자신들을 향해 겨눠진 화살이 기현에게 꽂힐 세라, 형원은 등에 불이 붙은 것 같은 통증에도 꼭 죽은 듯이 그를 제 품에 가만히 안고만 있었다. 형원은 주변의 기척이 사라진 후 한참이 지나서야 제 품 안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는 제 작은 연인을 바라본다. 이 고을의 병사들은 자리를 뜬 지 오래였으므로
손톱달 w. 주인장 기현은 형원의 가슴팍에 등을 기대고 앉아 형원과 손장난을 치다가, 제 고개를 돌리는 형원의 손길을 따라가 그와 입을 맞춘다. 형원의 품이 곧 기현의 보금자리였고, 이 깊은 산속만이 둘만의 세계였다. 형원이 어두컴컴해진 주위에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다 생각하는 찰나, 기현이 바닥을 더듬다 작게 웃어 보인다. 기현의 손끝에 닿는 것은 줄기가
손톱달 w. 주인장 기현은 형원의 손을 찾으려 자신의 손끝을 그의 손바닥 위에서 더듬거린다. 형원은 제 손바닥 위로 느껴지는 간지러운 촉감에 손을 살짝 웅크렸고, 이내 기현은 그의 손을 맞잡는다. 확실히, 자신의 손을 타고 전해지는 것은 인간의 온기임에 틀림없었다. 형원은 기현을 조심히 일으켜 세우고 다른 팔로 그의 어깨를 감싼다. 자신의 어깨에 닿는 손
손톱달 w. 주인장 기현이 눈을 떴을 때는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등에 닿아 있는 딱딱하고 서늘한 감촉, 저 멀리서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는 무거운 물방울 소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웅웅거리는 소리들은 기현의 신경을 긁어 놓기엔 충분했다. 자신의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 본다. 흉흉한 짐승 울음소리, 그리고 피비린내. 기현은 그 마지막
손톱달 w. 주인장 아침이 왔음을 인지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흙벽 너머로 풍기는 서늘하고 산뜻한 공기와, 옆집에서 키우는 닭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자신의 옆에서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면 충분했다. 기현은 바닥을 짚으며 서서히 몸을 일으켜, 자신의 아비가 있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려 아침 인사를 올린다. 자상한 목소리에는 적당한 쇳소리가 섞여 있었
용설란 (龍舌蘭) 2부: 문 너머의 이야기 w. 주인장 고운 의복을 잘 차려입고 한참 궁을 거닐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눈다. 대전 앞을 지날 때는 어린 시절 멋모르고 이 앞에서 뛰다가 대비에게 불려 혼이 났던 기억, 현비의 손을 잡고 궁을 거닐었던 기억, 세자와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화들. 한참을 거닐다 기현이 걸음을 멈춰서 외딴곳에 있는 궁을 바라보
용설란 (龍舌蘭) 2부: 문 너머의 이야기 w. 주인장 형원은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서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확인한다. 창밖으로 달빛만 새어 들어오는 불 꺼진 방. 그제야 꿈에서 깨었음을 자각한 형원은 얌전히 기현의 뺨 위에 올려진 제 손을 천천히 거두었고, 기현은 잠결에도 그것이 아쉬웠는지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형원의 품에 안겨 들어온다. 아, 매
용설란 (龍舌蘭) 2부: 문 너머의 이야기 w. 주인장 어색한 동거를 시작한 지도 2 주 정도 지날 즈음이 지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제 방 앞에 얌전히 앉아 밤새 강녕했느냐 묻는 기현에 형원이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 부탁한 이후로 기현은 옷방 앞에서 멀뚱히 서 있다가 형원이 나오면 고개만 꾸벅 숙여 안녕히 주무셨느냐 묻는 것이 다였다. 형원은 그마저도
용설란 (龍舌蘭) 2부: 문 너머의 이야기 w. 주인장 기현은 저가 궁에서 머물던 방보다도, 형원의 별채에서 썼던 방보다도 좁은 방 안에 우두커니 서서 둘러본다. 아까 형원이 뭔가 달칵이더니 환해졌는데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기현은 어두운 방 안에서 벽을 더듬거리다가 제 손끝에서 달칵하며 눌리는 것에 놀라 손을 뗐고, 그와 동시에 하얗고 밝은 빛이 터져
용설란 (龍舌蘭) 2부: 문 너머의 이야기 w. 주인장 이상한 꿈이었다. 민속촌에서나 볼 법한 옛날 건물이 덩그러니 놓인 숲 속이었다. 그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자신은 그곳에 꽤 오래 머물러 있었던 듯, 익숙하게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가 문득 때가 되었음을 알았는지 수풀 쪽으로 가서는 풀을 헤치고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는 장면이 바뀌었나? 자신이
용설란 (龍舌蘭) 1부: 순백의 산신 w. 주인장 기현은 제 손을 더 강하게 쥐어 오는 이를 결국 뿌리치지 못하고 강녕전에 다다른다. 내관의 인사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금상의 침전 앞에 도착한 기현은 기척도 없이 대뜸 문을 열어 젖히는 형원의 뒤에 숨는다. 감히 지존에게 절을 올릴 수도 없이 단단히 잡힌 손을 빼 낼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형원은 제
용설란 (龍舌蘭) 1부: 순백의 산신 w. 주인장 기현은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 가는 듯했다. 그를 지켜보는 별궁의 궁인들은 어찌 대군의 건강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시는가에 대해 걱정을 금치 못하였으나, 그의 상태를 되려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도 이 넓은 궁에 필시 있을 터이었다. 기현의 잔기침은 날이 갈수록 거세어져, 걸음을 걷다가도 멈춰 서서는 몸을 웅크
용설란 (龍舌蘭) 1부: 순백의 산신 w. 주인장 형원은 외출할 채비를 마치고 기현의 침소로 향한다. 그에게로 향하는 걸음 하나하나가 무거웠으나, 결국 자신의 선택이며 그것이 그에게도 더 나은 일일 것이라 스스로 되뇌어 본다. 형원이 기현의 침소 앞에 다다라서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면, 꼭 그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었다는 듯이 기현이 맑은 얼굴로 은은한
용설란 (龍舌蘭) 1부: 순백의 산신 w. 주인장 형원의 별채에서의 기현의 하루는 동이 트고서도 늦게 시작되었다. 궁에서와 달리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기지개를 켜면 언제나처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저를 반겼고, 뜰에 나가 산책을 하다 보면 형원이 제 방 창문에서 저를 불렀다. 탕약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투덜거리며 침소로 가서 그가
용설란 (龍舌蘭) 1부: 순백의 산신 w. 주인장 언제 세상에 났는지, 언제 세상을 뜰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이런 나를, 인간들은 선인이라 불렀다. 어느 날, 하늘이 내게 말했다. '연정을 다 하면 용설란은 만개하게 되리라.' 달가운 천명이었다. 내 그대를 만나, 그대로 인해 내가 눈을 감을 수 있으니, 내 삶은 그걸로 되었다. 이 나
낙하이론 (落下理論) w. 주인장 《2022 계간꿀른 겨울호 : poem》에 실렸던 동명의 글의 리네이밍 버전입니다. 또 시작이다. 아직 밤인가 싶을 정도로 어두운 새벽에 눈을 뜬 형원은 암만 눌러도 켜질 생각을 않는 난방기에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내리 꽂는다. 물론 세게 쳤다가 고장이라도 난다면 더 곤란해질 게 안 봐도 비디오였기에, 주먹을 날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