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러스 5
공포 6668
“세계는 알이지요.”
T는 백색 폰을 앞으로 옮기며 읊조렸다. P는 탁자를 톡톡 두드리다가 흑색 룩을 뒤로 물리며 되물었다.
“세계가 아리라고요? 너,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 삼인칭을 쓰던가요? 그것도 애칭으로 줄여서?”
“이건 뭔 헛소리야?”
T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고, P는 이해한다는 듯 온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이미 다 큰 어른이고 너의 나이가 곧 서른이 되어가지만 뭐, 그러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지요. U조차도 진심으로 그러지 않았는데. 어쨌든, 세간에서는 이렇게 말하던가요? ‘취향이니 존중해라.’ 예, 당신 취향인 것 같으니 존중해 줄게요.”
“허.”
T는 백색 나이트를 옮겼다. 흑색 룩의 견제가 빠지니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그렇게 기물을 옮기면서도 받은 말을 사근사근 되갚아 주는 일은 잊지 않았다.
“당신, 죽을병에 걸렸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네요. 귀도 확실히 안 좋은 것 같고. 미리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 흰 국화랑 흰 백합 중 어떤 꽃을 더 선호하세요? 아차, 이 말도 안 들리려나?”
“후후. 너, 언제부터 나를 이렇게 걱정해 줬다고 이렇게까지 해주나요?”
“아하하. 이걸 걱정이라고 해석해 주다니. 정말 멍청, 아니, 상냥하네요.”
둘은 서로 예의 바르게 웃었다. 그렇지만 체스판 위는 난장판이 되었다. 검은 비숍이 방금 움직인 흰 룩을 잡아먹었고 그 비숍은 흰 비숍에게 잡아먹혔다. 경쟁적으로 서로를 공격하던 싸움은, 누구도 당장 먹을 수 있는 말이 없어졌을 때 마무리되었다. P는 조금 감정 어린 숨을 들이쉬었다가 엇나간 대화 주제를 돌렸다,
“사실 제대로 들은 거 맞아요. 원문은 이랬을 테죠.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이지요.”
“어머. 멍청해서 못 알아들은 줄로만 알았는데.”
물론 대화 주제가 바뀌었다고 해서 둘 사이에서 비아냥이 사라질 리 없었다.
“그럴 리가요. 단지 이런 문장을, 너 같은 사람이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한 나머지 잠시 착각했지요. 대체 어디서 알게 되었나요? 화장실의 벽에 누가 낙서해 둔 것을 보았나요?”
“당신, 교양을 제외한 상식이 떨어지시네요. 보통 책을 읽어서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아, 하긴. 벙커에서만 곱게만 자란 분이지요?”
P는 과장되게 놀라는 체를 하였다.
“어라, 당신. 책도 읽었어요? 대체 무슨 돈으로요?”
“그야 물론 당신 팔아넘긴 값이지요.”
“이 나이까지 살면서 돈 번 일이 그것밖에 없다니. 불쌍하군요. 하긴, 직장은 얼마 못 다니고 잘렸다고 했지요?”
“앞으로 난 오래오래 살 텐데 돈 벌 기회야 아직 많이 남아있겠지요.”
물론 T도 지지 않았다. 둘은 마주 보며 웃었고, 이는 전쟁을 의미했다. 체스 보드 위는 다시 난장판이 되었다. 체스의 규칙을 준수하면서 부릴 수 있었던 난장판은 아까 전부 부렸으므로 이번에는 룰을 넘나드는 깽판이 벌어졌다. 누구는 부활 옵션이라면서 탈락한 체스 말들을 좀비로 만들어 체스 보드 위에 다시 올렸고 다른 누구는 체스계의 거신병을 소환했다. 체스 전문가가 보았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만한 광경이었지만,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방법을 당당하게 주장하며 이런 방법도 모르는 상대를 체스알못 취급했다. 이 외에도 체스 말과 체스 보드를 사용하여 만들 수 있는 기상천외한 방법이 쓰였지만 두 사람의 명예를 위해 공개하지 않겠다. 다만 어느 순간 잔뜩 어질러진 체스판을 내려다보며 T는 지루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세계는 정말 엉망진창이에요. 마치 이 체스판처럼 말이지요.”
T는 손끝으로 체스보드의 모서리를 집어 올렸다. 보드 위에 올려져 있던 체스 말들이 사정없이 떨어졌다. 테이블 위로, 또는 바닥으로.
“너무 낡았고, 오래 묵었지요. 정체되었고, 발전이 없으며 전부 어리석지요. 한두 가지를 고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전부 깨끗하게 치우고, 다시 시작해야 하지요. 세계는 알이라고 했죠? 이제 이 알은 깨질 때가 되었어요. 인류가 진정하게 나아가려면 파괴해야 해요. 그래서 멸망을 바랐는데.”
T의 손끝에서 체스 보드가 천천히 흔들렸다. 그러다가 가볍게 놓아버리자, 체스 보드는 테이블 위로 볼품없이 떨어졌다. 팍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지만, 체스판은 손상 간 곳 없이 멀쩡했다. T는, 오히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마치 깨져서 산산이 조각나기를 바란 사람의 얼굴이었다. P는 그런 일련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툭 내뱉었다.
“그 체스판 아주 비싼 제품인데요? 흑단 나무와 상아를 깎아 만들었거든요. 원래도 비쌌는데, 이제는 더 희소해서 가격이 더 올라갔어요. 이 유토피아에서 공급할 수 없는 재료로 만들어져서 다시는 생산할 수 없는 물건이거든요. 따라서 망가뜨리면 상당한 돈을 물어내야 할 텐데, 너, 그 금액을 감당하실 수 있어요?”
T는 절대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절대로.
“저런, 도련님? 슬슬 돈이 쪼들리기 시작하셨나 봐요, 그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에도 한계가 있는 모양이지요?”
그 말은 P의 입을 다물도록 만들었다. 그래도 값을 주장하면 재산이 떨어졌다는 놀림을 받게 될 것이다. 재산이 아직 충분하다고 어필하면 그럼 왜 체스판의 값을 신경 쓰냐, 쪼잔해졌다는 식으로 나올 테고 말이다. 어느 쪽이든 P가 다소 추해진다. P가 적당한 답을 찾아서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틈을 타서 T는 재빠르게 체스를 정리해서 눈이 안 닿는 곳으로 치워버렸다.
“너, 내 체스…….”
T는 P의 말을 끊고 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멸망이 왜 이리 지지부진할까요? 물론 지구에 운석이 떨어졌다, 어느 열도에 지진이 났다, 거대한 화산이 폭발한다, 그런 소리는 계속 들려요. 하지만 세계라는 것의 생이 끈질긴가 봐요. 아니면 거기 남아있는 사람들이 끈질긴 건가? 이번에야말로 지구가 종말 한다는 신문 1면이 대체 몇 번째인지 이제는 셀 필요도 없어요. 슬슬 지루해지네요. 좀 더 결정적인 충격이 필요한 걸까요?”
“그보다 내 체스 기물이, 만일 흠집이라도 갔으면…….”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제 말이나 들어요.”
T는 P의 말을 열심히 끊었고, P는 결국 어깨를 으쓱이며 T의 말에 어울려 주었다.
“들었어요. 하지만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지구로 다시 퇴출해 줄까요? 여기서 떠들고 있는 것보다 가서 생화학무기라도 터뜨리는 것이, 지구의 빠른 멸망에 좀 더 이바지할 수 있을 텐데. 앉아서 소극적으로 바라고만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멸망을 쟁취하세요.”
P가 별 의미도 없고 마음도 담겨있지 않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가 죽는 건 어때요?’에 해당하는 격려를 해주었고 당연하게도 T의 심기를 건드리기만 했다. T는 차갑게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괜히 말했네. 역시 당신 같은 사람이랑 대화가 통할 리 없지. 기대도 안 했어요.”
차가워진 시선, 경멸이 묻어나는 어조. 그것은 명백히 P를 무시하고 내려다보는 태도였다. 서로 싫어하고 지낸 지는 오래되었지만 이런 방향의 멸시는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P는 날카롭게 반문했다.
“나 같은 사람? T, 너 그게 무슨 뜻이지요?”
T의 백안이 번뜩였다. 친절한 척을 내다 던질 때마다 T는 눈은 그리 싸하게 빛나곤 했다.
“너도 결국은 그 바보 같은 세상에 안주했던 사람에 불과하니까요.”
T는 탑을 쌓는 시늉을 했다. 체스 말을 정리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대신 높게 쌓아 올렸을 것이다.
“너는 멍청한 세상에 너 자신을 맞췄어요. 어리석은 이들이 칭송하던 가치를 두르고 스스로 우월하고 완벽하다며 도취했지요. 그렇게 세상의 틀에 자신을 끼워서 맞췄요. 그 누구보다 더 열심히.”
T의 손가락이 허공에 얹어졌다. T가 쌓던 가상의 탑의 꼭대기였다.
“구시대의, 낡아빠진 가치에 충실하던 당신. 그런 당신이 내 이상향을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머리가 똑같이 물들었을 텐데.”
그리고 T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게 한번 치는 것으로 허상으로 쌓은 성은 마구잡이로 무너졌을 테다. T가 내려다본 테이블은 깨끗했다.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가치에서 벗어나지 못했지요. 하지만 나는 아니에요. 나는 진정으로 눈을 뜨고 보았으며 깨달았어요. 찬란한 거성과 진정한 이상향을. 세상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요. 어찌 보면 당연해요. 기존의 세상은 앞도 못 보는 이들로 넘쳐났으니까. 어쩌면 보더라도 외면했을까요? 세상을 바꾸는 대신, 멸망해 가는 세상에 인정받는 존재가 되려고, 아니면 기존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발버둥을 치면서?”
P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불쾌한 발언이 아닐 수가 없었다. T는 손뼉을 딱 치면서 마무리 지었다.
“자, 이제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떤 뜻인지 아시겠나요?”
그러나 P는 웃어야 했다. 인상을 찡그리는 짓은 치명적으로 공격당했음을 내비치는 꼴밖에 안 된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더 화려하게 웃으며 맞받아치는 자가 결국은 승리한다.
“결국은 너 자신이 패배자라서 자격지심을 느낀다는 소리 아닌가요? 말을 길게도 하네요?”
“마음대로 생각해요. 당신 같은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왜곡해서 볼 줄밖에 모르니까요.”
“후후후.”
“하하하.”
다시 가식적인 미소의 시간이 찾아왔다. 체스 보드와 기물이 아직도 밖에 나와 있었으면 이번에는 분명 날아다녔을 것이다. 체스 게임이 다트 게임을 빙자한 난투극으로 변했을 테니까. 과녁은 징그럽게 미소를 유지하는 서로의 얼굴이 적당해 보이고. 어쨌든 테이블 위에 아무것도 없어서 당장은 고요하게 지나갔다. 누구 하나가 체력이나 몸 상태에 대해 자신이 있었다면 주먹다짐이 벌어질 수도 있었지만, 둘 다 종잇장 같은 몸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상대가 걱정되기 때문은 당연히 아니었고 상대를 온전히 이길 자신이 둘 다 없었기 때문이다. 분노 표출도 상황을 봐가면서 해야 하는 법이다.
“하……어쨌든 T, 너 꽤 심심해하는 모양이니, 내가 일을 하나 추천해 줄까요?”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P가 먼저 말을 꺼냈다. T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내가 왜 당신이 시키는 일 따위를 해야 하지요?”
“어디까지 추천이에요. 하지만 안 할 수 없을걸요?”
P는 꽤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너, 맨날 이상향을 떠들잖아요. 그런데 네가 정말로 이상향을 만들 수 있는 거 맞나요? 그런 능력이 있는지는 전혀 증명되지 않았어요. 그동안 세상의 멸망에나 몰두하였잖아요.”
T는 눈썹을 세우며 사납게 나왔다.
“당연하지 않나요? 먼저 멸망해야 이상향을 실현할 수 있으니까, 선보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지요.”
“그러니 내가 당신에게 그 기회를 주겠다고요. 이건 세상을 새로 쌓아 올리는 일이랍니다.”
T가 벌떡 일어났다.
“어디지요? 아니지. 당신 지금 사기 치고 있지요?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내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내가 상부와 좀 가깝잖아요. 너는 접할 수 없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하지요.”
그러면서 P는 전자식 패드를 하나 T에게 건네주었다. 인터넷 서핑 및 프로그램 작성, 메모 같은 것이 가능한 소형 컴퓨터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P는 어떤 링크의 주소를 패드 안에 적어주며 속삭였다.
“집에 돌아가서 그 링크에 접속해 봐요.”
T는 P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못 믿는다고 아예 무시해버리기에는 너무 신경 쓰였다. 혼자가 된 T는 패드를 만지작거리다가 화면을 쓸어 패드의 전원을 켜고 링크에 접속했다. 링크는 어떤 파일을 다운로드 할 수 있는 클라우드로 이어졌다. T는 속는 셈 치고 파일을 다운받았다. 이 장치에 사용자를 가상 세계에 가둘 정도의 성능은 없어보였으니까. 곧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는 아이콘이 메인 화면에 생겨났다. 제목은 [행성 개발 프로젝트] T는 그 아이콘을 노려보다가 손끝으로 아이콘을 눌러보았다. 그러자 화면이 어두워지고 ‘행성 개발 프로젝트’라는 글씨가 화면을 가득 메웠고, 곧 화면이 넘어갔다. 그러자 간단한 설명이 떴다.
‘당신은 새로운 행성의 개척자입니다.’
‘행성을 개발하고 새로운 문명을 세우십시오.’
깜박이는 문구는 T에게 총관리자 제의가 왔을 때를 연상시켰다. 비슷한 제안일까? 자신이 멸망한 행성을 어떻게 다시 세울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게 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이윽고 AI를 형상화한 작은 캐릭터 이미지가 나타나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개척자님! 새로운 행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에 문명의 흔적이란 아무것도 없어요. 따라서 당신이 모든 것을 일구어야 합니다. 오직 당신만이 가능한 일이에요! 그럼 함께해 주시겠어요?]
T는 침을 꿀꺽 삼키며 예,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캐릭터가 경쾌하게 말했다.
[응해주셔서 감사해요! 자 그러면 가장 기초적인 부분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나무부터 베어볼까요?]
“응?”
T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을 때 캐릭터가 마저 말했다.
[나무는 도끼와 전기톱으로 벨 수 있는데 각자 루비로 구매할 수 있어요! 루비는 이곳에서 쓰이는 독자적인 단위로 광고를 시청하시면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광고 시청이 지겨우시다면 상점 탭을 눌러 빠른 충전을…….]
P 이 새끼가!! 이거 게임이잖아!! 그것도 과금 유도하는!!
T는 벌떡 일어나 강속구로 패드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누가 본다면 손뼉을 쳐줄 만한 자세였다. 그러나 기기는 쓸데없이 튼튼했으며 쉽게 파손되지 않았다.
T는 망치를 찾아 집을 뒤지며 확신했다. 세계가 알이라면 깨고 나가야 한다. 같은 원리로 기존의 세상은 멸망해야 했으며 이 패드는 쳐부숴야 함이 옳았다. 거기에 P도 묶어서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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