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러스 커미션 샘플

유머러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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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가비지 타임을 기반으로 한 드림 작업물입니다. 

훈련이 끝났고 잘 때까지 시간이 조금 남은 시각, 지상고 운동부는 기숙사에 모여있었다. 전원은 아니었다. 공태성은 실실거리며 나갔고 진재유와 감독도 잠시 나갔다. 정희찬은 본래 숙소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오늘만은 숙소에 붙었다. 이 시대의 청년들 각자의 자리에 들어앉아 가장 신세대적인 방식으로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으며 예의를 표하고 동시에 우애를 다지고 있었다. 즉, 각자 자기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때 H가 뒹굴거리다가 휴대폰을 내려놓고 모두에게 물었다.

“얘들아. 여기 농구부는 추석 연휴 때 어떻게 해? 집에 보내줘?”

기숙사에 남아있던 1학년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니 아나?”

“난 모름. 감독님이 별말 안 했음?”

“글쎄다. 아직 딱히 뭐라고 말한 게 없으셨는데. 아, 저번에 시합 이기면 추석 때 집에 보내준다고 하기는 했는데.”

“감독님 순 거짓말쟁이다. 그걸 믿나?”

정희찬과 김다은, 기상호가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으나, 별다른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한쪽 구석에서 휴대폰 스크롤을 내리고 있던 성준수가 말했다.

“작년에는 어디 안 가기는 했어. 그런데 그때는 추석 전후로 시합이 끼어있어서 그랬고.”

정희찬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누가 시합 일정을 그따위로 짰음?”

김다은이 대꾸하는데 H가 바닥을 콩콩 두드려 대면서 외쳤다.

“아니, 햄들. 그래서 올해 추석은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랬다. 아무도 몰랐다. 모두 머리를 벅벅 긁기나 했다. 침묵 속에서 상호가 작게 물었다.

“……재유햄이 알지 않을까요?”

“재유햄 지금 나갔잖아.”

“돌아오면 물어보면 되지 않음?”

“근가.”

1학년들이 여전히 모자란 머리를 모아보는 동안 H는 조금 시무룩해진 기색이었다. 상호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누나. 연휴에 나가고 싶어요?”

“꼭 그런 것까지는 아닌데, 그냥 일정을 모르고 있으면 답답하잖아.”

“제가 지금 여쭤볼게요.”

H가 조금 심통 내며 툴툴거리고 있자 기상호가 재깍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 기세가 되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공태성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왔다. 진재유도 함께였다.

“어, 재유햄 왔다. 햄, 마침 물어볼 게 있었음.”

“지금 그기 중요한 게 아니다.”

김다은이 뭔가를 물으려고 말을 꺼내는데 공태성이 칼같이 잘랐다. 김다은이 항의했다.

“님, 지금 내가 물으려는 게 뭔지 알고 그럼?”

“그기 뭐든 이것보다는 덜 중요하다. 니네들, 이번 추석 연휴 때 쉬고 싶지 않나?”

공태성이 김다은의 항의를 자르고 비장하게 물었다. 정희찬이 쩝소리를 내며 말했다.

“쉬고 싶기야 한데 그게 어디 우리 맘대로 되나? 재유햄, 우리 학교 보통 연휴 때 보내줘요?”

“사실 그간은 잘 안 보내줬다.”

진재유는 고개를 저었다. 대한민국의 입시생이 그렇듯 농구부원들은 쉽게 납득했다.

“하긴. 시간이 얼마나 남았다고.”

“농구 연습해야지 어쩌겠어요.”

그러나 공태성은 예외였다.

“안 돼. 절대로 쉬어야 해.”

포기하려던 부원들은 태성을 돌아봤다. 그는 불꽃 같은 열의를 태우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봐. 너희들도 쉬고 싶잖아.”

“내심 안 그런 사람이 여기 어디 있겠어? 근데 감독님이나 코치님이 허락해주나 마나가 문제이지.”

H가 엎드려서 대강대강 말했다. 이 기숙사 안의 사람들이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기상호는 예외였다. 그는 연휴 기간 내내 농구연 습만 하더라도 H가 공을 던져주고 꺄르르 웃는 모습을 보는 쪽이 더 좋았다. 그는 H를 힐끗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공태성이 열성적으로 외쳤다.

“다들 왜 그리 포기가 빨라? 다들 자존심도 없나? 니들은 경기할 때 상대랑 점수 차가 좀 나도 그렇게 포기할낀가? 아니지!”

“저 X끼 또 뭔 개소리를 하려고.”

서준수가 중얼거렸으나 이번만은 공태성이 신경 쓰지 않았다.

“내 반드시 이번 추석 연휴 쟁취해낸다.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다들 협조해줘라. 내가 총대맨다 ”

기숙사의 사람들은 서로를 힐끗거렸다.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잠시 후-

“추석 연휴를 보장하라!”

“보장하라! 보장하라!”

이현성 감독이 기숙사에 들어와보니 지상고등학교의 유서 깊고 명성 높은 농구부의 단원들은 공 튀기던 운동부에서 데모하는 운동부로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그들은 일편단심으로 기세 높게 구호를 외쳤다. 비록 기숙사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외치는 것에 불과하지만 열기는 결승 경기 못지않게 뜨거웠다. 저마다 마음속에 가진 추석 연휴에 대한 욕망이 불꽃을 피웠기 때문이리라. 공태성이 머리에 붉은 띠……는 구하지 못한 관계로 대신 스포츠 타월을 두른 채 앞장서서 나섰다.

“감독님! 저희 저번 대회도 끝났습니다! 감독님께서 마지막 경기 때 이기면 연휴 때 쉬게 해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옳소!”

힘 좋고 체격 좋은 운동부 청소년들이 일제히 외치니 시끄럽기 그지없었고, 이현성 감독은 잠시 귀를 막았다가 대꾸했다.

“짜식들이 고작 추석이 왔다고 잔뜩 풀어져서는. 야, 거 입시하는 애들은 추석 같은 거 전부 반납하는 거 모르나?”

“하지만 약속했잖습니까?”

“응, 맞아요, 맞아!”

김다은이 강경하게 나왔고 옆에서 H도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이현성 감독은 부원을 힐끗 둘러봤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요청이 감독인 자신에게 오기 전에 적당히 처리했을 성준수나 진재유 같은 녀석들이 묘하게 뒤로 빠져서 조용했다. 설마 이 녀석들끼리 뒤에서 작당이라도 한 건가?

“거 준수랑 재유, 니들도 말 좀 해보라. 1학년들은 아직 시간이 남아서 저리 뺀질거린다고 치자. 니네는 왜 조용히 있나? 얘들 이리 날뛰게 냅둘끼가?”

그러자 진재유와 성준수가 힐끗 눈치를 보다니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어머니 좀 뵙고 도와드리고 싶어서…….”

“저희 친척들이 이번에는 얼굴 좀 꼭 보자 하셔서…….”

그들의 사정이 공개되자 정희찬과 김다은이 요란을 떨어댔다.

“우와아아, 효자 나왔다, 우와.”

“저거 우리 주장 맞음? 다른 운동부랑 바뀐 거 아인가? 인성이 내가 알고 있던 거랑 좀 다른데.”

준수가 째려보며 일갈했다.

“니들 안 닥쳐?”

“죄송합니다, 닥칩니다.”

“옙.”

둘은 조용해졌고, 이성현 감독은 이번에는 기상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상호 니는 어떻게 생각하냐?”

상호는 조용하게 의견을 냈다.

“저요? 사실 그 시간에 농구 연습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하는데…….”

“저 배신자!”

“이 X끼 우리만 역적 만들면 좋나?”

급격히 험악한 야유가 쏟아졌고 그중 가장 사나워진 사람은 공태성이었다. 그는 야유하는 대신 시선으로 온갖 쌍욕을 퍼붓고 있으며, 그리고 개 중 일부는 실제로 입 밖으로 나왔다.

“마, 니 생각 똑바로 해라. 내가 니 땜시 은재 바람 맞히게 되면 그냥 씨X 아주…….”

그 목소리에는 천년 묵은 총각 귀신의 원한이 서려있는 듯 했고 스산함에 기상호는 몸을 움찔 떨었다. 공태성의 시선을 피해서 황급히 고개를 돌리던 기상호는 문득 H에게 시선이 닿았다. H는 연휴를 얻어내기 위해 투쟁! 단결! 같은 말을 외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잠시 홀려서 멍하니 지켜보던 기상호는 이윽고 기막힌 깨달음을 얻었다. 잠깐, 농구부에게 연휴가 생기면 H와 데이트를 갈 수 있는 거 아닌가? 징글징글한 농구부 단원들의 방해 없이 단둘이, 땀 냄새 나는 체육관이나 기숙사를 벗어나 요즘 핫플레이스에 가서, 백날 하는 농구 말고 다른 것을 즐기며, 멋지고 세련된 모습을 선보일 기회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떠올리다니, 방금 신의 계시가 내려온 게 틀림없었다!

“…… 생각은 하지만 이런 추석 연휴에도 한창 뛰놀아야 할 새파란 청소년들을 가둬놓는 행위는 UN 아동 권리 협약에 의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대한민국 추석 협회가 지상고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겁니다.”

기상호는 바로 말을 뒤집었다. 급하게 말하느라 의식의 흐름대로 말해버렸으나 효과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기상호까지 여론에 참여하자 농구부원 사이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정희찬이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감독님 이번에도 구라칠 겁니까? 이번에도 그짓말 치믄 벌써 두 번입니다. 옐로카드 두 번이면 벌써 퇴장입니다!”

“님, 근데 우린 축구부 아니고 농구부임.”

“어쨌든!”

김다은이 딴지를 거는 동안 이성현 감독이 발끈해서 일어났다.

“얌마, 내가 뻥을 언제 쳤다고 그라노.”

“저번에 농구화 사주신다고 했는데 안 사주셨잖습니까?”

“…… 뭔 고리 쩍 일을 아직도 맘에 담아두고 있나? 자식이 쪼잔해서는.”

이현성 감독은 툴툴거렸지만 사실 그도 아이들을 마냥 붙잡아 둘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좀 튕겨보는 중이었다. 쉽게 허락해주면 애들이 만만하게 여긴다. 따라서 슬슬 수락하려고 이현성 감독이 폼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알긋다. 그라믄 내 이번에만 특별히…….”

삐리리, 삐리리리리. 그때 갑자기 전화가 울리며 이현성 감독의 말을 가로막았다.

“감독님. 휴대폰 울리는데요.”

“……에이씨.”

이현성 감독은 폼 잡던 걸 때려치우고 휴대폰을 들었다.

“누꼬? 내 지금 바쁘니 좀 있다……아이고 어르신? 어르신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허, 이거 참 지가 먼저 전화 드렸어야 했는데. 예? 아입니다! 안 바쁩니다. 이번 추석 때 내려가냐고예? 그 제가, 아니 그때는 진짜 바빠서 시간이 안 났고, 이번에는 그게, 예, 제가 안 바쁘다고 하기는 했지만! 지당하십니다. 물론 마땅히 자식된 도리로 가야제요. 그런데 그게 제가 잠시만 있다가. 거 일정을 한번 봐야하는데 혹시 통화를 이따가, 이번에는 안 내뺍니다! 사실 그때도 내뺀 게 아니라 대회가 갑자기 잡혀서 그렇게 되었는데 충분히 설명드릴 시간이 없어서 오해를, 아니아니 가기 싫은 거 아입니다! 진짜 안 그렇습니다! 세상에 어느 자식이 그 따위로 굴겠습니까?”

통화를 하며 이현성 감독은 공손해졌고, 종종 쩔쩔맸고, 가끔 한참 해명을 해대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통화를 끝내니 농구부원들은 이상하게 너그러운 목소리로 눈으로 감독을 보고 있었다.

“……니들 다 봤냐?”

“예.”

거기다가 넉살맞게 한두 마디씩 얹기도 했다. 기상호와 정희찬이 코끝을 쓱 문지르며 훈훈한 분위기를 잡고 말했다.

“크흠, 감독님. 그런 사정이 있으셨을 줄이야.”

“저희 때문에 너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효가 제일 아닙니까.”

그리고 H가 잔뜩 요란을 떨었다.

“헐 감독님, 그러면 그럼 그동안 계속 안 간 건가요? 완전 불 속성 효자 되시겠다. 얼른 가서 그랜절 백만 번 드리고 용서 싹싹 비세요.”

어른한테 인사도 대충하던 이 요즘 애들이 왜 갑자기 유교 소년 소녀가 되었는지 정말 영문을 할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니 김다은도 붙었다.

“감독님도 가서 세배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라노 X신 같은게. 추석에 뭔 세배고?”

“님아 지금 그게 중요함?”

공태성이 딴지를 걸었으나 그 외의 부분에서는 농구부 전원이 순조롭게 손발이 맞았다. 이상현 감독은 눈물이 차올랐다. 심장까지 뜨거운 감각이 차오르는게 별로 감동은 아닌 것 같았고, 울화통에 가까워 보였다. 이 자식들. 이런 단합력과 팀플레이를 경기 때 좀 보여달라고.

“……하, 니들 오해할까 봐 발하는데, 내 이런 일 없어도 니네 연휴 그냥 보내주려고 했다.”

“아무렴요.”

“응당 그러셨겠지요.”

“지당합니다.”

“음음음!”

이상현은 감독으로서의 마지막 가오를 챙겨보며 말했지만 아무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H도 들떠서 고개를 크게 끄덕이기는 해줬지만 진지한 기색은 없었었다. 이상현 감독은 한숨을 푹 내쉬며 항복을 선언하며 말했다.

“가라. 내 보내주께.”

“이얏호!”

“우워어어어!”

H가 펄쩍 뛰어올랐는데 그 폼으로 덩크를 하면 백발백중일 것 같았다. 다른 농구부원도 환소성을 질렀는데, 농구보다는 어째 응원단에 어울리는 재능들이 두각을 드러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관중석에 버티고 앉아서 저 목청으로 내질러대면 상대편 기가 다 죽어서 웬만한 경기는 백전백승일 텐데. 이상현 감독은 골머리를 짚으며 초라하게 말했다.

“시끄러우니까 다 닥치라…….”

 

 

“햄들! 그래서 이번 연휴 때 다들 뭐할끼가?”

정희찬이 경쾌하게 물었다. 기숙사의 분위기는 그 어느때보다 좋았다. 그들에게 주어질 며칠의 연휴는 모두의 마음에 여유를 불어 넣어주었다. 평소 예민하던 준수도 제법 온순하게 답할 지경이었다.

“말 안 했나? 나는 친척들 좀 만나고 오려고.”

“준수형 대단하다. 사촌들 만나는 거 오는 거 안 힘들어요? 내는 한번 만나면 기 억수로 빨리기만 하던데.”

“기 빨릴 게 뭐 있어? 가만히 있다가 몇 마디 듣고 용돈 좀 받고 오면 되지. 이번에는 실적이 좋아서 다들 훈수도 안 둘 테고 말이야.”

정희찬은 준수의 말을 듣더니 이번에는 다른 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재유도 온화하게 대답했다.

“내는 어머니 뵈러 간다.”

“이여어어얼.”

방금 효심을 팔아서 연휴를 얻어낸 부원들은 놀리는 대신 엄지를 추켜세우며 호응해주었다. 다음은 김다은이었다.

“낸 그냥 기숙사에 있으려고. 집에 가봐야 왜 왔냐는 소리만 들을거임.”

기껏 연휴를 얻었는데 재미없게 기숙사에나 있는 소리를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그래, 그래. 하면서 화기애애하게 넘어갔다. 똑같이 기숙사에 있어도 쉴 시간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정희찬은 와하하 웃으며 신나서 외쳐댔다.

“내는 놀러갈끼다!”

태성은 다른 이들과 대조적으로 까칠하게 나왔다.

“내가 어딜가든 니들이 뭔 상관이고. 내가 뭔 아도 아니고. 가는 데를 니들한테 꼬박꼬박 보고해야 하나?”

농구부원들은 성질내지 않았다. 다만 수상쩍게 웃을 뿐이었다.

“알았다, 은재 누나랑 좋은 시간 보내라.”

“내 안부도 전해주셈.”

정희찬과 김다은이 한두 마디 던졌고 공태성은 알아서 혼자 폭발했다.

“뭐, 뭐, 뭐라카노! 다 닥치라!”

정희찬과 김다은은 보란 듯이 하이파이브를 칠 뿐이었다. 한 기숙사에서 부대끼고 지내다 남의 사정도 전부 알게 될 수밖에 없다. 고로 모두가 공태성의 이변을 진작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번 추석 연휴를 얻어내기 위한 투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뭔가 전화를 받고 실실거리며 공태성이 기숙사에 돌아오더니 갑자기 추석 연휴를 얻어내야 한다고 농구부원들을 닦달한 것이 시작 아니던가? 말 안 해도 뻔할 뻔 자였다. 게다가 아까 뭐랬더라. 은재를 바람맞히게 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던가?

이제 남은 건 기상호와 H뿐이었다. 이번에는 농구부원들이 함부로 덤벼들지 않았다. 기상호가 H와 있을 때의 분위기 또한 모르는 이가 없었다. 다들 헛기침을 하거나 시선을 돌리는 사이 기상호는 신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H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나. 저는 이번에 기숙사에 남으려고 해요.”

“응? 간만의 휴가인데 어디 놀러 안 가고?”

“혼자서 가고 싶은 곳은 별로 없어요. 하지만 만일 누나가 가면…… 저도 가고 싶어요.”

“짜식, 이렇게 귀여워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냐?”

기상호의 수줍은 물음에 H는 기상호의 머리를 사정없이 헝클어뜨렸다. 그러나 그다음에 붙은 말은 청천벼락 같았다.

“근데 나는 서울 올라갔다 올 예정인데.”

뽀각. 기상호의 여린 심장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실제로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아무튼 그러했다. 기상호는 파울 다섯 번으로 퇴장당하는 선수처럼 허망하게 물었다.

“왜요……?”

“왜긴 뭐 왜야. 가족이 부르는데 어쩌겠어?”

그런 기상호를 H가 귀여워하며 말했다.

“이 누님이 보고 싶어질 것 같아? 쫌만 버텨.”

아닌데, 그게 아닌데……. 기상호가 반박은 못 하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농구부원들은 속으로 탄식했다. 그들이 기상호의 사랑을 응원해 주기 때문은 별로 아니었고, 그보다는 기상호의 성질이 한동안 지독해질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같이 기숙사에 남기로 했던 김다은은 예정을 바꿔 자기도 튈지 재빠르게 고민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H는 폴짝 뛰어서 성준수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시도하며 말했다.

“맞아, 준수햄! 이번에도 KTX같이 타고 가자! 근데 예매 경쟁 완전 빡셀 텐데. 그치만 내가 한때 티켓팅으로 이름 쪼오금 날렸다. 함가보자!”

“그…….”

성준수는 기상호의 이글거리는 눈이 이제 자신을 향한 것을 발견했다. 이런 타이밍에 하필 이런 접점이라니. 준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 X발 저 미친 새끼, 뭔 난동을 피울지 감도 안 잡히네.

어쨌거나 오늘도 행복하고 평화로운 농구부였다. 가오 없이 한쪽에 찌그러진 이현성 감독 빼고. 마음에 상처를 입은 기상호도 빼고.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성준수도 빼고. 한동안 기상호의 성질로 같이 불행해질 다른 농구부원도 좀 빼고. 세어보니 좀 많이 빠지기는 하는데. 하여튼 추석 연휴는 얻었으니 대체로 행복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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