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화리
총 19개의 포스트
빗소리가 요란하다. 흐트러진 자세로 소파에 기댄 B는 낡은 계단의 삐걱거림에 귀를 기울였다. 고작 서너 가구가 거주하는 그의 아파트에는 새벽 손님을 맞이할 만한 인사가 없었다. 오직 B를 제외하고. 현관 앞에 다다른 발소리가 잠시 멈춰 섰다. B, 자? 새벽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쾌활한 목소리. 뻣뻣한 몸을 일으켜 세운 B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현관문을
서걱. 무딘 검날이 교도의 목 언저리를 파고들었다. 숫제 동물을 해부하듯 휘둘러진 칼날은 삽시간에 살점을 가르고 핏물을 솟구치게 만들었다. 비명 하나 없이 스러진 교도의 뒤로 기형검을 내던진 청명은 그대로 시산屍山에 주저앉았다. 주위에 마른땅을 찾아보기가 힘들만큼의 난전이었다. ...몇이나 살아남았지? 핏물을 담뿍 뒤집어쓴 채 숨을 헐떡이는 자가 셋, 생
붙잡는 손을 뿌리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람이 흥분 상태가 되면 언제든 활로를 찾아내기 마련이다. 과연 별호에 마魔를 붙인 사내들답게 빈틈없는 포위진이었으나 나 역시 천라지망을 피해 도망친 전적이 있는 사내였다. 탈진한 듯 몸에서 힘을 뺀 뒤 가장 경계가 약한 쪽으로 달려들었다. 실상 도박에 가까운 수였으나 기이하게도 그들은 절기를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유리창은 알 수 없는 자국과 먼지로 더럽혀진 채였다. 멜은 소매 끝으로 붉은 얼룩을 문질러 닦는다. 얇은 천 너머 미지근한 온기가 선연했다. 한때 자신과 같은 온도로 맥동하고 있었을 생명. 그러나 어떤 감정은 결코 비등하게 주고받을 수 없다. 멜. 구두가 젖을 거야. 부드러운 목소리가 정적을 깨트린다. 방금까지의 무표정이
저녁 내내 돌아가던 턴테이블이 멎고, 레코드판을 든 종업원이 지친 걸음을 옮긴다. 주방과 홀을 오가던 발소리는 어느덧 현저히 줄어든 채였다. A는 글라스를 닦던 손을 멈추고 낡은 기숙사의 감독생에게 시선을 던진다. 아니, 이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감독생은 더 이상 낡은 기숙사에 머물지 않았으니까. B 씨. 마지막 테이블을 닦던 B가 고개를 들었다. 방
먼저 갈게. 기다리지 마. 짧은 메시지를 노려보던 A가 메신저 앱을 종료했다. 늘 그렇듯 A의 소꿉친구는 혼자 행동하는 쪽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정말 혼자 돌아가기는 적적하단 말이지. 고민하던 걸음은 다시 학교 안으로 향했다. 아직 정규 수업이 끝나기에는 이른 시간. 복도는 간간이 들리는 판서 소리를 제외하면 조용했다. A가 걸음을 멈춘 곳은 익숙한 교실
누군가 물어뜯기고 짓밟히는 광경은 A에게 있어 결코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지나치게 고지식해서,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지나치게 부유해서, 지나치게 가난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은 타인을 끌어내리는 일에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표현일 때의 이야기였다. 회색으로 얼룩진 창문 너머 도시는 이미 그들에게 삼켜진 지 오래
78-1번 버스 임시 운행 중단.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삭막한 텍스트가 시야 가득 들어찼다. 집까지 가는 노선은 이것뿐인데. B는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정류장 벽면에 빼곡히 붙은 안내문이 모든 버스의 운행 중단을 알리고 있었다. 저녁 무렵 예정된 불꽃놀이 탓에 인근의 교통을 전부 통제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조금만 더 빨리 끝내고 나올걸...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도쿄 시내는 평소보다 많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는데. A가 질린 낯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연말 시즌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B의 안색도 그리 좋지는 못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크리스마스 캐롤, 수십 미터 높이의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 연말의 달콤한 분위기를 그대로 녹여낸 거리는 어느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차가운 북풍이 스며든다. B는 불안한 얼굴로 창밖을 응시했다. 점심이 지날 무렵부터 흐리던 하늘은 이미 새카만 먹구름으로 물든 채였다. 우산 안 가져왔는데... 작은 중얼거림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다. 오늘따라 길기만 한 종례가 야속했다. 가까스로 중앙 현관을 나섰을 때는 이미 차가운 빗방울이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누구에게나 잠들 수 없는 밤이 있다. 루카는 충혈된 눈을 문지르며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오래된 시트 특유의 먼지 냄새가 비강을 자극했다. 스파크, 방전, 뜨겁고 통제되지 않는 전류. 얕은 잠 뒤에 이어지는 악몽은 이미 일상이 된지 오래였다. 이런 것도 속죄라고 부를 수 있나? 루카는 자조했다. 잠은 죽음을 미리 경험하는 것과 같다. 타인의 목숨을 빼
[열이 완전 심하게 나요] [며칠은 꼼짝 못 할 것 같은데ㅜㅜ] 뭐... 키보드를 두드리던 B는 피곤한 눈을 문지르며 메시지 화면을 응시했다. 답지 않은 연락이었다. 아프니까 뭘 가져다 달라, 약속에는 못 나갈 것 같다는 말이면 또 몰라. 앞뒤 맥락 없이 전해진 문자는 황당함만을 안겨주었다. 최근에 A씨가 약속을 잡은 적이 있었나? 아닐텐데... 잠시 고
B는 상당히 이성적인 사람이다. 인간성이 부족했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은 선을 긋고 살았을 뿐. 이 사람에게 허락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저 사람에게 허락해 줄 수 있는 건 저기까지. 종종 그런 말을 들을 때가 있었다. B씨는 다 좋은데... 너무 정 없는 느낌? 태도가 딱딱한 건 아닌데 왠지 거리를 두는 것 같단 말이에요.
상대의 생각이나 감정 따위를 읽어내는 것은 눈치다. 하지만 그를 통해 상대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섬세함의 영역에 가깝다. B는 눈치가 꽤 빠른 편이었다. 넘어질 것 같은 사람을 붙잡아 주고, 비가 올 것 같은 날 미리 우산을 챙기라 충고하고. 하지만 정작 B를 두고 눈치 빠른 사람이라고 말할 이는 몇 되지 않았다. 어쩌면 한 손에 겨우 꼽을 만큼일지도
빈틈없이 칠해진 무채색은 곧 공백의 동의어가 된다. 겨울의 도시는 넘치는 공허로 언제나 투명하게 빛났다. 그 안을 걸을 때마다 A는 자신이 색을 모조리 잃은 세계에 떨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A는 겨울을 좋아했다. 쉴새없이 내리는 눈이나 온통 희게 변한 거리를 애정한 것은 아니다. 되려 A가 사랑한 것은 사늘한 바람과 부드러운 냉기 따위였다. 눈을 감아
은혜야, 뻗어진 손은 이도저도 아닌 곳에 멈춘다. 희게 질린 낯으로 나를 노려보는 그 애는 지독하게 낯선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네가 그랬잖아. 나를 좋아한다고. 분명 그렇게 말했잖아. 은혜의 눈 밑이 별처럼 샛붉게 물들었다. 나는 그저 싱거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연다. 은혜야. 그때는 우리가 어렸잖아. 지금은 중요한 시기니까, 응? 달래는 목소리
기억하니? 네가 울면서 찾아왔던 날. 경찰들이 이를 악물고 온 동네를 샅샅이 뒤지던 그날 말야. 나는 그때도 지금처럼 동네 꼭대기에 위치한 판잣집에 살았고, 너는 저 아래 동네 입구 집엘 살았었지. 아직도 봄만 되면 손에 봉숭아 물을 들여달라고 생글거리던 네가 눈에 선하다. ...그렇게 봉숭아 물이 들이고 싶었으면 혼자서 올 것이지. 꼭 온 동네 어린
A씨는 소소한 취미가 생겼다. 베란다 한 켠에서 산세베리아를 키우는 것. 개도 고양이도 아닌 화초를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물은 한달에 한번만 주셔도 충분해요. 영혼 없이 읊조리던 점원의 목소리. 그렇게 A씨는 옆자리 동료의 축하 선물을 사러 간 꽃집에서 사천 오백원짜리 조화 바구니와 오천원짜리 산세베리아 화분을 하나씩 사들고 나왔다. 화분을 사들였다고 해